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45화
로아즈 영지는 제국 남부에 있는 자그만 영지였다. 마을이나 성이 몇 개 있었지만, 중심은 백작의 저택이 있는 로아즈 시다.
성으로 둘러싸인 로아즈 시내에서 이변이 시작된 것은 7월 14일 한밤 중이었다.
데릭은 로아즈의 기사들을 이끄는 수석기사였다. 직위에 걸맞게 영지 내에서 가장 뛰어난 검술의 소유자로, 마나 코어를 형성하지 못해 마스터는 못 되었지만 검을 휘두를 때 체내에서 무의식적으로 마나를 활용하는 수준은 되었다.
그날 밤, 집에 돌아간 그는 괴상한 꾸러미를 발견했다. 꾸러미 안에는 검은 보석이 달린 목걸이가 있었다.
기사인 만큼 그는 마검 바르데르기오사의 외형을 얼추 알고 있었다. 그 안에 있는 것이 마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면 결코 건드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조잡한 목걸이였고, 미혼인 데릭의 집에는 여자가 살지 않았다. 누가 왜 이런 목걸이를 보냈지? 데릭은 그런 생각을 하며 무심코 목걸이를 집어 들고 말았다.
데릭의 집 근처에는 로아즈 가의 기사들이 거주하는 저택이 많았다. 몇 명의 사상자가 난 후에 기사들은 이변을 알아차렸다.
대장이 미쳤다.
평소 데릭은 가문의 기사들을 세 명까지 상대할 수 있었다. 다섯 명의 기사가 데릭을 막아섰다. 그들이 모조리 도륙당했을 때, 남은 기사들은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령이 달려갔다. 백작의 저택과 붙어있는 영주관에 도착한 전령은 자신 말고도 이미 다른 전령들이 도착해 있는 것을 보았다. 14일 밤에 로아즈 시내에 뿌려진 검은 목걸이는 하나가 아니었다.
조잡하고 작은 마석이었으나, 그것으로도 치명적이었다. 살의가 전염병처럼 거리를 휩쓸었다. 검게 물든 자가 이웃과 가족에게 칼과 창을, 도끼를, 쇠스랑을, 낫을 겨누었다. 지옥이 도래했다.
* * *
“북부 거리에서 살인마가 날뛰고 있습니다!”
“중앙 시장에 광인이 나타나…….”
“곡물 창고 안에서 계속 비명이 들리는데, 들어간 사람이 아무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3경비대가 광장 근처에 출몰한 미친 자들을 막는 중인데 도저히 막을 수가 없답니다! 증원이 필요합니다!”
15일 새벽, 로아즈 영주관은 아비규환이었다. 자다가 나온 백작 부부는 경비병과 기사들을 전원 호출해 사방으로 보냈다.
그러나 보내진 자들은 돌아오지 못했고, 보고는 계속해서 늘어났다. 밤 중에 시작된 사태는 몇 시간 만에 극단으로 치달아 해가 뜰 무렵에는 손쓸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있었다. 백작은 결단을 내렸다.
종이 울려 퍼졌다. 경비병과 기사들이 목숨 걸고 막아서는 사이 시민들이 대피했다. 영주관이 있는 내성(內城) 안쪽으로 살아남은 자들이 도망쳐 왔다. 모든 경비대와 기사들은 시내를 버리고 내성 성문 쪽으로 물러났다.
버티고 버티다 들어온 마지막 기사들이 성문을 닫았다. 경비대는 반수 이상이 죽었다.
안개 낀 아침이었다. 안개와 성벽 너머로 비명과 괴성이 피 냄새와 함께 넘어왔다. 미처 달아나지 못한 자들이 희생되고 있었다. 내성 안으로 도망쳐 온 사람들은 공터에 빽빽하게 모여 앉아 공포에 떨었다.
로아즈 백작은 영주관 집무실에서 창밖을 보며 신음을 흘렸다. 그의 뒤에서 영주관 소속 마법사 레베카가 위급 시에 사용하는 통신구를 연결하려 낑낑대고 있었다.
“마법 통신은 아직 연결되지 않소?”
“예, 이상합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마치 누가 일부러 차단해 놓은 것처럼…….”
“영주님! 큰일 났습니다!”
“여기서 더 뭐가 일어난단 말이냐?”
“데릭 경이 마스터였습니다! 성문이 부서졌습니다!”
“영주님, 피하십시오! 내부에서도!”
죽일 인간이 사라지자 내성 성문으로 온 데릭이 마스터처럼 검기를 뽑아냈다. 성문이 반으로 갈라졌다. 공터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절규했다.
영주관 안쪽에서도 비명이 울려퍼졌다. 내성 안에서 나타난 검게 물든 인간들 몇이 살육을 벌이기 시작했다. 피비린내와 비명이 하늘로 치솟았다.
“전부 영주관 안으로! 다 들이고 문을 닫아라!”
백작이 고함을 질렀다.
살의. 마검의 마나. 진짜 마검이 아니라 마검의 마나 일부일 뿐이기에 일정 이상의 인원수를 죽이면 살의가 해소되어 멈출 터였다. 시간이 흐르면 숙주의 몸이 한계에 이르러 쓰러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로아즈에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알고 있었더라도 그때까지 막는 것이 불가능하니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막아, 막으라고!”
“무립니다! 힘이, 크아악!”
“아, 아, 선배님, 다이크가, 다이크가……!”
“생각하지 마! 저건 그냥 적이다!”
“버, 버티기가, 도저히, 문을 봉쇄해야 합니다!”
“안 돼! 아직 밖에 사람들이 있다!”
“젠장, 너, 너, 그리고 너, 저놈을 맡아! 너랑 나는 저 자를 막는다! 나머지는……!”
“버려! 기사가 시민을 상대로 막는 것도 못 하나!”
“아아악!”
“대장님!”
“빌어먹을, 나라고, 데릭 이 미친 새끼야!”
“피해!”
내성을 포기한 기사들이 영주관의 정문에 모여들었다. 상대적으로 무력이 부족한 경비병들은 거의 전멸이었다.
옆 사람이 죽는 사이 살아남은 시민들이 영주관 안뜰로 도망쳐 왔다. 막아서던 기사들이 하나 둘 죽어나갔다. 한때 가장 든든한 기사였던 데릭이 동료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아비규환. 저택과 연결된 영주관에 막 도착한 란셀리드는 하얗게 질린 채 그 광경을 보았다. 소년은 가슴께를 더듬었다. 벨벳 케이스가 만져졌다.
〈일종의 보험이다. 에키네시아에게는 알리지 말고 그대만 알고 있어라. 위급 시에 잊지 말고 쓰도록.〉
“아버지!”
“나중에, 란셀! 피해 있어라! 집사, 란셀리드를 데려가게!”
“알겠습니다, 영주님!”
집사가 백작에게 다가가려는 란셀리드를 잡아끌었다. 란셀리드는 버둥거리다가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 제게 마도구가 있어요! 창천기사단장, 님이, 주신 마도구가!”
“……뭐?”
집사가 멈칫하고 백작이 돌아보았다. 란셀리드는 허둥지둥 달려가서 벨벳 케이스를 열어 보였다.
“이동마법이 새겨져 있대요. 발동까지 걸리는 시간은 10초, 범위는 반경 1미터, 안에 있으면 인원 제한 없이 안전한 곳으로 옮겨진다고…….”
백작은 한눈에 그것이 범상치 않은 물건임을 알아보았다. 근처에 있던 마법사 레베카도 확언을 해주었다.
“이동 마도구입니다. 굉장하군요, 이 정도 물건은 처음 봅니다. 형식을 보니 도련님 말씀대로의 성능일 듯합니다.”
창천기사단장이 ‘보험’이라며 주었다고. 백작은 마도구를 들여다보았다.
반경 1미터. 아무리 딱 붙어서도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은 스물 정도. 살아남아 영주관의 안뜰에 들어온 자들만 백여 명이었고, 아직 살아 있는 기사가 십여 명, 간신히 살아 남은 경비병도 몇 있었다.
로아즈 백작은 피와 비명이 가득한 영주관 정문을 바라보았다. 짧은 순간에 격렬한 갈등이 몰아쳤다. 그는 결국 마도구를 도로 아들에게 내밀었다.
“가지고 있어라.”
“백작님, 가족분들과 함께 마도구로 대피하십시오. 데릭 경이 마스터라면 버려봤자 시간 문제입니다.”
“아니, 아직 수가 남아 있네.”
곁에서 함께 들은 집사가 간언하는 말에 백작이 고개를 저었다. 밖에서 울부짖는 듯한 고함이 들려왔다.
“더는 못 버팁니다!”
“문을 닫아라!”
영주관 정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먼 곳에서 비명이 들려오고 있었지만 더는 열어놓을 수가 없었다. 미쳐 날뛰는 자들은 십여 명에 불과했으나 그들 중 쓰러진 자는 한 명도 없었고, 기사와 경비대는 계속 죽어 나가고 있었다. 기사들이 핏발 선 눈으로 문을 닫았다.
백작은 영주관 중앙 계단으로 달려가 벽에 걸려 있는 커다란 액자를 가리켰다.
“떼어내라, 당장! 레베카, 통신은 포기하고 이리 오시오!”
하인들이 달라붙어 액자를 내렸다. 액자 뒤에는 거대한 마법진이 있었다. 아젠카로 떠나 있는 사이 로아즈를 지켜달라는 에키의 부탁을 받은 니콜이 설치해 둔 것이었다. 레베카는 마법진의 중앙에 있는 마석을 보자마자 자신이 뭘 해야 할지 깨달았다.
“발동시킬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달려온 그녀가 재빨리 마석에 손을 올렸다. 웅, 하고 마법진이 울었다. 마법진의 선을 따라 퍼져나간 푸른 빛이 순식간에 사방으로 확산되었다. 반투명한 푸른 막이 영주관 전체를 감싸 안았다. 범위 방어 마법이었다. 레베카가 때를 잊고 감탄했다.
“맙소사, 이런 수식이라니, 역시 니콜 님은 대단해요…….”
“집사, 밖의 상황은?”
백작은 감탄할 틈이 없었다. 백작의 명을 들은 집사가 창가로 달려갔다. 곧이어 희망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못 뚫고 있습니다!”
푸른 막 너머에서 검게 물든 자들이 들러붙었다. 데릭이 검은 마나로 휩싸인 검으로 막을 내리쳐댔으나 막은 잘 버텼다.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고, 울음과 신음도 함께 터져 나 왔다.
가족과 친지가 죽은 사람들, 가족과 친지에게 죽은 사람들. 숨죽여 우는 자와 넋을 잃은 자, 절규하는 자와 웅크려 떠는 자들이 있었다. 오열과 고통과 공포가 공기 중에 흘렀다.
영주관에 머물던 백작의 주치의와 조수들, 신관이 부상자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하인과 하녀들이 물과 깨끗한 천 등을 날라 왔다. 기사들과 몇 남지 않은 경비병들, 그들을 도와 나섰던 시민들은 지쳐 쓰러졌다.
그리고 영주관 바깥에서 은밀히 숨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기척을 감추는 마법진 안에서 그들이 대화를 나누었다.
“변수로군.”
“현자의 제자가 아무리 탁월해도 저 규모의, 게다가 본인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발동한 방어막이 오래 가진 못할 겁니다.”
“방어막보다 악마들이 빨리 소모되겠는데. 진짜 마검처럼 무한정 마나가 공급되는 게 아니니.”
마검처럼 누구든 마스터급으로 만들지는 못해도, 실력 있는 기사면 마스터 흉내는 낼 수 있습니다. 특별히 강한 자를 골라 물들게 해놓았으니 그자가 곧 저걸 부수겠지요.”
“좋아. 우선 기다려보지. 인질 외에 생존자가 남아선 안 돼. 포위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성 밖으로 도망친 자들은 모조리 처리하는 중입니다. 오후가 되면 마검의 저주를 받은 땅이라 선언하고 격리할 예정입니다. 내부의 생존자는 악마를 계속 풀어 넣으면 처리될 겁니다.”
“그 검은?”
“준비해 뒀습니다.”
“막이 부서지고 악마들이 안에 들어가면 곧바로 행동을 개시한다. 로아즈 일가의 초상화는 숙지해 뒀겠지?”
“예.”
“괜히 악마들에게 걸리지 않게 조심하도록. 저것들은 피아 식별이 불가능하니.”
“알겠습니다.”
후드를 눌러쓴 자들은 조용히 푸른 막을 주시했다. 데릭이 쉼 없이 검기로 막을 내리치고 있었다. 어느 순간 막이 흔들렸다. 그것을 본 영주관 내부에서 비명이 솟구쳤다.
“마, 막에 금이 가고 있습니다!”
기사가 외치지 않아도 백작 또한 그것을 보고 있었다. 검게 타오르는 검기. 영주관 안에서 검기를 쓰는 데릭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시간이 촉박했다. 선택해야 했다. 백작은 이를 악물었다.
“……걷기 힘든 자들을 모아라. 가장 심한 자로 스무 명. 그리고 안거나 업힐 수 있는 어린아이를 모아. 란셀리드, 이리 와라.”
백작의 부름에 란셀리드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다가왔다. 백작이 소년의 어깨를 쥐었다.
“반경 1미터의 원을 그리고, 부상자들과 아이들을 최대한 채워 넣어라. 어린애들을 안아 들면 더 많은 수가 마도구로 이동할 수 있을 것이다. 너도 함께 가라.”
“어떻게 저만……!”
“걱정 마라. 나와 네 어머니는 사람들을 데리고 저택의 비밀통로로 나갈 테니. 너도 아는 통로지 않느냐. 우리가 그리로 가는 사람들을 이끌 테니, 너는 마도구로 이동하는 사람들을 이끄는 거다.”
아들의 어깨를 쥔 백작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보라색 눈동자가 형형한 빛을 담고 같은 색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도망치라는 게 아니다. 네가 그 사람들을 책임지란 뜻이다. 그게 후계자의 의무니까. 알겠느냐?”
“……예, 알겠습니다.”
란셀리드의 창백한 얼굴에 사명감이 깃들었다. 백작이 설핏 웃고는 아들의 등을 밀었다.
“가거라.”
소년이 달려갔다. 백작은 사랑하는 아들의 등을 잠시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