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37화
에키와 유리엔은 남아 있는 주방의 문을 뜯어내었다. 부서진 술 저장고의 문 대신 입구를 임시로 덮기 위해서였다. 해골 와이번들은 용 때문에 불바다가 된 주변 탓인지 근처로 날아오지 않았지만, 언제 또 덮쳐들지 모를 일이었다.
“무리하지 말아요, 율. 왼팔 상태가 좋지 않잖아요.”
에키는 그를 밀어내고 혼자서 그 일을 하려 했다. 괜찮다고 말하려 왼팔을 들어 보이던 유리엔이 갑자기 얼어붙더니,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그리고 곧 절망적인 사실을 깨달은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율? 아파요? 어디가 안 좋아요?”
그 표정을 본 에키가 놀라 다가왔다. 유리엔은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얼굴이 아니잖아요. 숨기지 마세요, 아프면 참지도 말고요! 부상이 더 있었나요?”
“아픈 것도 아니고, 부상이 더 있지도 않다. 신경 쓰지 마라.”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엉망으로 다친 것도 속상한데, 그가 더 큰 부상을 입고도 숨기려 하나 싶어 화가 났다. 에키는 너덜너덜해진 그의 제복 옷깃을 붙잡았다. 벗겨서라도 확인하려는 기세에 그가 놀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정말로 그런 게 아니다. 더 다친 곳은 없다.”
“그럼 왜 그렇게 놀란 거예요?”
“그…….”
유리엔이 머뭇거리더니 왼손목을 감싸 쥐었다. 그러곤 힘없이 대답했다.
“그대가 준 선물이……. 미안하다.”
에키는 뒤늦게 그가 뭘 말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왼팔 전체가 화상을 입을 정도였으니 당연히 왼팔의 소매도, 그 소매에 달려 있던 그녀가 준 커프스 버튼도 사라져 버렸다.
아마 소매가 타면서 떨어져 용의 입안에서 녹아버렸을 것이다. 에키는 황망히 눈을 깜박이다가,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왼팔이 저 꼴이 되었는데 커프스 버튼 따위가 뭐가 중요하다고. 정말이지…….’
“그런 걸로 사과하지 마세요.”
“하지만…….”
“사과하려면 다친 걸 사과하세요. 그게 더 속상하니까.”
에키는 딱 잘라 말하고는 문 쪽으로 향했다. 그러더니 퍼뜩 놀라 다시 유리엔을 돌아보았다.
“그렇다고 진짜 사과하라는 건 아니고요.”
“…….”
유리엔이 찔끔한 낯으로 시선을 피했다. 제지하지 않았으면 정말로 다쳐서 미안하다고 사과했을지도 모르겠다. 에키는 옅게 한숨을 쉬고 문의 경첩을 아메시스트로 내리쳤다.
유리엔은 우울하게 왼쪽 손목을 바라보다가 오른쪽 손목에 아직 남아 있는 커프스 버튼을 확인했다.
그는 그것을 떼어내어 안전하게 품에 넣으려다가, 그게 그녀가 직접 달아준 것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멈췄다. 결국 그는 그것을 떼어내지도 못하고 그대로 두었다.
‘돌아가면 장식장을 주문해서 소매 째로 보관해 둬야겠군.’
유리엔은 에키가 알면 기겁할 생각을 하며 그녀와 함께 문을 떼어냈다. 와이번들이 들을 만큼 큰 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느라 약간 시간이 걸렸다.
그들은 저장고의 부서진 문을 치운 뒤, 뜯어낸 문으로 위를 덮고 안으로 들어갔다.
에키는 가방에서 담요를 꺼내어 저장고 구석에서 기절하다시피 잠든 션과 아기의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별다른 도구도 없이 유리엔이 해놓은 응급처치가 생각보다 깔끔해서, 치료를 위해 깨울 필요는 없을 듯했다.
담요에 이어 그녀가 간단한 먹거리와 식수가 든 병을 꺼내 늘어놓자 유리엔이 감탄했다.
“그런 것들을 다 챙겨 온 건가?”
“결절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예상했었거든요. 식량은 꼭 챙겨야겠더라고요.”
예전에 결절에 갇혀 썩은 마물의 고기와 피를 먹던 그녀가 떠올라 그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에키는 그런 그의 반응을 알아채지 못하고 가방을 뒤적이며 고민하고 있었다.
유리엔이나 션이나 부상자니 말라 비틀어진 육포보다는 따뜻한 음식이 나을 거고, 아기는 미음을 먹여야 한다.
어느 쪽이든 불이 필요했다. 지하 술 저장고에서 불을 피울 순 없지만 위가 주방이라 거기서 얼마든지 조리를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연기나 냄새로 인해 몰려올 해골 와이번들이었다.
‘용이 언제 튀어나올지도 모르고, 얼마나 버려야 할지도 몰라. 일단 쉴 수 있을 때 쉬어두고 제대로 된 식사를 해야 해. 좀 쉰 뒤에는 연구 실에 숨겨둔 사람들도 데려와야겠지.’
이 정도까지 몸을 혹사한 건 회귀 이후 처음이었다. 전에 비해 많이 단련하긴 했지만, 그래봤자 겨우 4개월 단련한 귀족 영애의 몸이다. 나중에 몸살이 나는 건 피할 수 없겠으나, 근육까지 다치지 않으려면 좀 쉬어주어야 했다.
“그런데 그대는 결절을 어떻게 예상한 거지?”
유리엔이 그녀가 꺼내놓은 육포와 소금, 햄, 치즈, 건빵, 물 등을 챙겨들며 물었다. 에키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다 역으로 물었다.
“그전에 율……. 제가 시간을 되돌린 건 어떻게 알았어요? 정황상 추측이야 할 수 있다 쳐도, 되돌린 과정은 어떻게 아는 거예요? 처음부터 전부 알고 있었던 건가요?”
식재료를 챙겨든 그가 멈칫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랑기오사가 그에게 말했다.
[마검의 주인에게라면 정안까지 밝혀도 된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고, 정안을 알리지 않고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도 많을 테니.]
이런 날이 오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기에 성검은 담담하게 말할 수 있었다. 유리엔은 바깥으로 향하며 입을 열었다.
“긴 이야기가 될 것 같다. 괜찮은가?”
“어차피 서로 해야 할 이야기가 많은 걸요. 잠깐, 지금 어디 가요? 다리도 다친 사람이!”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유리엔이 문을 밀고 나가자 에키가 뒤따라왔다. 그는 박살이 난 주방을 뒤적거렸다. 에키는 그를 도우며 혹시나 마물이 다가오면 바로 알아챌 수 있도록 감각을 넓게 펼쳐놓았다.
“연기가 나면 마물이 몰려올 텐데요.”
“연기가 나지 않게 요리할 방법 정도는 안다.”
야숙을 하면서 마물이나 짐승, 때론 사람에게 들키지 않도록 요리하는 요령 정도는 스콰이어 시절에 익혔었다.
그는 용케 찌그러지지 않은 냄비 두어 개와, 숯과 화로, 귀퉁이가 찌그러진 종이 상자, 으스러지거나 망가지지 않고 살아남은 식재료 등을 찾아내며 랑기오사의 특성과 정안(正眼)에 대해 에키에게 설명해 주었다.
[와, 뭐야, 저거 사기 아냐? 치사하다! 누군 주인이 각성시키지 않으면 일어나지도 못하는데! 성검 주제에 치사해!]
바르데르기오사가 투덜거렸다. 에키는 예상도 하지 못했던 성검의 능력에 충격을 받고 걸음을 멈췄다.
“그, 그럼 절 처음 봤을 때부터 그냥 알아본 거예요? 그 정안으로?”
“그렇다.”
그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동안 알아보지 못하게 하겠다고 꾸미고 다니는 자신을 보면서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녀는 참지 못하고 묻고 말았다.
“……저기, 율. 제가 음, 기사답지 않게 입고 다니는 걸 보고 뭐라고 생각했어요?”
“에키, 기사다운 것과 옷차림은 관계가 없는 일이다.”
“아, 으, 그런 게 아니라……. 솔직히 말해 주세요. 아젠카에서 절 처음 봤을 때 무슨 생각을 했나요?”
“아젠카에서 처음 봤을 때라면…….”
부서진 벽에 걸터앉아 화로에 숯을 넣고 커다란 냄비를 뒤집어서 뚜껑처럼 덮어놓던 그가 말끝을 흐렸다.
선발 시험 때는 눈이 부셨고, 분수대에서 만났을 때는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그러면서 그녀가 여자라는 것을 제대로 인식했고, 그리고, 난생 처음 타인에 대한 욕구를 느껴보았었다. 금세 그의 얼굴이 그녀만큼이나 새빨개졌다.
“……왜 빨개지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했어요? 괜찮으니까 솔직하게 알려주세요.”
그녀가 재차 독촉하자 유리엔이 겨우 입을 열었다.
“……서…….”
“네?”
“……그대가, 너무 예뻐서. 눈을 떼기가 어렵다고 생각했었다.”
“…….”
[야, 너도 전에 쟤 보고 예쁘다고 하지 않았어? 너네 되게, 어, 좀…….]
다른 방향으로 부끄러운 대답이었다. 마검이 황당한 듯 중얼거렸고 에키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유리엔은 제가 말해 놓고도 수줍은지 눈을 돌리고 허둥지둥 손을 놀렸다.
[너, 실은 마검의 주인이 뭘 하든 무조건 예뻐 보이는 것 아니냐?]
성검이 헛웃음을 섞어 물었다. 유리엔은 그 물음을 못 들은 척하며 뚜껑을 덮은 화로 위에 다시 냄비를 올린 다음, 물을 붓고 뚜껑의 열기로 데우며 재료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에키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사실 안 들키고 싶어서 꾸미고 다닌 거라고 말하면 엄청 부끄러워지겠지?’
보자마자 알았다고 하니 도저히 그 이유를 말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갑자기 옷차림을 바꾸면 그것도 이상했다. 이미 그녀는 아젠카 내에서 드레스 차림의 사관생도로 유명한 판이었다.
‘어차피 이젠 다들 성격이려니 하고 있고, 그사이 익숙해지기도 했고, 유리엔도 예, 예쁘다고 하고, 나도 꾸미는 건 즐거우니까…….’
안 들키려고 치장했던 건 없었던 일로 하자. 아예 잊어버리는 거야. 난 그냥 드레스 쪽이 더 좋아서 입고 다니는 거라고. 원래부터 그걸 더 좋아하는 건 맞잖아.
에키네시아는 더 뻔뻔해지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달아오른 뺨으로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다른 것을 물었다.
“그럼 율, 제가 기오사를 모은 걸 알게 된 것도 그 정안 덕분인가요?”
“아니. 그건 랑기오사의 기억을 공유받은 덕분이다.”
“네? 랑기오사의 기억이라뇨?”
유리엔은 냄비 위에 상자를 덮어 혹시 모를 연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은 후, 미음을 끓이며 천천히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그가 어떻게 마검의 악마 속에서 그녀의 혼을 보았고, 어떻게 마검의 음모를 알게 되었으며, 랑기오사를 통해 무엇을 보았는지를. 그가 어떻게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는지를.
긴 이야기였다. 아기를 위한 미음이 끓고 식고, 그들과 션이 먹을 수프가 다 끓을 정도로. 완성된 요리들을 가지고 저장고로 내려가 식사를 마친 후에야 그의 이야기가 끝났다.
에키는 그가 끓인 수프를 먹으며 조용히 모든 것을 들었다. 수프는 예상한 대로 맛있었으나, 그의 이야기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고, 예상하지 못했던 깊이를 품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이 지금 마검의 음모와 관련하여 진행하고 있는 계획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녀가 멍하니 입을 열었다.
“율, 저는 복수를 포기하려 했었어요.”
션 몫의 요리를 챙겨놓던 유리엔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당신의 가족이니까요. 당신과 함께하려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일순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던 유리엔은, 뒤늦게 그녀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차렸다.
그녀가 자신이 겪은 15년에 대한 복수보다도 그와 함께하는 미래를 선택했다는 뜻이다. 심장 안쪽이 달구어지는 듯했다.
[적어도 감정적인 문제로 엇나갈 일은 없겠구나, 주인. 네가 그토록 사랑하는 여자가, 너를 이리 깊이 사랑해 주고 있으니.]
성검이 약간 마음을 놓은 듯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유리엔은 흐트러지려는 호흡을 간신히 고르고 그녀를 향해 말했다.
“에키, 그들은 내게 가족이 아니다. 나 때문에 그들을 용서해 줄 필요는 없다.”
“그래도…….”
“그대가 복수하겠다면 도울 것이고, 그대가 혹 복수하지 않겠다 해도, 내가 그들을 벌할 것이다. 그대가 용서할지라도 나는 그들을 용서할 수 없다.”
에키는 유리엔이 언뜻 드러낸 냉혹한 표정에 약간 놀랐다. 마검의 악마로서 그를 마주했을 때조차 본 적 없던 표정이었다. 내리깐 눈, 굳은 턱, 살기 어린 분노를 차갑게 품은 얼굴.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그가 분노하고 복수를 말하자 신기하게도 그녀 안에 도사리고 있던 분노가 유해졌다. 유리엔이 그녀를 대신해 화를 내어주는 것만으로도 모든 게 괜찮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살짝 웃었다.
“당신을 보니 정말로……. 전, 복수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아요.”
흘러 넘치려는 분노를 갈무리하던 유리엔이 당황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에키는 곧 웃음을 거두고 나직이 말했다.
“하지만 그들을 내버려둘 순 없어요. 저지른 짓에 대한 처벌은 받게 해야죠. 율, 당신의 계획대로면 그들은 어떤 벌을 받게 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