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46화
방어막이 버티는 사이 로아즈 백작은 저택의 비밀통로를 열었다. 성 밖으로 연결되는 지하 통로였다. 움직일 수 있는 자들과 기사들이 부상자를 부축하여 그리로 들어갔다.
란셀리드는 저택 뒤뜰에 원을 그렸다. 이동할 사람들 중에 어린아이를 제외하면 멀쩡한 사람은 란셀리드 혼자였다. 소년은 정중앙에 한쪽 팔과 다리가 잘려 아이를 안을 수 없는 경비병을 세우고 남은 손에 마도 구를 쥐어주었다.
“출발하라고 하면, 마도구를 부러뜨리고 열까지 세어라. 이동마법은 마도구를 부러뜨리고 나서 10초 후에 발동되니까.”
“아, 알겠습니다, 도련님.”
경비병은 고통으로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결연히 대답했다. 란셀리드는 기사들이 선별해 내려놓고 간 부상자들을 차례로 좁은 원 안에 세웠다.
대다수가 어린아이를 안거나 업은 상태였다. 다친 곳을 짓눌린 자들이 고통스럽게 신음하고 있었으나 소년은 눈을 딱 감고 가차 없이 그들을 밀어 넣었다.
총 서른여덟 명. 마지막으로 란셀리드가 그들 사이에 달라붙어 섰다. 주위를 살피고, 전원이 붙어선 것을 확인한 뒤 외쳤다.
“출발해라!”
란셀리드의 명에 중앙의 경비병이 마도구를 부러뜨렸다. 웅, 하는 낮은 울림이 들렸다. 그가 떨리는 음성으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최대한 밀착하고, 아이를 꽉 안아라! 10초만 버티면 된다!”
사람들에게 외치던 란셀리드의 눈에 뒤뜰로 난 문이 벌컥 열리는 게 보였다. 문을 연 것은 서너 살짜리 어린아이였다. 아이는 눈물로 흠뻑 젖은 얼굴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둘.”
란셀리드는 문을 잡고 선 아이를 향해 미친 듯이 손짓했다.
“이리 와!”
“셋.”
아이는 겁에 질린 얼굴로 문고리만 붙들었다. 낯선 사람들이 고통에 차 신음을 흘리며 원 속에 모여 있으니 괴상하게 보일 만도 했다.
바닥에 그려진 원을 따라 희미한 빛무리가 일었다. 마법이 준비되고 있었다.
“넷.”
갑자기 무언가 깨어지는 소리가 나며 머리 위에서 푸른 막이 부서져 내렸다. 마침내 데릭이 방어막을 부순 모양이었다. 아이가 놀라 몸을 움츠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란셀리드는 그 찰나에 수만 가지 생각을 했다.
자신은 걷기 힘든 부상자들을 부축해 밀어 넣느라 아이를 안지 않은 빈손이었다. 아이가 선 뒷문까지는 네다섯 걸음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죄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부상자였다.
“다섯.”
멀리서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짐승처럼 그르륵거리는 사람의 괴성과 함께.
‘내가 구해야 해. 시간은 충분해.’
생각과 동시에 소년은 원 밖으로 튀어나갔다.
“여섯.”
아이를 안아 들었다. 급하게 돌아섰다.
“일곱.”
돌아서는 걸음이 너무 급했다. 란셀리드의 발이 뒷문과 뒤뜰 사이에 있는 턱을 비스듬히 밟았다. 비틀거린 그가 넘어졌다.
“여덟.”
란셀리드는 넘어지면서 아이를 원 쪽으로 확 밀쳤다. 제대로 다리가 꼬인 그는 돌바닥에 무릎과 턱을 찧었다. 밀려난 아이는 가장자리에 있던 여자가 잡아당겨 안쪽으로 세웠다. 빛무리가 강해져 주위를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아홉.”
“크윽.”
란셀리드가 신음을 흘리며 비틀비틀 일어났다. 소년이 아직 들어오지 못한 것을 본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도련님!”
“도련님, 빨리……!”
그제야 사태를 알아챈 경비병이 허옇게 질린 낯으로 란셀리드 쪽을 바라보았다. 경비병은 마지막 숫자를 세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은 그가 세지 않아도 흘렀다.
소년의 눈 앞에서 금빛이 솟구치며 원 안의 사람들을 감싸 안았다.
* * *
7월 16일, 아젠카.
유리엔은 에키네시아가 있는 침실 밖의 복도에서 붉은 편지를 읽고 있었다.
-……명하신 대로 로아즈 영지 근처에 잠복하고 있던 정보원들이 군의 움직임을 포착했습니다. 근처의 성에 주둔하던 제국군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후드를 걸친 집단이 성에서 도망치는 시민들을…… 달아나는 시민들은 미처 구하지 못했습니다.
흔들리고 기울어진 필체는 정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여러모로 대비를 하긴 했으나 그것은 전부 로아즈 일가만의 위기를 상정했던 대비라, 도시 하나가 통째로 이렇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유리엔은 핏기가 가신 얼굴로 계속해서 읽어 내려갔다.
-……니콜 시즈튼이 영주관에 설치해 둔 방어막 마법진이 발동될 경우 자신에게 연락이 오도록 예비해 두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근방의 마법 통신이 차단되어 연락이 가지 못하고…… 이는 저희 측 마법사가 로아즈의 마법사가 뿌린 마나 통신을 감지해 알아낸 사실입니다…… 도주 중이던 로아즈의 마법사와 연결된 통신을 통해, 비밀 통로의 출구 위치를 전해 들었습니다. 급히 마차를 준비하여…… 로아즈 백작 부부를 포함한…… 구조에 성공했습니다.
유리엔은 미세하게 안도했다. 일부나마 구조했고, 구조된 사람들 중에 에키네시아의 가족이 있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그 아래에는 다른 글씨로 써진, 다른 자가 올린 보고가 쓰여 있었다.
-별장에 마도구를 사용한 사람들이 도착했습니다. 총 서른여덟 명, 부상자와 어린아이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전에 알려주셨던 로아즈 가문의 사람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정말이지 그녀의 가족다웠다. 가장 안전한 수단은 다른 사람들에게 넘기고 자신들은 비밀 통로로 나가는 선택을 하다니.
‘그래도 로아즈 일가는 전부 구조 되었으니……. 잠깐.’
유리엔은 황급히 편지를 다시 읽었다. 어디에도 없었다. ‘란셀리드 로아즈가 구조되었다’는 보고가. 대신 있는 것은 가장 아래에 덧붙여진 문장이었다.
-란셀리드 로아즈는 행방이 묘연합니다. 마도구로 이동한 자들의 증언을 조합해 보면…….
“……영주관 내에 남겨진 것 같다, 고.”
란셀리드 로아즈는 당연히 가문의 비밀 통로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홀로 남겨졌다면 통로로 이동했을 터다. 창천의 정보원들도 같은 판단을 하고 비밀 통로의 출구에서 대기했으나 소년은 나타나지 않았다.
기다리던 정보원들 중 몇이 통로를 통해 시내로 진입하기로 결정했다는 말로 편지가 끝났다. 유리엔이 고개를 들자 정보원이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보고가 올라오는 사이 새로운 소식이 도착했습니다.”
“말해라.”
“여기 있습니다.”
정보원이 건넨 건 전보였다. 전보를 펼쳐본 유리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로아즈 영지에 마검이 출몰했다고 선포되며 격리 명령이 내려짐. 제국군이 통제에 들어가 접근 불가.
* * *
“로아즈 영지에 괴현상이 발생했답니다.”
“대체 무슨 일이오?”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검게 물든 자들이 눈에 띄는 대로 사람을 죽이려 든다는군요.”
“검게 변해 사람을 죽인다니, 이건…… 전설 속의 마검 같지 않습니까?”
“마검 바르데르기오사가 나타난 겁니까?”
“그런 듯합니다. 그런데 그저 마검이 나타났다기엔 양상이…….”
“하나가 아니랍니다.”
“이건 저주입니다! 마검의 저주!”
“저주라니, 마검에 그런 기능도 있었답니까?”
“일단 뭐든 격리해야 합니다! 저대로 내버려 뒀다간 다른 영지에도 피해가…….”
황궁 대회의실에 모인 대신들과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몇 계단 위의 옥좌에 앉은 황제는 턱을 괸 채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황제보다 한 칸 아래의 황족석에는 황태자와 2황자가 앉아 있었다.
2황자 카르엠이 입을 열었다.
“이미 제국군이 로아즈를 격리하고 있소. 아침에 소식을 듣자마자 명이 하달되었으니, 지금쯤이면 격리가 이루어졌을 것이오.”
“오오…….”
“대단히 빠른 조치로구나. 나는 조금 전에야 소식을 들었는데.”
황태자 크루엔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말에 칼이 달려 있었다. 카르엠이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렸다.
“미리 대비를 하고 있었던 덕분이지요, 형님.”
“……대비라니?”
귀족들이 하나 둘 2황자를 바라보았다. 집중된 시선 속에서 카르엠은 매끄럽게 대꾸했다.
“원래 마검은 소유주를 악마로 만들 뿐, 이번처럼 다수의 사람들을 물들이는 힘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건 사고가 아닙니다. 마검이라는 천재지변이 아니라, 누군가가 만들어낸 인재(人災)라는 뜻입니다.”
대회의실 안에 차가운 정적이 내려 앉았다. 황태자는 보이지 않는 입 안쪽 살을 깨물었다. 이 말을 꺼내는 건 자신이었어야 했다. 선수를 빼앗겼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는 표정이 일그러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말했다.
“이상할 정도로 확신하는 것 같구나.”
“전부터 수상하게 여기던 중이었습니다.”
“무엇을 말이냐?”
“창천기사단 말입니다.”
의외의 말에 낮은 소란이 일었다. 카르엠은 느긋하게 손깍지를 꼈다.
“이번에 엘기오사를 찾아냈으니, 창천기사단에서 행방을 알지 못하는 기오사는 신검 라키아기오사를 제외하면 딱 하나뿐이지요. 마검 바르데르기오사.”
카르엠이 녹색 눈동자로 황태자를 응시했다.
“크루엔 형님. 한 번도 의심해 보신 적 없습니까? 기오사를 수호한다는 사명을 가진 창천기사단이, 정말로 마검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있는 걸까. 혹시 알면서도 감추고 있는 건 아닌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창천이 뭐 하러?”
“생각해 보십시오. 창천은 기오사를 찾는다는 핑계로 순례단을 각국에 보냅니다. 대놓고 타국을 샅샅이 조사하고 다니지요. 각국에선 창천의 조사를 암묵적으로 받아들이고 있고요. 불과 며칠 전에도 창천기사단에서 마검을 핑계로 스베인 백작의 성을 조사하지 않았습니까?”
스베인 백작 개인 소유의 성에 창천기사단장이 조사하러 왔었고, 때마침 결절이 터져서 성이 완전히 박살나다시피 했다는 건 벌써 소문이 파다했다. 귀족들의 술렁임을 바라보며 카르엠이 말을 이었다.
“창천기사단장이 제국의 황족이라 해도 창천은 제국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창천이 멋대로 제국을 조사할 수 있는 건, 기오사라는 명분이 있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신검을 제외한 기오사를 전부 찾아내면 더 이상 그런 핑계로 월권행위를 할 수 없게 됩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래서 지금, 타국에 간섭하기 위해 창천이 기오사를 숨기고 있다는 소리냐? 창천이 그런 짓을 해서 얻는 이득이 뭐가 있나? 망상도 정도껏…….”
“왜 하필 행방불명인 유일한 기오사가 마검입니까? 나타났다 하면 막기 어려운 학살이 벌어져서, 결국 창천이 출동해야만 하는 바르데르기오사 말입니다.”
황태자의 말을 끊은 카르엠이 대회의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숨죽인 정적 속에서 모두가 그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카르엠은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자제하며 계속해서 말했다.
“형님, 진정 모르시겠습니까? 행방을 알 수 없는 마검이 존재함으로 인해 창천기사단이 얻는 이득을. 창천의 무력은 다들 잘 아실 겁니다. 마스터만 수십 명. 그 엄청난 무력을, 누구도 거부하기 어려운 명분으로 휘두를 수 있단 말입니다. 마검이 나타난다면!”
“……창천이 정복 전쟁을 하는 것도 아니고, 설사 마검을 핑계로 출동한다 해도 그들의 행위는 마검 토벌에만 국한된다. 그 이상의 간섭은 대륙 전체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당연한 상식 아니었나?”
“글쎄요. 창천이 마검을 이미 가지고 있다면, 마검이 나타날 곳을 정하는 것도 자유롭겠지요.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혹은 본보기로 처리할 곳에 마검이 출몰하도록 만들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마검 토벌에만 국한되어도 상관이 없지요. 그래도 목적이 달성될 테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궤변이었다. 그러나 아예 일리가 없진 않았다. 귀족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2황자 전하, 그럼 전하께서는 로아즈의 참사 배후에 창천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렇소. 뭐, 의도가 아니라 실수일 수도 있겠다고는 생각하오.”
“실수라니요?”
“마검을, 바르데르기오사를 제 입맛대로 이용하려 하다가 통제를 벗어난 결과물일 수도 있다는 거요. 이번 사태는.”
“설마…….”
그때, 계속 침묵하고 있던 황제가 입을 열어 짧게 말했다.
“기오사를 관리하는 집단이라면, 기오사를 악용하는 집단으로 변질될 수도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