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꽃-152화 (152/211)

검을 든 꽃 152화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되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점점 되돌아오는 게 느려지고 있었다. 성검에는 더 이상 하얀 검기가 맺히지 않았다. 마나 코어가 부서질 듯 아팠다. 머릿속으로 살의에 찬 메아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한계.

유리엔은 덩굴을 뜯어내던 손을 멈췄다. 그리고 랑기오사를 들어 제 어깨를 내리쳤다.

하얀 검은 가시덩굴들과 함께 주인의 왼팔을 잘라냈다. 그러나 순식간에 다시 돋아난 덩굴들이 잘린 팔과 어깨를 이었다. 가시덩굴은 쏟아지는 그의 피를 고스란히 흡수하며 더 수가 늘어났다.

잘라내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제.

유리엔은 흘러내린 제 머리카락이 완연한 검은색인 것을 보았다.

“랑.”

[…….]

무언가를 예감한 성검은 대답하지 않았다. 기둥에 기댄 채 유리엔이 성검을 놓았다. 챙그랑. 피로 얼룩진 랑기오사가 로비의 대리석 바닥 위를 굴렀다.

“너를…… 쥐고 있, 으면. 나를 막기가…… 힘, 들 테니.”

살의에 물들어 무고한 자들을 학살하면 성검을 쥘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스스로의 의지로 저지르는 살육이 아니기 때문에 죽이자마자 바로 자격을 잃진 않는다.

본인의 의지가 아님을 감안해도 감정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수준, 즉 랑기오사 기준에서의 악행이 될 때까지는 오너 자격이 유지될 터였다.

랑기오사를 든 자신이 살의에 물들어 날뛸 경우 대량의 피해가 날지도 모른다. 희생자가 생긴 이후에 자격을 잃으면 늦는다.

유리엔은 지독한 고통 속에서 테레사와 창천기사들, 현자들이 그를 막을 수 있을지를 고려했다. 성검을 버려야 가능성이 올라간다는 건 확실했다.

“희생자를, 내지 않……으려면.”

[……무슨 뜻인지 알겠다. 더는 말하지 마라. 네 결정이 옳다.]

“미안, 하다…….”

[마검의 주인이라면 너를 되돌릴 수 있겠지. 아무도 네게 죽지 않으면 나중에 다시 내 주인이 될 수도 있다. 알겠느냐? 그러니 미치지 마라.]

머리카락이 거의 다 물들었다. 눈동자에도 푸른 부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성검의 음성이 점점 빨라졌다.

[마검의 주인은 6년이 걸렸지만, 그녀는 진짜 마검이 상대였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했었다. 그에 비해 이건 고작해야 바르데르기오사의 모조품에 지나지 않고, 너는 미숙하다 해도 제니스다. 버틸 수 있을 거다. 이런 것에 미쳐버리면 네게 실망할 테다.]

유리엔의 호흡이 어지럽게 허공에 흩어졌다. 성검은 한참 남은 할 말들을 모조리 삼키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주인, 기다리고 있겠다.]

유리엔은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성검을 포기하기 위해 입술을 뗐다. 그러나 바로 선언하지는 못했다.

성검을 포기한다는 것, 기오사를 각성시킨 오너가 아니게 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다른 사실이 뇌리를 채웠다.

그는 가시덩굴 사이로 보이는 왼쪽 손목 안쪽에 시선을 주었다. 에키네시아가 만들었던 꽃잎 같은 자국이 아직 남아 있었다.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안쪽의 어둠에 선명하게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몸을 떨며 오열하는 얼굴. 그리고 눈부시게 웃는 얼굴.

에키네시아. 에키.

눈을 감았다 뜨는 짧은 순간에 전신을 헤집는 고통보다 강렬한 감정이 몸 안쪽을 울리고 지나갔다.

유리엔은 호흡을 멈췄다. 그리고 속삭이듯 선언했다.

“랑기오사에…… 대한, 모든 권한을, 포기한다.”

손바닥에서 문양이 녹아내리며 사라졌다. 성검의 음성이 끊겼다. 유리엔의 눈이 감겼다.

다시 떠진 그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푸른빛이 남아 있지 않았다.

* * *

에키는 뜬눈으로 밤을 샜다.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 그녀는 해가 뜨자마자 대충 옷을 걸치고 침실에서 나왔다.

던컨이 그늘에 숨어 소리 없이 그녀를 뒤따라왔다. 창천기사단 본부에 도착한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명령했다.

“여기서 기다려. 들어가면 들킬 테니.”

“예, 아가씨.”

“……아가씨?”

“호칭이 마음에 안 드시면 다른 것으로…….”

“됐어, 호칭 따윈 마음대로 해.”

마음이 급했다. 그녀는 아무렇게나 답하고는 본부에 들어섰다. 사무관들이 출근하기엔 아직 한참 이른 시간이었는데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자들이 보였다. 에키는 그들 사이를 가로질러 부단장실로 향했다.

‘유리엔이 무슨 생각으로 내게 이 일들을 숨겼는지는 알겠어. 하지만 이대로 기다릴 수는 없어.’

그는 상태가 좋지 않은 그녀가 무리하지 않길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가족들의 생사도 불분명하고, 유리엔과 창천이 마검에 대한 의혹에 휩싸인 상황을 알게 된 이상 도저히 가만 있을 수는 없었다.

로아즈로 가야 했다. 격리된 지역에 그냥 가서는 들여보내 주지 않을 테니, 스콰이어의 자격으로. 그러려면 단장 대리인 부기사단장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다.

2층 계단을 오르던 그녀는 아래로 뛰어내려 오던 바라하 이슬라프와 마주쳤다. 노란 눈동자가 그녀를 담더니 그 자리에 뚝 굳어버렸다.

“에키.”

“안녕하세요, 선배님.”

에키는 빠르게 인사하고 그를 지나쳐 올라가려 했다. 지나치는 그녀의 앞을 바라하가 가로막았다.

“지금은 올라가지 마.”

“네?”

바라하는 무어라 말을 꺼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그는 마른세수를 하더니 뛰어내리다시피 계단을 내려갔다.

“최대한 빨리 모셔 올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마!”

에키는 순식간에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모셔 온다니, 누굴? 이상하게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그녀는 바라하의 말을 듣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

창천기사단 본부 2층에는 건물 밖으로 툭 튀어나와 천장이 트여 있는 테라스 비슷한 공간이 있었다. 테라스라기엔 지나치게 넓은 그 공간은 보통은 굳게 닫혀 있곤 했다.

그 안쪽은 비상시에 사용하는 이동 마법 도착지였다. 창천기사단으로 이동 마법을 사용할 경우 무조건 저 안에 도착하게 된다.

지금, 늘 닫혀 있던 그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근처는 아수라장이었다.

“붕대! 붕대 더 가져와!”

“이 수준의 부상자를 이동 마법으로 보내다니, 죽이려고 작정했답니까?”

“거기서는 죽는 걸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을 테니 도박이라도 걸어본 거 아니겠나! 붕대는? 없으면 옷이라도 찢어!”

“가져왔습니다!”

“지혈제도 가져와! 제기랄, 피가 안 멈춰!”

“이 이상한 덩굴은 대체 뭐야? 저주 마법?”

“성녀님은 언제 오시는 거냐!”

“바라하가 아까 출발했습니다!”

“이 꼬마, 숨은 쉬고 있는 건가?”

“성녀님 오실 때까지 못 버티는 거 아니야?”

사람들이 미친 듯이 드나들며 고함을 질러댔다. 피 냄새가 계단참에 있는 그녀에게까지 짙게 풍겨왔다. 에키는 홀린 듯이 그리로 다가갔다.

원을 그리며 모여 있는 사람들 사이로 벌건 피가 흘렀다. 그 안쪽에, 이동 마법의 도착지에 쓰러져 있는 소년이 보였다. 그녀는 한눈에 그를 알아보았다.

“란셀!”

에키가 비명처럼 소년의 이름을 불렀다. 주위에 몰려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허겁지겁 소년에게 달려드는 그녀를 막아선 것은 부기사단장 바론 틸리어스였다.

“기다려라, 금방 성녀가…….”

에키는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그를 피해 지나쳤다. 바론은 고작 사관생도를 자신이 잡지 못한 것에 순간 놀랐다. 그녀는 사람들을 밀치고 소년 곁에 주저앉았다.

“란…….”

[어어, 얘 네 동생 맞지? 심하다. 야, 그래도 아직 안 죽었어.]

끔찍한 모습에 말문이 막힌 그녀에게 마검이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란셀리드의 전신은 피투성이였다. 한쪽 눈과 배를 감싸고 있던 붕대는 피에 젖어 제 기능을 잃고 있었다. 배에 있는 길게 벌어진 상처에 검은 가시덩굴 같은 게 들러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헐거워진 눈가의 붕대 너머로는 파헤쳐진 상처가 드러났다.

에키의 머릿속이 하얗게 날아갔다. 지워버린 과거 속의 악몽이 떠오르며 손발이 떨려왔다. 제 손에 죽었던 피에 젖은 동생의 모습이 눈앞의 피투성이 동생과 겹쳐졌다. 덜덜 떨리는 그녀의 어깨를 어느새 다가온 바론이 움켜쥐었다.

“이 소년, 자네 동생이었지? 곧 성녀가 온다. 괜찮을 거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어떻게든 피를 멎게 해보려고 노력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눈은 이동 마법의 충격으로 상처가 터진 것이라 그나마 지혈제를 들이부으니 멈췄지만, 배의 부상은 엉긴 가시덩굴 때문인지 지혈이 되질 않았다. 울컥거리며 흐르는 피가 바닥에 웅덩이를 만들었다.

억겁 같은 시간이었다. 요란한 발소리와 함께 바라하가 뛰어올라왔다. 그는 한 팔에 샤이를 안고 있었다.

“성녀님!”

사람들이 분분이 비켜섰다. 샤이는 희게 질린 얼굴로 난장판과 피투성이 소년을 보았다. 소녀는 바라하가 내려놓자마자 달려가 소년의 앞에 꿇어앉았다. 바닥에 고인 피에 흰 옷이 붉게 젖어들었다.

뒤늦게 쫓아온 신관 아론은 피범벅인 소년을 보고 헛숨을 들이켰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아는 샤이는 엘기오사부터 뽑아냈다.

은빛 단검이 란셀리드의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소녀는 양손으로 단검을 움켜쥐고 눈을 감았다. 부드러운 연둣빛의 덩굴이 돋아나 소년의 전신을 감쌌다. 자잘한 상처가 눈에 보이는 속도로 아물며 하얀 꽃이 피어났다.

검은 가시덩굴은 바로 수그러들지 않고 버텼다. 그것이 버틸수록 샤이에게서 점점 핏기가 가셨다.

“윽…….”

소녀는 엘기오사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샤이의 온몸이 땀으로 흥건해질 때쯤, 가시덩굴이 억눌려 부스러지며 꽃이 눈부시게 빛났다. 그리고 그 모든 현상이 빛이 되어 사라졌다.

“됐어요, 이…….”

검을 거둔 샤이가 말을 끝맺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기다리던 신관이 황급히 다가와 옆으로 쓰러지는 성녀를 받아 안았다. 탈진으로 인한 기절이었다.

에키는 그 광경을 숨도 쉬지 못하고 지켜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란셀리드가 완치된 것을 확인해 주자 비로소 숨이 쉬어졌다. 검은 가시덩굴도, 배의 커다란 자상도 모조리 사라졌다. 다만 소년의 텅 빈 한쪽 눈은 되돌아오지 못했다.

“일단 병실로 데려가라.”

바론의 명에 준기사 하나가 란셀리드를 안아 올렸다. 사람들은 그제야 소년의 아래에 깔려 있던 편지봉투를 발견했다. 이동 마법으로 소년을 보내면서 함께 보낸 편지인 모양이었다.

사무관 하나가 피로 흠뻑 젖은 봉투를 들어 찢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뜯은 다음 바론에게 건넸다. 바론은 봉투에서 편지를 꺼내 펼쳤다.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은 그로서는 상상해 본 적조차 없던 일이었다. 첫 줄만 읽었는데도 뇌가 마비되는 듯했다. 너무 황당하고, 믿기지가 않아서, 바론은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그것을 읽었다.

“창천기사단장이 마검의 악마가 되었다고……?”

란셀리드를 업은 준기사를 따라 병실로 가려던 에키의 걸음이 그 자리에 굳었다. 그녀는 커다랗게 뜬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