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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134화 (134/211)

검을 든 꽃 134화

불이 뿜어지지 않자 고개를 든 션은 에키네시아가 검을 팽개치고 장갑을 벗어 던지는 것을 보았다. 드러난 하얀 오른손바닥에 날카롭고 새카만 무늬가 있었다.

그 무늬에서 모래처럼 무언가가 쏟아졌다. 그것은 유리같이 투명한 칼날을 형성했고, 불길한 검은빛의 손잡이를 형성했다. 투명한 칼날에는 검은 문양이 새겨졌다. 우아하게 느껴질 정도로 깔끔한 형태의 검이었다.

화가인 션은 기오사 시리즈의 외양에 관심이 많았다. 로잘린 디아상트가 그런 그에게 알려진 기오사들의 외양을 모아놓은 화첩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눈에 에키네시아가 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기오사 시리즈 중에서 유일하게, 주인이 기오사 오너가 아닌, 인간을 학살하는 악마로 불리는 검. 마검 바르데르기오사.

에키네시아는 망설이지 않고 그것을 쥐었다. 쥐자마자 검에서부터 피어오른 검은 기운이 그녀에게 스며들었다. 분홍색 머리카락과 보라색 눈동자 위로 물감이 쏟아지듯 검은색이 퍼져나갔다.

그 모습을 본 션은 공포에 질려 뒤로 기었다. 그러나 그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로 몸을 움직였다.

[어, 진짜? 진짜 나 쓰는 거야? 우와아! 신난다! 이게 얼마만이야!]

마검이 들떠서 재잘거리는 말보다 그녀가 검을 휘두르는 것이 더 빨랐다. 에키는 마검을 쥐는 것과 거의 동시에 용의 입을 길게 베었다.

투명한 검신에 마나로 이루어진 검은 칼날이 덧씌워졌다. 그것은 검기조차 튕겨냈던 용의 비늘을 부드럽게 갈랐다. 썩은 늪 같은 녹색의 피가 솟구쳤다.

캬아아악!

코에서부터 턱까지, 입을 세로로 길게 베인 용이 고통에 찬 괴성을 내질렀다. 입이 벌어지자마자 유리엔이 뛰쳐나왔다.

언뜻 보기에는 괜찮아 보였다. 용의 입천장을 찌르면서 쏟아진 초록색 피로 젖어 있어서 잘 구별이 가지 않긴 했지만, 실제로 그가 용의 입에 삼켜져 있던 시간은 극히 짧았으니 심하게 다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기를 바랐다.

에키는 그를 보고 안도했다. 그리고 유리엔은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의 그녀를 보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파문이 이는 호수처럼 요동쳤다. 그것을 본 그녀의 눈동자가 흐려졌다.

용이 울부짖으며 머리를 빼냈다. 에키는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마검을 쥔 채 물러나는 용의 머리를 따라 저장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저런 거대한 생물 한 마리를 상대할 때는 양손에 검을 드는 것보다 검 하나를 양손으로 쓰는 것이 낫다. 그래서 에키는 아메시스트를 챙기지 않고 바르데르기오사만 양손으로 쥐었다. 마검은 그게 만족스러운지 행복한 음성으로 말했다.

[주인아, 역시 저 허연 칼 따윈 쓸모없지? 내가 최고지, 그치?]

에키는 무표정하게 용을 주시했다. 입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용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것이 그녀를 향해 덩치에 맞지 않게 빠른 움직임으로 앞발을 내리쳤다.

주방의 한쪽 벽이 으스러지며 추락했다. 추락하는 것들 중에 그녀의 모습은 없었다.

그녀는 내려쳐진 용의 앞발 위에 올라탔다. 나는 듯한 속도로 용의 팔을 타고 달려 올라갔다. 급하게 잘라낸 드레스 자락과 올이 풀어진 금색 레이스가 그녀의 뒤로 날개처럼 흩날렸다.

[심장을 찔러야 죽을 거 같은데, 어음, 그냥 찔러서는 심장까지 닿기 힘들겠네. 무지무지 커!]

마검은 혼자 들뜬 어조로 떠들어댔다. 에키는 대꾸하지 않고 용의 어깨에 올라섰다.

심장을 베어야 한다는 건 보자마자 알았다. 문제는 저 비늘과 살과 근육을 뚫고 용의 심장에 닿으려면 가로등만 한 검이 필요할 것이란 점이었다. 평범한 장검보다 길고 넓은 바르데르기오사도 용 앞에서는 이쑤시개만 했다.

[어떻게 할 거야?]

마검이 흥미롭다는 듯 묻자, 에키는 덤덤하게 답했다.

“여러 번 베면 돼.”

심장에 닿을 때까지, 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었다.

사라진 인간이 제 어깨 위에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아챈 용이 그르릉거렸다. 에키는 내리치는 앞발을 피하며 마나를 씌운 마검을 용의 어깻죽지에 박아 넣었다.

그리고 그대로, 대각선으로 체중을 실어 떨어져 내렸다. 용의 가슴팍이 길게 베이며 녹색 피가 쏟아졌다.

크아아!

용이 지금까지와는 확연히 다른 괴성을 질렀다. 에키는 발광하는 용의 몸뚱이를 박차고 가장 가까운 곳에 남아 있는 건물의 파편 위로 떨어졌다. 아득한 높이에서의 추락이었다.

부서져 튀어나온 대들보를 움켜쥐며 한 차례 충격을 줄이고, 아래의 비스듬한 돌바닥을 디디고 주르륵 미끄러지며 몸을 낮추며 착지했다. 마나로 감싸긴 했지만 맨발이 완벽히 무사할 수는 없어서 여기저기 생채기가 났다.

[인간-!]

발을 돌아볼 틈은 없었다. 용이 천둥 같은 분노를 토해내며 불을 뿜었다. 머리 위로 불이 쏟아졌다.

에키는 그 파편에서 뛰어올라 위쪽의 다른 파편으로 이동했다.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용의 머리가 움직이며 불길이 따라왔다. 착지하자마자 다시 위의 다른 파편으로, 또다시 위의 파편으로. 그녀가 디딘 건물의 파편마다 불바다가 되어 타올랐다.

그녀는 곧 거꾸로 꽂힌 탑의 꼭대기에 도착했다. 탑의 아래에서부터 불길이 타고 올랐다. 더 이상 올라갈 파편이 없었기에 피할 곳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실상 에키는 일부러 여기로 온 것이었다. 용의 머리와 비슷한 높이에 도달하기 위해.

도움닫기를 하여 뛰었다. 닿을 수 없는 거리처럼 보이던 용의 몸뚱이까지 그녀는 닿을 수 있었다. 하얀 발이 불을 뿜고 있는 용의 콧잔등을 디뎠다.

가장 처음에 그녀가 베어낸 상처가 있는 위치였다. 용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에키는 입꼬리를 올려 웃고는 놈이 앞발을 휘두르자마자 거기에서 아래로 뛰어내렸다.

제 코를 때릴 뻔한 용이 분노를 토해내기 전에 어깨를 디디고, 다시 똑같은 자리에 마검을 꽂아 넣고, 똑같은 방식으로 베어 내려갔다. 상처가 더 깊어졌다.

크아아악!

용이 몸을 반 바퀴 틀며 긴 꼬리를 착지한 그녀에게 휘둘렀다. 워낙 거대하여 성벽이 움직여 내려치는 것 같았다. 바람만으로도 사람을 날려버릴 듯한 위력이었지만, 맞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법이다.

에키는 꼬리가 내리치기 전에 뛰어 올라 바로 위에 있던 넝쿨을 왼손으로 잡았다. 잡은 손 안에서 열매가 터져 산성액이 쏟아지며 장갑을 녹였다. 예상하고 잡은 일이라 그녀는 넝쿨을 잡자마자 도로 손을 놓았다.

수직으로 떨어진 그녀는 정확한 타이밍에 내리쳐진 꼬리 위에 내려섰다. 그리고 꼬리를 타고 달려 올라갔다.

용이 날뛰어 꼬리도 요동쳤지만 그녀는 균형을 잃지 않았다. 그녀가 등을 거쳐서 어깨에 도달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어깨에서부터 옆구리까지 용의 가슴팍이 길게 베였다. 오차 없이 전과 똑같은 위치였다.

같은 곳을 세 번 베이고 나서야 용은 개미 같은 인간에게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용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그것은 초조하고 급박하게 에키를 뒤쫓았다.

하지만 그 거대한 덩치로는 그녀를 잡을 수가 없었다. 애꿎은 건물의 파편들만 부서지고 불이 붙었다. 디딜 곳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으나 그녀는 용의 몸뚱이를 발판삼이 또 어깨에 도달했다.

결국 한 번 더 같은 곳을 베이자, 용은 도저히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죽일 거다! 죽여 버리겠다, 인간!]

발악 같은 절규를 남긴 용이 날개를 퍼덕였다. 거대한 몸체가 삽시간에 까마득한 하늘로 솟아올랐다.

에키는 눈살을 찌푸리고 하늘로 계속해서 올라가는 용을 올려다보았다. 불그스름한 하늘에 닿은 용이 그 하늘 안으로 뛰어들었다. 첨벙거리는 물소리가 나며 하늘에 파도가 일었다.

그녀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마검이 얼떨떨하게 중얼거렸다.

[주인아, 저거 하늘 아니었어?]

“……하늘……인 줄 알았는데.”

용이 바다에 잠겨드는 것처럼 하늘 속에 잠겨들고 나자, 하늘이 돌변했다. 처음 결절에 들어왔을 때처럼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빛깔로 돌아왔다. 드리웠던 어스름도 사라지고 사위가 대낮처럼 밝아졌다.

그녀는 설마 싶어서 용을 피해 달아나서 먼 곳에서 배회하고 있는 해골 와이번들을 유심히 보았다. 그것들도 도로 하얀 뼈로 변해 있었다.

[저 하늘 비슷한 게 빨개지면 뼈다귀들이 까매지고 용이 바다에서 나오나 봐! 용이 돌아가면 원래대로 돌아오고. 그게 이 결절의 법칙인 거 아니야?]

“아마도.”

어찌되었든 한동안은 조용하리라는 판단이 섰다. 에키는 마검을 늘어뜨리고 거칠어진 호흡을 갈무리했다. 물든 머리칼과 눈동자에서 색이 빠져나가며 문양 안으로 바르데르기오사가 되돌아갔다.

당면한 위기를 해결하고 나니 비로소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 떠올랐다.

‘그는 전부 봤겠지.’

용을 앞에 두었을 때보다 훨씬 더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망연히 오른손에 선명하게 드러난 문양을 내려다보다가, 느릿하게 손을 말아 쥐었다.

주방이 있는 쪽으로 돌아가려던 에키는 아까 벽난로를 향해 뛰어내렸던 성벽을 발견했다. 용이 날뛴 곳과 거리가 좀 되었던 덕에 성벽은 멀쩡하게 남아 있었고, 그 위에 그녀가 내버려 두었던 가방도 운 좋게 멀쩡했다.

가방을 챙겨서 천천히 이동했다. 와이번들이 근처에 날아다니고 있지 않아서 아까처럼 질러갈 방법도 없었지만, 빠르게 갈 수 있었더라도 그녀는 돌아서 갔을 것이다.

‘이미 알고 있었을 거야, 유리엔은. 그러니까 괜찮아.’

스스로에게 되뇌는데도 두려움이 가시지 않았다. 그를 마주하는 게 무서웠다. 혹여 그가 알지 못하고 있었다면, 그래서 그녀를 보는 그의 시선이 변한다면.

‘견딜 수 있을까.’

살의를 억누를 수 없게 되므로, 그녀는 절대로 이성을 잃어서는 안 된다. 유리엔이 증오로 그녀를 보며 저주하더라도 그녀는 이성을 유지해야만 했다.

걸음이 자꾸만 느려졌다. 가까워질수록 고산지대를 오르는 것처럼 숨이 가빠졌다.

영원히 닿지 않기를 바랐으나, 불가능한 바람이었다. 주방의 일부가 보였다. 뛰어내리기만 하면 되는 곳에서 그녀의 발이 뿌리를 내린 것처럼 멈췄다.

문이 부서진 술 저장고 바깥에 유리엔이 서 있었다. 뒤집어쓴 녹색 피를 대강 닦아내었는지 꽤 말끔해진 상태였다.

그래서 잘 보였다. 그의 상태가.

왼쪽 소매가 거의 다 타버렸다. 너덜너덜한 천 조각들 안쪽으로 화상을 입어 벌겋게 짓무른 왼팔이 보였다.

용의 입안에서 불길을 막다가 입은 부상이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팔을 늘어뜨린 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유리엔의 얼굴보다 그 팔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에키는 화상이 얼마나 통증이 심한지 잘 알고 있었다. 화상은 다치는 부위가 넓은 만큼 다른 상처보다 더 아프다. 덧나기도 쉬웠다.

제 손으로 그를 죽였었던 기억이 있는 그녀는 그의 부상에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보자마자 두려움이 밀려나며 생각이 아주 단순해졌다.

그가 다쳤다. 얼른 치료해야 했다. 들고 있는 마법 가방 안에 치료용품이 있었다. 에키는 황급히 뛰어내려 그에게로 다가갔다.

“율, 팔이……! 약이 있으니까, 얼른…….”

“에키네시아.”

그의 앞에 가방을 내려놓고 열던 그녀가 그의 부름에 우뚝 멈췄다. 애칭이 아니라 이름이었다.

잠깐 밀려났던 두려움이 도로 목을 죄었다. 고개를 들고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의 표정을, 그의 눈동자를 보는 게 두려웠다.

마검을 뽑은 직후 마주했을 때 호수처럼 출렁이던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치료부터 해요, 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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