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꽃-144화 (144/211)

검을 든 꽃 144화

“로잘린의 가족들은 그럼 오늘이나 내일 중에 도착하겠네요.”

“한동안은 창천기사단 내부에 머물게 할 생각이다. 외부에서 알아채기 어려운 곳이니.”

“언제까지요?”

“당장 진실을 밝히기는 어렵다. 마검의 음모를 공표하며 2황자와 황제를 벌하고, 크루엔 형님이 제위에 오른 후가 낫겠지.”

“하긴, 지금 당장은 공작의 죄를 밝혀봤자 황태자 전하의 세력만 위태로워지겠군요.”

“그래. 디아상트 공작이 황태자의 장인인 이상, 공작을 잘못 규탄했다간 2황자파에게 형님을 쳐낼 명분만 주는 꼴이 된다.”

“2황자와 공작이 연계되어 있다는 걸 증명하면 되잖아요.”

“그러니 우선 증거를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그 증거로 크루엔 형님부터 납득시켜야겠지.”

유리엔이 잠시 일어나더니 서류 뭉치를 가져왔다. 진행 중인 조사와 계획들을 정리한 문건이었다.

“그대가 연구실에서 찾아낸 노트의 해석, 니콜 시즈튼에게 맡겼다는 마석 목걸이의 분석, 그리고 근위기사단장과 디아상트 공작이 콜본에서 만났을지도 모른다는 정황 조사. 이 세 가지 조사가 끝난 후에 결과를 취합하여, 로잘린 디아상트를 내게 약혼녀로 보낸 경위와 함께 황태자 전하께 드릴 생각이다.”

“황태자 전하는…… 받아들이실까요?”

믿을 수 있는 사람인가, 라고 물으려다 너무 적나라하여 에둘러 물었다. 유리엔은 그녀가 무슨 의도로 물었는지 알아채고 담담히 답해 주었다.

“크루엔 형님은 무엇이 옳은지 모르는 사람은 아니다.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럼, 로아즈에 마검이 보내진 음모에 대한 증거로 황제와 2황자를 실각시키고, 그 뒤 취합한 증거로 공작을 실각시키고 나면…….”

“모든 일이 끝나고, 비로소 그대에게 제대로 청혼할 수 있게 되겠지.”

유리엔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에 에키가 멍해졌다. 그녀가 침묵하자 서류를 보고 있던 그가 의아한 듯 고개를 들었다.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 낯이었다.

“……율, 방금 뭐라고 했어요?”

“모든 일이 끝나면 그대에…… 게…….”

순순히 대답하다 말고 유리엔의 말끝이 흐려졌다. 연회에서 했던 충동적인 것 말고, 좀 더 제대로 된 청혼부터 결혼식까지 어떻게 진행할지 요즘 내내 구상하던 중이라 무심결에 입 밖에 내어버렸다. 그가 입가를 가리더니 목욕 이야기가 나왔을 때보다 더 붉어져서는 벌떡 일어났다.

“율?”

“디, 디저트를 가져오겠다.”

“그건 시간이 되면 알아서 가져오는 거 아니에요?”

“명, 령하는 것을, 잊어서. 하인들도, 잊어버렸을 수도 있으니까…… 금방 다녀오지.”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주워섬긴 그가 도망치듯 침실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은 에키는 세운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웃다가 근육통 때문에 신음을 흘리기를 반복했다.

[응? 주인 왜 저래? 바보 같아.]

[인간들은 사랑에 빠지면 바보가 되기도 하고 제정신이 아니게 되기도 하지. 그러려니 해라.]

[내 주인이 바보가 됐으니까 그럼 네 주인은 제정신이 아닌 거야?]

[…….]

* * *

에키네시아가 일어났다는 소식에 다음날부터 사람들이 병문안을 왔다. 가장 먼저 찾아온 건 앨리스였다.

“왜 이렇게 자주 앓아눕는 겁니까?”

“그러게요. 아무래도 체력 훈련을 더 해야겠어요.”

“무슨 소립니까, 에키가 훈련하는 걸 제가 다 봤는데. 거기서 더 하면 훈련 때문에 앓아누울 겁니다. 도대체가, 검술은 그렇게 뛰어나면서 몸은 왜 덜 만들어져 있습니까?”

앨리스로서는 걱정하며 하는 잔소리였지만 에키 입장에선 날카로운 질문에 뜨끔할 수밖에 없었다. 앨리스가 한숨을 쉬었다.

“파티마 선배님은 임시 스콰이어 임무 중이셔서 못 왔습니다. 대신 이걸 전해주라고 하셨고요.

“꿀에 절인 약초네요. 전에 주셨던 것도 맛있었는데.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앨리스.”

“예.”

“위즈덤은 어때요? 다들 잘 지내나요?”

“……사실 파티마 선배님 말고 다른 클럽원들도 다 병문안을 오려 했습니다. 그런데 단장님께서 거절하셔서. 저와 파티마 선배님만 허락해 주시더군요.”

“유……. 로드가요?”

“예. 에키가 피로한 상태라 많은 사람이 오는 건 좋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심한 건 아닌데…….”

에키는 유리엔이 왜 다른 클럽원들의 방문을 막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득 떠오른 것은 있었으나, 설마 유리엔이 그런 유치한 짓을 할까 싶었다.

‘그냥 나를 걱정한 거겠지.’

“앨리스, 파티마 선배님은 누구의 임시 스콰이어직을 하고 있는 건가요? 미하일 생도랑 테오 생도랑 그리고 음, 바라하 선배님은…… 잘 지내시죠?”

떠난 기간은 2주 남짓했으나 많은 일이 있었다 보니 한참 떠나 있었던 기분이었다. 앨리스는 그녀가 없었던 동안 사관학교와 클럽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차근차근 이야기해 주었다.

다음으로 다녀간 건 샤이였다. 수석 신관 아론과 함께 찾아온 샤이는 들어오자마자 에키를 치료하려 들었다.

“샤이, 이건 부상도 아니고 병도 아니라서 효과가 없을 거야. 정확히 말하면 그냥 지친 거니까. 유리, 아니, 로드께서도 설명해 주셨을 텐데.”

“설명, 듣긴 했지만…… 그래도 해 봐야 아는 거잖아요. 언니, 저 정말 열심히 연습했어요. 하게 해주세요, 네? 언니 아픈 거 싫어요…….”

샤이의 회색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했다. 그녀는 당황해서 소녀를 달래다가 결국 포기하고 엘기오사를 써 보라고 허락해 주었다.

단검이 가슴께를 파고드는데도 통증도 상처도 없는 건 무척 기묘한 느낌이었다. 엘기오사를 거둔 샤이는 조그만 손으로 에키의 이마를 짚어보더니 완전히 실망한 얼굴이 되었다. 에키의 열은 그대로였다.

“병이 아니라서 그래. 치료가 아니라 휴식이 필요한 상태거든. 그러니까 괜찮아.”

“……저, 언니한테 도움이 별로 안 되네요.”

“그럴 리가. 저번에 독을 마셨을 때 샤이가 날 치료해 줬잖아. 이번에도 로드를 치료해 줬고. 정말 고마워.”

“그런 건, 당연한 일인 걸요. ……얼른 나아야 해요, 언니.”

에키는 시무룩해진 소녀를 다독여 보냈다. 다음으로 찾아온 건 의외로 테레사였다.

“체력 훈련이 필요하면 말해라. 네게는 여러모로 신세를 졌으니 그 정도는 얼마든지.”

그 말과 함께 테레사는 커다란 과자 상자를 두고 갔다.

‘지나가다 들렀다면서 이런 건 언제 산 건지.’

과자 상자는 예쁜 분홍색에 귀여운 금박 무늬가 그려진 것이었고, 안에 든 쿠키는 동물 모양이었다. 테레사의 드레스 취향과 일맥상통했다. 에키는 과자를 먹으면서 웃고 말았다.

이어 니콜이 보낸 전보가 왔다. 마석 목걸이 분석 진행 중이라는 말과 함께 걱정 좀 시키지 말라는 잔소리였다.

오랜 예전이라면 귀찮아했을 잔소리가 지금은 따뜻하기만 했다. 에키는 유리엔이 그녀가 마검의 주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조만간 니콜에게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온 것은 로잘린 디아상트였다. 그녀는 화장으로도 완전히 가리지 못한 부은 눈을 하고 찾아왔다.

“오늘 아침에 그이랑 딸이…… 도착했어요. 조금 전까지 함께 있다가 온 길이에요.”

“오랜만에 만났을 텐데 더 함께 있지 않고요.”

“어차피 지금은 오래 같이 있어서는 안 되는 걸요. 들키면 위험하잖아요.”

“……조금만 기다리면 계속 같이 있을 수 있을 거예요, 로잘린.”

“에키네시아 로아즈 양.”

로잘린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드레스 자락을 쥐었다. 그녀는 침대에 기대앉은 에키를 향해, 우아하고 완벽하게 귀족의 인사를 했다.

“저는 그리 대단한 위치에 있지도 않고, 지금은 무력하지만…… 그래도 제법 수완이 있답니다. 혹 제 도움이 필요하다면 뭐든, 언제든, 제게 말하세요.”

“아, 아뇨, 괜찮아요, 로잘린은 이미 큰 도움을 주고 있잖아요?”

“그래도요. 알겠죠? 잊지 마세요.”

로잘린은 운 흔적이 역력한 얼굴로 화려하게 웃었다.

* * *

에키네시아가 일어날 때까지 외부 일정을 모조리 미뤄두었던 유리엔은 밀린 것들을 처리하느라 밤늦게 사택으로 돌아왔다.

그는 일하기 싫고 빨리 집에 가고 싶은 심정을 난생 처음 느껴보았다. 총행정관 임명을 끝냈으니 이제 조금씩 일이 줄어들 거라는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방에서 쉬고 있던 에키는 이상한 상자들을 한아름 안고 들어온 그를 보고 당황했다.

“그게 다 뭐예요, 율?”

“오는 길에 그대에게 주려고 샀다.”

“……그걸 다요?”

에키가 얼이 빠져서 되물었다. 유리엔은 협탁에 들고 온 것들을 내려놓다가, 쌓아놓고 보니 생각보다 많아서 내심 당황했다. 들어오자마자 마검과 함께 한쪽에 놓인 성검이 거 보라는 듯 중얼거렸다.

[난 분명히 말렸다. 주인. 사탕병을 살 때부터.]

[왜? 뭔데? 우와, 저게 다 뭐야?]

[됐다, 바르데르. 주인들은 내버려 두고 하던 얘기나 계속 하지.]

성검은 한숨을 쉬고는 마검과 다시 ‘문양’에 대해 논하기 시작했다.

유리엔은 창천기사단 본부에서 사택으로 가는 짧은 길에 가게가 그렇게 많은 줄 처음 알았다.

그중에서 에키네시아가 연상되는 것이나 그녀가 좋아할 법한 것만 샀는데 뭘 보든 자꾸 생각이 나더니만 이 지경이 되어버렸다. 제가 봐도 좀 과해서 유리엔은 슬며시 에키의 시선을 피했다.

“……보이니까, 그대 생각이 나서.”

에키는 황망히 그를 바라보다가 상자들을 풀어보았다.

비단 리본, 레이스 손수건, 색색의 사탕이 든 유리병, 작은 생화 다발, 독수리 깃펜, 보라색 잉크, 섬세한 무늬가 새겨진 오르골, 꽃을 말려 만든 향주머니, 조그만 솜인형, 검 모양의 금속 책갈피, 오밀조밀한 분홍색 초콜렛 통.

자잘하고 예쁘고 소소한 물건들이었다. 처음엔 당황스러웠는데 하나하나 풀어나가다 보니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가슴 안쪽이 간질간질했다.

“고마워요, 율.”

눈치를 보고 있던 유리엔이 그녀가 웃으며 하는 인사에 확 밝아졌다. 에키는 고개를 기울이며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이렇게 많이 사올 필요는 없어요. 당신이 보기에도 그렇죠?”

“……앞으로는 자제하겠다.”

유리엔이 살짝 상기된 얼굴로 대답했다. 아, 정말 사랑스러워서 못 견디겠다. 에키는 그런 생각을 하며 그의 왼팔을 잡아당겼다.

“저도 선물을 하고 싶은데, 지금 당신에게 줄 만한 게 없어서.”

“그대에게 무언가 받고 싶어서 사온 것은 아니니 부담은……!”

정색하며 말하던 유리엔이 헛숨을 들이켰다. 그의 왼쪽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에키가 소매로 가려지는 손목 안쪽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녀는 전에 로잘린에게 배운 대로 그의 피부를 살짝 빨아들였다. 촉, 하는 소리가 났다. 입술을 뗀 그녀가 웃었다.

“잃어버린 커프스 버튼 대신이에요. 제대로 된 선물은 나중에 줄게요.”

유리엔은 그녀가 입술을 댔던 손목 안쪽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곧 꽃잎 같은 분홍색 자국이 생겨났다. 그는 넋이 나가서는 뚫어져라 그 자국을 바라보았다.

에키는 그가 한참을 꼼짝 않고 있자 불안해졌다. 로잘린이 분명 이러면 엄청 좋아할 거라고 했는데. 물어보고 할 걸 그랬나.

“율? 싫어요? 미안해요, 전 당신이 좋아할 줄 알고…….”

그녀의 사과에 삐걱거리며 고개를 든 유리엔이 손을 뻗었다. 그녀를 잡아당겨 안고는 그대로 입을 맞췄다. 맞닿은 몸 너머에서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갈급하게 탐하고, 약간 떨어진 틈에 쉰 음성으로 속삭였다.

“싫지 않다. 하지만 앞으로는 하지 마라.”

“으, 역시 싫었던 거죠? 물어봤어야 했는데, 실수를…….”

“그게 아니라.”

다급히 그녀의 말을 끊은 그가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그녀를 놓고 떨어져 물러섰다.

“내가 그대에게 실수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하지 마라. 아니, 아예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내가, 준비를 하고, 인내할 수 있을 때에…….”

횡설수설 말하던 그가 신음을 흘리며 제 손에 얼굴을 묻었다. 흘러내린 은발 사이로 보이는 귀가 시뻘겋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듣지 못하고 있던 에키는 그 귀를 보고 불현듯 말뜻을 알아차렸다. 그녀의 얼굴이 그의 귀만큼이나 빨개졌다.

“미, 미, 미안해요. 앞으로는 안 그럴게요.”

유리엔은 손을 떼고 달아올라 시선을 피하는 에키를 보았다. 앞으로 안 그런다는 말에 어쩐지 엄청나게 서러워졌다. 결혼하고 싶다. 빨리. 이러다 죽을 것 같으니. 딱 그 생각만 들었다.

서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문가에서 요란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단장님. 급한 전갈입니다.”

“……나가마.”

유리엔은 얼굴을 문지르고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복도에 창천의 정보원이 땀에 흠뻑 젖은 채 서 있다가 경례를 하고 밀랍으로 봉한 편지를 건넸다.

붉은 봉투였고, 피처럼 붉은 밀랍이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잘 아는 유리엔은 굳은 낯으로 봉인을 떼어냈다. 편지에는 다급하게 휘갈겨진 글씨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첫 줄이 비수처럼 그의 눈에 파고들었다.

-키리에 제국 남부, 로아즈 영지에 마검 바르데르기오사가 출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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