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42화
기둥처럼 굵은 갈비뼈 사이를 뛰어넘었다. 그새 완성되어 안쪽에 자리 잡은 심장의 주위로 검은 가루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유리엔은 중간에서 횃불을 내던지고 양손으로 랑기오사를 움켜쥐었다.
웅웅, 하는 소리와 함께 하얀 검기가 폭발적으로 차올랐다. 랑기오사의 마나 증폭 기능이 검기를 확장해 얇은 칼날의 성검을 대검에 가까운 크기로 만들어주었다.
하얗게 빛나는 마나가 횃불을 대신해 주위를 밝혔다. 그는 펄떡이기 시작한 용의 심장에 성검을 꽂아 넣었다.
심장마저 검기를 버텨낼 정도로 강하진 못했다. 하얀 검이 검붉은 심장을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유리엔은 꽂힌 성검을 그대로 내리그었다.
사람보다 큰 거대한 심장이 반으로 갈라지며 푸확, 하고 녹색 피가 쏟아졌다. 벌어진 심장에서 흘러넘치는 피는 흐르는 늪처럼 보였다. 잘린 부위가 끄트머리부터 검은 가루로 변해 흩날렸다.
‘되었나?’
[주인, 심장 안을 봐라!]
성검이 다급히 외쳤다. 너덜거리는 심장 안쪽 깊숙한 곳에, 사람 머리통만 한 검은 돌이 있었다. 돌 안에서 검은빛이 기괴하게 일렁거렸다. 크기가 너무 큰 것만 빼면 익숙한 형태였다.
“마치…… 마검의 마나가 담긴 마석 같군.”
유리엔은 중얼거리면서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저것이 에키가 말했던 진짜 ‘심장’이라는 감이 왔다. 성검이 마나를 머금고 검은 돌을 내리쳤다. 하얀 마나가 눈부시게 빛났다.
깡, 하고 둔탁한 소리가 났다.
유리엔은 당황해서 내리친 부분을 보았다. 검은 돌은 검기를 덧씌운 성검으로 내리쳤는데도 흠 하나 나지 않았다.
[이거 아무래도…….]
성검이 신음을 흘렸다. 용의 비늘처럼, 저 검은 돌은 보통 검기로는 부술 수 없을 것이다. 유리엔은 성검과 같은 사실을 깨닫고 검을 치웠다.
그는 뒤를 흘깃 돌아보았다. 릴리를 안은 션이 기절하지 않은 게 용한 낯으로 계단 근처에 웅크리고 있었다. 웅크린 등이 부들부들 떨렸다.
공터의 천장은 아까 열렸던 것이 거짓말인 양 단단한 암석 표면만 보였고, 계단은 돌벽으로 꽉 막혀 있었다. 달아날 길은 없다.
다시 앞을 보았다. 그가 잘라낸 심장이 천천히 복구되기 시작했다. 발치를 적시던 늪 같은 녹색 피가 검은 가루로 화해 용의 뼈에 달라붙었다. 핏줄이 돋아나고 근육이 차오른다.
용은 그를 비웃듯이 그의 코앞에서 되살아나고 있었다.
여기서 용이 되살아나면, 자신도, 뒤에 있는 공녀의 가족들도 죽겠지. 저 용이 완성될 때까지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될까.
사라진 에키네시아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녀는 괜찮을까.
초조함. 무력감. 긴장. 불안, 걱정. 절망감. 정신이 요동치는 와중에도 그의 얼굴은 고요했다.
유리엔은 성검을 양손으로 쥐고 정면을 향해 똑바로 들어올렸다.
〈나를 기다려줘서 고마워요.〉
울어서 엉망이 된 얼굴로 눈부신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가 죽으면 그녀는 몹시 슬퍼할 것이다. 그러니 죽을 수 없다. 그녀를 기다려 주어야 했다.
〈……이렇게, 검기를 극도로 얇게 만들어서, 덧바르는 게 아니라 기존의 검기 위에 살짝 얹는 느낌으로요. 계속해서 겹친 다음, 마지막에 누르듯이 압축해서…….〉
그녀가 속삭였던 말이 귓가에 느린 노랫말처럼 맴돌았다. 닿았던 감촉, 닿았던 마나. 그의 마나에 뒤섞여 그를 이끌어주던 그녀의 마나.
마나 코어에서 마나가 가늘게 흘러나왔다. 더 가늘게. 더 얇게. 거미줄보다 가늘고, 종잇장보다 얇도록.
이마에 삽시간에 진땀이 가득해졌다. 화상을 입은 왼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동하느라 도로 터졌던 어깨와 허벅지의 상처에서 피가 줄줄 배어나왔다.
경고하려던 성검은 주인이 무엇을 시도하는지 알아차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리엔은 그 통증 속에서도 집중을 흩뜨리지 않았다.
바람만 불어도 찢어질 것처럼 얇아진 검기를 가느다란 칼날 위에 쌓아 올린다. 무너졌다. 다시. 천천히. 한 겹 한 겹 신중히. 실패. 다시 한 번 더.
검은 가루가 들러붙으며 용의 형태를 구성해 간다. 식은땀이 속눈썹에 맺혀 눈으로 흘러든다.
마나가 흔들렸다. 눈을 깜박이고, 처음부터 다시. 바늘 위에 물방울을 얹듯이. 숨을 멈추고, 느리게 겹친다. 실패. 촛불처럼 검기가 일렁인다. 다시, 또 다시.
집중을 유지해서. 그녀가 유도해 주었던 것을 기억하며. 더. 조금 더. 간절히. 절박하게.
제발.
불현듯 마나 코어가 기묘하게 움직였다. 쿵, 쿵쿵, 하고 코어가 터질 듯이 박동했다. 가슴 안쪽이 타오르는 것처럼 답답했다.
‘으…….’
저절로 나온 신음은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목 안쪽에서만 돌았다. 너무나 갑갑했다. 숨이 턱 막힌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나가 의지를 따르지 않는다. 어떤 형태를 이루어야 할지 손에 잡힐 듯이 선명하게 떠오르는데 마나는 굼뜨기만 했다. 그 갑갑함이 최고조에 이른 순간.
갑자기, 벼락이 내리치듯이, 무언가가 꿰뚫렸다.
전신을 죄고 있던 질긴 막 같은 것이 찢어지며 피부에 바람이 직접적으로 와 닿는 듯한 느낌. 서늘하고 오싹했다. 몸 안에서 흐르는 마나가 소름끼칠 정도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제 실패하지 않는다.
코어에서 흘러나온 마나가 손발처럼 그의 의지에 복종했다. 삽시간에 검기가 몇 겹이나 중첩되었다. 중첩된 검기를 압축한다. 성검의 날 위로 정련된 마나의 칼날이 돋아났다.
유리엔 드 하르덴 키리에는 바로 지금, 제니스의 초입에 발을 들였다.
[……!]
성검은 소리 없이 감탄했다. 역시 제 주인도 괴물 같은 천재였다. 아무리 마검의 주인 덕에 몸으로 체감해 봤다지만 이렇게나 빨리 가능해질 줄은.
유리엔이 검을 들어올렸다. 성검이 마나를 증폭했다. 보다 강력해진 중첩검기로 휘감긴 랑기오사가 일렁이는 검은 돌을 향해 내리쳐졌다.
조금 전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던 돌이 매끄럽게 갈라지며 썩은 나무토막처럼 부서졌다. 부스러지는 검은 돌에는 더 이상 광택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르륵.
[인…… 간…… 죽…… 이…….]
가래 끓는 듯한 괴성이 성대도 존재하지 않는 용의 목에서 흘러나왔다. 늘어지는 단말마와 함께 검은 돌에서 색이 빠져나갔다. 휘몰아치며 몸뚱이를 이루던 검은 가루들도 힘을 잃고 모래처럼 떨어져 내렸다.
마지막으로, 웅크린 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용의 뼈가 힘을 잃으며 바닥으로 쏟아졌다. 덜그럭거리며 넘어지고 부딪히며 뒹구는 뼈들을 피해 유리엔은 급히 뒤로 물러났다.
거리를 벌린 그는 성검을 늘어뜨리고 멀거니 무너지는 뼈들을 보았다.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것이 아무것도 아닌 뼈다귀가 되어 산사태처럼 쏟아졌다. 종내에는 중구난방으로 쌓인 뼈 무더기만이 남았다.
“……끝났나.”
[제니스의 경지에 발을 들인 것을 축하한다, 주인.]
성검의 말에 유리엔이 멍한 얼굴로 제 손을 들여다보다가, 가슴께에 손을 올렸다. 마나 코어가 심장처럼 박동하고 있었다.
검의 정점에 오른 자. 제니스, 겨우 한 발자국이었으나 분명히 그 안에 발을 디뎠다.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계단 위에서 달려오는 급박한 발소리가 들렸다. 유리엔은 반사적으로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계단을 틀어막았던 암벽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그 아래에 션이 엎어져 있는 게 보였다. 의외로 잘 버틴다 싶더라니 결국 기절한 모양이었다.
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난 릴리가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기어다녔다. 이곳은 아기가 기어다니기엔 좋지 않은 바닥이었다. 유리엔은 비틀거리며 걸어가 성검을 거두고 오른팔로 아기를 안아 올렸다.
긴장이 풀리자 왼팔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어떻게든 치료해야 할 듯했으나, 지금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묘하게 몽롱한 것이 통증도 잘 느껴지지 않았다.
품에 안긴 릴리가 그의 땀 냄새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버둥거리며 조그만 얼굴을 찡그렸다.
“이잉…….”
“유리엔!”
계단을 나는 듯이 뛰어내려온 에키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막 울음을 터뜨리려던 릴리가 그녀의 외침에 놀라 딸꾹거리며 울음을 멈췄다.
에키는 바다 속에서 언뜻 본 웅크린 뼈가 어디에 있는지 잘 알았다. 방향을 틀 방법이 없어 그대로 물을 통과해 하늘에서 떨어진 그녀는, 그나마 가까운 파편에 착지하다가 다리가 부러질 뻔했다.
요령 좋게 구르면서 전신 타박상 정도로 그치고 나니 주방의 파편이 있던 자리가 텅 비어 있는 게 보였다. 에키는 피가 식는 경험을 했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태피스트리가 걸린 복도로 향했다.
통로가 열려 있는 것을 보고 그가 이리로 왔구나 하며 찰나 안심했다가, 바다 속에서 가루가 된 용도 여기에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 정말로 미치는 줄 알았다.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몇 초가 무한하게 길었다.
그렇게 도착한 공터에는 용이 아니라 뼈 무더기가 되어버린 것이 있었다. 그것을 보고 있던 유리엔이 아기를 안고 돌아섰다. 눈이 마주쳤다.
막 새로운 경지에 접어든 충격과 통증이 뒤섞여 몽롱하던 유리엔의 정신이 그녀를 보자 흐물흐물 풀어졌다.
그는 본능처럼 그녀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무방비하게 기뻐하는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부르며 다가왔다. 엉망인 꼴로도 웃는 얼굴이 사람 여럿 잡을 만큼 황홀했다.
“에키.”
그가 무사하다. 겨우 안심한 에키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풀어진 얼굴로 다가온 유리엔은 옆에 릴리를 내려놓고 허리를 굽히더니 그녀에게 입맞춤을 했다. 쪼는 듯한 입맞춤이 그녀의 이마와, 눈가와, 뺨, 입술에 차례로 떨어졌다.
용과 싸우느라 지저분한 상태인데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에키는 황망히 그것을 받아들이다가, 입술에 닿았을 때 무심코 입을 벌렸다. 익숙해진 덕분이었다. 유리엔은 기다렸다는 듯 깊게 파고들어 왔다.
입을 맞추며 그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점점 그녀에게로 몸이 기운다. 에키는 계단에 앉은 채 뒤로 눕다시피 했다. 유리엔이 잘 안 움직이는 왼팔 대신 오른팔로 계단을 짚으며 몸을 지탱했다.
옆에 말똥말똥 앉아 있던 릴리가 제 앞에 늘어진 은발을 쥐고 잡아당겼다. 반짝이는 머리카락이 신기한지 아래위로 흔들어댔다.
그는 머리카락이 잡아당겨지는 말든, 무리하는 바람에 터져버린 상처들이 아프든 말든, 성검이 기가 차서 고래고래 소리를 치든 말든, 정신없이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그녀가 무사히 돌아온 게 기뻤다. 그녀가 좋았다. 닿고 싶었다. 더 깊이. 닿을수록 통증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맛이 간 머리는 본능에 몹시 충실했다.
“으응…….”
에키는 신음을 흘리며 움찔 어깨를 떨었다. 평소보다 배로 집요하고 격렬한 것이 첫키스를 할 때보다 더했다.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따라가기에 급급하던 그녀는 머리카락이 뽑히는 느낌에 정신을 차렸다. 은발만큼이나 신기한 분홍 머리를 발견한 릴리가 옆에 앉은 채 그녀의 머리카락을 마구잡이로 잡아당기고 있었다.
“……!”
릴리를 본 에키는 당황해서 그를 밀어냈다. 그녀에게 밀려난 유리엔이 눈썹을 늘어뜨린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글썽이는 눈이 몇 차례 느릿하게 깜박인다. 그 얼굴을 보니 그를 밀어낸 그녀가 굉장히 잘못한 것 같았다.
그리고 덜컥 그의 몸이 무너졌다.
“율?”
에키는 경악해서 제 위에 쓰러져 버린 그를 들어 올리려 했다. 그녀에게는 여리게만 보여도 사실 그는 극도로 단련된 몸이라 꽤나 무거웠다.
그녀는 축 늘어져버린 그를 들어올리기 위해 마나를 써야 했다. 버둥거리며 간신히 그를 일으킨 에키는 그가 기절하다시피 잠들었을 뿐임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사이 마음껏 그들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논 릴리가 양손에 분홍색과 은색 머리카락 몇 가닥을 함께 움켜쥐고 앉아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