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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139화 (139/211)

검을 든 꽃 139화

검을 떨어뜨려놓은 에키네시아와 유리엔은 기오사들이 무슨 대화를 하는지 몰랐다. 말을 걸어오면 들을 수 있지만, 기오사들은 각자의 주인에게 따로 말을 걸진 않았다.

그동안 에키는 유리엔에게 연회 때 그녀와 2황자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포함한, 그가 모르는 것들에 대해 전부 털어놓았다.

서로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녀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피로를 느꼈다.

혹사한 몸이 휴식을 요구하는 탓도 있었고, 기대어 있는 그의 품이 지나치게 따뜻하고 편안한 탓도 있었다. 그의 앞에서 항상 유지되던 긴장이 풀려서일지도 모르겠다.

눈이 자꾸만 감겼다. 유리엔이 그런 그녀에게 속삭였다.

“에키, 좀 쉬는 게 좋겠다.”

“경계를…….”

“내가 깨어 있잖나.”

“당신이 더 피곤할 텐데요.”

“그다지. 그대가 일어난 후에 자면 된다. 먼저 자라.”

그리 말하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나른했다. 에키는 애써 눈꺼풀을 들어 올리다가, 유리엔이 그녀를 안아 올리는 바람에 화들짝 놀랐다.

“잠깐만, 율, 부상자가! 팔 안 아파요?”

“가끔 그대는 잊어버리는 것 같은데.”

그는 아까 에키가 담요를 펼쳐놓았던 곳으로 가서 그녀를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마스터이고, 그대만큼은 아니라도 숱한 부상을 경험해 보았다. 이 정도 부상에 휘둘리지는 않는다.”

“…….”

“그러니 나를 믿고 쉬어라.”

유리엔이 그녀의 바로 옆 술병이 진열된 선반에 기대앉았다. 에키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자리에 누웠다.

그가 손을 뻗어 누운 그녀의 이마 위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눈이 마주치자 눈매가 접히며 예쁜 웃음을 돌려준다.

에키는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설핏 웃고는, 금세 잠들었다. 이마에 보드랍고 말캉한 감촉이 눌렸다가 멀어지는 게 흐릿하게 느껴졌다.

유리엔은 잠든 에키네시아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고 제 오른손을 보았다.

그녀가 용과 싸울 때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이토록 스스로가 나약하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그는 검을 익히면서 벽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적수가 될 만한 사람도 없었다. 막연한 향상심과 성실함은 가지고 있었으나 절박함을 느껴 보지는 못했다. 에키네시아가 마검을 이겨내기 위해 지독하리만치 절박하게 자신을 갈고 닦은 것과 달리.

좀 더, 강해지고 싶다.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는 생애 최초로 느낀 절박함을 품고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서 가상의 용을 향해 검을 겨누어본다. 그의 몸을 타고 마나가 휘돌기 시작했다.

* * *

에키네시아는 정확히 세 시간 만에 눈을 떴다. 옷차림이 불편했지만 놀라울 정도로 편안하게 잠들었다. 짧지만 깊은 잠이었다.

몸을 일으키자 션과 마주 앉아 있던 유리엔이 바로 알아차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좀 더 자지 않고.”

“이 정도면 충분해요.”

그는 더 이상 무어라 하지 않고 식사를 챙겨주었다. 션이 품에 안고 있는 딸아이에게 미음을 먹이며 꾸벅 인사를 했다.

“아까는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그녀가 잠든 동안 유리엔에게 대략적인 설명을 듣고 침묵을 부탁받은 션은 직접 목격한 마검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아니었다면 용에게 딸과 함께 죽었을 상황에서 마검이라며 난동을 피울 만큼 못난 인간이 아니었다.

“아뇨, 당연한 일인 걸요.”

에키는 머쓱하게 시선을 피하며 대꾸하고는 빠르게 식사를 했다. 식욕은 없었으나 체력 소모가 심해서 배를 채워줘야 했다. 유리엔이 만든 요리가 그녀의 입맛에 정말 잘 맞았기에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바로 바깥의 동태를 살폈다. 하늘인지 뭔지 모를 위에 있는 것은 여전히 푸른빛이었다.

“습격이 있거나 하진 않았나요?”

“전혀. 신기할 정도로 조용하다.”

“그럼 율, 좀 쉬어요. 무리했잖아요.”

유리엔은 사양하지 않았다. 피로한 상태로 버려봤자 짐이 될 뿐이니까. 에키는 그가 잠드는 것을 지켜보고 나서 우선 옷을 갈아입었다. 용의 피가 말라붙었고 산성액에 군데군데가 녹았으며 밑단을 잘라낸 드레스는 누더기가 따로 없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버리고 코르셋을 풀어놓았다.

회귀 이후 사치를 누렸더니 목욕을 할 수 없는 게 좀 아쉬웠다. 그녀는 몸을 대강 닦고 연하늘색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여기서 싸우려면 몸이 가벼운 편이 좋았다. 가죽 바지와 가죽 자켓보다는 무릎에 안 닿는 짧은 원피스가 가볍고 편했다.

‘그리고 이쪽이 더 취향이니까.’

에키에게는 중요한 선택 기준이었다.

장신구를 모두 풀어놓고, 화장을 지웠다. 유리엔 앞에서 이제 ‘아가씨’인 모습을 고집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에키는 입술 정도는 다시 발랐다. 바른 쪽이 예쁘니까.

성가시지 않도록 리본으로 머리를 높게 올려 묶었다. 신발은 신지 않았다. 맨발인 편이 더 잘 움직일 수 있었으므로.

옷을 갈아입은 에키는 응급처치만 되어 있던 션을 치료해 주며 잡담을 했다. 그는 로잘린에게 들었던 대로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기 릴리는 몹시 귀여웠다. 에키가 바라보자 방긋 웃기까지 했다.

“어제는 너무 놀라서 계속 울었지만, 원래는 순하고 낯도 별로 가리지 않는 아이입니다.”

릴리가 운 탓에 위험해진 것을 기억하는 션이 죄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에키는 괜찮다며 그를 안심시켰다.

‘둘 다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솔직히 살의에 물든 사람들을 연구실에서 발견했을 때, 션이나 아기도 멀쩡하지 못할 거라 각오했었다.

공작이 베푼 한 조각의 자비였는지, 아니면 그저 아직 실험할 차례가 아니었을 뿐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그들은 물들지 않았다. 운이 좋았다.

치료가 끝난 션이 릴리를 재우기 시작하자 에키는 내내 붙어 있었던 성검과 마검에게 다가갔다. 마검을 집어 드니 바르데르기오사가 빽 소리를 질렀다.

[으악! 야! 야! 말 끊겼잖아! 도로 내려놔!]

“뭐?”

[주웅요한 이야기 중이었단 말이야!]

“성검을 괴롭히고 있는 게 아니고?”

[무슨 소리야, 내가 왜 잴 괴롭혀? 나처럼 착한 검이 어디 있다고!]

에키는 의심스럽게 투명한 칼날을 내려다보았다. 이어 바닥에 있는 성검을 바라보았다.

주인처럼 하얗고 예쁜 검. 마검을 상대하느라 고생했을 거란 확신만 들었다. 무심코 그것을 집어 들려던 그녀는 손잡이 바로 앞에서 손을 멈췄다.

쥘 수 있을까.

거대한 학살을 저질렀던 그녀는 성검을 만질 수조차 없었다.

오너가 되는 건 기대도 하지 않았으나 건드릴 수도 없을 줄은 몰랐었다. 악행을 저지른 적이 한 번도 없어야 랑기오사 오너가 될 수 있지만, 랑기오사를 만지거나 옮기는 것 자체는 평범한 사람들도 가능했으니까.

당시의 에키네시아는 성검의 정의에 따라 ‘처벌해야 할 악인’이었기 때문에 랑기오사를 건드릴 수가 없었다. 그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악마라 부르며 그녀가 천벌을 받기를 원했으므로.

시간을 되돌려 모두를 되살려 냈어도, 그 죄는 남아 있을까. 랑기오사에 누적되는 ‘인간의 정의’는 여전히 그녀를 살아 있을 가치가 없는 악마라고 판별할까.

[너 뭐 해? 랑한테 물어보려는 거 아니었어?]

“랑?”

[성검 말이야. 랑한테 직접 물어봐, 내가 걜 괴롭혔는지 아닌지.]

그새 친해졌는지 마검은 아무렇지도 않게 성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물어봐, 얼른! 난 당당해!]

마검이 억울하다는 어조로 채근했다. 에키는 엉겁결에 성검을 집어 들었다.

쥘 수 있었다. 랑기오사는 그녀의 손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녀는 손에 잡힌 성검의 손잡이를 뚫어져라 보았다.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울지 않기 위해 약간 턱을 들었다.

“……랑기오사?”

조심조심 불러보았다. 몇 차례 더 불러보아도 성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검 쪽을 노려보았다.

“말 안하잖아.”

[어, 이상하다? 대답 안 해? 나 랑한테 닿게 해줘.]

그녀는 두 검의 칼날을 맞닿게 했다. 곧바로 한심하다는 어투의 말이 바르데르기오사에게 전해졌다.

[기오사는 주인 외의 인간과 대화할 수 없다, 멍청아. 그것도 모르고 있었느냐?]

[진짜? 야,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주인 말고 다른 사람이 날 만지면 살의에 물들어 버린다고!]

[문양을 통해 주인과 연결되는 건 알면서, 문양도 없는 인간과 연결되는 게 불가능한 건 왜 모르는 거냐.]

[어……. 그러게?]

랑기오사가 혀를 차는 소리를 냈다. 바르데르기오사는 구시렁거리며 주인에게 성검의 말을 전해주었다.

“오너만이 대화할 수 있는 거였구나. 하긴 당연하겠네.”

[어쨌든 난 안 괴롭혔어. 당장 나 쓸 것도 아니니까 빨리 붙여놔 줘.]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데?”

[기오사끼리만 할 수 있는 이야기야. 주인은 몰라도 돼! 비밀이야!]

바르데르기오사가 뻐기는 어조로 말했다. 에키는 한숨을 쉬고는 두 검을 겹쳐서 내려놓았다.

“랑기오사 너무 귀찮게 하지 마.”

[귀찮게 안 한다니까.]

항변한 마검이 곧 조용해졌다. 성검과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에키는 검들로부터 좀 떨어진 곳에 앉아 바깥을 경계하며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구상했다. 그사이 아기를 재우던 션은 꾸벅꾸벅 졸다가 딸과 함께 도로 잠들어 버렸다.

유리엔은 오래 자지 않았다. 두 시간 남짓 만에 깨어났으니 거의 눈만 붙인 수준이었다.

“더 자도 돼요, 율.”

“나 역시 이 정도면 충분하다.”

그가 에키 곁으로 다가왔다. 에키는 가방에서 꺼낸 작은 수첩에 연필로 지도 같은 것을 그려놓은 상태였다.

섬처럼 듬성듬성하게 그려진 원들이 보였다. 그리 자세하지는 않아도 결절 내부의 구조인 모양이었다. 유리엔이 그녀의 옆에 앉아 그것을 들여다보자 그녀가 설명했다.

“다시 용이 나타나면 이 근처에서는 힘들어요. 성의 파편이 거의 다 부서져서, 디딜 바닥이 없잖아요. 만약 제가 입힌 상처가 전부 나았다면 두세 번 베는 걸로는 무리거든요.”

용에게 들키지 않고 버틸 수 있다면 그게 최선이겠지만, 들킬 경우 전투를 고려해야 했다. 유리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편이 많이 남아 있는 곳으로 이동하는 게 낫겠군.”

“네. 연구실에 있는 사람들도 걱정 되고……. 그쪽으로 가는 게 좋겠어요.”

자아를 잃어 그저 살아 있을 뿐인 사람들이라도, 그대로 내버려둘 순 없었다. 그녀의 말에 그가 지도에 그어진 선을 가리켜 보였다.

“이건 이동할 경로를 잡아본 건가?”

“전 연구실 근처에서 출발했으니까요. 오는 와중에 봤던 걸 대충 그려 봤는데, 음, 정확하진 않아요. 길은 참고만 하세요.”

에키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연구실과 그들이 있는 술 저장고 사이의 한곳을 짚었다.

“여기에도 지하로 연결되는 문이 있을 거예요. 복도에 걸려 있는 태피스트리가 익숙하더라고요.”

“태피스트리?”

“그 뒤에 지하로 연결되는 통로가 있어요. 지하 2층으로 곧바로 이어지는 통로죠. 지하 1층과 지하 2층 사이 통로는 당신이 알려준 대로 무너져 있지만…….”

“그대가 말했던, 용의 뼈를 확인하러 가는 용도의 통로인가.”

“네, 맞아요. 태피스트리의 용 눈 부분 뒤의 벽돌을 누르면 열려요.”

“그리로 옮기자는 건가?”

“그래요. 용이 살아서 돌아다니니 거긴 비어 있을 거고, 넓으니까 안에서 불을 피울 수도 있겠죠. 여기에 사람들을 숨겨두고, 용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하면서 당신과 저만 드나드는 게 좋겠어요.”

“결절이 저절로 사라질 때까지?”

“그럴 수 있으면, 되도록이요.”

용과 싸울 수는 있어도, 용을 상대로 다른 사람들을 지키는 건 어려웠다. 마법사도 아닌 그녀가 불이 뿜어지는 걸 막을 방법은 없었다. 유리엔이라면 공격을 피하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그게 불가능했다. 유리엔도 다리까지 다친 부상자라 위험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용을 벨 수 있는 건 그녀 혼자뿐이니, 유리엔마저도 용을 상대할 때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유리엔 역시 현재 상황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불쑥 물었다.

“에키, 내게 검기를 중첩하는 법을 가르쳐줄 수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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