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40화
의외의 요청에 에키는 황망히 눈을 깜박였다. 유리엔이 진중한 낯으로 말을 덧붙였다.
“용을 베려면 중첩된 검기가 필요하다고 랑기오사가 알려주었다. 그대가 쉴 때 혼자 시도해 보았으나 제니스의 초입에 들어서지 않으면 쓸 수 없는 기술이라서인지 역시 잘 되지 않아서…….”
“잠깐만요, 제니스? 그게 뭔가요?”
“그대의 경지잖나.”
“제가 달성한 경지요?”
“그대가 제니스가 아니면 누가 제니스겠나. 중첩검기를 쓸 수 있고, 마나를 손발처럼 써서 물건을 움직이거나 부술 수 있으며, 마법을 파괴하는 게 가능하고, 마나 소드와 마나 실드를 만들 수 있는……. 설마 전혀 알지 못했나?”
에키가 얼이 빠진 표정을 짓자 유리엔이 몹시 당황했다. 그는 그제야 에키네시아가 오로지 독학과 실전으로 검을 익혔다는 것을 상기했다.
“어쩐지 마나 소드는 쓰면서도, 마나 실드는 쓰지 않더라니. 나는 그대가 피하는 것으로도 충분해서 쓰지 않는 줄 알았는데…….”
“……마나 실드요? 전 그게 뭔지도 몰라요.”
“마나 실드란 마나 소드를 만들 수 있는 제니스가, 음, 마나 소드는 그대가 빈손에 마나로 칼날 모양을 만드는 것을 부르는 명칭이다.”
유리엔은 창천기사단의 단장이었다. 일반인들이 제니스가 뭔지도 잘 모르는 것에 비해, 그에게는 제니스가 어떤 경지인지, 제니스가 가능한 기술이 뭐가 있는지에 대한 상세한 지식이 있었다.
창천의 기사들이 정립하고 대대로 덧붙여온 검술 이론이었다. 게다가 제니스인 주인을 모셔본 경험이 있는 랑기오사가 일러준 것도 꽤 되었다.
유리엔은 그녀에게 제니스의 기술에 대해 짤막하게 설명해 주었다. 제니스는 동시대에 두 명은커녕 한 시대에 한 명도 희귀했었지만, 천 년이 넘어가는 창천기사단의 전승에는 역대 제니스들이 보여준 기술이 대부분 정리되어 있었다.
다만 기술이 구현된 원리는 밝혀내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유리엔이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은 기술의 명칭과 형태 정도였다. 그러나 에키네시아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세상에. 왜 이렇게 써볼 생각을 못 했지.”
에키는 얼떨떨하게 중얼거렸다. 엷은 보랏빛이 감도는 마나가 그녀의 주위를 막처럼 감쌌다. 마나 실드였다. 보기에는 마법사들의 방어마법과 유사해 보였으나 검사인 제니스가 수식이 아니라 감으로 쓰는 기술이었다.
‘이거라면 용이 불을 뿜어도 막을 수 있겠네.’
[어? 주인아, 방금 너 뭐 한 거야?]
멀리 떨어져 있던 마검이 말을 걸어왔다. 에키는 마나 실드를 풀며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마나 실드, 발, 너도 몰랐어? 네 전 주인은 이런 걸 쓴 적이 없어?”
[몰라, 처음 봐. 걔보다 네가 강하니까, 걘 못 썼나 보지.]
에키가 한숨을 쉬는 사이 유리엔은 성검과 대화중이었다.
[원리도 모르는 상태에서 형태에 대해 듣자마자 바로 가능하다니, 소름이 끼치는군. 널 보고도 정말 엄청난 재능이라고 생각했는데, 마검의 주인은 무서울 정도야.]
“네 주인이었던 제니스와 비교해 보아도 그런가?”
[그녀는 마흔이 넘어서 제니스가 되었다. 그녀도 대단했지만, 마검의 주인은 뭐랄까……. 압도적이군. 타고난 재능도 재능이겠으나 처한 상황과 절박함이 저렇게까지 그녀를 개화시킨 거겠지.]
“그녀라서 가능한 걸 거다. 그 작은 불씨를 태양으로 키워낸 사람이니.”
성검은 그렇게 말하는 유리엔이 묘하게 들뜬 어투인 것을 눈치챘다.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뿌듯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주 좋아 죽는구나. 성검은 그 말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마검이 아니었으면 사방에 대고 그녀에 대한 자랑을 하고 다녔을지도 모르겠다.
그사이 에키가 마검을 손 안으로 회수했다. 유리엔도 성검을 문양으로 되돌리려 하자 그녀가 가로막았다.
“검기를 중첩하는 요령, 알려 드릴게요.”
“고맙다, 에키.”
유리엔의 얼굴이 밝아졌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그 얼굴이 심장에 좋지 않아 그녀는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우선 에키는 유리엔이 랑기오사를 들고 검기를 씌우게 만들었다.
“사실 특별히 요령이랄 건 없어요. 검기 위에 계속해서 검기를 덧씌우고 덧씌우면 되는 거라서. 이거 하다 보니까 검 없이도 검기를 만들게 되더라고요.”
“확실히, 중첩검기가 마나 소드의 기초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검기를 덧씌우려 하면…….”
랑기오사의 하얀 칼날에 어린 백색 마나가 조금 부풀었다.
“……이렇게, 검기가 커질 뿐 겹쳐 지지가 않는다.”
“으음, 솔직히 말로는 설명을 잘 못하겠어요. 그러니까 잠시만요.”
에키가 검을 든 그의 뒤에 달라붙었다. 그녀는 뒤에서 감싸 안듯 팔을 뻗어 그의 명치 근처, 마나 코어가 있을 위치에 손을 올렸다. 팔 안에서 그의 몸이 움찔거리더니 딱딱하게 굳었다.
랑기오사에 어려 있던 검기가 폭풍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게 깜박였다. 고통이나 부상에는 집중이 깨어져 본 적이 없던 그의 집중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해는 간다만, 집중해라, 주인.]
닿은 감촉이, 그녀의 체향이, 너무 강렬했다. 유리엔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제가 마나를 유도할……. 율? 다친 곳이 아프면 무리하지 말아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유리엔은 자제심이란 자제심은 다 끌어 모아 집중을 쥐어짜냈다. 간신히 검기가 형태를 다시 잡았다.
에키는 갸웃거리고는 마나를 유도하는 데에 집중했다. 사람의 몸 안에 마나를 집어넣는 건 살의에 물든 사람을 되돌릴 때 처음 해본 일이라 그녀로서도 깊게 집중해야 했다.
“……이렇게, 검기를 극도로 얇게 만들어서, 덧바르는 게 아니라 기존의 검기 위에 살짝 얹는 느낌으로요. 계속해서 겹친 다음, 마지막에 누르듯이 압축해서…….”
그녀가 그의 몸에 불어넣은 마나가 그의 마나를 이끌었다. 타인의 마나와 어우러져 하나의 검기를 만드는 건 유리엔이나 에키나 처음 경험해 보는 일이었다.
본능적으로 반발하려는 각자의 마나를 억누르고 상대와 부드럽게 접촉한다. 동조하는 느낌. 하얀색과 보라색이 뒤섞인 검기가 형성되자 기묘한 일체감이 온 몸을 적셨다.
그건 정말 이상한 느낌이었다. 에키는 한 차례 시범을 보이고 얼른 마나를 거두었다. 그에게서 물러나는 그녀의 뺨이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대, 대충 이런 식이에요.”
“……원리는 알겠다. 익숙해지려면 연습이 필요하겠군.”
한 번 경험해 봤다고 바로 파악하는 유리엔도 평범의 범주를 넘어서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처럼 약간 붉어진 낯의 유리엔이 검을 거두는 순간이었다.
캬아아아!
아득한 거리에서 터져 나온 울부짖음이 사방을 진동시켰다. 졸고 있던 션이 화들짝 놀라 일어나고 릴리가 깨어나 울음을 터뜨렸다. 유리엔과 에키는 즉시 달려가 문을 열고 밖을 보았다.
하늘이 붉어져 있었다. 너무 빨랐다. 하늘이 언제 붉어질지는 몰랐지만, 파란 하늘이 처음 결절에 들어왔을 때만큼은 유지될 거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반나절 정도 말이다.
그러나 반나절도 되기 전에 어스름이 내렸다. 그리고 곧바로, 붉은 하늘을 물처럼 가르며 용이 머리를 내밀었다. 완전히 빠져나온 용이 날개를 폈다.
“역시 나았어…….”
에키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그녀가 입힌 부상이 보이지 않았다. 용이 나온 이상 이동하는 건 위험했다. 그녀는 판단을 끝내고 유리엔을 돌아보았다.
“율. 제가 나갈게요. 안에서 나오지 마세요.”
유리엔은 고통스러운 빛을 눈에 띠었다가, 빠르게 그것을 감추었다. 자신은 부상자였고, 아직 용을 벨 실력이 되지 않았다. 돕고 싶다는 이유로 방해가 될 수는 없었다.
그는 붕대로 감싸놓았을 뿐인 그녀의 발에 시선을 주었다.
“발은?”
“이런 곳에서 뛰어다니려면 맨발이 나아서요.”
“알았다. 부디…… 조심해라.”
그가 감추었다지만 그녀는 언뜻 드러난 그의 심정을 보았다. 사실 그녀로서는 모든 것을 알고도 그녀를 지지하고, 이해하고, 걱정하며, 곁에 있어주려 하는 그의 존재 자체가 넘칠 정도의 도움이었다.
에키는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꾹 누르고는, 발갛게 달아오른 뺨으로 웃었다.
“다녀올게요.”
유리엔은 홀린 듯한 눈으로 그 미소를 보았다. 치맛자락과 리본으로 올려 묶은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여름에 저택의 정원을 산책하는 소녀 같은 차림으로, 그녀는 마검을 뽑아 들고 날 듯이 뛰어올랐다.
에키는 최대한 빠르게 주방에서 멀어졌다. 분홍색 머리카락은 파란 바다와 진회색 성의 파편들 사이에서 쉽게 눈에 띌 것이다. 그녀는 용이 금세 자신을 발견하고 공격하러 내려오리라고 예상했다.
실제로 용은 금방 그녀를 발견하긴 했다. 그러나 그녀를 발견한 용이 취한 행동은 예상과는 달랐다.
용은 높은 창공에서 내려오지 않고 불을 뿜었다.
벌겋다 못해 푸르게 보이는 화염이 천벌처럼 내리꽂혔다. 에키는 쉽게 그것을 피했다. 더 가까운 거리에서 쏟아지던 불도 피하던 그녀가 까마득한 높이에서 떨어지는 불을 피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녀가 피한 땅이 불의 압력에 부서져 내렸다. 용은 그녀가 이동한 곳에 다시금 불을 뿜었다. 에키는 또다시 피했다. 그것을 몇 차례 반복하자 그녀는 용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저거, 내려올 생각이 없는 거 같은데?]
마검의 말대로였다. 용은 그녀가 절대 닿을 수 없는 높이의 하늘에서 불만 뿜어댔다. 에키는 기가 찼다.
“지금 인간이 무서워서 안 내려온다는 거야? 용이?”
[결절 안이니까 가짜 용이잖아.]
“가짜건 뭐건!”
[랑이 그러는데, 원래 진짜 용은 마법을 쓴대. 말도 잘하고 말이야. 저건 몸뚱이는 진짜 용이라 해도 머리엔 살의만 든 짐승이라서 마법을 못 쓰는 것 같다던데?]
“그건 정말 다행이네.”
저 용이 마법까지 써댔다면 목숨이 위험했을 것이다. 그녀는 어찌 살아남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모조리 죽었겠지. 간담이 서늘했다. 그러면서 에키는 계속해서 불을 피하고 있었다.
[근데 주인아, 이거 좀…… 불리하지 않아?]
“불리하지. 엄청.”
그녀는 응접실의 파편에서 넝쿨을 타고 복도의 일부로 넘어갔다. 넝쿨이 감겨드는 속도보다 그녀의 움직임이 빨랐기에 붙들리지는 않았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서 터진 열매가 뿜은 산성액이 비처럼 쏟아지며 넝쿨을 끊어버렸다.
응접실의 파편은 내리꽂힌 불에 부서지고 타오르며 바다로 떨어졌다. 에키는 반쯤 부서진 복도의 벽 위에 올라서서 그 꼴을 보았다. 그녀가 디뎠던 곳마다 용의 불에 부서져 내려서 바다가 점점 더 잘 보이고 있었다.
용이 그녀의 머리 위로 다시 불을 뿜었다. 그녀는 아래에 있는 지붕의 일부로 뛰어내리며 중얼거렸다.
“디딜 곳이 사라지고 있으니까.”
불을 끝없이 뿜을 수 있는 건 아닐 터다. 용의 불이 한계에 달하는 것과, 그녀가 디딜 바닥이 전부 사라지는 것 중에 어느 쪽이 빠를까.
확실한 것은, 용은 지치면 하늘로 뛰어들어 회복하고 나타나겠지만 사라진 바닥은 다시 생겨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저거 처음부터 널 맞추는 게 아니라 파편들을 죄다 부숴버릴 목적인 거 아니야?]
“아마도. 그러다 내가 맞으면 좋고, 아니면 바닥이 줄어드니 좋고.”
이를 갈며 에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나 실드로 막는 건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 용은 그녀가 아니라 그녀 근처의 모든 파편을 부수면 그만이니까. 피할 곳을 잃은 좁은 바닥에서 막고만 있는 건 자살 행위였다.
숨어버리면? 용은 모든 파편을 부술 때까지 멈추지 않겠지.
그녀는 또다시 쏟아져 내리는 불을 피하며 마검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검게 물들었다.
반원을 그리며 휘둘러진 검에서 검은 마나가 화살처럼 쏘아졌다. 날아가는 검기의 속도는 상당했으나 거리가 너무 멀었다. 용은 날갯짓 한 번으로 그것을 피했다.
[야, 그런 걸로는 답이 없겠는데?]
검은 용은 손바닥만 하게 보였다. 아무리 그녀가 높이 뛰어도, 날개가 없는 이상 저것에 도달하는 건 불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