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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158화 (158/211)

검을 든 꽃 158화

입술로 마나를 흡수하는 것은 묘한 기분이었다. 독을 빨아내듯 살의로 물든 마나를 빨아내어 삼켰다. 물을 마시는 것처럼 흘러들어 온 마나가 목을 타고 그녀의 마나 코어에 쌓였다.

그녀의 안에 살의가 쌓여갈수록 유리엔의 머리카락과 눈에서 검은빛이 빠져나갔다. 동시에 그의 몸부림도 차츰 잦아들었다. 어느 순간 그의 반항이 완전히 멎었다.

에키는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그녀가 사랑하는 푸른 눈동자가 보였다. 흐릿하게 풀린 눈이 깜박이며 그녀를 보더니 곧 감겼다. 정신을 잃은 듯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남은 살의를 삼키고 입술을 떼었다. 그로부터 흡수해 낸 살의는 굉장한 양이었으나 그럭저럭 감당할 만했다.

오른팔을 흘깃 보았다. 가시덩굴이 밀려난 모양새로 그녀의 팔에서 떨어져 손잡이 부근에 뭉쳐 있었다.

“발, 다 됐어?”

[어, 나 진짜 대단한 거 같아! 역시 가짜 따위가 이 몸의 상대가 될 리가 없지. 그치 주인아? 이거 봐, 이제 저거 버려도 돼!]

그녀는 마검의 말에 따라 가짜 마검을 손에서 놓았다. 숙주를 가시덩굴로 얽어매고 버티던 그 검은 더는 그러지 못하고 쉽사리 그녀의 손에서 떨어졌다.

에키는 바르데르기오사를 집어 넣기 전에 마검의 칼날을 가볍게 토닥였다.

“정말 잘했어, 발.”

[……어어어, 어, 어, 으, 응! 나, 난, 엄청 잘했어!]

마검이 어쩐지 허둥거리는 음성으로 대답하더니 답지 않게 조용해졌다.

지친 에키는 자신이 방금 처음으로 마검에게 칭찬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녀는 마검을 문양으로 되돌린 다음 비틀거리면서 유리엔의 위에서 일어났다.

그의 가슴 위에 손을 올려보고, 코끝에 손가락을 대어보았다. 심장이 뛰고 숨을 쉬고 있다. 눈은 감겨 있지만 바닥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확실하게 은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다만 왼팔을 휘감고 있던 가시덩굴은 아직 남아 있었다. 란셀리드의 배에 남아 있던 것을 샤이가 없애느라 고생한 것이 떠올라 에키의 낯이 심각해졌다.

그녀는 긴장한 채 가시덩굴을 손끝으로 잡아당겨 보았다. 피를 먹고 번들거리던 그것은 의외로 손을 대자마자 부스러져 가루가 되어 사라 졌다.

‘란셀은 가짜 마검에 찔렸던 것 같고, 율은 찔린 게 아니라 잠식된 거였으니까…… 그 차이인가? 아니면 바르데르기오사의 영향일 수도 있겠네.’

이유야 어찌되었든 다행이었다. 비로소 안도했다. 흐트러진 호흡이 길게 새어 나왔다.

그러고 나서 옆에 떨어져 있는 가짜 마검을 보니 머리끝까지 분노가 치솟았다. 그녀는 그것을 지긋이 짓밟으며 중얼거렸다.

“이 망할 물건은 대체 뭐야.”

[어……. 미, 밀어내다 보니까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나서……. 어디서 봤나 했더니, 바로 얼마 전에 결절에서 봤던 거랑 좀 느낌이 비슷한 거 같아.]

“결절?”

[거기서 나온 용 말이야. 그거 벨 때랑 비슷했어!]

공작가는 용의 뼈를 보관하고 있었으니 용의 심장이나 용의 피나, 하여간 용의 부산물이 더 있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용의 뼈 자체를 이용했을지도 모르고.

‘이 가짜는 그럼 마검에서 뽑아낸 마나와 그것을 이용해서 만든 물건인가?’

마법사가 아닌 그녀는 대충 추측만 할 뿐이었다. 자세히 알려면 가져가서 마법사들에게 제대로 분석을 맡겨야 할 듯했다. 실상 분석을 들어봤자 원리를 이해할 자신도, 그럴 필요도 없다. 그녀가 알아야 될 것은 어차피 하나뿐이었다.

누가 이것을 만들었는가.

“만든 건 정신 나간 공작 짓이겠지. 그걸 가져다 유리엔을 물들인 건 빌어먹을 2황자 짓이겠고.”

에키는 으득 이를 갈고는 가짜 마검을 걷어찼다. 날아가서 데굴데굴 굴러간 그것이 뿌리가 드러난 나무에 부딪혀 멈췄다.

“아윽…….”

있는 힘껏 걷어찼더니 등에 난 부상들이 끔찍하게 아팠다. 마나로 지탱해서 무시하고 움직일 순 있지만 통증은 그대로인 탓이다.

그녀는 어깨를 움츠린 채 작게 신음을 흘리고는 재차 한숨을 쉬었다. 당장 박살 내버려도 속이 덜 풀리겠지만 저건 중요한 증거품이니 잘 챙겨가야 했다. 에키는 마나로 가짜 마검을 들어 올려 제복 망토에 둘둘 말았다.

그러고 나서 유리엔을 부축하려던 그녀는 그의 왼팔이 어깨에서부터 반쯤 잘린 상태인 걸 발견했다. 지금껏 가시덩굴에 가려져 있어서 몰랐었다. 살펴보니 완전히 잘렸던 부위가 제니스다운 놀라운 회복력으로 약간 붙은 상태였다.

테레사가 유리엔에게 입혔다는 부상은 허벅지 근처였다. 그러니 이건 아마도 물들어갈 때 그가 스스로…….

“망할 2황자 새끼. 죽여 버리겠어.”

에키는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란셀리드의 눈과 폐허가 된 로아즈까지 연상되며 아찔할 정도로 살의가 치솟았다. 머리가 핑 도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간신히 그것을 가라앉혔다.

망토 끝부분을 잘라 그의 어깨를 대강 고정했다. 아까 던컨과 헤어진 곳 근처에 마법 가방을 놔두었으니 거기까지만 가면 제대로 된 붕대로 치료할 수 있을 거다.

에키는 너덜너덜해진 제 등을 무시하고 그의 상처만 주의하며 정신을 잃은 그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 * *

유리엔이 정신을 차린 것은 한밤중의 일이었다.

흐릿한 시야에 우둘투둘한 동굴 천장이 보였다. 타닥거리는 모닥불의 빛이 그 천장에 불규칙한 그림자를 그렸다. 그는 한동안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 빛만 보고 있었다. 그러고 있으니 지끈거리는 두통이 조금씩 가셨다.

일어나기 위해 움직였다. 왼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어깨를 보니 붕대와 빳빳한 천으로 고정된 팔이 보였다. 전신이 무겁고 곳곳에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어지러움과 고통을 참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가 누워 있던 곳은 두꺼운 여행용 망토 위에 담요를 몇 겹이나 깔고, 그 위에 침낭을 깔아 푹신하게 만든 자리였다.

약간 떨어진 곳에 꺼져가는 모닥불이 있었고, 그 근처에는 물을 끓였던 듯한 냄비와 붕대더미, 피를 닦아낸 것으로 보이는 수건, 옷인지 걸레인지 모를 천뭉치, 약통 같은 것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한쪽에는 마법 가방으로 보이는 게 놓여 있다.

그리고 모닥불 너머 아무렇게나 펼쳐놓은 침낭에 엎드려 있는 사람이 보였다.

유리엔은 앉은 채로 그 사람을 관찰했다. 여자였다. 셔츠에 바지 차림.

옆에 허물처럼 벗어던져져 있는 재킷의 모양이 매우 익숙했다. 창천기사단 정식 기사의 하얀 제복이다. 셔츠는 새것인지 깨끗한데 바지나 재킷은 피와 먼지에 여기저기 베인 자국으로 엉망이었다.

엎드린 채라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길게 늘어진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이 눈에 띄었다. 연한 분홍색. 독특한 색이었다.

‘창천기사라면 전원 알고 있다. 게다가 저런 특이한 머리카락의 여기사라면 잊어 버리기도 힘들 텐데…… 누구지?’

그는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다가,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가 어딘지, 왜 자신이 여기에서 부상을 입은 채 누워 있었는지, 저 여자는 누구인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머리가 아팠다.

‘마지막 기억이…….’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유리엔은 습관처럼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성검에게 묻기 위해서였다.

“……?”

손바닥에 익숙한 황금빛 문양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황망히 아무것도 없는 손을 들여다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성검을 불러보았다.

“랑.”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성검이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는 마른세수를 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오래 앓다가 일어난 것처럼 온몸이 쑤셔 절로 신음이 나왔지만 입밖으로 흘리지는 않았다. 휘청이는 걸음으로 엎드려 있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여자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보통 창천의 기사라면 건드리기 전에 이미 일어났어야 할 상황인데, 여자는 그가 어깨를 흔든 이후에야 깨어났다. 낮은 신음과 함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유리엔은 그 얼굴이 예상했던 것보다 앳되고 예쁘장해서 조금 놀랐다. 기사라기보다는 애지중지 자란 아가씨처럼 보였다. 게다가 너무 어렸다. 스물 남짓으로 보인다. 창천기사 중에 유리엔 자신보다 어린 사람은 없었는데, 어떻게?

그녀가 커다란 눈을 깜박였다. 보라색 눈동자. 어쩐지 몹시 인상적인 눈이었다. 그 눈을 들여다보니 가슴 안쪽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술렁였다. 유리엔은 물어보려던 말들을 모조리 잊고 홀린 듯이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유리엔?”

그녀의 입술이 움직여 그의 이름을 불렀다. 짧은 부름이 귀가 녹아들 듯 달콤하게 들려서 그는 굉장히 당황했다.

왜 가슴께가 먹먹하고 눈꺼풀이 떨려 오는지, 왜 심장이 저릿하게 아파 오며 울컥 무언가가 치받아 오르는지, 유리엔은 도저히 스스로의 반응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당황해서 굳어버린 그를 향해 그녀가 장갑을 낀 손을 뻗었다. 낯선 여자, 그녀로 인해 이상해진 스스로의 상태에 본능적인 경계심이 솟았다. 그는 반사적으로 그 손을 쳐내며 뒤로 물러났다.

여자의 표정이 멍해졌다. 곧 그녀의 시선이 그의 오른손에 닿더니 무언가 깨달은 듯 아, 하고 작게 신음을 흘렸다.

그녀의 조그만 얼굴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곧 그녀는 제 손으로 눈가를 꾹 누르고, 표정을 펴고, 태연해졌다.

유리엔은 그녀가 얼굴을 일그러뜨린 순간 덜컹 하고 내려앉는 제 심장을 느꼈다. 대체 왜?

그가 제 반응에 의아해하는 사이, 여자가 심호흡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를 향해 경례를 했다.

“창천기사 에키네시아 로아즈입니다, 단장님.”

“에키네시아 로아즈?”

낯선 이름인데도 애틋한 발음이었다. 입 속으로 몇 번 이름을 굴려보는데 난생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 들었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며 들뜨는 감각. 어디서 이 이름을 들어 보았던가?

유리엔이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 고민하고 있자 그녀가 무언가를 힘들여 삼키듯 숨을 고르고 말을 덧붙였다.

“기사가 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으니 잘 모르실 거예요.”

“일주일도 되지 않았다고? 신입인가? 여기는 대체 어디지? 내가 왜…….”

“천천히, 천천히 설명해 드릴게요. 지금은 말고요.”

쏟아지는 유리엔의 질문을 에키네시아가 막았다. 그녀는 약간 떨리는 입술로 웃었다.

“일단 지금은 좀 더 쉬세요, 아침에 이야기하죠.”

“아니, 나는 괜…….”

“제가 좀 피곤해서요. 죄송합니다. 단장님.”

에키네시아는 그의 말을 딱 잘라 끊어내더니 돌아서서 침낭에 도로 엎드려 누워버렸다.

아무리 창천이 위계질서가 강하지 않은 편이라지만 단장을 앞에 둔 기사라기엔 무례한 태도였다. 신입 기사가 단장의 질문을 끊고 드러누워 자려 하다니.

게다가 정말 저 여자가 창천의 기사가 맞는지,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도 의심스러웠다. 성검이 사라져서 정안을 잃어버린 상태라 악의를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도 확인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의문이었다. 이 상태로 쉬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는 엎드려 있는 좁은 등과 그 위에 흩어진 분홍색 머리카락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지적하거나 추궁하려는 의도였는데, 막상 그의 입에서 나온 건 둘 중 어느 쪽도 아니었다.

“경은 왜 엎드려서 자는 건가?”

“이게 편해서요. 습관이에요.”

“경의 셔츠에 피가 묻어 있다. 등을 다쳤나?”

긴 머리카락 중에 어색하게 잘려나간 부분이 있었다. 그 사이로 흰 셔츠에 붉은 핏자국이 약간 번져 있는 것이 보였다.

언뜻 봐서는 발견하지 못할 위치였는데도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것을 찾아냈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을 제쳐놓고 그것부터 물었다. 생각과 몸이 따로 놀고 있었다.

그의 말에 에키네시아가 부스스 몸을 일으키더니 제 등을 더듬었다. 무성의한 손놀림으로 젖은 것을 확인한 그녀가 작게 혀를 찼다.

“네, 조금.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러고는 도로 엎드려 버린다. 유리엔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어떻게 신경을 안 쓰나. 제대로 치료는 한 건가? 그대는 왜……!”

항상 자기 몸을 아끼질 않는 건가, 라고 말할 뻔했다. 그녀에 대해 아주 잘 안다는 듯이. 어째서? 낯선 얼굴이고, 모르는 이름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 심정이 되는 건지.

그는 혼란스러워져서 입술을 깨물었다. 스스로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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