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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136화 (136/211)

검을 든 꽃 136화

쉼없이 닦아내는데도 그녀의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에키는 눈물처럼 말을 쏟아냈다.

“원망하지 않았어요? 미워하지 않았나요? 나는, 나는 당신이, 나를 죽이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 번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품어보지 않았다. 나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 그럴 수가 없었다.”

“당신은, 죽을 때 눈을 감지 않았었잖아요. 그때에도 저를 원망하지 않았다고요? 어떻게?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나요?”

그녀가 울음 섞인 질문을 던졌다. 유리엔은 그 질문을 더 이상 피할 수 없었다.

몸에 입은 부상보다 마음 안쪽이 더 쓰라렸다. 그는 자해하는 심정으로 진실을 입밖에 내었다.

“내가 어떻게 감히 그대를 원망할 수 있겠는가. 그대가…… 마검을 쥐게 만든 원인이……, 나였는데.”

그의 입술을 타고 눈물이 흘러 떨어졌다.

“……내가 그대를 악마로 만들었다, 에키네시아.”

에키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가 멍하니 되물었다.

“그게 무슨 뜻인가요?”

“내가 그대를 보았다.”

유리엔이 천천히 그녀로부터 손을 뗐다. 그는 그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며 그녀에게서 약간 물러섰다.

“카르엠이…… 형님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대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저 호기심이었다. 그래, 고작 호기심이었다. 그 호기심이 그대를 그렇게 만들었다. 내가 그대를 보지 않았다면, 그대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면…….”

젖은 채 이어지는 말이 어지러웠다. 반면 담고 있는 진실은 단순했다.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2황자의 이름. 그리고 보았다는 말.

〈나를 바보로 아나? 넌 유리엔과 만난 적이 있다. 작년 탄신 연회 때 내가 분명히 보았지.〉

축제 마지막 날의 연회에서, 카르엠이 그녀에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이어서 니콜이 마검의 음모를 밝혀내 그녀에게 설명해 주었을 때, 결국 풀지 못했던 의문도 생각났다.

〈그 조건에 부합하는 게 우리뿐이야?〉

〈아니, 몇 더 있지. 그중에 하필 로아즈가 걸린 이유는 모르겠어. 제비뽑기라도 했나. 아니면 나 때문인지도 모르지.〉

〈언니 탓이 아니야.〉

〈로아즈가…… 선택된 건, 다른 이유겠지.〉

끝까지 알아내지 못했던, 로아즈가 선택된 이유.

시간을 되돌린 후 처음 다시 만났을 때, 분수대 앞에서 유리엔과 나눴던 대화.

〈작년 여름, 탄신 연회 때 말이다.〉

〈탄신 연회에서, 저를…… 보셨었어요?〉

〈그대가 누구인지는 몰랐지만, 그대를 본 기억은 있지.〉

텅 빈 뇌리에서 유리엔의 말들과 함께 다른 것들이 천천히 맞물려갔다. 결론은 금방 나왔다.

유리엔이 탄신 연회 때 그녀를 보고 관심을 가졌다. 카르엠이 그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카르엠은, 마검의 제물로 로아즈 가문을, 에키네시아 로아즈를 선택했다.

왜 하필 로아즈였는지에 대한 해답이었다. 왜 하필 그녀가 마검을 쥐게 되었는지에 대한 해답이기도 했다.

그녀에게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고작 그런 이유로. 그런 이유로 그녀가 마검을 쥐게 된 거였다고?

발아래가 붕괴하는 기분이 들었다. 새하얗게 질린 그녀를 본 그가 이를 악물었다.

“……그러니 나를 원망해라. 나를 증오해라. 그대는 죄가 없다.”

무너지려던 정신이 그의 말에 멈췄다. 생각하기도 전에 말이 튀어나갔다.

“유리엔. 당신이 마검을 제게 보내라고 명령했나요? 제가 불행해지길 원하고 의도했나요?”

“아니! 그런 바람 따윈 품어본 적 없다!”

“그럼 당신 탓이 아니잖아요.”

생각보다 먼저 나온 말이, 귀를 통해 다시 돌아왔다. 스스로 한 말이 그녀를 지탱하고 일으켜 세웠다. 에키는 망연히 중얼거렸다.

“그래요. 당신 탓이 아니야. 아니잖아요. 당신은 그저 저를 본 것뿐이잖아요.”

“하지만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대의 삶을 망가뜨렸다. 내가 그대를 바라보지 않았다면 그대는 그런 불행을 겪지 않고, 그저 평화롭게…… 살 수 있었을 테니까.”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고통스럽게 떨리고 있었다. 에키는 그의 턱을 타고 흘러 떨어지는 눈물을 보았다. 그것이 핏방울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당신을 미워하라고요? 그건 싫어요, 유리엔. 그러고 싶지 않아요.”

그녀가 고개를 젓고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당신이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잘못한 사람은 따로 있잖아요.”

유리엔의 눈이 커졌다. 그는 입을 약간 벌린 채 더운 숨을 내뱉다가, 쉰 목소리로 물었다.

“나를, 원망하지 않나? 나 때문에 그대가 나락에 떨어졌는데. 나로 인해 무관하던 그대가, 그토록 긴 세월을 고통받았는데. 내가 증오스럽지 않나? 나를…….”

“율.”

에키는 희미하게 웃었다. 눈물은 아직도 그치지 않고 흘렀고, 머릿속은 여전히 뒤죽박죽이고, 가슴 안쪽은 무겁고 뜨겁고 쓰라린데도,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그건 아까 제가 당신에게 했던 질문이잖아요. 증오하지 않냐니.”

그녀는 그에게 손을 뻗었다. 젖어 있는 그의 뺨을 감싸고,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우리, 서로에게 같은 것을 묻고 있네요. 대답도 똑같아요.”

유리엔의 호흡이 흐트러졌다. 에키는 그가 그녀에게 주었던 대답을, 그에게 되돌려 주었다.

“저도, 당신을 증오하지 않아요. 당신의 죄도 아닌 것으로 당신을 원망하진 않아요. 어떻게 제가 그럴 수 있겠어요.”

그녀 자신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것을 그에게 겨눌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를 위해 복수를 포기할 각오도 했었는데, 그가 의도하지도 않았던 일로 증오하는 건 불가능했다.

유리엔으로 인해 그녀가 선택되었다고 해도, 그것은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스스로의 의지도 아니었던 일의 결과로 치르지 않아도 될 대가를 너무 많이 치렀다.

그녀를 믿고 기회를 주었다. 그것으로 인해 터전을 잃었고, 친구를 잃었고, 가족 같은 사람과 동료들, 마침내 자신의 삶마저 잃었다. 잃고 난 후에도 불명예가 남았다. 에키는 9년 동안 유리엔과 창천기사단이 그녀 때문에 모욕당하는 것을 들었다.

“당신은 당신으로 인해 내가 나락에 떨어졌다고 했지만, 그게 아닌 걸요. 저를 그렇게 만든 건 당신이 아니고, 당신도 피해자일 뿐인데.”

그녀의 손에 죽을 때도 자신은 원망 한 점 드러내지 않아놓고서, 되레 그녀보고 자신을 원망하라니. 그 지옥 속에서 그녀에게 유일한 빛이었던 사람이.

그제야 에키네시아는 유리엔이 그녀를 한 번도 증오한 적 없다는 말을 온전히 이해했다. 그녀가 이 순간 그를 증오할 수 없듯이, 그 역시 그녀를 증오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유리엔, 저는 당신으로 인해 그 나락에서 버틸 수 있었어요. 당신이 마검에 물들어 있던 저에게 기회를 주었을 때, 그리고 저를 계속해서 지켜봐 주었을 때, 그게 저에게 얼마나 큰 구원이었는지…… 당신이 알까요.”

목이 메여왔다. 에키는 언젠가 꿈꿨던 것처럼 환한 미소를 띤 채 말했다.

“나를 기다려줘서 고마워요. 당신이 있어서, 이겨낼 수 있었어요.”

오래도록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긴 시간을 흐르고 돌아 마침내 그 말이 그에게 닿았다.

유리엔의 입술이 떨렸다. 후두둑 눈물을 쏟으며 그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무어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 그의 심정을 전달하기에 언어는 너무나 부족한 도구였다.

그래서 그는 떨리는 팔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하고 싶은 말들도, 아직 하지 못한 이야기도 산더미처럼 많았다. 그러나 이 순간에는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심장 박동이 겹쳐졌다. 언어 대신 체온이 닿았다. 닿은 체온이 서로를 감싸 안았다. 입술에서는 눈물 맛이 났다.

* * *

드라코툼바 성에 방문한 창천기사단장에 대한 보고와 결절이 터졌다는 소식은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

디아상트 공작은 나란히 올라온 보고를 내려놓았다. 공작의 붉은 머리칼에는 새치가 섞여 있었고 눈매에는 주름이 져 있었으나, 눈동자만은 세월에 무뎌지지 않고 형형했다.

“쯧.”

뒷목을 주무르던 공작이 가볍게 혀를 찼다.

이제 더는 드라코툼바 성이 필요하지 않으니 결절이 발생한 건 나쁘지 않았다. 저절로 증거를 지워줄 테니까.

문제는 그곳에 잃어버리기엔 아까운 게 있다는 사실이었다. 돈 주고도 구하기 어려운 용의 뼈라든가, 마검의 마나가 담긴 마석이라든가.

그 순간 디아상트 공작의 뇌리에 그 성에 처박아놨던 로잘린의 남편과 딸은 떠오르지 않았다.

‘이참에 결절이 3황자도 해치워주면 좋겠지만 그건 쉽지 않겠지. 기오사 오너니까.’

공작은 손끝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두 번째 황후를 잃고 무능해져 버린 황제, 비틀린 편애를 받고 망가져버린 2황자, 그런 2황자를 상대로도 유리하지 못한 상황인 황태자, 쫓겨나다시피 했고 황제의 증오를 받고 있음에도 홀로 거목이 되어버린 3황자.

그리고 그들 외에는 직계 혈족이 남지 않은 하르덴 황실의 상황.

그 정황을 보며 디아상트 공작은 꿈을 꾸기 시작했다. 제국의 상징이 은사자가 아니라 디아상트의 문장인 붉은 사슴으로 바뀌는 꿈을.

아무리 황실의 상황이 심상치 않아도, 처음에는 망상에 불과했다. 그러나 신도 그가 꿈을 이루길 바라는 건지 그에게는 점차 쓸 만한 장기말들이 생겨났다.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이고 강력한 것은 마검 바르데르기오사였다.

공작위를 계승한 직후, 드라코툼바에 대대로 물려받은 용의 뼈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확인하러 갔었다. 그때 거대한 뼈들 사이에 꽂혀 있던 바르데르기오사를 보고 얼마나 놀랐던가.

아마도 선대의 누군가가 마검을 얻고 나서, 창천기사단에 넘겨주기는 아깝고 그렇다고 쓰는 것도 불가능하여 그곳에 둔 모양이었다.

디아상트 공작은 마검을 발견하자마자 흥미로운 구상을 떠올렸다.

황실이 마검을 이용해서 황위 다툼을 벌이면 어떻게 될까? 그 결과 다른 황족들이 다 죽고, 최후의 승자가 남았을 때, 그 승자가 마검을 이용해 제국민들을 제물 삼아 황위를 얻은 거라고 밝혀버리면?

최후의 승자는 분노한 군중들에게 목이 잘리고, 하르덴 황실은 몰락하고, 음모를 밝혀낸 자는 제국 전체의 영웅이 될 것이다. 영웅이 되면 비어버린 옥좌에 앉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 구상이 너무도 매혹적이라, 디아상트 공작은 그것을 실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공작은 은밀히 그 구상을 다듬고 구체화했다.

세력을 키우고, 장녀를 황태자비로 보내고, 근위기사단장과 관계를 쌓고, 황제가 마검을 발견하도록 만들고, 음모를 부추겼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실현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그의 구상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전멸하며 마검의 등장을 알려야 할 로아즈 백작가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게 어긋남의 시작이었다.

마검은 증발했고, 3황자는 로아즈의 장녀를 스콰이어로 삼았다.

공작은 2황자가 아젠카의 태양 축제에서 그 스콰이어와 접촉한 후 있었던 일에 대해 알고 있었다.

‘마검의 마나에 영향을 받지 않는 여자. 혹은, 마검의 주인.’

디아상트 공작은 창천기사단장의 방문에 대한 보고서를 다시 들춰보았다.

‘마검이 있다는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러 왔다라…….’

몇 년 전만 해도 틀린 소문은 아니었다. 지금은 헛소문이 되었지만.

‘3황자가 드라코툼바에서 마검에 대한 단서를 발견할 확률은…… 높겠군.’

디아상트는 마검과 연루되어서는 안 된다. 그랬다간 모든 계획이 무너져 버린다. 어긋남을 더는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아무래도 3황자부터 치워 버려야겠어.’

3황자가 결절에서 나오기 전에 선수를 쳐야 했다. 디아상트 공작은 다른 계획을 실행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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