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49화
남자가 새파랗게 질려서는 더듬더듬 중얼거렸다.
에키가 정신을 차림과 동시에 그녀의 머리칼과 눈동자를 채워나가던 검은색도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광경을 보고도 이상하다고 생각할지언정 바로 마검을 연상하지는 못할 텐데, 남자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들켰다. 그 판단과 동시에 에키는 남자의 발목을 걸어 넘어뜨리고 그의 위에 올라탔다. 맨손에 확 피어 오른 보랏빛이 칼날을 이루었다. 그녀는 그 마나의 칼날을 남자의 목 위에 지그시 눌렀다.
“방금 뭐라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눈치 빠른 남자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에키는 가늘게 뜬 눈으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못 본 걸로 하라는 건 무리겠지?”
“아뇨, 전 못 봤습니다.”
“넌 쐐기의 간부잖아. 네가 봤다는 건 곧 쐐기에 알려진다는 거고. 물론 죽으면 아무한테도 말을 못 하겠지만.”
[어, 주인아, 그건 내가 할 말인데……. 그치, 역시 죽이는 게 깔끔하지? 빨리 죽이자! 허연 검 말고 나로! 나 꺼내줘!]
“저, 정말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거짓말, 다 봤잖아.”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사락거리는 분홍색 머리카락에 감싸인 얼굴은 여리고 아름다웠으나, 그것을 보는 남자는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네가 생각해 봐도 널 죽이는 게 낫지 않니? 쐐기가 그다지 선량한 집단도 아니고 말이야. 너도 죽을 죄 꽤나 많이 짓고 살았겠지.”
가벼운 어조로 말하며 그녀가 마나의 칼날을 꾸욱 눌러 왔다. 목의 피부가 베여 붉은 피가 새어 나왔다. 남자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제, 제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고아였는데 절 거둬 키운 것이 쐐기라 따르는 것일 뿐, 사실 저는…….”
그는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며 애원했다. 그러면서 오른손을 휘둘렀다. 어느 순간 꺼내진 단검이 그 손에 들려 있었다. 회색 마나가 깃든 단검이 소리 없이 에키의 뒷목을 노렸다.
에키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팔을 들어 그것을 막지도 않았다. 그녀의 목 부근에 짧은 찰나 보라색 마나가 반짝이고, 검기가 실린 단검은 허공에 멈추었다. 마나 실드가 순식간에 생겨났다 사라지며 공격을 막았다.
“어머.”
남자는 그녀가 무슨 방법으로 제 검을 막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에키가 눈꼬리를 휘었다.
“연기가 제법이네. 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어.”
죽음을 직감한 남자의 표정이 허옇게 질렸다가, 급격히 차분해졌다. 그가 조금 전 애원하던 것과 전혀 다른 어투로 입을 열었다.
“저를 살려두시는 게 좀 더 유용하지 않을까요.”
“응?”
“로아즈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제 덕에 알게 되신 것 아닙니까. 원하시는 정보를 지속적으로 제공할 테니, 저를 살려서 곁에 두시지요.”
“결국 쐐기와 정보를 주고받겠단 소리네.”
“쐐기와 연락하는 내역을 당신에게 모두 공개하겠습니다.”
“그걸 내가 어떻게 믿니?”
“정보가 새 걸 판단하면 그때 죽이시지요.”
“새고 나면 늦잖아. 나는 너를 죽이고 쐐기에서 직접 정보를 받아도 되는데?”
할 말을 잃은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곧 그는 허탈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믿어달라고 해봤자, 못 믿으시겠죠. 어쩔 수 없군요. 죽이십시오.”
그 말과 동시에 늘어뜨려진 그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에키는 그 손을 번개같이 붙잡아 바닥에 꽉 밀어붙였다.
“미리 알려 두겠는데, 나한테 독을 쓰는 건 자살행위야. 아, 어차피 죽을 상황이니 상관없나? 근데 너 정말 연기 잘하네. 쐐기 같은 것 말고 연극배우를 하지 그랬어?”
포기한 척하고 손끝의 장치로 독을 뿌리려던 남자는 괴물을 보는 듯한 눈으로 에키를 바라보았다. 이 암기를 알아채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사실 에키는 회귀 이전 쐐기를 쓸다시피 할 때 그들의 장치를 겪어본 덕에 아는 것이지만, 남자가 보기엔 그녀가 신 내지는 악마처럼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꼬리뼈까지 돋았다.
[야, 근데 너 왜 죽이겠다면서 살의가 없어? 이상하네?]
‘죽일 생각이 없거든.’
에키는 마검에게 속으로만 대답하며 남자를 응시했다. 이자를 죽여 입을 막는 건 간단했다. 하지만 그랜마의 오른팔을 죽였다간 쐐기와 적대하게 될 것이다.
회귀 이전에도 이 자는 죽이지 않았었다. 이 남자를 죽이기 전에 그랜마가 나와 항복을 해 버렸으니까. 그랜마가 숨겨둔 손자만큼이나 아끼는 게 이 남자였다.
‘지금 쐐기와 적대해선 안 돼. 정보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로아즈가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유리엔이 지금 무슨 상황에 있는 건지, 빌어먹을 황제와 2황자와 디아상트 공작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 건지, 그녀는 알아야 했다.
한 번 폭주할 뻔하고 나니 머리가 급격히 냉정해졌다. 그녀는 당장 필요한 쪽을 선택했다.
“일단 봐주겠어. 정보가 필요한 건 사실이니.”
그녀가 마나를 거두고 남자의 위에서 일어났다. 남자의 눈이 약간 커졌다. 진심으로 놀란 듯했다. 에키는 삐딱하게 서서 남자를 향해 말했다.
“너, 이름이 뭐야.”
“핸드입니다.”
“쐐기에서 쓰는 별명 말고, 본명.”
“…….”
“본명, 말해.”
“……던컨입니다. 고아라서 성은 없습니다.”
“좋아, 던컨, 일어나.”
던컨이 일어나며 약간 비틀거렸다. 에키는 그보다 한 뼘은 작았다. 일어선 그를 그녀가 빤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망가려 하면 죽일 거야.”
“예.”
“쐐기가 내가 마검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돼도 죽어.”
“……예.”
“네가 스스로 말한 대로 쓸모가 있는지 지켜보겠어.”
그녀가 진심으로 죽일 생각이 없다는 것을 남자는 알아채지 못했다. 만 단위의 학살을 저지른 경험이 있고 습관처럼 마검의 살의를 통제하고 있는 에키가 보이는 살기는 소름끼치게 섬뜩했다. 살기에 예민하고 익숙한 던컨은 그것을 더 적나라하게 감지했다.
정말 마검의 주인인가. 대체 어떻게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걸까. 몇백 년 전 마검을 쥐고도 악마가 되지 않았다던 검사에 대한 전설이 사실이었던가. 함부로 물을 수 없는 질문들이 입안에 차올랐다. 던컨의 이마에 식은땀이 한 방울 흘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안 죽이는 거야? 치, 좋다 말았네. 다시 생각해 봐, 주인아. 쟤가 떠들고 다니면 큰일 나는 거 아니야? 죽이자니깐?]
에키는 칭얼거리는 마검의 말을 무시하고 돌아서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팔짱을 낀 그녀가 그를 향해 턱짓했다.
“그럼 우선 로아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아는 걸 전부 말해 봐. 창천이 출동했다는 이야기도.”
* * *
7월 18일.
로아즈에 도착한 창천기사단 토벌대는 캠프를 설치했다. 로아즈 시의 외성(外城)이 보이는 들판으로, 제국군 캠프와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두 캠프의 중간 지점, 외성의 정문과 마주보는 곳에 공동 지휘막사가 있었다.
유리엔은 지휘막사에서 제국군의 사령관인 2황자 카르엠과 마주했다.
“내부에 마검의 저주를 받은 자들……. ‘악마’들이 배회하고 있다. 정문을 막아둬서 밖으로 나오지는 못하고 있는데, 그중에 마스터급이 하나 있어서 얼마나 버틸지 알 수 없는 상황이지.”
의자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턱을 괸 카르엠이 빙긋 웃었다.
“최우선 목표는 악마 토벌, 다음으로 생존자 구출과 마검 수색이다. 마검의 저주가 담긴 물건도 수색해야겠지. 아마도 이것과 비슷한 형태일 거다.”
카르엠이 탁자에 종이를 펼쳐놓았다. 투명한 보석이 달린 목걸이가 그려져 있었다. 에키가 2황자에게 받아서 니콜에게 조사를 맡겼던 바로 그 목걸이의 형태였다.
그것을 응시하던 유리엔이 카르엠에게 시선을 주었다. 서늘한 눈이었다.
“이것을 만든 게 창천기사단이라 주장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아, 어디까지나 의혹이다. 열심히 수색해서 찾아내 봐. 찾아내서 조사하면 의혹을 벗을 수도 있잖아?”
카르엠이 어깨를 으쓱이더니 양피지를 한 장 꺼내서 펼쳤다. 시내 지도였다.
“창천은 인원이 적으니 수색이 어렵겠지. 창천기사 한 명마다 제국군 소대를 붙여주겠다. 담당할 구역은 미리 배치해 두었으니 각자 담당 구역 내의 토벌, 구조, 수색을 수행하도록.”
듣기에는 지원해 주는 것 같아도, 실상은 기사 하나당 소대 하나씩 감시인원 겸 짐 덩어리가 붙고 구역별로 격리되는 작전이었다. 유리엔이 고개를 저었다.
“악마 토벌이 최우선이니, 토벌을 기사단이 우선 진행하고 이후에 제국군을 투입하여 수색과 구조를 하는 게 낫습니다. 시가지 같은 장애물이 많은 곳에서 군대로 강력한 개인을 상대하는 건 현명하지 못한 선택입니다.”
“악마들이 숨어버리면 어떻게 찾아 내려고? 그리고 생존자가 있으면 구출을 위해 인원이 필요하잖나.”
“마검의 영향이라면 살의에 물든 자들이고, 살의에 물든 자들이라면 살인할 기회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숙주의 부상이 심각한 상태가 아니라면 숨지 않을 겁니다.”
“부상이 심각하면 숨는다는 소리군. 그러다 놓치지 않으려면 제국군이 포위망을 구축하는 게 낫다.”
“제국군으로 포위망을 구축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물든 자들은 기사도 아닌 군인 몇으로 막을 수준이 아닙니다. 희생자만 늘릴 뿐입니다.”
“유리엔. 나는 네가 좀 더 똑똑할 줄 알았는데 말이다.”
카르엠이 비웃음을 띠었다.
“창천 단독 작전은 무슨 이유를 들어도 허용할 수 없다. 너희가 로아즈 참사의 배후일지도 모르는데 단독으로 로아즈 시내를 돌아다니게 하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그는 더 이상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 유리엔을 향해 지도를 밀어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천기사 하나당 제국군 소대 하나. 그리고 너는 마스터급이라는 그 악마를 찾아 토벌하도록. 네 소대에는 나와 현자 헤레이스 리어폴드가 포함된다. 네 성검이 진짜인지 확인해야 하니까.”
어느 정도 예상한 결과였기에 유리엔은 당황하지는 않았다. 대신 준비해 둔 말을 꺼냈다.
“그리 하겠습니다. 다만 성검의 증명을 위해서 더 공정한 증인이 필요합니다.”
“헤레이스 리어폴드는 현자 칭호를 받은 마탑의 7인 중 하나다. 그런데도 못 믿겠단 소리냐?”
“제국 측에서 아젠카의 검증을 믿지 못하겠다고 한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게다가 증인 하나로는 부족하지 않습니까?”
“그럼, 좋다. 디아상트 가의 마법사가 동행했으니 그도 함께 가지. 네 약혼녀의 가문 소속이니 믿을 수 있겠지?”
카르엠이 선심 쓰듯 말했다. 유리엔이 고개를 저었다.
“다른 증인을 요청했습니다. 형님도 납득하실 인선입니다.”
“아젠카의 사람이라면, 대신전의 대신관일지라도 창천과 연계되어 있으니 믿을 수…….”
반박하던 카르엠의 말끝이 흐려졌다. 밖이 소란했다. 카르엠이 막사 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유리엔이 덤덤히 설명했다.
“마침 도착한 모양이군요. 제국 마탑 7현자 전원과, 남부 왕국 마탑의 탑주입니다.”
“……뭐라고?”
예상치 못한 사태에 카르엠의 안색이 급변했다.
현자 하나가 카르엠의 수족임을 깨달은 즉시 유리엔은 나머지 현자 전체에게 요청했다. 니콜의 스승인 현자 칼리스토 팽은 제자를 위해 곧바로 합류했다. 나머지 다섯을 움직이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유리엔은 그들에게 기오사 시리즈가 보관되어 있는 기오사 홀의 한시적 개방을 약속했다. 성검이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해 주는 간단한 일의 대가로 기오사 홀에 들어가 볼 수 있다니, 탐구심에 목숨도 종종 거는 현자들로서는 거부하기 어려운 유혹이었다.
아메시스트를 제작할 때 마법세공을 주문했었던 남부 왕국 마탑의 경우, 유리엔에게 빚이 있었다. 단장이 된 직후 토벌해 인간의 땅으로 되돌렸던 죽음의 숲이 있던 곳이 남부 앙투아르 왕국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토벌에 함께했던 앙투아르 마탑주는 유리엔의 검이 성검 랑기오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마탑주는 그가 어이없는 의혹에 휩싸였다는 소식에 흔쾌히 증명 요청을 수락했다.
마탑은 마법에 평생을 바친 자들이 모이는 집단이다. 현자라는 칭호는 그중에서도 마탑 내부의 까다로운 기준을 충족시킨 소수에게만 주어지는 것으로, 개별적인 마법 이론을 정립할 수 있는 수준의 거장들을 일컬었다.
제국의 마탑보다 수준이 떨어진다 해도 한 나라의 마탑 수좌에 앉아 있는 남부 마탑주 역시 제국의 현자들에게 밀리지 않는 권위자였다. 7 현자 중 하나라는 이유로 헤레이스 리어폴드를 내세웠던 카르엠으로서는 거부할 수 없는 증인들이었다.
창천기사단장은 창백해진 2황자를 향해 태연히 말했다.
“증인은 많을수록 좋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