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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141화 (141/211)

검을 든 꽃 141화

[주인아, 어떻게 할 거야??]

“기다려봐, 생각 중이니까.”

에키는 불을 피하며 초조하게 대꾸했다. 파편이 계속해서 부서지며 남은 파편 간의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바로 뛰어넘기엔 멀어서 중간의 넝쿨에 매달리자 열매가 터지며 산성액이 쏟아졌다.

그것을 피해 빠르게 이동하려던 그녀는 문득 든 생각에 마나 실드를 만들어냈다. 예상대로 산성액은 마나 실드를 통과하지 못했다. 그녀가 그것을 공격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보라색 마나의 막 위로 타고 흐르는 산성액에 그녀의 시선이 닿았다.

‘잠깐, 이거라면…… 될지도 몰라.’

그녀는 아래의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지체한 시간은 짧았으나 벌써 머리 위로 후끈한 열기가 덮쳐왔다. 용이 넝쿨에 매달려 있는 그녀를 향해 불을 뿜었다.

에키는 고민을 그만두고 감을 따라 그대로 손을 놓았다. 그녀의 몸이 까마득한 아래의 바다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으악! 야! 야! 떨어지면 어떡해!]

마검이 기겁해서 소리를 질러대건 말건 그녀는 아래를 똑바로 주시했다. 짙은 푸른빛으로 출렁이는 바다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물에 닿는 순간 마검이 비명을 질렀으나 에키는 눈을 감지 않았다. 첨벙, 하고 요란하게 물이 튀었다.

[주인아! 악! 주인 죽으면 안 되는데! 난 어떡하라고!]

“발, 아까는 녹아서 죽는 게 보고 싶다며?”

[그건 너 말고 다른 인간 얘기지! 딴 인간들은 다 죽어도 주인은 죽으면 안 된단 말이야! 죽지 마! 주인아 죽지 마!]

“귀 따가우니까 소리 그만 질러. 안 죽었어.”

[어? 진짜?]

에키는 전혀 젖지 않았다. 구 형태로 그녀의 몸을 완전히 감싼 마나 실드가 뼈까지 녹이는 산성 바닷물을 막고 있었다.

[……와, 마나 실드라는 거 되게 편하네?]

바다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짙은 푸름뿐. 아래로 내려갈수록 푸른빛이 짙어졌다. 밑은 빛조차 들지 않아 무저갱 같은 검은색이었다.

그녀는 물을 가르며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수면이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어, 야, 근데 이렇게 계속 빠져도 되는 거야? 결절이니까 끝이 있는 거겠지?]

“없을지도 몰라.”

[뭐? 그럼 큰일 난 거 아니야?]

“글쎄. 오히려…….”

에키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아래를 응시했다. 순식간에 검푸른 심해에 도달했다.

해저에는 에키의 짐작대로 바닥이 없었다. 그녀는 끝없이 떨어져 내렸다. 물거품이 마나 실드 뒤로 유성처럼 이어졌다. 이대로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에 짓눌려 죽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주인아? 이, 이거, 괜찮은 거야?]

“괜찮아. 봐.”

무한할 듯하던 어둠이 어느 순간부터 옅어지고 있었다. 암흑에서 검푸른 빛으로, 그리고 점점 더 푸르게 변하더니, 조금씩 붉어졌다.

푸른 물속에 불그레한 빛이 퍼져나갔다. 노을 지는 하늘 같은 빛깔이었다. 먼 아래로 일렁이는 수면이 보였다.

[잉? 저게 뭐야? 수면은 위에 있었잖아? 왜 아래에도 수면이 있는 거야?]

“바다에서 나왔던 용이 하늘로 뛰어들었었잖아. 그래서 혹시나 했는데.”

수면에 마나 실드가 닿았다. 작게 일었던 파문이 커지며 파도가 되어 출렁거렸다. 수면을 완전히 통과하자 발밑으로 결절 내부의 풍경이 드넓게 펼쳐졌다.

바다에 떨어졌던 그녀는 하늘에서 추락했다. 거대한 용의 몸뚱이가 이제 그녀의 아래에 있었다. 에키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

[우와. 너 똑똑하다.]

용의 덩치가 크다는 것이 이럴 때는 이득이었다. 공중에서 약간 방향을 튼 것만으로도 용의 위로 떨어질 수 있었다.

구형의 마나 실드는 기울어진 용의 등에 부딪혀 경사를 따라 데굴데굴 굴렀다. 내버려두면 아래로 떨어져 버릴 것이다.

그녀는 마나 실드를 흩어버리고 주르륵 미끄러진 다음 몇 바퀴 굴렀다. 중간에서 비늘 틈에 손가락을 넣어 잡으며 겨우 몸을 멈췄다.

“윽.”

물을 통과해서 속도가 줄긴 했지만 그래도 까마득한 높이였다. 실드로 일차적인 충격을 흘렸는데도 전신의 부담이 굉장했다. 다행히 마나로 강화한 덕에 어디가 부러지거나 하진 않았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피떡이 되었을 상황이었다.

짧은 신음을 흘리며 움츠러든 직후에 에키는 곧바로 움직였다. 용이 알아채기 전에 행동해야 했다. 가슴팍을 베어도 심장에 닿기 힘든 용을 상대로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명확했다.

넓은 용의 등 위를 가로지른 에키가 용의 날갯죽지에 도달했다. 마검에 새카만 검기가 몇 겹이나 덧씌워졌다.

그녀는 나무를 베듯이 가로로 눕힌 검을 날갯죽지에 찍어 넣었다. 이어 손잡이를 꽉 움켜쥐고 그대로 기다란 날갯죽지를 따라 달렸다.

그녀가 용의 날개를 베어냈다.

크아아악!

[인간-!]

소름끼치는 비명이 사방을 진동시켰다. 날개 잃은 용은 잘린 날개와 함께 녹색 피를 흩뿌리며 추락하기 시작했다.

* * *

유리엔은 먼 곳에서 에키의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덕에 그는 보다 빠르게 상황을 깨달았다.

[영악한 놈이군. 하긴, 마검의 마나로 물들었던 인간들에게 영향을 받은 결절이라면 살의만 있는 게 아닐 테니.]

“그게 무슨 뜻인가?”

[마검을 구성하는 재료에는 인간의 악의도 있지. 악의란 대체로 집요하고 교활한 법이다. 저 용은 그 악의에도 영향을 받았을 거다.]

집요하고 교활하다. 그 말을 듣자마자 퍼뜩 떠오른 것이 있었다. 그는 용에게 부서지는 파편들을 유심히 살폈다.

“……!”

무언가를 깨달은 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유리엔은 급하게 저장고 안으로 뛰어들어 가서 짐들을 마법 가방 안에 쑤셔 넣었다. 구석에서 릴리를 안고 덜덜 떨고 있던 션이 겁에 질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유리엔이 가방을 챙기며 그를 향해 말했다.

“일어나라. 이동해야 하니.”

“아, 아, 안에 있으라고 하지 않았어요?”

“여기 있다간 죽는다.”

그저 죽이고 싶어 날뛰는 짐승이면 자신을 다치게 만든 인간만을 노릴 것이다. 하지만 교활하고 악의 어린 짐승이라면.

‘우리가 숨어 있는 곳도, 그녀가 우리를 지키려 한 것도 알겠지.’

용은 언제든 방향을 틀어 이곳으로 올 수 있다. 그것이 에키를 공격하며 부수고 있는 성의 파편은 대부분 그녀와 그들이 있는 곳 사이에 있는 것들이었다. 멀리서 지켜보니 확연히 보였다.

‘길을 없애 버리려는 거다.’

이대로라면 그녀가 이리로 올 길이 사라진다. 물론 날개가 있는 용은 길과 상관없이 순식간에 날아올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죽는다.

‘다가갈 방법을 없애고 그녀가 지키려던 인간들을 그녀의 앞에서 죽이는 것. 악의와 살의가 동시에 충족되겠군.’

그러니 여기에 있어선 안 된다.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유리엔은 션을 잡아 일으킨 후 밖으로 나갔다. 어제 에키에게 던져지며 발목을 접질린 그는 심하게 절뚝였다.

“아이를 넘기고 업혀라. 가방은 그대가 들도록.”

“으, 네, 네…….”

션이 훌쩍이며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유리엔은 릴리를 안고 션을 업은 채, 전투가 벌어지는 곳을 피해 빙 돌아 이동했다. 와이번이나 용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소리를 죽였다.

중간에 크게 흔들리는 것에 놀란 릴리가 울음을 터뜨렸다. 션도 유리엔도 일순 오싹했으나 다행히 용이 난동을 부리는 소리에 울음소리가 묻혔다. 션이 다급히 릴리를 달랬다.

어느 순간 용이 불을 뿜는 것을 멈췄다. 그것은 허공을 빙빙 돌면서 긴 목을 빼고 아래를 살폈다.

에키가 바다에 뛰어드는 것을 제가 뿜어낸 불에 가려서 보지 못한 용이 그녀를 찾으려는 행동이었으나, 유리엔으로서는 용이 왜 저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을 공중에서 배회하던 용이 불현듯 방향을 틀었다. 용은 날갯짓 두어 번 만으로 자리를 옮길 수 있었다. 곧 무언가를 찾은 용이 추락하는 듯한 속도로 하강하더니 꼬리로 파편 하나를 후려쳤다. 그들이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숨어 있던 주방의 파편이었다.

[나오지 않았다면 죽었겠군.]

“끅…….”

그 광경을 본 션이 비명이 튀어나오려는 제 입을 틀어막으며 괴상한 소리를 냈다. 용은 앞발과 꼬리로 마구잡이로 파편을 부수더니 마지막 남은 조각은 입을 벌려 삼켜버렸다.

파편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자 용이 까마득한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그것이 다시 무언가를 찾듯 공중을 날아다녔다.

그사이에도 멈추지 않고 침착하게 이동한 유리엔은 얼마 지나지 않아 에키네시아가 알려주었던 태피스트리에 도달했다. 그녀가 말한 대로 벽돌을 누르자 아래로 내려가는 통로가 열렸다. 그는 션을 통로 안쪽으로 밀어 넣고 밖을 살폈다.

[용이 저러는 걸 보니, 마검의 주인이 사라졌나?]

“…….”

[죽은 건 아닐 거다. 죽었다면 용이 저리 찾으러 돌아다니진 않을 테니까.]

유리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그녀의 곁에 서고 싶다고 하면서, 이토록 무력하다니.’

주인이 무슨 심정일지 잘 아는 랑기오사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주인은 강하다. 역대 주인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강자였다. 이 속도로 성장한다면 서른 후반에서 마흔 즈음에 순조롭게 제니스가 될 터였다.

제니스였던 전 주인도 그 즈음에 경지에 이르렀고, 용을 잡을 때엔 창천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여럿 함께했었다.

그러니 자신의 주인이 약한 게 아니었다. 마검의 주인이 아예 규격을 벗어나는 존재일 뿐이다. 시간을 되돌리기 전에도 20대에 이미 제니스가 되었던 데다가, 제대로 된 용은 아니라 해도 몸뚱이는 용인 것을 홀로 몰아붙이고 있으니.

그러나 이런 사실은 주인에게 위로가 되지 못할 것이다. 성검은 침묵하다가 조심스럽게 종용했다.

[주인, 들어가 있는 게 낫겠다. 마검의 주인은 괜찮을 거다.]

“……알았다.”

신음처럼 답한 유리엔이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렸다. 그는 기다리고 있던 션과 함께 통로를 따라 내려가 지하의 넓은 공터에 도착했다. 안쪽은 몹시 어두웠다. 벽에 횃대가 걸린 것을 발견한 유리엔이 횃불에 불을 붙여 들어 올렸다.

“……!”

“으아악!”

빛이 비추는 곳을 본 션이 기겁해 뒷걸음질을 치다가 주저앉았다. 거대한 용의 뼈가 불빛에 어른어른 드러났다.

[이게 왜 여기에…… 그럼 밖의 용은 대체……?]

성검이 얼이 빠진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 * *

날개 잃은 용은 바다로 떨어져 내렸다. 에키는 함께 추락하며 마나 실드를 발동했다. 용이 바다에 빠지며 해일 같은 물보라가 일었다. 뒤따라 바다에 떨어진 그녀는 괴상한 현상을 목격했다.

물에 들어간 용이 심해에 닿자 먼지처럼 흩어져갔다. 수중에서 구멍 같은 것이 입을 벌렸다. 그 구멍은 검은 가루처럼 흩어진 용의 몸을 빨아들인 다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구멍 안쪽에 언뜻 보인 것은 웅크리고 있는 거대한 뼈였다.

* * *

유리엔은 공터의 천장이 뚜껑처럼 열리는 것을 보았다. 위로 검푸른 바다가 보였다. 바다에서 검은 가루 같은 것이 공터 안으로 떨어져 내리고 천장이 도로 닫혔다. 동시에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나며 그들이 들어왔던 계단이 돌벽으로 막혔다.

가루가 용의 뼈 위로 쏟아졌다. 그것이 뼈에 들러붙으며 천천히 용의 몸뚱이를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그 기괴한 광경을 보자마자 유리엔은 어떻게 하늘로 뛰어들었던 용의 상처가 모조리 나았는지 깨달았다. 나은 게 아니라 몸체를 새로 만들었던 거다.

[맙소사, 저게 완성되면……!]

“안다!”

가장 먼저 구성되고 있는 건 심장이었다. 저 용은 심장을 베어야 죽을 거예요. 에키가 지나가듯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심장 위로 살과 근육이 구성되고 비늘이 뒤덮고 나면 늦는다. 유리엔은 지체하지 않고 만들어지기 시작한 심장을 향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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