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57화
에키는 아메시스트를 꺼내지 않았다. 그가 준 검을 그를 향해 겨누기는 싫었다.
유리엔이 짐승 같은 눈으로 그녀를 살폈다. 본능적으로 그녀가 강하다는 것을 알아챈 듯했다. 그래서 그는 막무가내로 덤비지 않았고, 에키는 선공을 할 수 없었다. 마검을 들어 그에게 겨누고 있는 상황만으로도 그녀는 힘들었다.
대련을 시도했을 때처럼, 칼날 너머로 보이는 유리엔의 모습이 자꾸만 뭉그러졌다. 바로 이 투명한 칼날에 꿰뚫려 죽었던 그의 마지막 모습이 겹쳐 보인다. 호흡이 가빠지며 손끝에 진득하고 끔찍한 감촉이 느껴졌다. 피가 손을 타고 흐르는 듯한 환각.
에키는 이를 악물었다. 그가 했던 말들을 되새겼다. 그가 그녀에게 웃어주던 순간들을 떠올려 악몽을 덮었다. 위태롭게 흔들리던 칼끝이 간신히 멈췄다. 바람이 나뭇잎을 훑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결국 유리엔이 먼저 움직였다. 그가 서 있던 자리에서 훅하고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에키는 왼쪽으로 몸을 틀며 마검을 들어 올렸다.
검과 검이 맞부딪히기 이전에 검은 마나와 보라색 마나가 먼저 부딪혔다. 쾅 하는 폭음과 함께 요란한 충격파가 일었다.
“윽……!”
그녀와 타인의 검기가 부딪혔을 경우 언제나 그녀 쪽이 더 강력했다. 상대는 검을 놓치거나 부러뜨리며 그녀의 마나에 밀렸었다. 그러나 유리엔의 검기는 그녀에게 밀리지 않았다. 그녀가 가르쳐 주었던 중첩 검기가 그의 검을 감싸고 있었다.
비슷한 힘으로 충돌한다면 가벼운 쪽이 더 크게 밀려나게 된다. 에키는 충격파에 속절없이 밀려났다.
상대적으로 무거워서 몇 걸음 물러서는 데 그친 유리엔은 빠르게 균형을 되찾았다. 그는 밀려나고 있는 그녀를 향해 검기를 날렸다. 피할 여유가 없었다. 에키는 마나 실드를 생성했다.
그녀는 커다란 고목에 부딪혀 그것을 바스러뜨리며 겨우 멈춰 섰다. 그와 동시에 그의 검기가 그녀의 실드와 충돌했다. 또다시 거대한 충격파가 사방을 휩쓸었다. 폭풍 같은 바람에 나무들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비산하는 흙과 먼지 사이로 새카만 그림자가 달려들었다. 에키는 자세를 바로잡기도 전에 검부터 들어 올렸다. 이번에는 대비하고 버텼기에 밀려나지 않고 막았다. 발뒤꿈치가 땅을 파고들었다.
막아선 그녀를 향해 유리엔이 쉼 없이 검을 내리쳤다. 검이 부딪힐 때마다 천둥이 치는 것과 비슷한 폭음이 일었다. 여파만으로도 대지가 길게 긁히고 나무가 부러져 나갔다.
[뭐 해? 너라면 저 정도 검기는 뚫을 수 있잖아?]
마검이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대답할 틈이 없는 에키는 속으로만 답했다.
‘할 수 있지, 물론. 하지만 그 정도로 힘을 쏟으면 조절에 실패할지도 몰라.’
그녀로서도 최선을 다해야 유리엔의 검기를 부술 수 있는데, 그 정도로 힘을 쏟으면서 중간에 멈출 자신이 없었다. 아니, 사실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실수할지도 모른다는 상상만으로도 시도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상대로 마검을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미칠 것 같은데, 그가 다칠지도 모르는 공격이라니.
정신없이 쏟아지는 칼날을 막았다. 미처 피하지 못한 검기의 여파가 피부 곳곳을 길게 긁고 지나갔다. 긴 머리카락의 일부가 잘려 꽃잎처럼 흩날렸다. 그래도 에키는 막기만 할 뿐 공격하지 못했다.
이성이 완전히 나가 살의에 지배받는 상황에서도 유리엔의 검이 그리는 궤적은 유려했다. 오래도록 단련한 검술은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와중에도 무너지지 않았다.
유리엔의 검술은 교과서적이다. 변칙이 거의 없고 성실할 정도로 정직했다. 간결하고 기교가 적은 것은 앨리스와 비슷했지만, 앨리스가 가볍고 빠른 느낌이라면 유리엔은 상대적으로 정적이었다. 그렇다고 바라하처럼 묵직하거나 테레사처럼 방어적이진 않았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그야말로 정석적인 검.
정석이란 보통 완벽에 가장 가까운 형태를 말한다. 단점이 없는 만큼 특출 난 장점도 없지만, 갈고 닦을수록 모자람도 넘침도 없이 완벽해지는 것. 유리엔의 검이 바로 그러했다.
지워버린 과거에 그와 마주했을 때보다 더 발전한 상태. 그것은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마검의 마나와는 정말로 어울리지 않는 검술이었다. 그가 얼마나 쉬지 않고 검을 단련해 왔는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살의에 물든 몸으로도 성실하고 정직한 검. 그러니 저 몸 안에 갇혀 있는 그의 혼은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자아를 유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정안이 없는 그녀는 볼 수 없지만 울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괴로워하며 보고 있을지도 몰라. 내가 그랬듯이…….’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녀의 기세가 바뀌었다.
망설임을 버렸다. 자꾸만 겹쳐지려 하는, 그녀에게 죽었던 그의 모습으로부터 눈을 돌렸다. 두려움을 무시했다. 막아주길 가장 절실하게 바라는 건 그 자신일 테니까.
‘할 수 있어. 아니, 해야 해.’
입술을 깨물었다. 바르데르기오사에 폭발적으로 마나가 차올랐다. 그녀의 검이 처음으로 그의 검이 아니라 그의 몸을 향했다. 유리엔이 상체를 틀며 간신히 그것을 피했다.
검에 담긴 마나의 양과 질의 수준이 달라졌다. 스쳐 지나가며 남은 후폭풍이 가시덩굴을 으스러뜨리며 유리엔의 어깨를 후려쳤다.
“……!”
충격으로 유리엔이 움츠러들었다. 에키는 그를 지나쳐가면서 바로 방향을 틀었다. 등을 노리고 휘둘러지는 검. 그가 자세를 낮추며 그것을 피했다.
피할 것을 예상한, 아니, 피하기를 바라고 검을 휘두른 에키는 검을 따라 몸을 반 바퀴 돌리며 자세를 낮춘 그를 걷어찼다. 제복 부츠의 단단한 굽이 유리엔의 무릎 안쪽을 가격했다.
균형이 흔들리는 그를 향해 다시 검을 내리쳤다. 그가 피한다. 완벽하게 피하기엔 늦었다. 칼끝이 팔뚝을 벨 것 같았다. 에키는 기겁해서 방향을 바꾸었다. 무리해서 비껴낸 칼이 허공을 갈랐다. 그 틈에 유리엔은 겨우 균형을 되찾았다.
전투의 양상이 급변했다. 그녀가 공세를 취하자 유리엔은 피하기에 급급해졌다. 애초에 왼팔이 멀쩡하지 않은 그는 온전한 실력을 발휘할 수도 없었다. 제대로 싸워도 밀릴 판에 그것은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몇 번이나 벨 기회가 생겼다. 그러나 그때마다 에키는 칼날의 방향을 틀었다. 몸에 무리가 가는 짓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기절시킬 틈은 좀처럼 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그가 너무 강했다. 명치나 목덜미를 쳐야 기절시킬 수 있을 텐데, 그 부위는 급소라 그가 절대 공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에키로서도 단번에 그의 급소를 칠 방법은 없었다. 공격을 멈추지 않고 지속해 그가 방어하거나 피하지 못한 팔다리나 옆구리에 상처를 늘려 갔다면 가능해지겠지만, 그녀는 차마 그에게 부상을 입히지는 못했다.
전투가 지속되자 주변은 난장판이 되었다. 인간이 날붙이를 들고 맞붙는데 주위는 용들이 싸움을 벌이는 것마냥 엉망이 되어갔다. 대지가 파헤쳐져 속살이 드러나고 바위가 으스러지며 빗나간 검기에 나무들이 베여 쓰러졌다.
‘다치지 않게 기절시키는 건 무리야. 그럼 차라리 힘을 빼자.’
에키는 유리엔이 토벌단과 어떻게 싸웠는지 바론으로부터 대강 들었었다. 그의 마나에는 한계가 있고, 그녀의 마나에는 한계가 없다. 마검을 사용한다면 말이다.
장기전을 결심하고 마검의 마나를 끌어올렸다. 그와 똑같이 물든 검은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러나 검게 물든 눈동자는 뚜렷한 이지를 유지했다.
둘 다 호흡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녀의 공격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전투가 지속될수록 악마는 무언가를 알아차렸다.
저 인간은 이 몸이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본능적인 판단이었다. 유리엔은 가슴께를 노리고 베어 들어오는 그녀의 검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 발짝 더 들어섰다. 화들짝 놀란 에키는 억지로 검을 거두었다. 그 순간에 처음으로 그녀에게 허점이 드러났다.
“……!”
[으악! 으악! 야, 괜찮아?]
에키는 신음을 흘리지 않았다. 그녀를 대신해 마검이 비명을 질러댔다.
검은 마나로 감싸인 투명한 칼날이 보라색 마나의 막을 뚫고 그녀의 옆구리부터 등의 중간까지를 가르고 지나갔다. 피하면서 급하게 마나 실드를 만들지 않았다면 상체의 절반이 토막 났을 중상이었다. 갈라진 상처로 왈칵 피가 터져나왔다.
[씨이, 내 짝퉁 주제에! 저게 감히! 쟤도 짜증나, 저런 거에 휘둘리고! 둘 다 죽여버릴 거야!]
마검이 잔뜩 화가 난 어투로 소리를 지르며 에키의 오른팔을 점령하려 들었다. 오른팔이 저절로 움직여 유리엔을 베려는 것을 그녀가 아슬아슬하게 저지했다. 억지로 멈춘 반동과 부상의 여파로 입에서 울컥 피가 쏟아졌다.
그 틈에 또다시 드러난 허점을 유리엔이 공격해 왔다. 에키는 간신히 그것을 피해 뒤로 훌쩍 물러나며 쉰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발, 죽을래?”
[하지만 쟤가!]
“내가 다치더라도 베지 마.”
[뭐야, 그런 게 이해가 안 가! 아프잖아? 죽을 뻔했는데 왜 참아? 난 싫어!]
“이 정도론 안 죽어. 그리고, 너도…… 아무도 못 죽이게 되더라도 나랑 같이 있고 싶다며.”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접근하며 내리치는 유리엔의 검을 튕겨내며, 그녀가 속삭였다.
“그 기분이랑, 비슷한, 그런, 거야, 발.”
[……!]
유리엔의 검을 막느라 길게 말해 줄 틈은 없었기에 그 말은 짧고 끊겨 있었다. 그럼에도 바르데르기오사는 그 순간 어렴풋이 깨달았다.
타인을 위해 손해를 감수하고 인내한다는 것의 의미를. 왜 그렇게 하고 싶어지고, 왜 그렇게 하게 되는지를. 그것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껴야 하는 감각이었다.
마검이 그것을 처음으로 깨닫는 것과 동시에 투명한 칼날에 새겨져 있던 검은 문양이 잠깐 동안 희미하게 빛났으나, 에키도, 그녀와 맞붙고 있는 유리엔도, 바르데르기오사 스스로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부상을 입었음에도 에키의 움직임은 둔해지지 않았다. 장기전은 무리임을 판단하고 오히려 더 빨라졌다.
‘내가 베지 않으려 하는 걸 눈치챘어. 빨리 끝내야 해. 그렇다면.’
에키는 일부러 등을 내주었다. 유리엔이 그녀가 드러낸 허점을 베어 들어올 때, 그녀는 드디어 틈을 잡았다.
그녀의 손이 그의 턱밑을 위로 후려쳤다. 강한 충격이 뇌리를 뒤흔들자 그의 몸이 비틀거렸다. 어지간한 마스터라도 기절할 만한 충격이었으나 그는 기절하지는 않았다.
에키는 당황하지 않고 그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며 올라탔다. 가시덩굴에 뒤덮여 가짜 마검을 쥐고 있는 그의 팔을 마검을 쥔 오른손으로 움켜쥐어 바닥에 짓눌렀다. 가시가 손을 뚫으며 상처를 남겼으나 아랑곳 하지 않았다.
“흑, 으…… 하아…….”
옆구리에서 등을 가로지른 부상 위에 일부러 내주어 가로로 베인 부상이 더해졌다. 그녀는 신음과 뒤섞인 호흡을 뱉으며 힘을 주었다. 왼손으로 자유로운 그의 오른손을 억눌렀다. 유리엔은 붙잡힌 짐승처럼 날뛰었으나 저보다 작고 가벼운 그녀를 떨쳐내지 못했다.
그녀는 땀을 뚝뚝 흘리며 아래의 그를 내려다보았다. 으르렁거리는 얼굴. 살의로 번들거리는 새카만 눈동자. 바닥에 길게 흩어진 검은 머리카락. 문득 이 상황이 그와 그녀가 처음으로 제대로 마주했던 그 때와 반대라는 것을 깨닫자 웃음이 났다.
“율.”
울음과 웃음이 섞인 부름이었다. 구해줄게요, 반드시. 당신이 내게 기회를 주었듯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오른손을 움직여 그가 쥔 마검을 겹쳐 쥐었다. 가시덩굴이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마저 휘감아 왔다. 에키는 그것을 내버려두고 그 가짜 마검을 꽉 잡은 다음, 그에게서 강제로 빼앗았다.
“크윽……!”
유리엔이 몸부림치며 신음을 토해냈다. 엉겨 붙은 가시덩굴이 뜯어내지며 피가 튀었다.
가시덩굴은 멀어진 기존의 숙주에게 들러붙느니, 보다 가까운 새 숙주를 잠식하는 것을 택했다. 미친 듯이 자라나는 덩굴이 그녀의 오른팔에 파고들었다. 에키는 그것을 상대하지 않았다.
“발, 오른팔 넘겨줄게. 네가 저거 막아봐.”
[어? 뭐? 내, 내가?]
“어떻게든 해봐, 난 바쁘니까.”
그녀는 오른팔의 통제권을 바르데르기오사에게 완전히 넘겨줘 버렸다. 그녀의 오른팔을 점령한 마검은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곧 한껏 들떴다. 숙주를 조종하는 능력으로 ‘가짜 마검’이 바르데르기오사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 같잖은 가짜가, 어디서 내 걸 잡아먹으려 들어? 얜 내 주인이야, 나쁜 놈아!]
마검이 신이 난 어조로 떠들어댔다. 뭘 어떻게 하는지 몰라도 가시덩굴이 위축되며 밀려나기 시작했다. 에키는 덜덜 떨리고 있는 오른팔을 늘어뜨린 채 방치해 두고 유리엔을 들여다보았다.
가짜 마검을 떼어냈어도, 유리엔의 몸에 남아 있는 살의는 여전했다. 그가 상체를 들어 그녀의 목을 물어 뜯으려 했다. 에키는 고개를 틀어 그것을 피했다.
아직 남아 있는 가시덩굴이 잘렸다가 회복 중인 그의 왼팔을 고정하고 있었지만, 가짜 마검이 분리되자 힘을 잃었는지 그쪽 팔은 움직이지 못했다.
그는 왼팔, 에키는 마검에게 넘겨 준 오른팔을 움직이지 못하고, 그의 오른손은 그녀가 왼손으로 짓누르고 있었다. 남아 있는 살의를 흡수하려면 그의 마나 코어에 접촉해야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에키는 머리를 숙였다. 엉망인 그의 제복 가슴께를 입으로 풀어헤쳤다. 이로 제복 단추를 물고 잡아당겼다. 하얀 피부가 드러났다. 어울리지 않는 검은 얼룩 같은 것이 그 피부 곳곳에 번져 있었다.
그녀는 요동치는 그의 상체를 내리 누르며 마나 코어가 있을 위치에 입술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