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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156화 (156/211)

검을 든 꽃 156화

회색 산맥은 그리 거대한 산맥도 아니고, 험준하거나 높은 산맥도 아니었다. 심지어 서식하는 마물도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색 산맥은 수색하기에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산맥을 이루는 산들이 전부 돌산이고, 계곡이 많아 흔적이 잘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추적을 도울까요? 추적술에는 일가견이 있습니다.”

산길에 들어선 직후 던컨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에키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필요 없어.”

그녀는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땅을 살피거나 나뭇가지나 풀이 꺾이는 방향을 관찰하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목적지를 아는 듯한 행동이었다.

그녀가 향하는 곳마다 작은 동굴 내지는 바위들이 얽혀 그늘을 만든 장소가 있었다. 그런 곳을 세 군데 확인하고 나자 해가 저물었다. 에키는 마지막으로 확인한 동굴 바닥에 주저앉았다.

“요리 잘해?”

“기본은 할 줄 압니다.”

“그럼 네가 좀 해줘.”

마법 가방에서 나온 냄비와 식재료들이 던컨에게 건네졌다. 던컨은 묵묵히 그것을 받아서 요리를 시작했다. 그사이 에키는 대강 잠자리를 만들고는 무릎 위에 턱을 괴고 허공을 보고 있었다.

던컨이 완성한 스튜 그릇을 들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 바로 스푼을 들었다. 던컨이 멀거니 물었다.

“아가씨는 제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요리를 시키고 의심 없이 드시는군요.”

“독 넣었어?”

에키는 그렇게 묻고는 던컨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스튜를 떠 먹었다. 던컨은 입가를 실룩였다.

“아뇨.”

“그럼 됐어. 앞으로도 넣지 마, 죽고 싶지 않다면.”

“그게 무슨 뜻입니까?”

“내가 독 정도로는 안 죽어서. 푸누스였나? 그거 먹고도 안 죽었지.”

“……설마, 발자국 없는 독 말입니까?”

뭐 이런 미친 괴물이 다 있나. 던컨은 그런 심정으로 되물었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대신 그 정도의 독이면 정신을 잃어. 그렇게 되면 마검을 억누를 수가 없게 되거든? 내 손에 죽고 싶으면 독 넣어도 돼.”

“…….”

던컨은 입을 다물고 제 몫의 스튜 그릇에 고개를 처박았다. 알면 알수록 무서워졌다.

식사를 마친 에키는 곧 침낭 속에 파고들었다. 그녀는 손만 내어 한쪽을 가리켰다.

“정리 알아서 하고, 거기서 자.”

“불침번은 필요 없는 겁니까?”

“접근하면 알아서 깨. 너도 그냥 자.”

불침번은커녕 오직 혼자서 떠돈 세월이 9년이었다. 에키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던컨은 그녀가 정말 잠든 상태로도 바로 깨어나는지 실험하고 싶어졌으나, 호기심의 대가로 목숨을 지불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얌전히 그릇을 치우고 잠들었다.

세 시간쯤 흐른 후에 던컨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어느새 일어난 에키가 출발 준비를 마치고 그를 바라보았다.

“피곤해?”

“……아뇨, 괜찮습니다.”

“그럼 일어나.”

밖은 아직 어두웠지만 에키는 대낮과 다름없이 걸음을 옮겼다. 던컨은 그녀 정도의 시력은 없어도 어둠에 익숙한 직업상 무난히 그녀를 뒤따를 수 있었다.

그녀는 이번에도 목적지를 아는 것처럼 이동했다. 길도 없는 산 속을 헤매지도 않았다. 은신처가 될 만한 곳을 또 하나 확인하고 나자 서서히 해가 밝아왔다.

“회색 산맥을 굉장히 잘 아시는 것 같습니다.”

“반 년 정도 여기서 살았어.”

“예? 대체 언제…….”

백작 영애 에키네시아 로아즈의 삶에는 그럴 만한 시기가 없었다. 에키는 태연히 답했다.

“악몽 꿀 때.”

“……꿈속에서 말입니까?”

“그래.”

던컨은 앞서 걷고 있는 에키의 뒷모습을 다시 훑어보았다. 고생이라곤 해본 적 없는 것 같은 외모와 여린 실루엣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요소투성이. 그는 생각을 포기하기로 했다. 애초에 마검을 쥐고도 악마가 되지 않은 점부터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이틀을 회색 산맥 속에서 보냈다.

이틀간 던컨은 그녀에 대해서 꽤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그는 마검이 말을 한다는 사실까지 알아차렸다. 에키가 그의 앞에서 대놓고 마검과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가 무언가를 물으면 꼬박꼬박 대답해 주었고, 종종 먼저 말을 걸기까지 했다.

“의외로 친절하시군요.”

“대화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서. 일종의 보험이기도 하고.”

“……예?”

“내가 멀쩡해 보여?”

그녀가 생긋 웃으며 물었다. 던컨은 당황해서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여러모로 이상하고 괴물 같은 데다 의문투성이이긴 해도, 미친 것 같지는 않았다.

가만히 던컨을 보던 에키가 돌연 손을 옆으로 휘둘렀다. 내쏘아진 보랏빛 마나가 폭음을 일으키며 그곳에 있던 바위를 박살 냈다. 직격당한 부분은 가루가 되다시피 했다.

던컨의 낯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손을 거두고 돌아섰다.

“그럭저럭 멀쩡해 보인다면 다행이고. 가자.”

“……방금 뭘 하신 겁니까?”

“화풀이. 근데 별로 안 풀리네.”

“제가 당신을 화나게 만들었습니까?”

“아니. 너 말고.”

에키는 가파른 벼랑 끝으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전부 죽이고 싶고, 죽일 능력도 되는데, 죽이기 시작했다간 멈출 수 없게 될까 봐 참고 있어서. 죽이려면 분노를 삭이고 냉정한 상태에서 죽여야 되거든. 그런데 분노가 안 가라앉아.”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어도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 말인지는 알만했다. 로아즈 참사의 배후와 창천기사단장을 물들인 자들 말이겠지. 던컨은 망설이다가 물었다.

“꼭 참아야 합니까? 미칠 것 같을 정도라면…….”

“참아야 해, 악마가 되어선 안 되니까. 그리고 미칠 것 같은 건 그 문제 때문만은 아니야.”

가족을 죽이고 로아즈를 몰살시키고, 니콜마저 죽인 후, 부상을 입은 몸으로 헤매고 다녔던 산. 그 산속에서 그녀가 웅크려 지냈던 곳들을 되짚으며, 그녀처럼 악마가 되어있을 유리엔을 찾아가는 길은 악몽의 재현이나 다름없었다.

에키는 회색 산맥에 들어온 이후 계속해서 악몽을 꾸었다. 시간을 되돌리기 전 제대로 잠들지 못하던 시절처럼.

그녀는 그 점을 설명하는 대신 벼랑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상당한 높이였으나 무게가 없는 것처럼 가볍게 착지했다. 이틀간 그녀와 동행한 던컨은 놀라지도 않고 벼랑을 타고 내려왔다.

그가 내려오는 사이 에키는 이미 한참 앞서서 숲 속을 걷고 있었다. 던컨은 그녀를 뒤쫓으며 물었다.

“보험이라는 건 무슨 뜻입니까?”

갑자기 그녀가 걸음을 멈추더니 대낮임에도 숲이 울창해 어둠이 도사린 한쪽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그러곤 고개를 돌려 던컨을 돌아보았다.

“이제 따라오지 마. 이거 가지고 캠프 근처로 돌아가서 기다려.”

그녀는 밀랍으로 봉한 편지를 둘 꺼내서 그에게 내밀었다. 편지 하나에는 부단장 바론 틸리어스의 이름이, 다른 하나의 겉에는 로아즈 백작 부부와 란셀리드 로아즈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약속한 일주일에서 4일 남았지? 기다리다가 27일이 되면 그 편지들이랑, 두 번째 서류를 창천기사단에 전해주고 쐐기로 돌아가. 돌아가면 네가 알게 된 것을 모두 보고해도 돼.”

두 번째 서류는 그녀가 마검의 주인임을 밝혀야만 전할 수 있는 내용들이 있는 그 문서였다. 던컨은 멀거니 편지와 그녀를 번갈아 보았다.

“보험이라는 게 이것 말씀이셨습니까?”

“응.”

“창천기사단장을 되돌리는 것에 실패할 때를 대비해서 말입니까? 다른 사람들에게는 분명 확실하다고…….”

“그래, 성공하겠지. 하지만 보험이란 건 원래 최악을 대비하는 거잖아?”

에키가 어깨를 으쓱이더니 오른손의 장갑을 벗었다. 하얀 손에 뚜렷한 검은 문양. 그 문양에서 투명한 칼날의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움켜쥔 그녀가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내 최악은 좀 많이 위험해서. 이번엔 최악의 경우라 해도 막을 수 있는 재앙 수준에서 그치도록 보험을 두는 거야.”

겪어본 것처럼 들렸다. 아니, 지금까지 계속 그녀의 말과 행동은 마치 마검의 악마가 되어 날뛰어본 적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악마가 출몰했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 없지만 그게 아니면 설명이 되질 않았다.

그녀는 긴 악몽을 꾸고 와서 변했다고 했었다. 어쩐지 그 악몽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던컨은 망연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검을 쥐고도 그 살의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건, 어떤 과정을 겪어야 가능해지는 일일까.

앳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보라색 눈동자는 우물처럼 깊었다. 긴 고통과 그것에도 굴하지 않은 의지가 스민 결과였다. 이 순간 던컨은 그 깊이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게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확신하지는 못해도.

“그러니 나 없다고 바로 도망치지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명하신 대로 기다리겠습니다. 성공하고 돌아오십시오.”

그는 충동적으로 말했다. 에키가 의외라는 듯 그를 보더니 설핏 웃었다.

“좋아, 빨리 가. 궁금하다고 근처에 남아 있을 생각 말고. 죽을 수도 있으니까. 죽기 싫어서 내 말을 따르고 있었던 거잖아?”

던컨은 잠시간 묘한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곤 느릿하게 대답했다.

“……예.”

편지를 받아든 던컨이 허리를 깊게 숙이며 인사를 하고 금세 사라졌다.

에키는 그의 기척이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다음 움직이기 시작했다. 숲 안쪽에 도사린 어둠 너머에서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꼭 이렇게 해야 해? 걔 포기하면 안 돼? 주인아, 너 며칠 전부터 살의 엄청 솟구치고 있는 거 너도 알잖아. 걔 것까지 흡수했다간 진짜 못 참게 될지도 몰라. 그래도 돼?]

마검이 답지 않게 조심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에키는 웃으며 답했다.

“너 어쩐지 좀 철든 것 같다? 랑기오사 덕분인가?”

[난 원래 착했어! 야, 말 돌리지 말고. 차라리 걔들 먼저 죽이고 오자니깐! 신나게 죽이고 오면 살의 좀 늘어도 괜찮을 거 아냐. 어차피 그것들 죽어도 싼 놈들이잖아?]

“지금 죽이기 시작하면 오히려 더 못 참게 될 걸. 내 살의, 취할 정도라며?”

[에이, 아니면 그냥 쟤 버려! 다른 인간들 다 미쳤었는데 쟤라고 제정신으로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잖아! 쟤 말고도 너 좋다는 애, 그 덩치 큰 놈도 있고, 너네 가족들도 다 살아있는데, 쟤 때문에 이래야 해?]

“내가 물들면 넌 좋은 거 아니었어?”

[사람 죽이는 건 좋아. 하지만 그러고 나서 네가 화내니까 별로야. 차라리 아무도 못 죽이더라도 너랑 잘 지내는 편이 나은 거 같아.]

그녀의 걸음이 멈칫했다. 마검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내가 그렇게 좋아?”

[엥? 넌 내 주인이잖아.]

당연한 걸 대체 왜 묻느냐는 듯한 천진한 목소리.

“전에도 주인이 있었잖아. 그 사람은 너한테 피 맛도 종종 보여줬다며?”

[확실히 네가 전 주인보다 날 더 괴롭히긴 하지만, 그래도 너랑 있는 게 좋아. 어, 왜인지 설명을 잘 못 하겠는데, 넌 걔에 비하면 날 하나도 안 무서워해서 그런가? 에이, 몰라. 어쨌든 그러니까 주인아, 쟤 포기하고 가서 복수나 하자, 응?]

“발, 나는…….”

그녀는 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숙주의 부상이 아물 때까지 은신처에 웅크리고 있던 ‘악마’가 인간의 기척을 느끼고 기어 나왔다.

늘 정갈하던 머리카락이 엉망이었다. 달빛 같던 은색은 어둠에서 갈라져 나온 것처럼 검어졌다. 그녀가 좋아하던 예쁜 푸른 눈동자는 불길하게 일렁이는 검은빛에 뒤덮여 있었다.

가시덩굴에 뒤덮인 왼팔. 아파 보였다. 그 손에 들린 가짜 마검. 그리고 그녀를 향하는, 표정 없는 얼굴. 언제나 그녀를 볼 때면 풀어지던 모습은 남아 있지 않다.

에키는 문득 그의 목에 남아 있었던 멍자국을 떠올렸다. 그녀가 그의 목을 졸랐던 자국.

유리엔.

울 것처럼 흐려진 낯으로 그녀는 바르데르기오사를 들어 올렸다.

“……어떻게 되든, 그를 포기할 수는 없어.”

그런 선택지 자체가 이제 그녀에게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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