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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154화 (154/211)

검을 든 꽃 154화

창천의 정식 기사 서임식에는 기오사 홀 입장 과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창천이 보유중인 주인 없는 기오사들이 보관된 공간에서, 기사는 원하는 만큼 머물며 기오사의 선택을 받을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에키네시아 로아즈의 경우 기오사 홀 입장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서임식 또한 아주 간략하게, 5분도 되지 않아 끝났다.

창천의 제복으로 갈아입고, 성녀를 보필하기 위해 마침 근처에 있던 수석 신관 아론 앞에서 창천의 맹세를 행하고, 네 장의 날개를 단 황금빛 매가 새겨진 창천의 문장을 부단장이 제복에 달아주는 것으로 끝이었다.

선언문 낭독이나 검 수여식이나 기오사의 세례, 축복 등의 본래 존재하던 과정은 모조리 생략되었다. 상황의 급박함과 단장의 부재 때문이었다.

게다가 기오사 홀을 열기 위해서는 현존하는 모든 기오사 오너의 승인이 필요했다. 테레사는 로아즈에서 중상으로 쓰러진 상태고 유리엔이 악마가 되면서 성검 랑기오사의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으니 기오사 홀을 여는 건 무리였다.

대신 본래 기사로 서임되기 전에 진행되는 심사나 시험 등도 전부 건너뛰었다. 원칙대로라면 스콰이어 출신이라 해도 일부 과정을 거쳐야만 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으므로.

그 와중에 에키는 바론으로부터 창천의 정보원들이 그녀의 부모님과 로아즈의 생존자들을 구조하여 아젠카로 이동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란셀리드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만, 무사하며 곧 깨어날 거라는 확언을 받았다.

유리엔의 안배가 그들을 살렸다. 정보원들은 물론이고 마도구까지 준비해서 주었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인질이 된 란셀리드를 살리기 위해 그는…….

에키는 더 생각하지 않았다. 더 생각했다간 이 자리에 없는 그를 향해 울음을 터뜨리고, 화를 내고 싶어질 것 같아서.

그러고 나서는 곧바로 출발이었다.

에키네시아를 포함한 창천기사단은 20일 저녁에 마나 열차에 탑승했다. 외지에서 임무중인 기사와 아젠카의 방어를 담당한 기사를 제외한 창천기사 전원이라는 대규모 인원이었다.

성녀 샤이는 기사단 소속은 아니었으나 엘기오사 오너로서 원정에 합류했다. 사관생도들은 포함되지 않았고 보조로는 준기사들과 정식 스콰이어만이 포함되었다.

출발 전에 바론은 짧게 원정의 목표를 설명했다. 마검의 악마 제압. 그는 추살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유리엔을 향해서 그 표현을 쓸 수는 없었다.

마검에 물든 자를 토벌하는 것은 기오사를 관리하는 창천의 사명이다. 물든 과정이 어떻게 되었건, 물들었으면 돌이킬 수 없으므로 그 목표는 변하지 않았다.

물론 바론은 유리엔을 그렇게 만든 음모를 반드시 밝혀낼 생각이었다. 우선 순위가 다를 뿐이다. 그가, 그 유리엔이,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고 다니도록 내버려둘 순 없으므로.

유리엔을 막는 것은 제국이 아니라 창천기사단이어야 했다. 그를 위해서도, 창천을 위해서도 그러했다.

바론은 지금부터 단장을 잃은 창천을 이끌어야만 했다. 충격적인 소식에 제국이나 아젠카뿐만 아니라 대륙 전체가 동요하고 있었다. 많은 것이 변할 터다. 어지러울 정도로.

그는 명을 내리고 출발 전에 혼자서 가족들이 있는 집에 잠시 다녀왔다. 다녀온 그의 눈가가 충혈되어 있었으나, 모두가 그 점을 모른 척했다.

원정을 떠나는 창천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출발 후 열차 안에서 몇 가지 시급한 문제를 처리하고, 바론은 기사들의 객실을 순회하며 단원들의 상태를 살폈다. 원정의 목표가 목표이 니만큼 하나하나 살펴봐야만 했다.

대부분이 동요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유리엔은 젊었고 단장에 취임한 지도 몇 년 되지 않았지만, 이미 많은 업적을 쌓은 사람이었다. 대륙 기사들의 우상. 기사 중의 기사인 창천기사들에게도 그 인식은 마찬가지였다.

바론은 새카맣게 탄 속내를 전혀 내보이지 않고 그런 기사들을 다독였다. 마지막으로 들린 곳은 갓 기사가 된 에키네시아 로아즈의 객실이었다.

“미안하게 되었군, 에키네시아 경. 서임식 같지도 않은 서임식에 바로 원정이라니.”

“아뇨, 괜찮습니다. 제가 원한 일이니까요.”

바론의 사과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바론은 묘한 낯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제복을 맞출 시간조차 없어서 그나마 몸집이 비슷한 여기사의 것을 빌려 입었다. 그로 인해 본래 몸에 딱 붙어야 하는 제복이 커서 헐렁한 탓에 더 어려 보였다.

‘일찍 결혼했으면 저만 한 딸이 있었을지도.’

바론의 딸은 늦둥이라 여섯 살에 불과하긴 했다. 그래도 그는 에키만 한 딸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였다.

저토록 어린 마스터라니.

보통 마스터는 빨라야 30대에 되곤 했으므로 스물아홉 살에 마스터가 된 테레사 폰 프랑 알마리도 기사단 내에서는 젊다 못해 어린 느낌이었다. 스물세 살에 마스터가 되고 스물네 살에 단장이 되었던 유리엔도 아예 다른 인종으로 취급되었는데, 이번에는 심지어 스무 살.

게다가 아무리 뜯어보아도 검에 익숙하지 않을 듯한 몸으로.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마스터임을 숨기고 있었다는 정황이 수상했다. 정말로 많은 것들이 수상했다.

하지만 바론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당장 닥쳐온 일이 급했고,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유리엔 때문에 여태껏 숨겨온 사실을 드러냈다는 건 확실했기에.

또한 그녀는 바론이 아들처럼 여기며 후계자로 키우고 있는 바라하 이슬라프를 결절에서 구해낸 사람이었다. 에키네시아가 마스터임을 밝힌 후, 바라하가 그에게 고했다.

〈로드, 그 때에 제가 결절에서 살아나온 것은 순전히 그녀 덕분입니다.〉

〈너는 그녀가 마스터인 것을 알고 있었나?〉

〈예. 그 외의 다른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녀가 부탁했기에 비밀을 지켰습니다.〉

〈……그 외의 다른 것?〉

〈죄송합니다, 약속했으니 그녀 스스로 밝히기 전에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럼 하나만 묻겠다. 바라하, 너는 그녀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예, 물론입니다.〉

바라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그래서 바론은 추궁하지 않기로 했다. 바라하 이슬라프를 믿는 만큼 에키네시아 로아즈를 신뢰하기로 결정했다.

“뭔가 궁금한 것이 있는가?”

그것은 갓 기사가 된 그녀를 위한 질문이었다. 창천기사의 권한과 의무, 원정 시의 행동 요령 같은 것들을 설명할 생각으로. 그러나 그녀는 바론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말을 꺼냈다.

“부단장님께서는, 로드, 아니, 단장님이 진행하고 있던 계획에 대해 아는 것이 있나요?”

“계획이라니?”

에키는 바론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녀가 나직이 말했다.

“마검 바르데르기오사를 활용해서 실험을 하고, 저주를 만들어낸 것은 2황자파와 디아상트 공작이에요. 단장님은 그것을 파헤치고 처벌할 계획을 진행 중이셨어요.”

“자, 잠깐, 디아상트 공작?”

2황자파가 배후라는 건 사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그러나 유리엔과 결혼으로 맺어질 예정이었던 디아상트 공작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에키는 길게 설명하지는 않았다.

“자세한 사항은 곧 서류로 정리해서 넘겨드릴 거예요. 그리고, 부단장님. 단장님을.”

그녀는 그 대목에서 잠시 숨을 멈췄다. 질끈 눈을 감았다 뜨고, 미미하게 떨림이 묻어나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단장님을, 포기, 하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계신 거죠?”

포기. 에두른 표현이었으나 바론은 명확하게 알아들었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바론은 유리엔의 죽음을 전제로 원정을 계획했고, 앞날을 준비 중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미 악마가 되었다면 답이 없으므로. 그래도 그의 명예는 죽게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터였다. 다른 기사들은 동요하더라도 책임을 지고 선택을 해야 하는 바론은 굳건해야 했다. 그는 딱딱하게 답했다.

“마검의 악마는 토벌해야 한다, 에키네시아 경. 예외란 없다.”

“제가.”

에키는 다시 말을 멈췄다. 그녀는 뒷말을 눌러 삼키고, 흔들림이 사라진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부터 단장님이 돌아오신다는 전제로도 준비해 주셨으면 해요.”

“……뭐라고?”

“로아즈에 도착하면 제게 단독행동을 허용해 주세요. 그리고 일주일만, 딱 일주일만 추적을 늦춰주세요. 그러면 제가 단장님을 모시고 오겠습니다.”

허무맹랑한 말이었다. 유리엔의 생사를 걸고 헛소리를 한다는 점에서 분노까지 치밀 지경이었다.

주의를 주려던 바론은 에키네시아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형형하게 타오르는 보랏빛 눈동자가 언뜻 태양처럼 보일 정도로 강렬했다. 어린 기사의 치기 어린 허세나 철없는 주장이라곤 볼 수 없는 무게감이 그녀에게 있었다.

열차가 덜컹거리는 소리가 조용한 객실을 울렸다. 바론은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납득시켜 봐라.”

그는 에키네시아가 길게 무언가를 설명하리라 짐작하고 들을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녀는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부단장님. 저는, 제니스예요.”

바론은 귀를 의심했다. 잘못 들었다.

에키가 손을 들어 올렸다. 가죽 장갑을 낀 작은 손 위로 보랏빛 마나가 확 피어났다. 마나 소드를 만들어낸 그녀가 주먹을 움켜쥐자 마나가 사그라들었다.

바론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스무 살 마스터, 아무리 봐도 농담처럼 보이고, 여러모로 의심스럽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납득할 순 있다. 스물세 살 마스터가 이미 있었으니까.

하지만 스무 살 제니스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명제였다. 가장 긴 경력을 가진 기오사 오너로서 제니스가 어떤 경지인지 잘 알고 있기에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말이 안 된다. 천재라고 해도 용납 가능한 수준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환각을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아니면, 눈앞에 있는 이 예쁘장하고 가느다란 여자가, 인간이 아니라 마물의 일종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섬뜩 소름이 돋았다.

“믿기지 않으시겠죠. 이해해요. 그래서 부단장님께만 알려드리는 거예요.”

에키는 아무렇지도 않게 허공에 손을 그었다. 그녀의 손이 움직인 궤적을 따라 마나의 칼날이 또다시 형성되었다. 그녀는 장난치듯 그것을 한 바퀴 허공에서 돌리고, 다시 스러지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고, 따라서, 저는 단장님을 제압할 수 있어요. 생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물들기 전으로 되돌리는 것도…… 가능할지도 몰라요.”

손을 거둔 그녀가 바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선명한 시선.

“제게 기회를 주세요. 그와 함께 돌아오겠습니다.”

그 말은 막막한 어둠에 드리워지는 얇은 빛줄기처럼 들렸다.

바론은 내심 절박하게 바라고 있었다. 뜬금없이 신이라도 강림해서 이 믿기지 않는 절망을 해결해 주기를. 황당무계해도 좋으니 기적이 일어나서, 예민한 소년이던 시절부터 지켜봐왔고 처음으로 거둔 스콰이어였으며 진심으로 인정한 단장인, 유리엔을 되돌려 주기를.

그녀가 괴물이건, 인간이 아닌 무언가건, 제니스라는 건 사실이었다. 마스터이자 기오사 오너인 바론이 눈앞에서 만들어진 마나 소드를 착각할 리는 없었다. 그리고 제니스라면 기적이 되기에 충분한 존재였다.

“정말로 단장님을 되돌릴 수 있나? 그와 함께 돌아올 수 있다는 건가?”

되돌릴 수 있나? 그 질문에 에키는 확신할 수 없었다.

마검의 마나에 물든 자들을 되돌려 보긴 했으나, 그들은 미쳐 버렸으니까. 그리고 유리엔을 물들인 건 그냥 마검의 마나가 아니라 가짜 ‘마검’이었으니 무언가 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신할 수 없어도 확신해야만 했다. 그녀를 보는 순간 무방비하게 풀어지던,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던, 벌겋게 달아오르던, 이해와 사랑을 함께 주었던, 그녀의 유일한…….

“네. 반, 드시, 함께, 돌아오겠어요.”

내내 담담하고 선명하던 에키네시아가 흐려졌다. 그녀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 더듬거림과 흐려진 얼굴이 지독하게 절실했다. 그것이 결정적이었다. 바론은 이성과 책임을 잠시 내팽개쳤다.

“일주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만들어 주겠다. 에키네시아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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