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48화
유리엔은 에키네시아가 찾아낸 노트에 있던 문구를 떠올렸다. ‘마검에서 추출한 마나를 이용하면, 또 다른 마검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저들이 이용하고 있는 살의가 담긴 마석들.
“아마 내가 살의에 물들 수밖에 없는 상황을 유도하겠지. 물들어 살인을 저지르면 더 이상 성검을 쥘 수 없게 될 테니까.”
[그걸 알면서도 가겠다는 뜻이냐?]
“살의를 정화하는 것은 한 번 해보았던 일 아닌가. 그들은 너의 이런 기능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내가 제니스의 초입에 접어든 사실도 알지 못하고 있겠지.”
[그 짓을 또 하자는 말이로군.]
“미안하다, 랑.”
[됐다. 그 편이 깔끔하긴 할 터이니. 네가 내 주인이며, 내가 랑기오사임을 증명하기에도 괜찮은 방법이고. 마검의 주인은 싫어할 것 같지만.]
“그녀에겐 비밀로 할 예정이다.”
유리엔은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에키네시아가 쉬고 있을 사택을 향해.
“결절에서 무리하는 바람에 가뜩이나 지쳐 있는데, 이 일에 대해 알게 되면 더 무리하려 들겠지.”
[로아즈의 참사는? 그것도 알리지 않을 작정인가?]
“란셀리드 로아즈의 행방이 명확해지면, 그때에. 관련된 일은 내가 처리하면 되니……. 적어도 몸이 회복될 때까지만이라도 그녀가 마음 편히 쉬었으면 좋겠다.”
[……그래, 일단은 숨기는 게 좋겠지.]
성검은 다른 이유에서 에키네시아에게 당분간 이 사실을 알리지 않는 것을 찬성했다.
그녀의 자제심을 알지만, 가문의 터전이 그들로 인해 또 몰살당하고 남동생마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면 과연 그 자제심이 버텨줄까.
랑기오사는 굳이 그 점에 대해서 언급하지는 않았다. 성검은 제 주인이 함정에 대비하고 모함에 반박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 * *
바로 다음날인 7월 17일, 창천기사단장 유리엔 드 하르덴 키리에와 기오사 오너 테레사 폰 프랑 알마리, 정식 기사 열 명이 로아즈를 향해 출발했다. 부기사단장 바론 틸리어스는 아젠카에 남았다.
에키는 출정 소식 자체를 듣지 못했다. 그녀가 들은 것은 유리엔이 기사단 쪽에 밀린 일을 처리하느라 한동안 사택에 오지 못하게 되었다는 전갈뿐이었다. 그가 그동안 일도 미뤄두고 그녀 곁을 지켰다는 걸 아는 에키는 그러려니 했다.
유리엔이 사택에 고용해 둔 하녀들은 솜씨가 좋고 입이 무거운 자들이었다. 에키는 침실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은 채 정성 어린 시중을 받았다. 그녀는 먹고 자고 쉬는 것만 반복하며 회복에 집중했다.
그렇게 약 이틀. 이제 거의 회복되었으니 내일은 기숙사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과, 이틀이나 유리엔을 보지 못했더니 꽤 서운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7월 19일 저녁.
쐐기가 그녀를 찾아왔다.
에키는 침대에 푹신한 베개를 몇 개나 겹쳐놓고 기대서 한가롭게 수를 놓고 있었다. 멍하니 있자니 심심해서 하녀에게 수틀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 참이었다.
귀족 영애의 교양으로 배웠던 자수였지만 말 그대로 교양이라,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손수건에 약간의 수를 놓는 정도였다. 그나마도 바늘을 쥐는 게 15년만이어서 예전보다 더 서툴렀다.
‘예쁘게 만들어지면 그에게 선물하려 했는데.’
그녀는 엉성하기 그지없는 손수건을 들어 올려 살펴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이건.”
[주인아, 너 진짜 못한다. 포기해.]
“그 정도는 아니거든? 예전엔 잘했었어. 칭찬도 들었다고.”
[그럼 뭐 해, 지금은 못하는 거 맞잖아.]
“좀 하다 보면 감이 돌아올 거야.”
항변하던 에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창가에 막 도달한 검은 그림자가 창을 두드리려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고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가느스름하게 뜬 눈으로 창 너머의 정원수에 매달린 남자를 바라보던 그녀가 피식 웃었다.
“열어주는 거 귀찮으니까 알아서 열고 들어와. 그쯤은 쉽겠지?”
남자는 창문을 두드리려던 자세로 잠시 굳어 있더니 곧 능숙하게 손을 움직였다. 잠금쇠를 따고 소리 없이 방에 착지한 남자가 침대로부터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늘씬한 체격에 단출한 가죽옷을 입은 남자였다. 평범한 외모, 짧은 밤색 머리카락, 짙은 갈색 눈동자. 특이한 점이라곤 없는, 흔하디흔한 인상이었다. 그럼에도 에키가 그를 기억하고 알아본 건 그의 정체 때문이었다.
“그랜마의 오른팔이 여기까지 무슨 일이야?”
쐐기의 유일한 마스터. 마스터쯤 되면 어느 나라에 가도 신분이 어떻건 간에 귀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으니, 마스터의 실력을 가지고서도 뒷골목 조직에 속해 있다는 건 정말 특이한 경우였다.
남자는 묘한 눈으로 에키를 훑었다. 하늘하늘한 잠옷에 숄을 걸치고 푹신하고 커다란 침대에 기대 있는 여자. 흘러내린 분홍색 머리카락이나 수틀을 잡고 있는 손목이나 가느다란 것이 온실에서 자란 꽃 같았다.
하지만 남자는 그녀와 검을 맞대었다가 손아귀가 터졌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괴물. 진짜 괴물. 절대 적대해서는 안 될 수준의 괴물. 그 점은 그랜마가 강조하지 않아도 남자 스스로 체감했다. 남자는 맹수와 거리를 유지하듯 달아날 거리를 유지하고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맡긴 조사의 결과를 가지고 왔습니다.”
“콜본? 딱 한 달쯤 걸렸네.”
태양 축제 즈음, 근위기사단장과 디아상트 공작이 콜본에 방문했던 날짜와 동선에 대해 맡겼던 조사였다. 고개를 기울인 그녀가 덧붙여 물었다.
“그런데 왜 당신쯤 되는 사람이 직접 왔어? 전에는 다른 조직원을 통해서 전달하더니.”
“의뢰대로 콜본을 조사하다가, 쉽사리 조사하기 어려운 부분이 생겨서 제가 직접 온 겁니다.”
“뭔데?”
남자가 품에서 양피지 두루마리를 꺼내더니 그녀의 침대 끝에 내려놓고는 도로 거리를 벌렸다. 에키는 손을 뻗기가 귀찮아 마나로 그것을 들어 올려 가져왔다. 남자는 그 광경을 보고 숨을 삼키고는 반 걸음 더 물러났다.
“……디아상트 공작은 온천, 근위기사단장은 사냥터. 각자 다른 목적으로 들리고 콜본에 가는 날짜도 다릅니다. 그런데 그들이 늘 공통적으로 들리는 곳이 있습니다.”
“그게 어디야?”
“세공품 공방입니다. 주문제작만 받는다는.”
에키는 두루마리의 봉인을 뜯으며 남자를 흘깃 바라보았다. 남자가 말을 이었다.
“그 외에도 그들이 공통적으로 방문하는 장소가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런 곳들은 다른 사람들도 많이 드나드는데다 조사해 보니 별다른 게 없었습니다.”
“세공품 공방만 수상하다는 거네.”
“잠입이 불가능했습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뚫을 수 없는 수준의 마법진이 구축되어 있어서. 세공은 보석이나 귀금속을 사용하니 보안이 철저한 게 보통이긴 하지만, 거긴 비정상적인 수준입니다.”
“그래서?”
“따라서 더 이상 조사하는 게 불가능합니다. 지금까지 조사한 내용은 그 두루마리에 모두 모아 놓았습니다. 이 점을 알려드리러 왔습니다.”
남자는 긴장한 음성으로 말하며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저자가 왜 저러나 싶어 의아해하는 에키에게 마검이 종알거렸다.
[야, 쟤네 너한테 되게 쫄았나 봐. 못 한다고 하면 네가 죽일 거 같아서 저러는가 본데?]
‘그렇게까지 겁을 줬었나.’
검 한 자루 들고 조직의 전투원 대부분을 전투불능으로 만들고, 숨겨 놓은 중요 장부와 서류에 인장까지 빼돌리고, 수장 손자의 거주지까지 들먹였던 데다, 맨손으로 창고를 박살 내기까지 해놓고서, 에키는 그런 생각을 했다.
두루마리에는 그간의 조사 결과와 세공품 공방의 위치, 쐐기가 알아낸 공방에 대한 정보가 나열되어 있었다.
수상한 장소의 위치를 알아낸 걸로 충분했다. 어차피 뒷골목 조직에게 그 이상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그녀는 두루마리를 내려다보며 대꾸했다.
“알았어. 그게 다야?”
더 보고할 내용은 없느냐는 뜻으로 한 말이었으나, 남자는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그는 허겁지겁 말을 꺼냈다.
“로, 로아즈 관련 소식을 궁금해하실 것 같아 전력을 다해 조사하는 중입니다! 그 외에도 더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로아즈?”
에키가 두루마리에서 고개를 들고 눈살을 찌푸렸다. 저들이 그녀의 정체를 알아내는 건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었지만, 그래도 대놓고 로아즈 이야기가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건 매우 거슬렸다.
“너희가 로아즈 조사를 전력으로 하고 있다고?”
“예, 격리된 상태라 들어가는 건 무리지만 그래도 근처의 소문을 취합하여…….”
“잠깐만.”
격리? 이상한 표현이 들렸다. 그녀가 서늘하게 남자를 응시했다.
“격리라니?”
“……설마 모르고 계셨습니까?”
남자의 낯에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다. 에키가 침묵하자 그가 말을 덧붙였다.
“로아즈 시에 마검이 나타나서 시 전체가 격리된 상태잖습니까.”
[마검? 나? 난 여기 있는데?]
바르데르기오사가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에키는 순간적으로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 그녀는 두루마리를 내팽개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에게 다가가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 동작이 너무나 빨라서, 남자는 침대에 있던 그녀가 제 코앞으로 순간이동이라도 한 줄 알았다.
“그게 무슨 헛소리지? 당장, 전부, 말해.”
불길이 일 듯 형형해진 보라색 눈동자가 남자를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멱살을 틀어쥔 손이 목덜미에 드리워진 칼날처럼 느껴졌다. 남자는 마른침을 삼키고 급하게 설명했다.
“바, 바르데르기오사가 로아즈에 출몰하여, 마검의 저주가 그 땅에 퍼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7월 15일부터 격리된 상태입니다. 제국군과 창천기사단이 합동작전으로 토벌을 진행한다고…….”
남자의 말이 이어질수록 에키의 낯빛이 희게 질려갔다. 남자는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뒷말을 이었다.
“저희가 조사한 바대로면, 창천기사단이 로아즈 참사의 배후가 아닌지 의심받는 중입니다. 그것을 해명하는 것을 겸해 단장이 직접 로아즈로…….”
“참사……라고.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로아즈 일가는 어떻게 됐어?”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겁에 질린 것 같은 음성과 달리 그녀에게서 새어 나오는 기세는 무시무시했다. 남자가 식은땀을 흘리며 답했다.
“로, 로아즈 시는 거의 전멸이라고 보면 됩니다. 내부에 숨어 있는 생존자가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탈출한 생존자는 없다고 합니다. 로아즈 백작가의 행방은, 구, 궁금해하실 것 같아 이미 조사 중입니다. 아, 아직까지는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눈앞이 아찔해졌다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나가 버리려는 정신을 아슬아슬하게 붙잡고, 그녀는 나직이 물었다.
“……창천이 의심받고 있다는 건 뭐야.”
“이건 저희도 어렵게 입수한 정보입니다만…… 창천기사단이 마검을 이미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숨겼다는 의혹이 있습니다. 이번 참사도 창천이 숨겨뒀던 마검을 잘못 관리해 일어난 실수일 수도 있다더군요. 그것의 해명을 위해 창천기사단장이 직접 로아즈로 갔다고…….”
대체 어떻게? 마검에 관해 말하려면 마검을 가져다 놓은 게 자기들이라고 자백하는 꼴이 되는 게 아니었나? 의혹이라니? 바르데르기오사는 여기에 있는데, 로아즈에 나타났다는 마검은 뭐야? 마검의 저주는 또 무슨 소리고? 거기다 유리엔이, 로아즈로 갔다고?
생각을, 해야 하는데, 머리가 빙글빙글 돌아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어머니. 아버지. 란셀리드, 마검.
설마 또, 간신히 되살렸는데. 어떻게 시간을 돌렸는데. 두 번의 기회는 없다고 했었는데. 이번에도?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면, 나는…….
어지러웠다. 깊고 어두운 것이 뱃속에서부터 기어올라 머리를 녹이려 들었다. 시야가 점멸하며 숨이 뜨거워졌다.
[야! 야! 주인아, 정신 차려! 야! 이씨, 나 아직 자신 없단 말이야!]
마검이 빼액 소리를 질렀다. 에키는 이성이 무너지기 직전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에게 멱살이 잡힌 남자가 기절하기 직전의 몰골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에키는 눈앞을 반쯤 가리고 흘러내린 자신의 머리카락이 검은색인 것을 보았다.
“마, 마, 마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