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38화
“폐위는 당연하나 그 뒤의 처벌이 문제다.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미수에 그친 터라, 극형에 처하긴 어렵다. 과거와 달리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으니까.”
유리엔은 냉정한 현실을 말했다. 마검의 학살을 체감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고 상대가 몇백 년을 이어온 제국의 황제이기에, 폐위까진 쉬워도 극단적인 처벌은 힘들었다.
이 명분을 내걸고 황제를 치는 게 황태자라는 것도 문제였다. 실질적으로 피해를 본 사람이 없는 상태라, 사형에 처할 경우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들이 아비를 죽이다니’라는 손가락질 같은.
그래서 황태자는 신분 박탈과 유폐 정도의 처분을 구상하고 있었다.
에키는 턱을 괸 채 생각했다. 그녀 역시 이번 삶에서는 아무도 마검 때문에 죽지 않았을 거라 판단했었다. 그래서 유리엔을 봐서라도 넘어가 주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연구실에 있을, 이미 살아 있다고 하기 어려운 네 명의 사람을 떠올렸다.
얼마나 많은 자들이 희생되었을까. 황제는 디아상트 공작이 이런 실험을 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그녀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미수가 아니라면요?”
“……?”
유리엔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에키는 무표정하게 말을 이었다.
“이곳으로 오는 열차 안에서 2황자 전하와 디아상트 공작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죠. 제가 어떻게 그것을 확신했는지 알려 드릴게요.”
그녀는 디아상트 공작가가 숙청되었던 미래와, 그녀가 2황자와 디아상트 공작 간의 관계를 의심하게 된 계기를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연구실에서 그녀가 본 것과, 마법 가방 안에 넣어둔 노트와 마석 케이스에 대해서도.
그들은 아직도 서로에게 말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녀의 말을 들으며 유리엔의 움켜쥔 주먹에 힘이 들어가 핏줄이 섰다. 그러다가 어느 지점에 이르러 그의 낯이 창백해졌다. 그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잠깐, 에키. 그들에게 있던 살의를 그대가 흡수했다고?”
“……그러고 보니, 율.”
에키가 고개를 기울이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션이 잠든 곳에서 좀 떨어진 곳에 쌓여 있는 커다란 나무 술통에 나란히 기대 앉아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그녀가 유리엔의 바로 앞으로 오더니 그에게 바짝 다가앉았다. 그러곤 그의 목덜미로 손을 뻗었다.
“이제 이 붕대 아래에 뭐가 있는지 보여줄 수 있죠?”
유리엔이 움찔 놀라며 상체를 뒤로 물렸다. 뒤에 있는 나무 술통 탓에 그가 물러날 수 있는 공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에키는 그의 목깃에 손끝을 댄 채 속삭였다.
“제가 기절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세요. 그 상처와 관계가 있는 거죠?”
“이건, 그저 부상일 뿐이다.”
3주쯤 되었는데도 아직 희미하게 멍이 남아 있었다. 유리엔은 그녀에게 그것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살의에 휘둘려 자신을 죽이려 한 자국은 분명히 그녀를 슬프게 만들 테니까.
하지만 에키는 확고했다.
“그저 부상이라면 왜 이토록 숨기나요? 역시 제가 당신을 다치게 만들었나요?”
유리엔은 대답하지 못했다. 에키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그의 목깃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그가 놀라 그녀의 손을 움켜쥐었으나,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목을 감고 있는 붕대가 드러나자 유리엔은 포기하고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에키는 매듭을 풀고 붕대를 벗겨냈다.
하얀 피부에 흐려져가는 멍이 남아 있었다. 거의 희미해졌지만 누가 봐도 목을 졸렸던 자국이었다. 에키의 손에서 풀린 붕대가 스르륵 미끄러졌다.
“이건…….”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멍 자국을 더듬었다. 그녀의 것일 게 틀림없는 손자국이었다. 회복이 빠른 마스터임에도 이렇게 자국이 남아 있다는 건 거의 목이 부러질 뻔했다는 소리였다.
“이러고도 아무 일도 없었던 척, 모르는 척했단 말이에요? 당신은 정말이지……!”
왈칵 화를 내던 에키가 말끝을 흐렸다. 그가 부득불 이것을 보이지 않으려 한 이유를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어서.
그녀는 힘이 빠진 머리를 툭 하고 그의 어깨에 기댔다. 유리엔은 찰나 숨을 멈췄다가, 팔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대의 의지가 아니었음을 잘 안다. 신경 쓰지 마라.”
“아뇨, 신경 쓸 거예요.”
약간 젖은 목소리로 반박한 에키가 그에게 기댄 채 호흡을 골랐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손길과 닿은 곳에서 느껴지는 그의 심장박동이 위로처럼 다정했다. 그녀가 속삭이듯 물었다.
“완전히 물들었던 거죠, 저는?”
“……그래.”
“어떻게 제압했어요? 쉽지 않았을 텐데.”
유리엔은 잠시 망설이더니 곧 그 때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그의 가슴팍에 거의 기댄 채 이야기를 듣던 에키는 그가 했던 도박에 기겁해 상체를 세웠다.
“그런 무모한 짓을 했단 말이에요? 미쳤어요? 차라리 그냥 봉인구를 채우지 그랬어요!”
“마나 없이 독을 버티는 건 불가능할 테니, 그럴 순 없었다.”
“그렇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성공했지 않나.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제 혹여 그대가 흔들리더라도 도울 수 있으니 다행인 일 아닌가.”
유리엔이 웃었다. 그 웃는 얼굴이 정말로 기뻐 보여서 에키는 말문이 막혔다. 보고 있자니 맥이 풀리며 뭉클해졌다.
[아, 저래서 살의는 줄었는데 상쾌하지 않고 찝찝했던 거구나. 주인아, 쟤보고 앞으론 그거 하지 말라고 해. 그거 별로였단 말이야!]
“좀 닥쳐, 발.”
철없는 마검의 말 때문에 몽글몽글 풀리던 기분이 흐트러졌다. 에키가 짜증스럽게 쏘아붙이자 유리엔이 눈을 깜박이더니 물었다.
“마검이 무어라 했나?”
“……네.”
유리엔 앞인 걸 알면서도 긴장이 풀려서 막말을 해버렸다. 그게 부끄러워서 그녀는 살짝 시선을 피했다. 가만있던 성검이 그 광경을 보고 유리엔에게 말을 걸었다.
[반응을 보아하니 어느 정도 마검의 성격이 짐작되는군. 주인, 바르데르와 대화를 할 수 있게 해주겠나?]
“대화라니, 왜?”
[바르데르기오사가 깨어난 건 이번이 겨우 두 번째라,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어서 말이지. 어떤 성격인지 좀 알아두고 싶다.]
유리엔의 중얼거림에 에키가 의아한 듯 그를 보았다. 유리엔이 그녀에게 말했다.
“성검이 마검과 대화해 보고 싶다고 청하는데, 괜찮겠나?”
[어, 나 할래! 할래! 얘기해 보고 싶어!]
마검이 신이 나서 끼어들었다. 에키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이 촐싹거리고 아무 생각 없는 녀석을 성검과 만나게 해줘도 되는 걸까.
[빨리! 빨리이!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단 말이야! 주인아, 뭐 해?]
바르데르기오사의 징징거림에 결국 그녀는 손에서 마검을 꺼냈다.
“성검에게, 음, 미리 미안하다고 전해주세요.”
“어째서? 그대가 미안할 이유가 있나?”
“바르데르기오사가 좀, 아니, 많이 철이 없어서요.”
[내가 뭘! 나 똑똑하고 착하고 눈치도 빨라! 너랑 쟤랑 요상한 분위기면 열심히 입 다물고 참, 아! 아! 아파! 왜 때려!]
에키는 억울하다고 항변하는 마검을 한 대 쥐어박은 후 한쪽에 내려놓았다. 유리엔도 성검을 꺼내서 그녀의 마검과 칼날이 닿도록 놓았다.
[직접 대화하는 건 처음이군, 바르데르기오…….]
[있잖아, 어떻게 하면 너처럼 계속 깨어 있을 수 있어?]
랑기오사가 차분하게 하는 인사를 끊어먹으며 바르데르기오사가 캐물었다. 에키네시아의 반응을 보고 어느 정도 짐작했던 일이라 성검은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랑기오사로서의 특징이자 능력이다. 너는 불가능해.]
[그런 게 어딨어, 같은 기오사인데! 진짜 치사하다. 나도 깨어 있고 싶단 말이야!]
[치사하지 않다. 이건 공정한 기능이야. 주인이 악행을 저지르면 나를 쥘 수 없게 되는데, 악행의 기준을 알려주기 위해서는…….]
[넌 그럼 안 자? 잠 안 와?]
[자려 하면 잘 수는 있다. 굳이 그럴 필요성을 못 느낄 뿐이지. 피로하지 않은데 잠을 잘 필요는…….]
[잔다고? 그럼 어떻게 일어나는데? 난 주인이 없는 상태에선 일어날 수가 없는데.]
[너나 다른 기오사들은 주인의 혼에 자아를 의존하지만, 내 자아는 주인과 별개로 본체에 깃들어 있다. 처음부터 구조가 달…….]
[넌 네 마음대로 깰 수 있단 거네? 어떻게? 일어나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 난 잠들어 있을 땐 아무 생각도 못 하겠던데.]
[너는 안 되는 게 정상이다. 내 경우엔 만들어질 때부터 제작자가 의도하고 구조를…….]
[요령 좀 알려줘. 나도 깨어 있고 싶어! 너만 알고 있다니 치사해!]
칭얼거리는 어투로 마검이 졸라댔다. 하는 말마다 끊긴 성검은 몇 마디 나누지도 않고 피로감을 느꼈다.
[나만 알고 있는 게 아니라, 원래 그런 거라고 하지 않았나.]
[알아, 네 자아는 본체에 깃들어 있다며? 그러니까 어떻게 깃들어 있는지 알려달란 거라고.]
[알면서 뭘 더 묻는 거냐?]
[너 은근 답답하다. 바보야?]
마검이 한심하다는 듯 말하자 성검은 순간적으로 울컥할 뻔했다. 랑기오사는 바르데르기오사의 정신연령을 생각하며 참았다. 마검이 종알종알 말을 이었다.
[너 말고 다른 기오사들은 주인의 혼으로부터 조건에 맞는 자극을 받아야 각성할 수 있고, 주인의 혼이랑 연결된 건 주인에게 새겨진 문양이잖아. 그래서 연결이 끊기면 잠들어 버리는 거고.]
[당연한 얘길 하는군.]
[야, 너도 주인의 손에 문양이 새겨지잖아. 그럼 너도 문양을 통해서 주인이랑 연결된다는 건데, 연결된 상태이면서도 주인의 혼에 영향받지 않는 비결이 뭐야?]
[아까부터 말했잖나, 내 자아는 주인과의 연결에 의지하는 게 아니라 내 본체인 검 자체로 유지된다. 연결과 별개로 말이다.]
[정확히 어디에? 네 본체를 감싸고 도는 그 황금빛 문양? 뭐가 네 자아를 유지하는 거야?]
[그렇게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다만. 아마 그 문양이 맞을 거다.]
[그럼 봐, 내 본체에도 칼날에 문양이 있어. 대장장이가 심심해서 새긴 문양은 아닐 거 아냐. 다른 기오사들은 이런 문양 없잖아!]
[……!]
[나도 너처럼 내 의식을 주인과 연결된 문양이 아니라 내 칼날의 문양을 통해 유지하면, 주인이 정신을 잃어도 자아를 유지할 수 있어?]
성검은 의외로 날카로운 질문에 상당히 놀랐다. 제작자부터 다른 신검 둘을 제외하면, 확실히 다른 기오사의 본체에는 자신이나 마검 같은 문양이 없었다.
바르데르기오사가 아이 같은 말투에 막무가내로 굴어도 역시 기오사인 만큼 마냥 어린아이인 건 아니었다. 잠시 침묵하던 성검이 조용히 물었다.
[바르데르. 왜 그렇게 그것에 집착하는 거지?]
[나도 너처럼 주인과 별개로 깨어 있을 수 있으면, 주인이 정신을 잃어도 내가 조절할 수 있잖아.]
[……살의 말이냐?]
[어. 날뛰고 나면 나야 좋지만…… 쟤가 엄청 화낸단 말이야. 난 주인이 화내는 게 싫어. 너도 봤다며? 쟤 자해했을 때 진짜 놀랐다고. 그 땐 장난 아니어서, 한동안 말도 못 붙였어.]
그렇게 말하는 마검의 목소리는 풀이 죽어 있었다.
[인간 좀 죽인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닌데, 주인은 아닌가 봐. 찝찝하면 나쁜 놈만 골라서 미리 조금씩 죽이면 될 텐데 그것도 싫어해. 죽일 만한 상황일 때 죽이자고 하면 화내기만 하고.]
[악인을 처벌하는 건 나로서도 거부하지 않는 일이다만.]
[정말 아니다 싶으면 죽이긴 해. 그래도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어. 살의가 계속 늘기만 할걸.]
[아마 그녀는 조종당했을 때의 기억 때문에 되도록 살인을 피하려는 걸 거다.]
[그러니까 가르쳐줘. 어떻게 하면 너처럼 자아를 유지할 수 있어?]
[자아를 유지해서, 주인이 폭주하는 걸 막고 싶다는 뜻이냐?]
[잘될지는 몰라도 같이 정신을 잃는 것보단 낫잖아. 어, 그리고 혹시 그게 가능해지면, 주인이…… 날 안 버릴지도 모르고. 쟤, 날 버리려고 준비하고 있거든.]
[…….]
[버려지기 싫어. 난 쟤가 맘에 든다고. 쟤랑 헤어지면 또 언제 깨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나도 다른 기오사처럼 주인을 상징하는 검이 되고 싶단 말이야!]
성검은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침묵했다. 마검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 타고난 기능을 바꾸고 싶어하다니.
기오사를 만든 대장장이는 그들에게 자아를 부여하며 이런 미래를 예상했을까.
[빨리 알려줘, 응? 어떻게 본체의 문양으로 자아를 유지하는 건데?]
[……한 번도 그 점을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자신이 없다. 내겐 너무나 당연한 일이니.]
[일단 다 말해 줘, 어떤 느낌인지. 따라하다 보면 뭔가 될지도 모르잖아!]
[네 본체의 문양이 나와 같은 기능을 하는 건지, 그저 장식일 뿐인지는 모른다. 그러니 너무 기대는…….]
[알게 뭐야, 그런 건 해보고 안 되면 생각할래. 얼른 가르쳐 주기나 해. 안 가르쳐주면 너 성검 아냐! 나쁜 검이라고 소문 낼 거야!]
마검이 막무가내로 떼를 썼다. 그러나 성검은 조금 전과 달리 화가 나지 않았다. 랑기오사는 웃음기가 어린 목소리로 부드럽게 대꾸했다.
[알았다, 보채지 마라. 차근차근 짚어가며 다 말해 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