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55화
바론에게 넘겨줄 서류를 만든 것은 던컨이었다. 에키는 정보를 보기 좋게 정리하는 작업에 능하지 못했으므로, 그에게 디아상트 공작과 2황자 간의 관계, 드라코툼바 성에서 발견한 그들이 마검으로 연구했던 정황 등을 설명해 주고 문서로 만들게 시켰다.
창천기사단 원정대가 로아즈에 도착하기 직전에 던컨은 서류를 완성해 왔다. 에키는 객실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 그가 내민 서류를 확인한 다음, 다음 문서를 작성하게 시켰다.
2황자파가 로아즈에 마검을 가져다 둔 음모와, 태양 축제의 연회에서 마석목걸이를 그녀에게 주었던 사건을.
그것들은 그녀가 마검의 주인임을 밝히지 않고서는 알릴 수 없는 내용이었다. 현재로선 공개하는 게 불가능한 내용이기도 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녀에게 진짜 마검이 있다고 해봤자, 유리엔을 막아야 한다는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되레 그녀의 행동반경만 제한되는 꼴이 된다. 유리엔이 사냥감처럼 몰리고 있는 상황에서 마검을 쥐고 어떻게 물들지 않는지를 증명하고 있을 틈 따위는 없었다.
창천기사단장의 스콰이어인 그녀가 마검을 가지고 있음을 공개함으로써, 창천기사단이 마검을 숨겨놓고 악용했다는 의혹을 증폭시키게 되는 것도 문제였다.
모든 것은 시간을 들이면 증명할 수 있겠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당장 일주일의 여유도 간신히 낸 판이다. 유리엔을 구하는 것이 복수나 해명보다 우선이었다.
마검에 대한 그녀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던컨의 표정이 묘해졌다.
“왜?”
“……질문해도 되는 겁니까?”
“해봐.”
그녀가 턱짓하자 던컨이 꿀꺽 침을 삼키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가씨는 대체…… 정체가 뭡니까?”
“이미 알고 있잖아?”
에키가 눈살을 찌푸리며 대꾸하자 던컨은 할 말을 잃었다. 그녀의 말대로, 던컨은 그녀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에키네시아 로아즈. 로아즈 백작가의 장녀. 창천기사단장의 스콰이어였다가, 이제 막 창천의 기사가 된 여자. ‘제니스’라는 전설적인 경지에 이른 검사.
그녀의 이력이나 살아온 삶 어디에서도, 마검을 쥐고도 지배당하지 않으며 스무 살에 제니스에 이를 만한 단서는 보이지 않았다. 백작 영애 에키네시아 로아즈와 검사 에키네시아 사이에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될 법한 괴리가 있었다.
차라리 에키네시아 로아즈라는 여자의 탈을 쓴 다른 사람이라고 하면 납득이 갈 것 같다. 마검을 쥔 날을 기점으로 사람이 바뀌었다던가.
“당신은 정말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맞는 겁니까?”
에키는 잔뜩 긴장한 채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를 턱을 괴고 훑어보았다. 거의 다 말해 버렸으니 저런 의문을 가지는 것도 당연하겠지. 그녀는 툭 던지듯 말했다.
“맞아. 긴 악몽을 꾸고 왔을 뿐이지.”
“……예?”
에키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목적지에 도착한 열차의 속도가 느려지고 있었다.
7월 21일, 희뿌옇게 해가 밝아오는 이른 아침에 원정대는 로아즈 성 근처의 캠프에 도착했다.
바론은 곧바로 제국군 총사령관인 2황자를 상대하러 갔고, 샤이는 테레사의 막사로 향했다. 테레사보다 심각한 부상자도 있었으나 악마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기오사 오너의 치료가 더 급했다.
에키는 던컨을 달고 바론에게 배정된 막사로 향했다. 던컨은 출신이 출신인 만큼 어지간한 마스터들 사이에서도 기척을 숨기는 게 가능했다. 기오사 오너 수준만 아니라면 말이다.
바론이 2황자를 만나러 간 터라 막사에는 짐을 풀고 있는 바라하만이 있었다. 그녀는 바라하에게 밀랍으로 봉한 첫 번째 서류를 건네주었다.
“부단장님께 전해주세요, 선배님.”
“하대하십시오, 에키네시아 경.”
바라하가 서류를 받아 들며 깍듯이 답했다. 에키는 약간 당황한 채 그를 보다가, 시선을 내려 자신이 입고 있는 하얀 제복을 보았다. 빌려 입어 크긴 했지만 의심할 여지 없는 창천의 제복이었다.
기사와 스콰이어 사이에는 굉장한 차이가 있다. 최소 자격이 마스터인 창천기사의 경우에는 더 심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되는 건가요?”
“당연한 일입니다.”
“아무래도 어색한데요. 당분간은 힘들겠어요.”
“금방 익숙해지실 겁니다.”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말하던 바라하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마검 말인가요?”
“……네.”
“그건 가짜예요.”
“역시 그랬군요.”
여러모로 생략된 대화였으나 당사자인 바라하와 에키는 확실하게 알아듣고 있었다. 바라하는 그녀가 마검을 쓰는 모습을 보았었으니까. 그는 노란 눈동자로 자신에 비하면 한 줌밖에 되지 않을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에키네시아 경.”
“네, 말하세요.”
“지금까지 숨기던 것들을 이렇게 전부 밝혀도 되는 겁니까? 숨겨왔던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로드께서도 상황이 상황이라 지금은 넘어가고 계시지만, 나중에는…….”
“알아요.”
바라하가 무엇을 걱정해서 하는 말인지 알고 있었다. 마스터임은 아예 대놓고 밝혔고, 바론에게는 제니스라는 사실까지 밝혔다. 이대로면 사태가 마무리된 후에 본격적인 추궁이 이루어질 것이다. 던컨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어 왔듯이.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납득이 불가능한 수준이니까. 왜 사관생도부터 시작했고, 3년 기한을 잡았던가. 자연스럽게 넘어가기 위해서였다. 그 것을 포기한 이상 뒷수습은 각오하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단장님을 위해서입니까?”
에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라하는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물었다.
“정말 되돌리는 게 가능합니까? 설령 가능하다 해도, 되돌리고 난 후에 경은 괜찮은 겁니까?”
숨기지 못한 걱정이 뚝뚝 묻어나는 물음이었다. 유리엔이 아니라, 그녀를 향한 걱정. 에키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바라하는 치받아 오르는 무언가를 내리누르는 것처럼 이를 악물고 있었다.
“저는 단장님을 존경합니다. 그 분이 무사하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만약 그분이 무사히 돌아오는 대가로 경이…….”
“바라하 선배님.”
그의 말을 끊은 에키가 머뭇거리더니,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아니, 바라하.”
“……!”
“걱정해 줘서 고마워. 하지만 괜찮아. 꼭 무사히 돌아올 테니까. 단장님도, 나도. 결절에서 우리가 무사히 빠져나왔던 것처럼.”
흔들림 없는 목소리와 부드러운 표정. 안심시키려는 태도. 흰까마귀 협곡의 결절 안에서 억지로 공포를 누르고 있을 때 그를 향해 그녀가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그러니 저를 믿고 기다려 주세요, 선배님.”
그렇게 말한 그녀가 돌아섰다. 하얀 제복과 푸른 망토 위로 분홍색 머리카락이 살랑거리며 내려앉았다. 바라하는 망연히 그녀가 막사를 벗어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는데.
“……지독하게 부럽군.”
그녀에게 사랑받는 남자가 부러웠다. 질투가 날 정도로. 그럼에도 마음껏 질투할 수조차 없었다. 에키네시아가 내보이는 마음이 너무 명백하고 강렬해서. 그가 가질 수 없는 마음인 게 너무 확실해서.
만약 에키네시아가 정말로 유리엔 단장을 구해내어 돌아온다면, 그러고도 단장이 디아상트 공녀와의 약혼 따윌 하겠다고 한다면, 포기하려는 노력 따윈 그만둬 버릴지도 모르겠다.
그는 속절없이 반응하는 가슴을 달래며 눈을 감았다.
* * *
부단장의 막사에서 나온 에키는 자신의 막사에서 짐을 챙겼다. 일주일 이상의 노숙을 대비한 준비였다. 유리엔이 선물해 주었던 마법 가방은 이번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에키는 자꾸만 떠오르는 그의 얼굴을 간신히 가라앉혔다.
“잠깐 들어가도 될까?”
막사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아는 사람의 것이었다. 갈라지고 쉬어 있는 음성. 에키는 가방을 닫으며 밖을 향해 말했다.
“네, 들어오세요.”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의 남자가 입구의 천을 걷으며 들어왔다. 디트리히 사루아였다.
그는 평소의 한량 같은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지치고 힘들어 보이는 꼴이었다. 머리카락은 엉망으로 헝클어졌고 눈 아래가 거뭇했다. 면도를 할 여유도 없었는지 턱에는 수염도 까끌까끌하게 나 있었다. 그나마 옷은 막 갈아입어서 깨끗했다.
막사에 들어선 그는 제복 차림인 에키네시아를 보고 흠칫 놀랐다. 눈이 커진 채 굳었다.
“……진짜 기사가 됐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디트리히 경, 무슨 일이신가요?”
“창천기사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는 자리였냐. 거참, 로드나 스콰이어나 똑같아.”
디트리히는 푸슬 웃더니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웃음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가 느릿하게 말했다.
“이걸 어쩔까 했는데, 중요한 증거품이긴 하지만, 그래도 네가 가지고 있는 게 맞겠다 싶더라고. 부단장님께도 말씀드렸다.”
그는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에키가 의아한 얼굴로 그것을 받아 들려 하자, 디트리히가 제지했다.
“이건 단장님이 막사를 떠나기 전에 받은 상자다. 이걸 보고 나간 후에, ……그렇게 되었지.”
유리엔이 인질로 잡혔던 란셀리드를 구하러 갔다가 악마가 되었다는 것까지는 바론에게 들었었다. 그러나 자세한 사정까지는 몰랐다. 에키가 딱딱해진 얼굴로 상자를 받았다.
“열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이런.”
디트리히가 말하기도 전에 그녀는 상자를 열어버렸다. 유리병과 쪽지. 유리병 안에 있는 것. 말갛게 떠올라 막사 안까지 비쳐드는 아침 햇살과 끔찍할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에키네시아가 이성을 잃지 않은 것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 각오한 덕분이었다. 샤이에게 치료받았는데도 불구하고 란셀리드의 한쪽 눈은 텅 비어 있었으니까. 뒤늦게 정신을 차린 샤이는 엘기오사의 능력에 대해 공부한 대로 설명해 주었었다.
〈잃어버린 신체 일부를 재생하는 건, 역대 엘기오사 오너들 중에서도 소수만 가능했대요. 전…… 아직 부족해서, 지금은, 못 하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열심히 할 거예요.〉
울먹이던 소녀가 덧붙였던 말이 있었다. 혹시 사라진 부분을 찾아오면, 지금의 자신이라도 회복시킬 수 있다고.
에키는 란셀리드의 눈동자를 가만 들여다보다가 쪽지를 읽었다. 그리고 상자를 닫았다. 그녀가 지나치게 차분해서 디트리히는 몹시 당황했다.
“너, 괜찮냐?”
“괜찮아요. 이거, 감사합니다.”
그녀는 상자를 챙겨 넣으려다 멈칫했다. 그리고 그것을 디트리히에게 도로 건네주었다.
“경이 가지고 계시다가, 아젠카로 돌아간 후에 성녀님께 전해주세요. 그럼 동생의 눈을 치료해 주실 거예요.”
“그래? 다행이네. 그런데 왜 네가 직접 가지고 가지 않고?”
“저는…….”
에키는 말끝을 흐렸다가 웃으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이상하게 여긴 디트리히가 뭐라 말하려는 찰나, 막사 밖에서 급한 걸음이 다가오더니 바론이 나타났다.
“에키네시아 경, 제국군과 작전 토의를 끝냈……. 디트리히 경, 여기서 뭐 하나.”
“아르 세밧티엠. 아까 말씀드렸던 물건을 전해주고 있었습니다.”
“음. 용무가 끝났으면 나가보도록. 그녀와 할 이야기가 있다.”
“알겠습니다.”
디트리히는 결국 제대로 묻지 못하고 막사를 나갔다. 바론이 주위의 기척을 확인하고 품에서 꺼낸 지도를 에키의 앞에 펼쳐놓았다.
“제국군이 포위망을 구축하고, 그 안쪽을 창천기사단이 수색하기로 결정했다. 수색에 참여하겠다고 고집을 피울까 봐 우려했는데 의외로 순순히 물러나더군.”
“이건…… 회색 산맥이군요.”
“단장님이 사라진 곳이 이쪽이니까. 이동속도를 고려해 보면 아직 회색 산맥 내부에 있을 거다. 예상 이동 경로는 이 정도.”
바론이 붉게 그어진 선들을 가리켰다. 에키는 그 선을 보고 있지 않았다. 얄궂게도 지워진 과거, 마검을 쥔지 며칠 되지 않은 상태에서 니콜 시즈튼에게 부상당한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숨어들었던 곳도 회색 산맥이었다.
“일주일간, 수색 속도를 늦추겠다. 그러니…….”
“일부러 늦출 필요는 없겠어요.”
“음?”
“제가 누구보다 빠르게 단장님을 찾아낼 수 있을 테니까요.”
에키는 지도에 시선을 둔 채 덤덤히 말했다. 부상당한 악마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어떤 곳을 찾아가는지 그녀보다 잘 알 사람은 없었다. 하물며 장소마저 같다면.
“일주일 안에 캠프로 복귀할 테니, 부단장님께선 수색에 참가하지 마시고 캠프에서 기다려 주세요.”
“알겠다.”
바론이 답하자마자 에키는 지도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그를 향해 아젠카식 경례를 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바로 가겠다고? 쉬지 않아도 되겠나?”
“시간이 부족하니까요.”
그리고, 캠프에 계속 남아 있다간…… 제가 악마가 될지도 모르겠어서요. 에키는 뒷말은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어, 야, 너 제정신 맞아? 진짜 엄청나다. 나 취할 거 같아. 막, 막 들뜨고 어지럽고 기분 좋아. 이게 인간들이 취한다! 하는 그런 기분인 거 맞지? 우와, 장난 아니야…….]
그녀의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살의를 느낀 마검이 뭉개지는 발음으로 횡설수설했다. 에키는 제국군 막사 쪽을 흘깃 보고는 마법 가방을 집어 들었다.
“다녀오겠습니다, 부단장님.”
“……건투를 비네.”
바론이 기사들을 모아놓고 임무를 하달하는 사이, 에키네시아는 캠프를 벗어나 말을 하나 잡아타고 곧바로 회색 산맥 쪽으로 향했다. 던컨만이 그림자처럼 그녀를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