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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151화 (151/211)

검을 든 꽃 151화

유리엔은 실피드를 타고 영주관 건물 안에 들어섰다. 현관이 완전히 부서져 있었다. 데릭의 검기가 긁고 지나간 자국이 짐승이 할퀸 것처럼 남아 있는 로비에서 그는 말을 세웠다.

“어서 와라.”

익숙한 음성이 중앙계단 위에서 들려왔다. 카르엠이 입가에 미소를 매단 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유리엔은 이를 악물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형님.”

“네가 화를 내는 건 오랜만에 보는구나. 초연하게 구는 네놈의 얼굴이 참 보기 싫었는데, 지금 네 표정은 마음에 들어.”

“란셀리드 로아즈는 어디 있습니까.”

“사실 이건 네가 아니라 그 계집애를 노린 계획이었는데 말이다. 스콰이어랍시고 어딜 가든 데리고 다니더니 왜 이번에는 데리고 오지 않았지?”

“대답해라, 카르엠 드 하르덴 키리에. 란셀리드 로아즈는 어디에 있나.”

하대하는 유리엔의 음성이 무섭도록 가라앉아 있었다. 카르엠은 눈을 둥그렇게 뜨더니 요란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핫, 하, 네가 드디어 그 가식적인 형님 대우를 집어치우는구나! 빌어먹을 새끼. 나는 네 형이 되고 싶었던 적이 한 번도 없어. 친애하는 동생아, 나는 늘, 형님 소리를 하는 네 혀를 뽑아버리고 싶었단다.”

유리엔은 흠칫 놀랐다. 란셀리드의 혼이 보일까 싶어서 떴던 정안에 비치는 카르엠의 모습이 지독하게 끔찍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새카맣고 새빨간 악의. 끈적할 정도로 짙고, 눈이 시릴 정도로 강렬하며, 섬뜩할 정도로 어두운.

“네놈은 태어나지 않았어야 했다. 그럼 모든 게 정상이었을 테니까. 어마마마는 살아계셨을 거고, 아바마마는 자애로웠을 것이며, 나는 자랑스러운 아들이었겠지. 우리는 완벽한 가족이었다. 네놈만 태어나지 않았다면!”

언제나 카르엠이 유리엔을 향할 때면 악의에 가득 차 있었으나, 지금 그의 정안에 비치는 것은 평소 이상이었다. 여태까지의 악의는 나름 자제한 결과였다는 듯이.

카르엠의 표정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나는 말이다, 줄곧 네가 망가지는 걸 보고 싶었다. 네가 패배하고, 꺾이고, 손가락질당하고, 절망하여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꼴이 보고 싶었단 말이다! 내 발 아래에서!”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소리를 지른 카르엠이 돌연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는 나긋해진 음성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솔직히 제위 따윈 필요 없다.”

“……!”

“친애하는 동생아, 이건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비밀이란다. 나는, 딱히 황제가 되고 싶지 않아. 나보다는 크루에 형님이 훨씬 제위에 어울리지, 안 그러냐?”

유리엔은 저도 모르게 커진 눈으로 카르엠을 응시했다. 제위가 필요 없다고. 크루엔 황태자가 황제가 되는 게 낫다니.

‘정말로 오직…… 내가 고통받는 것을 원해서 이런 짓들을 벌인단 말인가?’

가족이 아니라 여긴 지 오래 되었음에도, 그 깨달음은 제법 쓰라렸다. 차라리 권력에 눈이 멀어 이런 짓들을 벌였다는 게 낫겠다. 이렇게까지 악의를 받을 정도면 자신에게도 무언가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아바마마께서는 어떻게든 내게 제국을 주고 싶어 하시지만 말이다. 불쌍한 아버지. 너 때문에 미쳐서 늘 어리석은 선택을 하곤 하시지.”

카르엠은 몸을 움츠리더니 키득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흘러내린 은발 사이로 보이는 녹색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어미는 죽이고, 아비와 친형은 전부 미치게 만든 소감이 어떠냐, 유리엔? 너는 사람이 아니야. 저주지.”

유리엔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면서 쓰린 깨달음과 목 안쪽을 꽉 막으며 차오르는 것들을 삼켰다.

‘내가 어떻게 했더라도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어릴 때에는 무엇이든 했다. 주어지는 의무와 쏟아지는 지적들을 모두 소화해 냈다.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 한 점의 흠도 없는 사람이 되려 노력했다.

사랑받고 싶어서 웃어 보이기도 했고 슬픔을 알아줄까 싶어서 울어 보이기도 했다. 조금 나이를 먹은 후엔 제가 형보다 뛰어난 것이 문제인가 싶어서 실력을 감춰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열여섯에 아젠카로 쫓겨났다. 쫓겨날 때 알았다. 만약 자신에게 꼬투리가 잡힐 만한 점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그것을 핑계로 평생 유폐되거나 죽을 수도 있었다는 것을.

유리엔은 그제야 그간 해온 모든 노력이 무의미했다는 것을 깨달았었다. 처음부터 아비와 형제에게 그는 가족도 혈육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깨닫고 나서도 혈육에 대한 모든 기대를 버리는 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아젠카에서 사람들과 만나고 정을 붙이고 있을 곳을 찾아낸 후에야 포기할 수 있었다.

그가 노력할 장소는 황실이 아니라 아젠카였다. 아끼는 사람들은 창천기사단에 있었다. 사랑하고 헌신할 사람은 에키네시아 로아즈였다.

그는 이제 혈육에게 애정을 갈구하던 소년이 아니라 자아를 구축한 성인이었다. 새삼스럽게 흔들리지는 않는다. 반론하지도 않았다. 무의미한 짓이었으므로.

태어난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자에게 무슨 말인들 먹힐까. 가치 없는 자에게는 줄 대답도, 낭비할 감정도 없었다. 유리엔은 낯을 가다듬고 무표정하게 말했다.

“란셀리드 로아즈는 어디에 있나. 답하지 않으면 검을 들겠다.”

그 물음은 카르엠이 쏟아낸 것들에 대한 완전한 무시였다. 카르엠의 눈에서 불이 튀었다. 그는 아래에 있는 유리엔에게까지 들릴 정도로 까드득 하고 이를 갈더니,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네놈의 이런 점이, 끔찍하게 싫어.”

유리엔은 말없이 랑기오사를 뽑아들었다. 카르엠이 삐걱거리는 톱니바퀴 같은 웃음소리를 냈다.

“란셀리드 로아즈가 어디 있냐고 했지?”

그가 품에서 마도구를 꺼내더니 부러뜨렸다. 그러자 공간이 일렁이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동 마법으로 카르엠의 앞에 나타났다.

마도구를 보고 반사적으로 대비 자세를 취했던 유리엔은 후드를 쓴 사람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아무것도 덮어쓰지 않고 있는 소년을 보았다.

시체처럼 늘어진 란셀리드 로아즈의 한쪽 눈은 대강 붕대로 감싸여 있었다. 그 붕대는 흰색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붉었다.

유리엔은 순간적으로 계산을 했다. 계단 위로 뛰어올라 저 자들을 베고 란셀리드를 구해내는 것과, 저 자들이 소년의 목을 그어버리는 것 중 어느 쪽이 빠를까. 그는 성검을 움켜쥔 채 움직이지 못했다.

“살리고 싶다면, 살려봐라, 유리엔. 발악해 봐.”

카르엠이 몹시 즐겁다는 투로 말하며 손짓했다. 후드를 쓴 자들이 소년을 벽에 기대 세웠다. 그리고 그 중 하나가 마법진이 새겨진 장갑을 낀 채 길쭉한 상자에서 한 자루의 검을 꺼냈다.

그 검은 알려진 마검 바르데르기오사의 외형과 거의 똑같은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자가 그것을 란셀리드의 배에 찔러 넣었다. 소년은 검에 꿰인 채 벽에 박혔다.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도 고통으로 소년의 전신이 경련했다. 선혈이 쏟아지며 상처 부위에서부터 검은 얼룩이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저 미친 새끼가!]

성검이 드물게 욕설을 내뱉었다.

“발악하고 실패해라. 네가 이름도 명예도 목숨도 모조리 네 손으로 진창에 처박아 버리길 빈다. 내 저주받은 동생아.”

카르엠은 충혈된 눈으로 유리엔을 노려보았다. 그의 뒤로 다가온 후드를 쓴 자들이 이동 마법을 사용했다. 빛에 휩싸인 그들은 금세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유리엔은 그들이 사라지자마자 움직였다. 계단을 나는 듯이 뛰어올라 란셀리드의 곁에 서서 제 망토 자락을 움켜쥐었다.

소년은 부들부들 떨며 입에서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컥, 컥 하고 목 막힌 신음이 들려왔다. 유리엔은 망토를 손에 둘둘 감고 소년의 몸을 꿰뚫은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안 돼, 놔라!]

그가 검을 쥐는 순간 무언가를 직감한 성검이 고함을 질렀다. 바르데르기오사와 똑같이 생긴 그 ‘마검’의 손잡이에서 검은 가시덩굴 같은 것들이 투두둑 돋아났다. 그 덩굴이 유리엔의 손을 타고 오르며 팔목을 감았다. 가시가 손을 감싼 망토를 뚫고 피부를 찔러 들어왔다.

유리엔은 검을 놓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그것을 뽑아내며 쓰러지는 소년을 받쳐 안았다. 곧바로 소년을 눕히고 랑기오사를 꺼냈다.

손과 팔목에 완전히 엉켜든 가시덩굴 사이로 피가 흘렀다. 손을 놓아도 ‘마검’은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손끝에서부터 검은 얼룩이 전염병처럼 퍼져나갔다. 유리엔은 물들어가는 손을 란셀리드의 가슴께에 올리고 다른 손에 쥔 랑기오사로 바닥을 짚었다.

그사이 란셀리드의 갈색 머리카락은 마검을 쥐고 물들어버린 악마들처럼 새카맣게 변해가고 있었다. 검에 찔린 배에서는 울컥울컥 더운 피가 쏟아졌다. 유리엔은 숨 돌릴 틈도 없이 소년을 물들인 살의부터 흡수했다.

[이 가시덩굴은…… 마법의 일종 같은데. 저주 마법인가? 망할, 판별이 힘들군. 처음 보는 형식이다.]

성검이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그사이 유리엔의 어깨 부근까지 검은 얼룩이 번졌다. 가시덩굴이 계속해서 돋아나며 팔을 얽어매었다. 덩굴 사이로 흐른 피가 ‘마검’의 손잡이를 새빨갛게 물들였다.

유리엔은 란셀리드에게서 흡수한 마검의 마나를 랑기오사에게로 흘려 보냈다. 성검은 입을 다물고 그것을 변환하기 시작했다. 하얀 칼날에 백색 검기가 조금씩 생성되었다.

이미 여러 차례 정화를 한 후였다. 게다가 팔을 휘감은 가시덩굴로부터 지독한 통증이 치밀고 있었다. 쉽지가 않았다. 그래도 해내야 했으며, 해낼 수 있었다.

유리엔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는 고통으로 흐려진 눈으로 검은빛이 빠져나간 란셀리드를 내려다보았다.

소년의 배에서 끊임없이 피가 쏟아졌다. 빨리 지혈을 하고 치료하지 않으면 죽는다. 그런 생각을 하던 그의 상체가 덜컥 흔들렸다.

[주인!]

팔뚝을 지나 어깨를 휘감은 가시덩굴이 목덜미로 파고들었다. 유리엔의 입술을 타고 피가 주륵 넘쳤다. 깜박이는 눈꺼풀 아래로 하늘색 눈동자에 언뜻 검은빛이 비쳤다.

유리엔은 고개를 흔들고 상처가 날 정도로 강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시야의 초점이 흐려졌다 잡히기를 반복했다.

[넘치기 직전이다. 망할, 괜찮으냐?]

성검이 급하게 말했다. 유리엔은 성검에 가득 맺힌 백색 검기를 아무렇게나 허공에 뿌렸다. 벽이 박살이 나며 먼지구름이 안개처럼 솟았다. 그는 성검을 든 팔로 소년을 들쳐 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인?]

랑기오사의 음성에 불안이 깃들었다. 유리엔은 대답하지 못했다. 목덜미 안쪽으로 파고드는 가시덩굴을 막을 여력이 없었다. 몸을 거쳐가는 살의로부터 정신을 유지하기도 벅찼다.

너무 많았고, 끝이 보이지 않았다. 란셀리드에게서 흡수한 살의는 조금 전 대부분 털어냈으나 ‘마검’에서 쏟아지는 살의는 폭포처럼 마나 코어를 물들이고 있었다.

일순 명치 안쪽이 찢어질 것 같은 통증이 일었다. 시야가 점멸했다. 깜박일 때마다 눈동자가 검어졌다가 아슬아슬하게 푸른빛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그 상태로 간신히 계단을 내려가 로비에 세워두었던 실피드에게로 다가갔다. 오래 함께한 명마는 기묘한 주인의 상태에 바짝 긴장했으나 달아나지는 않았다. 유리엔은 피투성이가 된 란셀리드를 말 등에 올리고 말의 엉덩이를 쳤다.

실피드가 울음소리를 내며 영주관 밖으로 달려 나갔다. 유리엔은 로비의 기둥에 기대 섰다. 그사이 성검에 또 한가득 하얀 검기가 맺혔다. 그는 그것을 다시 허공에 뿌렸다. 로비의 바닥이 길게 패이며 갈라졌다.

[이건 끝이 없다, 안 돼. 빨리 저것을 떼어내야 한다! 이대로는……!]

덩굴 때문에 ‘마검’을 놓을 수가 없었다. 유리엔은 성검을 쥔 손으로 어깨의 가시덩굴을 붙잡았다. 상처가 생기는 것을 무시하고 마구잡이로 그것을 뜯어내었으나 그가 뜯어 내는 속도보다 덩굴이 늘어나는 속도가 더 빨랐다.

목까지 완전히 휘감은 가시덩굴이 숨을 죄어 왔다. 일부가 아래로 돋아나며 심장 근처로 파고들었다.

독이 번져든다. 검은 가시덩굴이 피를 먹고 번들거리며 기괴한 빛을 냈다. 늘어진 은빛 머리카락의 끝이 물감에 젖듯 검게 물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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