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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135화 (135/211)

검을 든 꽃 135화

고개를 들지 않고 가방에서 연고와 지혈제, 붕대 등의 치료용품들을 꺼냈다. 창천의 매 문양이 새겨진 금속통 연고는 예전에 유리엔이 그녀에게 챙겨주었던 물건이었다.

약을 챙겨 드는 그녀의 머리 위로 그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유리엔이 허리를 숙여 앉더니 그녀의 맨발을 감싸 쥐었다.

있는 대로 날뛴 그녀의 발은 엉망이었다. 흰 발 곳곳에 생채기가 나 피가 흘렀다. 불에 덴 곳도 있었다. 유리엔은 그 발을 보며 꽉 막힌 음성으로 속삭였다.

“그대도 다쳤잖나.”

“이런 건 그냥 생채기예요. 당신 부상이 훨씬 심각하다고요!”

오른쪽 다리나 왼쪽 어깨나 다 피범벅에, 왼팔은 아예 그슬려 놓고서 무슨 소린지. 에키는 울컥 화를 내고는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녀가 익숙한 손놀림으로 소독을 하고 약을 바른 다음 붕대를 감는 동안 유리엔은 줄곧 그녀의 발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그녀는 다른 말을 꺼냈다.

“션 워런트 씨와 아기는 괜찮나요?”

“그는 팔꿈치 뼈에 약간 금이 간 것 같다. 발목도 접질렸고. 하지만 그 외에는 단순한 타박상들이다. 그가 감싼 덕에 아기는 다치지 않았다.”

“던져진 것치고는 양호하네요. 그 사람한테도 치료를 해 줘야겠어요.”

“내가 판자로 부목을 대어주고 술로 소독하여 응급처치를 해놓았으니 급한 치료는 필요하지 않다. 지금은 기절하다시피 잠든 상태니 조금 후에 하는 게 낫겠다.”

“아……. 네, 지쳤을 텐데 굳이 깨울 필요는 없으니까…….”

“용은 어떻게 된 건가? 하늘로…… 뛰어드는 것은 봤다만.”

“일단 물러난 것 같긴 한데, 잘 모르겠어요. 만약 다시 나타났을 때 다 회복되어 있다면 좀 골치가 아프겠네요. 차라리 결절이 저절로 아물어서 원래대로 돌아갈 때까지 안 나타났으면 좋겠어요. 식량은 많거든요.”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은 대화였다. 에키는 여전히 그의 얼굴을 보지 않은 채 붕대를 감았다. 고통이 심할 텐데 그는 신음 하나 흘리지 않았다.

팔과 어깨에 이어 허벅지 바깥쪽의 물어뜯긴 상처까지 급한 대로 치료하고 나자, 얌전히 치료를 받고 있던 유리엔이 움직였다. 그는 그녀의 발을 잡아당겼다. 에키는 당황해서 발을 잡아 빼며 목소리를 높였다.

“괜, 괜찮다니까요, 이런 건!”

“내가 괜찮지 않다.”

유리엔이 딱 잘라 말하더니 그녀의 발을 제 무릎 위에 올렸다. 다리가 들어 올려져 짧아진 드레스 자락이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황급히 옷자락을 붙잡았다.

유리엔이 그녀의 맨발을 감싸 쥐고 꼼꼼히 치료해 나가기 시작했다. 왼팔이 불편할 텐데 그런 티는 전혀 내지 않았다.

피와 먼지와 용의 피 따위를 닦아 내고, 소독을 하고 연고를 바른 후에 붕대를 감았다. 한쪽이 끝나자 곧 다른 발을 받쳐 올렸다.

조심스럽고 정성 어린 손길이었다. 에키는 그제야 그의 얼굴을 보았다.

평소 같은 표정은 아니었다. 내리깔린 눈썹, 흐려진 낯. 슬픔과 자책 같은 것이 옅게 깔려 있었다. 그러나 그뿐, 어디에도 증오나 혐오는 보이지 않았다.

악마였던 시절처럼, 마검을 들고 검게 물든 그녀를 보았음에도.

[쟤 하나도 안 놀라네? 왜 저렇게 태연해?]

바르데르기오사가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에키는 조그맣게 물었다.

“안 물어보세요?”

“무엇을?”

“……보신 것, 전부요.”

그는 대답하지 않고 마지막 붕대를 마무리했다. 매듭을 지은 그가 곱게 자란 아가씨다운 작고 보드라운 발에 감긴 거친 붕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이 가만히 그녀의 발끝을 쓸어 올라가 발등에 닿았다.

어쩐지 애달픈 접촉이었다. 에키는 움찔 어깨를 떨었다. 통증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재차 발을 빼려 하자 이번에는 그가 순순히 놓아주었다. 그러곤 조용히 대답했다.

“그대가 묻지 않길 원한다면.”

아무것도 묻지 않겠다. 이대로 모른 척하겠다. 그런 뜻이었다. 말도 안 되는 대답이었으나, 깊은 무언가가 깃든 대답이기도 했다.

〈그대가 그것을 숨기고 싶다면, 숨겨주겠다. 원한다면 나 역시 잊어버리도록 노력하마.〉

마스터임을 들켰을 때 유리엔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정말 당신은 알고 있나? 그러면서 아무런 티를 내지 않고 있나? 왜? 내가, 숨기고 싶어 해서?〉

기절했다 깨어났을 때, 모른 척하려는 그를 알아차리고 그녀 자신이 했던 생각도 떠올랐다.

기묘한 먹먹함이 물처럼 차오른다. 에키는 속에서부터 솟구쳐 튀어나가는 물음을 막지 않았다.

“유리엔. 제가 누구인지 아나요?”

유리엔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물기 어린 하늘 같은 눈동자를 보았다. 짧고 아득한 정적 끝에, 그가 우는 것처럼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알고 있다.”

“전부요? 제가…….”

차마 제 입으로 말하진 못하고, 에키는 아무렇게 늘어뜨린 오른손에 시선을 주었다. 장갑을 벗어던진 손바닥에 검은 문양이 뚜렷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그것을 본 유리엔이 그녀가 하지 못한 뒷말을 수긍했다.

“그대가 마검의 주인임을, 그리고 이제는 존재하지 않게 된 과거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고, 짐작하고 있었음에도 실제로 들으니 온몸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생각이 가닥가닥 끊어지며 어지러워진다.

에키는 숨을 들이켜고, 마구잡이로 솟아나는 의문들도 숨과 함께 삼키고, 지금까지 줄곧 그녀의 마음을 얽어매고 있던 가장 두려운 것을 끄 집어냈다.

“당신은…… 저, 를…… 증오, 하지, 않나요?”

길지 않은 물음에 지독하게 무거운 감정이 매달려 말을 잇기가 쉽지 않았다. 더듬더듬 발음을 이을 때마다 뱃속 깊은 곳에 박혀 있는 갈고리를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그 갈고리는 내장을 할퀴고 목 안쪽을 긁으며 올라와 혀를 아리게 만들었다. 말이 아니라 상처를 뱉어내는 듯했다.

그녀의 물음에 유리엔이 잠시 침묵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을 들었다는 듯이. 그의 눈이 커졌다가 떨리기 시작했다. 곧 그가 입을 열었다.

“……에키네시아. 나는, 단 한 번도 그대를 증오해 본 적 없다.”

그 음성은 습기가 묻어날 것처럼 젖어 있었다.

예전에는 절대 불가능하리라 여겼던 대답이었다. 처음으로 그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 치받아 올랐던 뜨겁고 무거운 것이 다시금 전신을 채웠다.

정말로, 정말로?

“어떻게……. 당신은 다 기억하고 있잖아요.”

“그래, 기억하고 있다.”

그녀의 눈에서 아무런 전조 없이 눈물이 한 방울 툭 떨어졌다.

“그런데도요? 저는 당신을 죽였고, 당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모조리 망가뜨렸잖아요! 그것도 당신이 준 기회를, 당신이 준 신뢰를 배신하면서!”

눈물이 투둑투둑 떨어졌다. 그 눈물에 얼어붙었던 유리엔이, 그녀가 비명처럼 말을 쏟아내자 급하게 다가왔다. 그는 양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며 엄지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냈다.

“에키. 그대는 한 번도 나를 배신한 적이 없다.”

다정하고 서글픈 어조였다. 그녀는 이렇게 다정한 말을 들을 자격이 없었다. 에키가 그의 손을 밀어내며 정신없이 고개를 저었다.

“이겨내지 못했잖아요, 저는! 당신이 믿어 주었는데도! 결국 다, 죽이고, 그토록 끔찍하게……!”

울먹이며 헐떡이는 그녀의 턱을 그가 잡았다. 유리엔은 눈물로 가득한 작은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방금도 그의 목숨을 구해놓고서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양, 원해서 저지른 것도 아닌 과거의 죄악으로 울고 있는 얼굴을.

그가 아는 한 가장 강한 사람. 검으로도, 영혼으로도, 눈부시게 빛나는 사람. 그리고 그가 아는 한 가장 상처가 많은 사람.

그를 죽이고 그를 살려낸 사람. 그가 움직이는 이유가 되어버린 사람. 그가, 사랑하는 여자.

그녀가, 또 스스로에게 악의를 겨누고 있다. 정안을 떠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당신이, 당신이 어떻게 절 증오하지 않을 수 있죠? 그런, 짓을, 저질렀는데! 아무리 없던 일이 되었다 해도, 그런, 그런 걸, 잊을 수 있을 리가. 검을 쥔 손가락 틈새로 흘러내리던 핏물의 감촉이 아직도 생생해. 당신뿐만이 아니라, 나는……. 읍.”

유리엔은 그녀의 젖은 턱을 쥐고, 검은 문양이 새겨진 오른손을 얽어 쥐고, 입술을 맞대었다.

겁에 질려 달아나는 혀를 끝까지 좇아 제 혀로 감싸 안았다. 공포로 식은 입술에 온기를 나누었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숨을 받아 삼켰다.

느리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 애원하는 몸짓이기도 했다. 그녀의 몸에서 차츰 떨림이 잦아들었다.

그가 입술을 뗐다. 속눈썹이 서로 스칠 듯이 가까웠다. 멈추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보라색 눈동자를 주시하며 그가 속삭였다.

“에키네시아. 그건 그대의 죄가 아니었다. 그러니 제발 스스로를 탓하지 마라.”

“제가, 저지른 짓인데도요?”

“그중에 그대가 원해서 행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대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그녀가 만들어낸 희생자 중에서도 최대의 피해자인 남자가, 그녀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속삭였다.

마음 깊은 곳에 있던 억울함. 원해서 그런 일을 저지른 게 아니라는 항변. 나 역시 피해자라는 호소.

그렇게 외면하기엔 그녀가 저지른 짓이 너무 거대하여, 염치가 없어서, 제대로 꺼내본 적 없던 그 심정을, 그가 입에 담았다. 처음 마주했을 때처럼.

굳어버린 그녀의 머리카락을 그가 쓸어 넘겼다.

“그럼에도 그대는, 자신의 죄도 아닌 그것들을 모조리 짊어지고, 끝내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리기까지 했지 않나.”

코가 맞닿았다. 이마가 맞닿았다. 젖은 음성이 귓가에 닿았다.

“에키, 나는…… 그대가 모두를 살려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 감내한 시간들을 안다. 고통스럽고 외로운 세월이었음을 안다. 그대가 어떻게 기적을 만들어냈는지, 그대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나는 알고 있다.”

어떻게 알고 있느냐는 말 이전에, 울음이 또다시 치받았다.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고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세월이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다 여겼다.

심지어 누군가가 알게 되었다간 그런 것으로 네가 저지른 학살과 일으킨 비극들이 무마될 줄 아냐며 분노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기도 했었다.

죄책감과 공포가 고독과 함께 뒤섞여 만들어진 상처는 그녀 자신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깊었다. 행복으로 덮은 아래에 여전히 벌어져 있던 그 상처에 온기가 와 닿았다.

너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안다고.

너무나도 듣고 싶은 말이었음을, 줄곧 원해왔던 위로라는 것을, 에키네시아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자각했다. 먹먹함이 차올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한 방울 한 방울이 용암 같은 눈물만 소리 없이 솟았다.

유리엔이 그런 그녀의 눈물을 자꾸 닦아냈다. 그가 흠뻑 젖은 눈으로 그녀를 담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그대를, 증오할 수 있겠는가.”

그는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다. 에키네시아가, 자신이 그녀를 증오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을 줄은 정말로 몰랐다.

그에게는 그녀를 증오하지 않는 게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오히려 그가 그녀를 볼 때마다 증오에 대한 두려움과 죄책감을 느꼈으니까. 그래서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가 그의 앞에서 간혹 두려움을 드러낼 때, 그게 그와는 상관없이 그에게서 연상되는 그녀의 과거 때문인 줄로만 알았다.

그의 증오 따위가 뭐라고, 그토록 두려워했단 말인가. 마검을 드러낸 후 가장 먼저 하는 질문이 자신을 증오하고 있지 않느냐라니.

그 질문에서 유리엔은 그녀가 겪었을 자책을 온전히 깨달았다. 그리고 동시에, 마검을 쥐게 된 원인을 모르는 그녀로서는 그를 볼 때 죄책감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자괴감이 치밀어 올랐다. 유리엔의 낯이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홍채의 결까지 낱낱이 보이는 거리였다. 에키는 그의 푸른 눈에 차올라 있던 습기가 결국 넘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울면서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내가, 어떻게, 감히 그대를. 에키. 에키네시아.”

부서질까 겁이 나는 것처럼 애타고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덜덜 떠는 손가락이 그녀의 눈가를 반복적으로 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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