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꽃-153화 (153/211)

검을 든 꽃 153화

유리병과 쪽지를 확인한 테레사, 디트리히, 현자 칼리스토는 바로 영주관 안으로 진입을 시도했다. 앞장 서서 들어가던 테레사는 로비에 발을 들인 순간 본능적으로 기오사를 꺼내 공격을 막았다.

“큭!”

첫 공격 이후 곧바로 계속해서 칼날이 짓쳐 들어왔다. 테레사는 생각할 틈도 없이 그것들을 막아냈다.

수호검 디몽기오사의 주인이자 방어형 검술인 프랑 알마리의 계승자인 테레사는 공격을 막아내는 데에 있어서는 창천기사단장보다도 뛰어났다. 그녀의 실력보다 훨씬 윗줄인 경우에도 어떻게든 막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테레사는 지금 막는 것조차 버겁다는 느낌이 들었다. 속도를 쫓아가기 힘들었고, 내리치는 검의 무게감으로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몇 차례의 검격을 그녀가 아슬아슬하게 버텨내자 상대가 훌쩍 뒤로 물러났다. 현자가 마법으로 불빛을 피워 올렸다. 밝아진 빛 속에서 비로소 그들을 응시하는 상대가 보였다.

긴 검은 머리를 늘어뜨린 검은 눈동자의 남자. 가시덩굴 같은 것이 왼팔에 휘감겨 있었다. 그리고 그 손에 쥐어진, 칼날이 유리처럼 투명하고 손잡이는 새카만 검.

“단장……?”

“맙소사, 바르데르기오사!”

디트리히가 얼이 빠진 채 중얼거렸고 칼리스토가 비명처럼 외쳤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놀라고 있을 여유도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다.

‘마검의 악마’는 표정 없는 얼굴로 검을 휘둘렀다. 검은 기운이 날을 따라 불길처럼 타올랐다. 검기가 스치고 지나간 곳마다 박살이 났다.

그 자리에서 그들이 죽지 않은 것은 방어에 특화된 기오사 오너인 테레사의 존재와, 유리엔의 온전하지 못한 상태 덕분이었다.

성검은 미리 버렸고, 왼팔은 스스로 잘랐다가 가시덩굴이 이어붙인 상태여서 유리엔은 상당히 약화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제니스에 발을 들인 기사가 오직 죽일 목적으로 검을 휘두르자 재앙이 따로 없었다.

테레사는 막는 것만으로도 벌써 한계에 이르렀다. 마스터가 아닌 디트리히는 몸놀림이 둔한 칼리스토를 끌고 여파를 피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칼리스토는 검기의 여파가 사방을 긁어대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마법 주문을 외우기가 어려웠다. 애초에 마법사란 사전대비 없이는 전방에서 활약하는 게 불가능한 존재였다. 그가 소리를 질렀다.

“이대로면 다 죽는다! 신호하면 일단 피해라!”

그 말에 테레사가 사력을 다해 유리엔의 검을 튕겨냈다. 디트리히에게 짐짝처럼 들린 채 간신히 주문 하나를 완성한 칼리스토가 마법을 사용했다.

로비 안에 감각을 차단하는 안개가 짙게 피어났다. 그것이 유리엔의 시야를 가리자마자 그들은 미친 듯이 달아났다. 그들 역시 시야를 잃었으나 탐지마법을 사용한 칼리스토가 길을 인도했다.

“이리, 이리로! 달려!”

영주관 밖으로 뛰쳐나가 급히 말에 올라탔다. 거리를 가로지른 그들은 서문 근처에서 서성거리는 실피드와 마주쳤다. 실피드의 등에는 피투성이 소년이 실려 있었다.

유리엔이 안개를 벗어나는 데에는 긴 시간이 들지 않았다. 실피드를 끌고 막사로 달아난 테레사 일행이 숨을 고른 뒤 사태에 대해 의논할 때쯤, 고함소리와 함께 비상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신력 1629년 7월 20일, 아직 어두운 새벽. 로아즈 서문과 가까운 제국군 막사 방향에서 ‘마검의 악마’가 출현했다.

창천기사 열 명과 디몽기오사 오너 테레사, 7인의 현자 중 여섯이라는 전력이 모여 있지 않았다면, 그리고 유리엔이 성검을 버린 부상상태가 아니었다면, 혹은 유리엔을 물들인 것이 진짜 ‘바르데르기오사’였다면, 전멸했을지도 모른다.

유리엔의 검을 막아서는 게 가능한 존재가 테레사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스터들이라 해도 제니스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막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막아서면 검기로 감싼 검마저 절단되거나 손아귀를 찢으며 튕겨나갔다.

기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를 막는 것이 아니라 시선을 끌고 공격을 유도한 다음 피하는 일이었다. 피하는 것조차 쉽지 않아 몇은 중상을 입었다.

다른 자들은 시간을 끄는 것도 불가능했다. 제국군은 희생자를 낸 후에야 완전히 물러섰다. 빠르게 사태를 파악한 창천기사들이 군을 물리라고 외쳤으나 지휘관들이 그들을 무시한 탓이었다.

군이 물러난 들판에서 창천과 유리엔의 격돌이 이루어졌다.

어딘가로 사라진 헤레이스 리어폴드를 제외한 여섯 현자들이 마법으로 보조를 시도했다. 그러나 악마는 교활하게도 마법사들을 먼저 노렸다. 그가 공격하면 막을 수 있는 건 테레사뿐, 피하는 것도 마나로 신체를 강화한 마스터쯤 되어야 가능한 상황이니 마법 보조는 제대로 이루 어지지 못했다.

기사들은 현자들을 살리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짧고 간헐적인 마법만이 그들을 지원했다.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사망자가 나오지 않은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제니스는 그런 존재였다. 지워진 과거, 제니스도 아니었던 에키네시아에게 토벌단이 몰살당했던 것처럼.

그 새벽은 치열하고 길었다.

유리엔의 ‘마검’은 바르데르기오사와 달리 무한한 마나를 공급하지 못했다. 그가 다른 기사들보다 먼저 지치지 않은 것은 유리엔 자신이 보유한 마나량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점점 느려졌고, 해가 뜰 무렵에 처음으로 부상을 입었다. 이미 만신창이라 정신력으로 움직이던 테레사에 의해서였다.

‘마검’은 이대로 전투를 지속할 경우 숙주가 죽게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것은 도주를 감행했다.

유리엔은 로아즈 성 근처의 회색 산맥 쪽으로 사라졌다. 진작 한계에 달한 사람들은 그가 물러나는 것을 붙잡을 수 없었다. 테레사를 포함한 창천기사 전원과 현자들은 탈진하거나 혼절해 버렸다.

그사이, 그 새벽 내내 물러난 제국군과 함께 혈투를 지켜보기만 했던 2황자가 선언했다.

“창천기사단장 유리엔 드 하르덴 키리에가 마검의 악마가 되었다. 이리 된 것을 보니 역시 창천은 마검을 숨기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그가 들고 있었던 성검도 가짜였던 거다. 현자들마저 속이다니.”

토벌단에 동행한 이후 가문의 마법사만 내보내고 줄곧 침묵하던 디아상트 공작이 처음으로 반발했다.

“성검이 기적을 보이는 것을 모두가 보았으니 그게 가짜라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사고로 마검에 물든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만. 어쨌든 사고든 뭐든, 악마가 되었으니 토벌해야 한다는 건 동의하겠지?”

형식적인 과정이었다. 디아상트 공작은 어쩔 수 없다는 태도로 2황자의 주장을 수긍했다. 카르엠은 명을 내렸다.

“도주한 마검의 악마를 추살해야 한다. 시급히 전국에 알려라.”

기다렸다는 듯이 제도로, 이어서 제국 전역으로 전령이 보내졌다. 아젠카로는 전령이 가지 않았다.

창천기사들과 현자들이 모조리 전투의 여파로 쓰러진 상황에서, 준기사에 불과한 디트리히가 제국군과 황자를 상대로 인질극에 대한 추궁과 유리엔이 물든 정황에 대한 의심을 제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최대한 빨리 아젠카에 소식을 전해야 했다. 동시에 인질로 이용된 사람인 란셀리드 로아즈 또한 어떻게든 살려야 했다.

디트리히는 창천기사단 장기 임무 보급품 중에 본부로 딱 한 명을 이동시킬 수 있는 비상용 마도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유리엔의 막사를 뒤집어엎어 그것을 찾아낸 후 편지와 함께 소년을 아젠카로 이동시켰다.

* * *

부기사단장 바론 틸리어스는 디트리히 사루아가 급하게 휘갈긴 편지를 통해 대략적인 정황을 파악했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 두세 번 읽긴 했으나, 거짓도 아니고 그가 잘못 읽은 것도 아니었다. 현실을 깨닫고 충격이 가라앉자 판단과 결정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창천기사 전원에게 총동원령을 내린다. 타지에서 임무를 수행중인 기사도 예외는 없다. 그레고리만 남아 준기사들과 함께 아젠카를 지키도록. 너, 당장 모든 기사에게 명령을 하달해라. 너는 대신전에 지원을 요청하고, 넌 총행정관에게…….”

바론이 급박하게 명령을 쏟아냈다. 에키네시아는 완전히 핏기가 가신 얼굴로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씨이, 어떤 놈들이 가짜보고 자꾸 나라는 거야? 난 여기 얌전히 있었는데. 무지 착하게 지냈단 말이야! 주인아, 저것들 죽여버리러 가자! 얼른! 기분 나빠! 죽이고 싶어!]

마검이 억울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에키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고, 조용히 대답했다.

“그래, 죽여버려야겠어.”

[……어? 어어? 우와, 진짜? 우와아, 우와! 주인아, 진짜지?]

마검의 음성은 신이 나서 폴짝폴짝거리는 것처럼 들렸다. 반면 에키는 죽이겠다는 말을 내뱉어 놓고도 차분했다. 정확히는 감정이 극에 이르러 도리어 차가워졌다.

‘유리엔.’

가족들. 유리엔. 로아즈 참사. 용암이 속에서 끓어올랐다. 주위 풍경이 잘 인식되지 않았다. 그녀에게서 표정이 사라졌다.

‘……가짜 마검.’

그녀는 달리는 사람들 사이를 가로 질러 정신없이 명을 내리고 있는 바론에게로 다가갔다.

“저도 가겠습니다.”

침착한 음성이었다. 그녀를 본 바론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자네 심정은 안다. 하지만 이건 스콰이어가 낄 만한 상황이 아니야. 아젠카에서 대기하도록.”

그 말을 끝으로 그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고 근처에 있어서 빠르게 당도한 기사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에키는 딱 한 호흡 동안 고민했다. 무의미한 고민이었다. 뒷수습할 미래 따위는 현재를 잃을 위기에서는 고려할 가치가 없었다.

“부단장님.”

바론이 그녀를 흘깃 돌아보았다. 에키는 허리춤의 아메시스트에 손을 올렸다.

“스콰이어가 아니라 기사라면 참가 가능한가요?”

당연한 소리였고, 헛소리였다. 마음이 급한 바론은 성가시다는 낯을 감추지 않았다. 창천기사단장이, 그의 스콰이어였던 유리엔이 마검에 물들어 악마가 되었다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책임자인 그가 스콰이어라지만 1학년짜리 사관생도를 상대해 줄 틈은 없었다.

“에키네시아 생도, 미안하지만 지금 자네를 상대해 줄 여유는 없…….”

에키가 아메시스트를 뽑았다. 스릉, 하고 칼날이 드러나자 근처에 있던 사무관들이 당황하고 기사들이 긴장했다. 바론은 말을 멈추고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충격을 심하게 받았나보군. 바라하, 에키네시아 생도를 부탁하지.”

“……예, 로드.”

성녀를 데려온 후 굳은 얼굴로 서 있던 바라하가 에키에게로 다가왔다. 에키는 다가오는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바라하는 그녀가 지금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차렸다.

그는 그녀가 마검의 주인인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단장이 마검에 물들었다느니 하는 저 충격적인 소식의 배경에 무언가 음모가 있을 거라는 짐작도 했다. 그래서 그는 로드의 명을 무시하고 걸음을 멈췄다.

실내에서 불 리가 없는 바람이 일었다. 급격한 마나의 이동이 불러일으키는 현상이었다. 바라하를 부른 후 돌아서던 바론이 정지했다. 난데 없이 검을 뽑아든 스콰이어를 경계하던 기사들이 얼어붙었다.

사늘한 칼날 위에 보랏빛 마나가 불꽃처럼 어룽거렸다. 그것은 누가 봐도 의심할 수 없을 만큼 뚜렷하고 선명한 검기였다. 얇은 원피스 차림의 앳된 사관생도는 검기로 감싸인 검을 들고 무표정하게 말했다.

“스콰이어 에키네시아 로아즈, 지금 이 자리에서 기사 서임을 요청합니다.”

시간이 정지한 것 같은 정적과 차마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는 경악이 그녀 주위로 퍼져나갔다. 누군가의 손에서 미끄러진 종이뭉치가 흩어지고, 누군가가 떨어뜨린 검이 바닥을 굴렀다. 바론은 홉뜬 눈으로 고작 스무 살에 불과한 그녀를 응시했다.

유리엔 드 하르덴 키리에가 스물세 살에 마스터가 되면서 세웠던 최연소 마스터 기록이 갱신되는 순간이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