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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150화 (150/211)

검을 든 꽃 150화

로아즈 토벌작전은 7월 19일 동틀 무렵에 시작되었다.

창천기사 열 명과 기오사 오너 테레사가 제국군 소대와 함께 맡은 구역으로 진입했다. 유리엔과 2황자가 포함된 소대에는 디아상트 공작가의 마법사에 7현자와 마탑주까지, 아홉 명이나 되는 고위 마법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마검의 저주를 받은 자들을 상대한다는 말에 바짝 긴장해 있던 소대원들은 동행하는 마법사들과 창천기사단장을 보고 완전히 안도한 낯이 되었다.

기사 데릭은 영주관 근처에서 배회하고 있었다. 유리엔이 그를 상대하는 것은 싱거울 정도로 간단하게 끝났다. 그는 심지어 데릭을 생포하는 것까지 성공했다.

하얗게 빛나는 검이 휘둘러져 검은 기운을 뿜어대는 데릭의 검을 쳐냈다. 검을 잃은 데릭은 짐승처럼 날뛰다가 도주를 시도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리엔에게 제압당했다.

“저게 성검 랑기오사가 아니면 기오사 전설을 다시 써야겠는데.”

“탐지 마법을 쓰는 마나가 아깝구만. 이런 뻔한 일을.”

“마법검 알라다트기오사라면 우리가 못 알아볼 리가 없고, 솜니움기오사의 환상이라면 저런 위력을 보이진 못하지. 다만 저게 형태가 자유롭게 변화한다는 팔란타기오사라면 알아보기 어렵긴 하겠군.”

“어이고, 기오사에 대해 잘 모르나 보오. 팔란타기오사의 별칭이 뭔지도 모르시오?”

“무슨 소리요, 기오사에 관심이 없는 마법사가 어딨다고! 공명검이잖소!”

“별칭은 아는데 그 별칭이 무슨 이유로 붙었는지는 싹 까먹은 거 아니요? 나이는 못 속이지.”

“안 까먹었소이다! 주인의 상태에 따라 지속적으로 공명음을 내고 형태가 변화하기 때문에 공명검이라 불리는 것 아니오! 고정된 형태가 없는 팔란타기오사를 구별하는 방법이 그 공명음이잖소!”

“그래서 지금 저 검이 공명음을 내고 있소?”

“……크흠, 흠.”

“에잉, 남부 왕국 마탑주도 있는 자리에서 무식한 소릴. 현자 망신은 혼자 다 시키는구려.”

“아, 거, 잠깐 깜박할 수도 있지!”

여섯 현자와 마탑주는 아주 쉽게 랑기오사를 인정했다. 애초에 가짜라는 주장 자체가 무리수였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남은 현자 헤레이스 리어폴드와 디아상트의 마법사 역시 다른 현자들과 남부 왕국의 마탑주 앞에서 뻔한 진실을 부정하지 못했다. 만장일치로 성검의 인증이 이루어졌다.

토벌은 순조로웠다. 해가 지기 전에 물든 자들이 모두 사살되거나 생포되었다. 실제 마검에 물든 악마도 아니고 마검의 마나를 약간 주입받았을 뿐인 사람들은 창천기사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숨어 있던 시민들도 마스터급 기사들의 넓은 감각 덕분에 쉽사리 발견되었다. 그러나 생존자의 수는 몹시 적었다.

이 사태를 일으킨 물건은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수색하기로 결정되었다.

마법사들은 온 김에 그 물건까지 확인하고 돌아가길 원했으나 2황자는 그 요청을 반기지 않았다. 그러나 마탑주는 타국인이라는 명분으로 돌려보낼 수 있어도 제국 마탑의 현자들을 돌려보낼 명분은 없었다.

마탑주는 창천기사단장에게 빚을 지운 것에 만족하고 아쉽게 귀환했다. 현자들은 모두 남았다. 마석 목걸이들을 발견하면 즉시 조사를 시작할 기세였다.

캠프로 돌아온 유리엔은 검게 물들어 포박당한 채 울부짖는 사람들을 응시했다.

에키네시아는 결절 안에서 물든 사람들을 살의를 흡수해 되돌렸었다. 그는 그녀처럼 살의를 흡수하고도 인내하지는 못해도, 정화할 수는 있었다.

“잠시, 시도해 볼 것이 있다.”

마법사들과 모여든 제국군들, 2황자가 지켜보는 가운데서 유리엔은 살의 흡수를 시도했다. 에키에게 들은 마검의 마나를 흡수했던 과정을 되새겼다. 그녀보다는 한참 미숙하긴 해도 그 역시 제니스였기에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성공할 수 있었다.

에키에게 썼었던 봉인구는 일부러 사용하지 않았다. 그것을 쓰면 더 쉬웠겠지만,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는 듯 대비해 둔 물건은 의심을 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살의의 정화라니…….”

“이런 방식으로 랑기오사를 사용하는 건 최초 아니오?”

현자들은 유리엔이 일으킨 기적에 완전히 흥분했다. 이미 증명했지만, 이로서 그가 랑기오사의 주인임은 더욱 확고해진 셈이었다. 그것은 성검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의 발견이기도 했다.

안타까운 점은 유리엔이 되돌린 사람들이 에키가 경험했던 대로 모조리 미쳐 있었다는 것이었다. 마법사들이 치유마법을 사용하고 군의관이 살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대부분 몇 시간 되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유일하게 숨이 유지된 것은 로아즈의 수석기사였던 데릭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근본적으로 신체 능력이 달라서 버티는 듯했다.

마법사들은 살의에 물든 자들과 성검의 기능에 대해 밤을 샐 기세로 갑론을박을 벌였다. 제국군은 소대 단위로 지켜본 창천기사들의 활약과 유리엔에 대한 이야기로 술렁이고 있었다.

모든 상황이 예상한 것과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카르엠은 주위를 신경 쓰지 않고 토론을 벌이는 현자들과, 선망의 시선을 받고 있는 유리엔을 지켜보다가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고 제 막사 안에 틀어박혔다.

그리고 해가 저물었다.

유리엔은 막사 안의 침상에 기대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성검이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처음이 아니니 좀 낫긴 하다만, 역시 마검의 마나에 파마의 성질을 깃들게 하는 건 피곤한 작업이다.]

“무리하게 만들었군. 미안하다, 랑.”

[아니, 네 선택은 정의로웠다. 할 수 있는데도 저들을 물든 채 내버려 두는 건 옳지 않아. 그들이 살아남을 확률이 낮다 하더라도 말이다. 나는 너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든다.]

만족스럽게 말하던 성검이 조금 다른 어투로 덧붙였다.

[문제는 네가 마검의 마나를 변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 모두가 알게 되었다는 건데. 이래도 괜찮은 건가?]

“그 점은 괜찮다. 소용없는 함정임을 깨닫고 시도 자체를 그만두는 편이 나으니까.”

[하긴 그도 그렇군. 나로서도 그 짓을 더 할 일은 되도록 없었으면 한다. 어차피 저자들의 죄는 곧 밝혀질 테고. 조사 과정이 지난할지라도, 결국 창천이 아니라 2황자 측이 로아즈 참사의 배후라는 것이 밝혀질 거다. 그렇게 되면 마검의 주인이 찾아냈던 증거들도 쓸 수 있겠지.]

느긋하게 말하던 성검은 유리엔이 제 말을 듣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깊게 가라앉은 눈을 허공에 두고 턱을 굳히고 있었다.

[주인, 왜 표정이 어둡지? 상황은 네 계획보다도 순조롭지 않나.]

“란셀리드 로아즈가 없다.”

[마검의 주인의 동생 말이냐?]

“오늘 영주관 근처를 돌아볼 때 주의 깊게 살펴보았지만, 시신조차 보이지 않아.”

[시신이 다른 곳에 있거나, 살아서 어딘가에 숨어 있는 상태거나, 아니면…….]

성검은 유리엔과 동일한 가정을 떠올리고 말끝을 흐렸다. 무어라 말하려던 유리엔이 문득 입을 다물었다. 그는 막사의 입구에 시선을 주었다.

“창천기사단장님께 온 전갈입니다.”

입구로 다가온 그림자가 나직이 고하더니 무언가를 막사 입구에 내려놓고 사라졌다. 유리엔은 일어나 막사 앞에 놓인 것을 보았다. 작은 상자였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바로 상자를 열어보았다.

“멍하니 뭐 하냐, 율?”

이번 임무는 위험해서 스콰이어나 생도들 대신 준기사들이 기사들의 보조를 맡고 있었다. 유리엔의 보조를 담당하게 된 준기사 디트리히가 보급품을 들고 돌아오다가 막사 입구에 선 유리엔을 향해 물었다. 유리엔이 고개를 들었다.

“디트. 실피드는?”

“아까 마구를 벗겨서 쉬게 해놓았는데. ……너, 안색이 왜 그래?”

유리엔이 들고 있던 상자의 뚜껑을 닫더니 디트리히의 어깨를 움켜쥐고 막사 안으로 쑤셔 넣었다. 디트리히가 황당하다는 듯 그를 보았다.

“야,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디트리히 사루아.”

유리엔은 막사 바깥의 동태를 잠시 살피며 막사의 입구를 닫았다. 디트리히를 향해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지금 즉시 현자 칼리스토 팽과 테레사 경에게 가서 그들과 함께 은밀히 캠프를 벗어나라. 누구에게도 캠프를 나가는 것을 들켜서는 안 된다. 벗어난 후에는 등불을 끈 채 조용히 이동해서 영주관 근처로 와라. 영주관에 들어가지는 말고 근처에서 대기하도록.”

“뭐? 갑자기 왜…….”

“그리고, 두 시간 안에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유리엔이 한 번 더 주위의 기척을 살피더니 뚜껑을 닫은 상자를 디트리히에게 내밀었다. 디트리히는 얼떨떨하게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들과 함께 이 상자를 열고, 알아서 판단하고 행동해라. 그 전까지는 열지 마라.”

“……대체 무슨 일입니까, 단장?”

“시간이 없다. 너를 믿겠다.”

유리엔은 그 말을 남긴 후에 후드가 달린 망토를 들고 훌쩍 막사 밖으로 나가버렸다. 디트리히는 그가 애마인 실피드를 풀어내서 캠프 밖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멀거니 그것을 보던 디트리히는 곧 유리엔의 명대로 움직였다. 또라이라고 욕하기도 하고 답답한 놈 취급 하기도 하고 친구라는 핑계로 편히 대하곤 하지만, 그는 유리엔이 단장으로서 내린 명을 어겨본 적이 없었다. 디트리히는 내심 유리엔을 존경했고, 그의 판단을 신뢰했다.

그는 우선 테레사 폰 프랑 알마리를 찾아갔다. 막사에서 휴식 중이던 테레사는 유리엔의 명을 전달받자마자 망설임 없이 바로 준비를 했다.

다음으로 디트리히는 중앙의 지휘 막사로 가서 현자 칼리스토 팽을 찾았다. 7인의 현자가 모두 모여 토론 중이었기 때문에 의심받지 않고 그를 불러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디트리히는 고민하다가 칼리스토에게 주어진 막사에 실수인 척 횃불을 떨궜다. 제 막사에 불이 붙었다는 소식에 칼리스토가 급히 뛰쳐나와 마법으로 불을 껐다.

“제 실수로 막사가 손상되었으니, 제 막사를 드리고 저는 새로 막사를 치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 현자님.”

칼리스토는 디트리히의 말을 듣고 막사 안에서 짐을 챙겨 나왔다.

디트리히는 다른 이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 이르자마자 방향을 틀어 테레사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칼리스토에게도 유리엔의 명을 전달한 다음, 제 말에 노인을 태워 테레사와 함께 이동했다. 칼리스토는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창천기사단장이 이렇게 하라고 했단 말이냐?”

“네, 현자님. 저도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들을 가로질러 성 외곽을 반 바퀴 돌아서 성의 서문을 통과했다. 달빛도 적은 밤에 텅 빈 도시를 가로지르는 건 유쾌하지 못한 경험이었다. 토벌이 막 끝난 터라 시신을 제대로 치우지 못해 시체의 악취가 코를 찔렀다.

디트리히는 높은 쇠울타리에 둘러 싸인 영주관이 보이자 말을 멈췄다. 테레사가 근처에 있는 문이 부서진 집을 가리켰다. 그들은 그 안으로 들어가 회중시계를 들여다보며 시간을 쟀다.

시간은 지루하고 초조하게 흘렀다. 유리엔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열어봐라, 디트리히.”

테레사의 말에 디트리히가 한숨을 쉬며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짧은 쪽지와 함께 투명한 유리병이 들어 있었다. 유리병 안에 꽉 찬 액체 속에 동그란 무언가가 보였다.

등불을 켜지 않은 상태라 어두워서 그게 무엇인지 잘 구분이 가지 않았다. 쪽지의 글씨도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마스터인 테레사는 스며드는 어슴푸레한 달빛만으로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

테레사가 입을 틀어막았다. 디트리히는 빛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망토를 뒤집어쓰고 등불을 켜 유리병을 비췄다. 칼리스토가 궁금한지 목을 빼고 디트리히 쪽을 보았다.

“흐억!”

“뭐, 뭐야. 뭔데 그러나, 자네?”

소스라치게 놀란 디트리히의 손에서 떨어진 유리병이 마룻바닥을 데굴데굴 굴러 벽에 부딪혔다. 흘러내린 망토 너머로 등불 빛이 병에 가 닿았다. 현자는 비로소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알아차렸다.

그것은 사람의 안구였다. 눈동자가 보라색인.

테레사는 새파랗게 변한 얼굴로 쪽지를 집어 들어 읽었다.

-소년을 살리고 싶으면 지금 즉시 혼자서 영주관으로 와라. 늦으면 남은 눈을, 다른 자가 알게 되면 시신을 보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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