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47화
황제의 말은 무거웠다.
창천은 기오사 시리즈를 관리하고 수호한다. 기오사의 악용을 방지하기 위해 창천은 어느 국가에도 소속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창천이 직접 기오사를 악용할 수도 있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던 명제에 대한 의심이 퍼져나갔다.
“폐하, 현 창천기사단장은 성검의 주인입니다. 성검 랑기오사는 악행을 저지를 경우 쥘 수 없게 되는 기오사잖습니까. 게다가 이번에 피해를 입은 로아즈 영지는 창천기사단장의 스콰이어가 소속된 곳 아닙니까?”
황태자가 반박했다. 상식적인 말이었으므로 귀족들이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엠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냈다.
“창천기사단장이 정말로 성검의 주인입니까? 지금도?”
“무슨 헛소릴, 불과 얼마 전 태양 축제의 사열식 때도 랑기오사를 보이지 않았나?”
“그게 진짜 랑기오사일까요?”
“……?”
“창천이 보유하고 있는 기오사 중에는 자유자재로 형상을 바꿀 수 있는 기오사나, 환상을 펼쳐 눈을 속이는 힘이 있는 기오사, 오너가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기오사까지 있습니다. 셋 중 어느 기오사든 성검으로 위장하는 게 가능하겠군요.”
“……카르엠. 그게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나?”
“왜 아닐 거라 생각하십니까? 창천기사단장이 ‘성검의 주인’인 편이 창천에 유리하잖습니까. 다른 기오사의 주인인 것보다 훨씬. 지금도 보십시오, 오로지 ‘성검의 주인’이라는 이유로 의심을 거두려 하지 않았습니까?”
카르엠이 비릿한 미소를 띤 채 말했다. 그는 과장스럽게 팔을 벌리며 외쳤다.
“기오사를 관리하는 것도, 기오사 오너를 인증해 주는 것도, 기오사를 공개하는 것도 창천의 마음입니다. 그러니 단장을 보다 유리한 기오사 오너로 꾸미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입니다!”
소리 없는 경악이 대회의실을 채웠다. 황태자마저 말문이 막혔다. 고요 속에서 입을 연 것은 디아상트 공작이었다.
“지나치게 비약이 심합니다, 2황자 전하. 마검이 원인이라서 기오사를 관리하는 창천이 수상하다니요. 게다가 성검이 가짜일 수도 있다니. 전하, 창천을 의심할 만한 증거가 있습니까? 증거도 없는 주장은 선동에 불과합니다.”
공작은 황태자와 제 사위가 될 창천기사단장을 편드는 것처럼 보였다. 실상은 2황자의 발언과 주장도, 디아상트 공작의 반론도 사전에 계획된 것이었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귀족들이 조심스럽게 동의했다.
“마, 맞습니다. 창천이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창천은 세습하지 않는 집단이고, 아젠카 외의 영토를 소유하는 게 금지되어 있으며, 그 구성원들은 대륙 각지에서 온 자들입니다.”
“타국에 간섭하지도, 간섭받지도 않는 것이 창천의 근본 아닙니까? 창천의 근본을 저버리면 기사단의 유지 자체가 불가능할 텐데요.”
“다른 나라에 마검을 일부러 가져다 놓는다니, 창천의 기사들이 그런 명을 따를까요?”
“그들을 뭉치게 하는 건 왕도 아니고 충성심도 아니잖습니까. 창천이라는 집단의 사익을 위해 사명과 명예를 저버리는 일에 기사 전원이 동의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하나하나가 마스터급인 창천 기사들의 혈연이 대륙 각지에 퍼져 있는데, 창천이 마검으로 타국을 농락하려 한다니…….”
“하물며 기오사를 다른 기오사로 위장한다는 건…….”
“황태자 전하의 말씀대로, 피해를 입은 게 창천기사단장의 스콰이어가 소속된 가문인 것도 이상합니다. 왜 일부러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애초에 창천이 그런 짓을 해서 얻는 이득이라는 게 정말로 있긴 합니까?”
“기오사를 관리하는 집단이니까 기오사 관련 사건의 배후라니요. 이건 의심을 위한 의심 같군요. 근거 없는 억측 아닙니까.”
분위기가 서서히 바뀌어가는 가운데, 2황자가 난데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요란한 웃음에 귀족들이 하나 둘 입을 다물었다. 카르엠은 웃음을 갈무리하며 귀족들을 향해 말했다.
“창천은 확실히 왕의 명에 따르는 보통 기사단들처럼, 단장의 명에 무조건 순종하는 기사단은 아니오. 하지만 명분이 있다면 기꺼이 검을 뽑겠지. 마검은 그래서 더욱 훌륭한 명분이오, 기오사잖소.”
“그야 그렇습니다만, 전하…….”
“그러니 창천 전원이 합심할 필요는 없소. 마검에 대해 아는 건 극히 소수의 기사로도 충분할 거요. 예를 들면, 창천기사단장 혼자서…… 마검의 위치를 알면서 숨기고 있다거나.”
반박하려는 귀족의 말을 끊은 카르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내가 미리 대비를 하고 있다지 않았소? 아무런 증거도 없이 창천을 의심하고 대비를 했을 것 같소?”
황족석에서 내려와 대회의실 중앙 원탁에 다가온 그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원탁에 내려놓았다.
“이것이 증거요.”
그것은 투명한 보석이 달린 목걸이였다. 귀족들이 의아하게 그것을 바라보는 가운데, 디아상트 공작이 조용히 물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2황자 전하?”
“이게 바로 ‘마검의 저주’의 정체요.”
귀족들이 얼어붙었다. 카르엠은 유리엔에게 곧잘 지어 보였던 그 기묘한 미소를 띤 채, 나직이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창천에서 만들어낸 물건이기도 하지.”
* * *
전갈을 받자마자 사택에서 단장 집무실로 온 유리엔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황태자가 급하게 보낸 마나 전보였다.
마법사간의 통신을 통해 전해지는 전보는 마법사라는 고급 인력을 쓰기 때문에 길게 보내지 않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 전보가 빽빽하게 다섯 장. 유리엔은 빠르게 그것을 읽었다.
-……2황자가 마석 목걸이를 창천기사단이 마검을 연구하다가 만들어 낸 물건이라며 제시했다. 마탑 소속 현자의 제자이자 로아즈 가문의 후원을 받은 마법사 니콜 시즈튼이 연구하던 물건을 7현자 중 하나가 빼돌렸다는 모양이다.
[예상보다 더한 놈들이구나, 이자들은.]
그와 함께 모든 것을 보고 들은 성검이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유리엔은 무의식적으로 힘 주어 움켜쥐는 바람에 끝부분이 구겨져버린 전보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 현자의 증언과, 니콜 시즈튼과 로아즈의 관계, 너와 로아즈의 관계를 바탕으로, 2황자는 네가 살의를 담은 마석 목걸이를 만들어냈다고 주장했다.
[기가 찰 노릇이군.]
“……덫이다.”
유리엔이 신음을 흘렸다. 마탑의 현자 중에 2황자에게 매수된 자가 있었다니. 니콜 시즈튼은 스승인 현자가 비호하고 있었으나 대회의가 종료된 이후에 구금되었다고 한다. 스승이 있으니 당장 위험하지는 않겠지만 상황이 나쁠 건 확실했다.
마석 목걸이는 에키네시아가 2황자에게 직접 받은 물건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아는 사람은 에키네시아 본인뿐이다. 목걸이와 2황자 간의 관계를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당장 그것을 가져와 제작한 곳을 역추적해 보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으나, 이제 와서 그런 식으로 증명하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2황자 파가 증거를 남겨놓았을 확률도 낮았다.
-로아즈가 마검 사태로 제국군에 의해 격리되는 바람에, 로아즈에 저자들이 마검을 가져다 놓았다는 증명도 어려워졌다. 증인이 될 만한 자들이 이번 사태로 죽었을 확률이 높다. 살아남았어도 2황자파인 제국군이 격리한다는 명분으로 처리했겠지.
‘이렇게 되면 증거를 아무것도 공개할 수가 없다.’
드라코툼바에서 회수한 마석들과 마검을 연구한 노트, 이것 역시 디아상트 공작과의 관계를 증명할 방법이 없다. 결절 때문에 성이 완전히 박살이 나서 단서가 사라졌다.
[내가 성검이 아니라, 다른 기오사라고……. 정말 참신한 발상이다. 칭찬하고 싶을 정도군.]
유리엔이 성검의 주인이기에 그의 발언은 신뢰를 얻는다. 지금까지 그가 쌓아온 행적이 그 점을 뒷받침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2황자가 그 신뢰의 근간을 흔들어 놓았다. 지금 유리엔이 이 노트를 드라코툼바에서 발견했다고 내세웠다간, 되레 창천이 마검을 연구한 증거로 몰릴 뿐이었다.
마찬가지로 유리엔이 마검의 위치를 알고 있다는 사실도 이제 밝힐 수 없다. 창천이 마검을 고의적으로 숨기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어버릴 테니까.
에키네시아의 가문인 로아즈를 참극으로 몰고 갈 리가 없다는 정황은 먹히지 않는다. 2황자가 ‘실수’를 언급했기 때문이다.
마검으로 실험하다가 실수하는 바람에 참사를 불러왔다. 왜 로아즈냐고? 마검으로 실험하던 곳이 로아즈니까. 로아즈의 장녀가 왜 창천기사단장의 스콰이어가 되었겠나. 그게 다 로아즈에서 마검을 실험하기 위해서였다.
‘창천이 로아즈에서 마검으로 실험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워 조사를 하고 있었기에, 제국군이 로아즈 참사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다.’ 이것이 2황자의 주장이었다.
[주인, 나를 증명하는 건 몹시 간단하다. 그걸 저자들이 모를 리가 없어.]
“그래, 모를 리가 없지. 그런데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내세웠다는 건…….”
이 모든 사항은 유리엔이 성검의 주인임을 증명하고, 마검으로 수작을 부린 것은 2황자파와 디아상트 공작이라고 증언한 뒤 조사에 들어가면 해결할 수 있다.
대놓고 조사했다간 증거를 인멸하거나 막다른 길에 몰린 자들이 내전을 일으킬 우려가 있어 은밀히 진행 중이었지만, 이 상황에서는 창천의 혐의를 벗는 게 더 중요했다.
성검을 증명하는 법은 간단하다. 기오사 홀에 보관된 모든 기오사를 공개하고, 유리엔이 가진 것이 환상을 만드는 솜니움기오사나 모양이 변형되는 팔란타기오사, 마법을 쓸 수 있는 알라다트기오사가 아니라 ‘성검 랑기오사’임을 확인시켜 주면 된다.
그러나 2황자가 주장하고 제국 대회의에서 결정한 증명 방법은 그것이 아니었다.
-아젠카에서 진행하는 증명은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다른 방법이 제시되었다. 곧 정식 공문이 도착할 거다.
“로아즈에서 발생한 마검 사태를 창천기사단과 제국군이 함께 해결한다. 그 과정에서 창천기사단장은 기오사를 사용하여, 제국이 보는 앞에서 성검의 주인임을 증명하라…….”
기오사와 관련된 문제로 나설 경우 창천은 단독으로 행동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기오사가 일으키는 사건은 대규모 인원보다는 소수의 특출한 자들, 즉 기오사 오너와 보조할 마스터들 몇 정도만 나서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실력이 부족한 다수는 괜히 발목만 잡는 꼴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각국에서 창천에 토벌을 요청하면 창천은 후방지원 외의 지원을 거부해 왔다. 이번에 제국은 창천의 그 원칙을 깬 합동작전을 원하고 있었다.
제국군의 사령관으로는 2황자가 직접 나선다고 한다. 마탑 대표로는 니콜 시즈튼을 고발했던 현자가, 황태자 측에서는 디아상트 공작이 직접 로아즈까지 와서 유리엔의 성검을 검증한다고.
-내가 직접 가려 했으나, 디아상트 공이 만류하고 나서서 그가 가기로 했다. 우리 측 마법사를 공작과 함께 동행시켰다. 혹 카르엠이 증명 과정에서 불순한 짓을 벌이면 공작이 막아줄 것이다.
디아상트 공작과 2황자의 관계를 모르는 황태자로서는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다. 성검이 혀를 찼다.
[누가 봐도 함정이군.]
“그렇다고 가지 않을 수는 없다.”
마검 토벌에 창천이 나서지 않으면, 의심이 더 커질 것이다. 게다가 제국군과 디아상트 공작이 입맛대로 로아즈 참사의 증거를 조작할 수도 있다. 보다 확실한 증거를 꾸며내어 창천을 참사의 주범으로 몰고 갈지도 모른다.
유리엔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보내는 건 성검에 대한 의혹을 증폭시키는 꼴이 된다. 그러니 그가 직접 가야 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마검의 주인임을 밝힐 수도 없었다.
‘내 스콰이어인 그녀가 마검의 주인이라고 하면, 마찬가지로 창천이 마검의 위치를 숨겼다는 사실을 긍정하는 것이 된다.’
또한 제국은 마검의 주인인 에키네시아의 신병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지워진 시간에도 그러했듯이.
“……가는 수밖에 없다.”
유리엔의 중얼거림에 성검이 한숨을 쉬었다.
[위험하지 않겠나?]
“대충 어떤 함정을 꾸며 뒀을지는 짐작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