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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143화 (143/211)

검을 든 꽃 143화

용을 처리하고 난 후의 결절은 그다지 위험하지 않았다. 와이번들이 아직도 징그럽게 많이 남아 있긴 했지만, 그것들이 들어올 수 없는 지하가 있고 식량이며 각종 도구가 가득 든 마법 가방도 있으니 큰 걱정은 없었다.

에키는 유리엔이 잠든 직후 통로를 나와서 연구실을 찾아갔다. 연구실은 난장판이 된 곳과 거리가 꽤 되었던 덕에 멀쩡했다. 그러나 연구실에 있던 사람들은 멀쩡하지 못했다.

네 명 모두 아무 외상 없이 잠든 것처럼 죽어 있었다. 육체가 부서진 정신을 뒤따라간 듯했다. 그녀는 가라앉은 표정으로 그들을 보다가, 시신 위에 테이블보를 끌어다 덮어주고 나왔다.

연구실에서 돌아오자마자 에키 역시 기절하듯 잤다. 잠든 세 사람 중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건 션이었다.

션은 낑낑거리며 불을 붙이고 요리를 하다가 주방에서 챙겼던 몇 개 안 되는 소중한 냄비 바닥을 태워먹었다. 탄 냄새에 일어난 에키는 로잘린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생활력도 영 글러먹었어요. ……열심히 하긴 하는데 실수하는 꼴이 속 터지더라고요.〉

에키는 냄비를 빼앗고 션에게 요리를 금지시켰다. 그녀가 대충 먹을 만한 수준의 음식을 만드는 동안에도 유리엔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 중에서 가장 심한 부상을 입고도 끊임없이 움직였으니 한계에 이른 듯 했다.

유리엔이 일어난 건 꼬박 하루가 지난 후였다. 결절 안에서는 시간의 흐름을 알기 어려웠으나 대충 그 정도쯤 되었다.

그가 깨어난 후 대강 식량을 셈해 보았다. 주방에서 찾아낸 것도 있어서 릴리까지 넷이 넉넉하게 먹어도 열흘치는 충분했다. 그래도 결절이 저절로 아물 때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 하루빨리 나가는 게 나았다.

“율은 쉬고 있어요.”

“그럴 수는 없다. 함께 가지.”

“왼팔, 잘 안 움직이잖아요. 다리 상처도 덧나고. 제가 모를 것 같아요?”

에키가 눈꼬리를 치켜 올리자 유리엔이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명령조로 말했다.

“마물들은 제가 청소할 테니 당신은 쉬어요.”

“부상은 나가서 치료받으면 된다.”

“그러다 혹시 후유증이라도 남으면 정말로 화낼 거예요. 당신 지금 중상이라고요.”

“그렇다고 혼자 싸우면 그대가 무리하게 되잖나.”

“어차피 남은 마물들은 별거 아니에요, 수가 많을 뿐이지.”

“그래도 쉬고만 있는 것은…….”

“먼저 쉰다고 생각하세요. 나가면 제가 쉴 테니까. 율, 전 더 이상 당신이 다치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현재 그의 상태로 싸웠다간 그녀의 신경을 분산시킬 뿐이다. 유리엔은 그 점을 깨닫고 더는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

그 뒤부터 그가 안정을 취하는 동안 에키는 결절 내의 마물들을 처리해 나갔다.

그녀는 잠잘 때를 제외하고 마나 사용을 멈추지 않았다. 거리낄 것 없이 마검을 사용하니 마나가 남아 돌아서이기도 하지만, 정확히는 멈추면 몸을 가눌 수 없어서였다. 이미 피로가 극에 달한 몸은 마나 사용을 중단하면 그대로 앓아누울 게 뻔했다.

[야, 이러다 나가면 너 진짜 한 달은 앓아눕는 거 아냐?]

“일주일 정도겠지. 그래봤자 몸살이야. 다친 곳이 있는 건 아니니까 휴가라 생각하고 쉬면 돼. 유리엔은 돌아가자마자 샤이에게 부탁해야겠지만.”

그녀의 부상은 추락하면서 생겼던 타박상이나 손발의 생채기 정도라서 괜찮았다. 몸살은 아젠카에 돌아가서 실컷 쉬면 될 일이다.

에키는 아슬아슬하게, 근육이 파열되지 않을 정도를 유지하며 몸을 혹사시켰다. 그녀가 결절 내의 해골 와이번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는 데에는 사흘 정도가 걸렸다.

마물을 모조리 처리한 후, 그녀는 연구실로 되돌아가 결절의 시작점에 바르데르기오사를 꽂았다.

신력 1629년 7월 12일.

에키네시아 로아즈와 유리엔 드 하르덴 키리에는 션 워런트와 릴리 워런트를 구출하여 결절에서 탈출하는 데에 성공했다.

비슷한 시각, 디아상트 공작의 계획에 따라 2황자로부터 은밀한 명을 받은 자들이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11막. 선택하는 것과 선택할 수 없는 것

션 워런트와 릴리 워런트는 창천의 정보원들에게 도움을 받아 정체를 숨기고 우회하여 아젠카로 향해야 했다. 그들의 존재와 로잘린의 상황을 드러내려면 디아상트 공작을 실각시켜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했으므로 당장은 감춰야 했다.

반면 유리엔와 에키네시아는 곧바로 열차를 타고 아젠카로 돌아왔다. 그들이 아젠카에 도착한 건 7월 13일 저녁의 일이었다.

유리엔은 소식을 듣고 본부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었던 성녀에게 치료를 받았다. 샤이는 치유검 엘기오사를 사용하여 생채기 하나 남기지 않고 그의 모든 부상을 완치시킨 다음 탈진해 버렸다.

에키는 그가 완전히 낫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쓰러졌다. 혹여 그의 왼팔에 후유증이라도 남을까 걱정하다가 안심이 되며 긴장이 풀린 탓이었다.

유리엔은 사람들이 쓰러진 그녀를 기숙사로 데려가려는 것을 막았다.

“그녀는 내 스콰이어니 내가 직접 돌보겠다.”

강경한 어조였고 그리 틀린 말도 아니었다. 로드의 임무를 함께한 스콰이어가 다치거나 병에 걸릴 경우 로드가 책임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그는 에키네시아를 자신의 사택으로 데려가는 데 성공했다.

로드와 스콰이어이긴 하지만 남녀 사이라 미심쩍어 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유리엔이 성검의 주인인 데다 예비 약혼녀인 로잘린과 자주 만나려 업무를 줄이는 등의 변하는 모습까지 보였던 터라 큰 의심은 돌지 않았다.

유리엔으로서는 필수적인 결정이었다. 피로한 상태인 그녀를 마음 편히 쉬게 하기에는 출입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그의 사택이 기숙사나 병실보다 나았다.

마석 목걸이 건 이후 침묵하고 있는 2황자나, 드라코툼바 성에 그들이 방문했던 걸 알게 된 디아상트 공작이 에키에게 무언가 수작을 부리는 것을 미리 차단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 가장 큰 이유는 그녀 곁에 있고 싶은 그의 욕심이었다. 그는 아예 기사단에 휴가를 내고 마검의 음모와 관련된 일만 은밀히 처리하며 사택에 머물렀다.

* * *

어렴풋이 잠에서 깨자 느껴진 것은 보드랍고 사늘한 이불의 감촉이었다. 에키는 눈을 반쯤 떴다가 도로 감았다. 적당히 따뜻하고, 적당히 시원하고, 매우 푹신했다.

편안한 환경과 달리 몸 상태는 상당히 나빴다. 열이 올라 있는지 이마가 지끈거리고 전신에 힘이 들어 가질 않았다. 아래로 푹 꺼지는 기분이었다. 목덜미는 땀으로 미끈거렸고 목 안쪽과 입술은 열로 인해 바짝 말라 있었다. 갈라지는 느낌에 에키는 약간 뒤척이며 침을 삼켰다.

작은 행동이었는데도 알아차린 건지 덜컹 하고 누군가 일어서는 소리가 났다. 다가오는 기척이 익숙해서 경계심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일어나는 대신 베갯잇에 뺨을 파묻었다.

다가온 손길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등을 받치더니 상체를 들어올렸다. 그는 그녀를 제게 기대도록 만들었다. 그러더니 축축한 것이 땀이 맺힌 이마에 닿았다. 시원했다.

물수건이 그녀의 얼굴과 목덜미를 꼼꼼히 닦아내는 동안에도 에키는 눈을 뜨지 않았다. 눈을 뜨기도 피곤했고, 기댄 몸이 지극히 편안했다. 의지하며 그저 푹 쉬어도 될 것 같은. 날을 세울 필요도 긴장할 필요도 없이 그저 믿어도 될 듯한.

곧이어 입가에 미지근한 물이 느껴졌다. 목이 갈라지던 참이었기에 반사적으로 입을 벌렸다. 조금씩 물이 밀려드는 것을 받아 삼켰다. 지나치게 차갑지 않은 물이 달게 목을 적셨다.

끈적거리던 땀이 닦이고 갈증까지 해소되고 나니 한없이 졸렸다.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과 감싸 오는 체온이 나른했다. 그녀는 자신을 받치고 있는 사람에게 온전히 기대어 다시 잠들었다. 말캉한 감촉이 이마에 상냥하게 와 닿았다.

* * *

꼬박 이틀을 비몽사몽으로 보낸 후에야, 에키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었다. 아주 작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지속적으로 들리고 있었다. 흐릿한 시야에 소리의 근원이 비쳤다.

그녀가 누운 침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책상이 있었다. 언뜻 보아도 호화로운 침실인 방에 그 책상은 영 어울리지 않았다. 일부러 끌어다 놓은 것 같았다. 은발의 남자가 그곳에 앉아 서류더미를 뒤적였다.

‘유리엔.’

종이를 내려다보며 미세하게 얼굴을 찡그렸다가, 턱을 만지작거리다가, 깃펜을 쥔다.

소매를 반쯤 걷어 드러나 있는 팔뚝은 단단하고 펜을 놀리는 손도 커다란데, 손가락의 모양이나 몸이 그리는 선이 우아해서 거칠다기보다는 조각상처럼 매끈해 보였다.

에키는 멍한 머리와 반쯤 뜬 눈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그림 같아. 예쁜 파란 눈. 팔뚝 만져보고 싶다. 만지면 부끄러워하겠지.

이제 그에게 숨길 필요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남은 문제들만 처리하고 나면 그와 함께할 수 있다.

계속 같이 있고 싶어. 같이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나눠야 할 이야기도 많은 걸.

‘다 끝나면…… 결혼하게 되려나. 부모님 놀라시겠네. 란셀리드는 기절할지도.’

의식의 흐름이 마구잡이로 흐르며 그녀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떠올랐다.

[어, 주인아, 일어났어?]

마검의 말에 그녀는 이불 속에 파묻혀 있던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늘 끼고 있던 장갑이 없는 맨손이었다. 하얀 손바닥에 검은 문양이 뚜렷했다.

“에키!”

우당탕 하고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와 함께 유리엔이 그녀를 불렀다. 손을 들어 올리는 작은 움직임에 그녀가 일어난 걸 알아챈 그가 서류를 팽개치고 침대가로 다가왔다. 에키는 웃는 얼굴 그대로 그를 보았다.

“율”

“……걱정했다.”

달리다시피 다가왔으면서 침대에 걸터앉는 건 느렸다. 그는 에키의 이마 위에 제 손을 올려 열을 재어 보았다.

“많이 내렸군. 다행이다.”

“얼마나 잤어요, 저?”

“이틀 정도. 중간에 조금씩 깨긴 했지만.”

“여기는…….”

“내 사택이다. 그대가 편히 쉬기엔 여기가 나을 것 같아서.”

유리엔의 눈길이 그녀의 오른손에 잠시 머물렀다. 그의 말대로, 기숙사나 다른 사람들이 드나드는 병실이었다면 마음껏 쉬지 못했을 것이다. 마검의 문양을 들킬까 봐 불안해서.

에키는 그의 시선을 따라 오른손바닥을 가만 응시하다가 불쑥 물었다.

“계속 당신이 제 곁에 있었나요?”

“그래. 계속 그대의 곁에 있었다.”

그가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다정하고 애틋한 손길. 잠결에 어렴풋이 그 손길을 몇 번 느낀 게 기억났다. 속에서 몽글하고 따뜻한 것이 차올랐다. 그게 민망해서 에키는 일부러 살짝 짓궂게 물었다.

“설마 목욕도?”

“그, 그, 그런, 무례한 짓은, 하지 않았다!”

애틋하던 유리엔의 얼굴이 삽시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오른손을 붕대로 가려놓고 하녀에게 시켰다며 황급히 설명하는 그를 보며 에키는 웃음을 터뜨렸다. 웃다가 근육통이 남은 전신이 아파 와서 낑낑거리자 유리엔이 허둥지둥 연고를 찾았다.

“괜찮아요, 그보다 배가 고픈데요.”

“잠시만 기다려라.”

[주인아, 일어난 김에 나 또 랑이랑 얘기하게 해주면 안 돼? 쟤보고 랑 꺼내달라고 해!]

유리엔이 하인을 불러 식사를 가져오라 명하는 사이 바르데르기오사가 칭얼거렸다. 에키는 커다란 베개에 기댄 채 수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또? 뭐 하려고?”

[기오사들끼리 하는 주웅요한 얘기!]

“대체 무슨 얘긴데, 그거.”

[그런 게 있어! 빨리, 빨리이, 응? 너 자는 동안 혼자 궁리하던 거 랑한테 물어봐야 한단 말이야!]

“뭘 물어보려는 거야?”

[묻지 마, 안 가르쳐줘! 비밀이야! 그러니까 빨리 꺼내줘! 여긴 들킬 일도 없잖아!]

“너 역시 랑기오사 괴롭히려는 거지?”

[야, 넌 왜 이렇게 자기 기오사를 못 믿어? 안 괴롭힌다니깐. 랑한테 물어봐. 걔가 싫다고 그러면 안 조를게. 빨리! 얼른!]

에키는 한숨을 쉬고 침대가로 돌아오는 유리엔을 바라보았다. 미리 준비시켜 두었던 건지 그새 나온 음식

쟁반을 들고 있었다. 침대 위에 직접 식사를 차려주는 그를 향해 그녀가 말했다.

“율, 바르데르기오사가 랑기오사하고 이야기를 하고 싶대요. 랑기오사가 싫어하지 않나요?”

[음? 뭔가 알아낸 게 있나. 마검과 이야기하게 해다오, 주인.]

에키의 말이 끝나자마자 성검이 답했다. 유리엔은 고개를 기울였다.

“알아낸 거라니?”

[헛된 일일 수도 있으니, 확실해지면 알려주겠다. 지금은 말할 수가 없군.]

“알았다.”

그는 성검을 뽑고, 에키가 꺼낸 마검과 함께 한쪽 구석의 협탁 위에 겹쳐서 올려놓았다. 에키는 성검이 대화를 허락했다는 걸 믿기 어려운 듯 고개를 내저었다.

“기오사들이 무슨 할 얘기가 있는지 모르겠네요.”

“글쎄, 성검은 워낙 오랜 세월을 살았으니…… 마검에게 뭔가 가르칠 게 있는 것 아니겠나.”

“마검이 배운다고요? 뭔가를? 성검으로부터?”

마검의 성격을 아는 그녀는 황당한 표정이 되어 기오사들 쪽을 바라보았다. 서로 대화하느라 바쁜 기오사들은 주인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유리엔은 조금 웃고는 수프 그릇을 그녀 쪽으로 밀었다.

“식겠다. 우선 먹어라.”

“아. 네.”

에키가 식사를 시작하자 그는 그녀가 잠든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일단 그가 제니스가 되었다는 건 당분간은 비밀로 할 예정이었다. 아직 명백히 제니스라 하기엔 서툴기도 하고, 적에게는 정보가 덜 알려질수록 유리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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