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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133화 (133/211)

검을 든 꽃 133화

날개를 편 용의 몸집은 압도적이었다. 그것이 몸을 일으키자 근처에 서 있던 땅이 부서져 내렸다. 완전히 일어난 용이 기지개를 켜듯 날갯짓을 했다.

날개 끄트머리가 그들이 있는 벽난로 쪽으로 다가와 스쳤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바닥의 절반이 박살 나며 벽난로의 굴뚝이 부러졌다.

“으아악!”

비처럼 떨어지는 벽돌에 션이 비명을 질렀다. 에키와 유리엔은 눈을 마주쳤다. 일단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유리엔이 빠르게 말했다.

“주방 쪽에 지하 술 저장고로 연결되는 문이 있다. 지하가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저긴가요?”

에키가 30미터쯤 떨어져 있는 반토막 난 주방을 가리키자 유리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린 넝쿨이 그 사이에서 덜렁거리고 있었다.

용이 몸을 털며 한 차례 더 날갯짓을 했다. 날개 한 짝이 어지간한 연무장만 했다. 거대한 날개 그림자가 그들이 있는 바닥 위를 뒤덮었다. 곧 직격할 것이다.

그것을 보자마자 에키와 유리엔은 같은 행동을 했다. 션과 아기가 숨어 있는 벽난로로 달려갔다. 다리를 다친 유리엔보다 에키가 빨랐다. 에키는 자신보다 큰 션의 뒷덜미를 잡고 어린아이를 끌어내듯 손쉽게 끌어냈다.

“아기 꽉 안아요! 율, 넝쿨! 넝쿨 잡아요!”

길게 말할 틈이 없었다.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날개가 그들이 있는 곳을 내리쳤다.

용에게는 몸 풀기에 지나지 않는 행위였지만 그 결과는 끔찍했다. 바닥이 산산이 조각 나 아래의 바다로 추락했다. 남은 건 고작 벽난로의 일부와, 그 일부에 연결된 넝쿨뿐이었다. 발 디딜 공간은 남지 않았다.

에키는 부서진 벽난로의 틈새에 아메시스트를 박아 넣고 그것에 매달렸다. 그녀의 다른 팔에 아기를 안고 있는 션의 뒷덜미가 잡혀 있었다. 션은 대롱대롱 흔들리며 아기를 꽉 안았다.

벽난로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던 유리엔은 에키의 외침을 알아듣고 떨어지면서 끊어진 넝쿨을 잡았다. 그가 힘주어 움켜쥐지 않아도 넝쿨은 저절로 움직여 그의 팔을 얽어매었다. 아까 잘라내면서 열매가 다 터진 덕에 산성 액체는 남아 있지 않았다.

날개를 털어낸 용이 완전히 바다에서 빠져나왔다. 그것이 퍼덕거리기 시작하자 광풍이 불었다. 유리엔이 붙잡은 넝쿨이 진자처럼 흔들리고 에키의 몸도 정신없이 흔들렸다.

팔이 빠질 것 같았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버티며 바람의 방향을 가능했다. 아무리 그녀라도 이런 자세와 상황에서 오래 버티기는 힘들었다.

용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날갯짓이 빨라지며 바람도 미친 듯이 강해졌다. 결국 그녀는 아래의 션을 향해 소리쳤다.

“머리! 잘 감싸요! 아기랑!”

“네?”

“던질 테니까! 잘 굴러야 해요!”

“더, 던져요? 네?”

션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에키가 주방 쪽으로 턱짓하자 무슨 뜻인지 깨달았는지 그 얼굴은 결국 파랗다 못해 새하얘졌다. 그는 몸을 움츠리며 아기를 온몸으로 감쌌다. 아기는 서럽게 울어대고 있었다.

에키는 그의 상태를 확인하고 바람을 주시했다. 용이 날개를 퍼덕일 때마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그 바람이 주방 쪽으로 향하는 순간, 그녀는 몸을 흔들어 얻은 반동으로 션을 주방을 향해 있는 힘껏 던졌다.

“우와아악!”

션이 길게 비명을 남기며 날아갔다. 그녀의 힘에 바람을 탄 그의 몸은 넉넉하게 주방에 닿았다.

그의 운동신경으로 제대로 착지하는 건 무리였는지, 구르고 부딪히며 여기저기 상처가 나긴 했지만 어쨌든 무사했다. 아기는 그의 품에 파묻혀 다치지 않은 듯했다.

에키의 행동을 본 유리엔은 알아서 움직였다. 랑기오사를 넝쿨에 대고, 흔들림에 그대로 순응하다가 넝쿨이 주방 쪽으로 뻗는 순간 넝쿨을 잘랐다.

그는 손목에 엉겨 붙은 넝쿨을 단 채로 깔끔하게 주방에 착지했다. 그리고 바로 에키 쪽을 보았다.

그녀는 사정이 좋지 않았다. 션을 던진 반동으로 아메시스트가 반쯤 뽑혀 나와 위태로웠다. 마검이 불안하게 중얼거렸다.

[야, 야, 아무리 너라도 저 밑에 떨어지면 좀 위험할 것 같은데?]

용의 몸이 떠오르며 바람이 점점 심해졌다. 헐겁게 박혀 있던 아메시스트가 조금씩 밀려나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것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쩌지? 이 상태에서 기어오르려 하면 아메시스트가 내 몸을 지탱할 수 있나? 주방까지 뛰어넘으려면 도움닫기를 해야 거리가 될 텐데…….’

“에키네시아! 이쪽을!”

유리엔이 절박하게 외쳤다. 반사적으로 그를 본 에키는 유리엔이 주방 쪽에 늘어져 있던 넝쿨을 쥐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그 끝에 부서진 벽돌들을 엮어놓았다. 넝쿨이 닿는 것을 휘감으려 드는 덕에 빠르게 매달 수 있었다.

그가 벽돌을 매단 넝쿨을 들어 올렸다. 던지려는 듯했다. 의도를 알아 차린 에키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리엔은 곧바로 그것을 집어던졌다. 힘을 주는 바람에 그의 허벅지 상처에서 피가 튀었다.

잘린 넝쿨은 주방과 벽난로 사이의 중간 정도까지 오는 길이였다. 에키는 매달린 벽돌이 가장 높은 곳에 다다르기 직전에 몸을 튕겨 맨발로 아메시스트가 박혀 있는 부분을 걷어찼다. 반동을 얻은 몸이 검과 함께 튕겨 나왔다. 그녀는 중간에서 떨어지기 시작한 넝쿨을 움켜쥐는 데 성공했다.

[와, 짜릿하다. 이거 은근 재밌는데?]

마검이 철없이 감탄했다. 에키는 넝쿨을 쥔 채 흔들리며 옅게 한숨을 쉬었다. 유리엔이 위에서 그녀가 매달린 넝쿨을 끌어 올렸다.

용은 완전히 공중에 떴다. 그것이 떠오르는 경로에 있던 걸리적거리는 기둥이나 건물의 일부들이 모조리 부서져 바다로 떨어졌다. 그들이 조금 전까지 있던 벽난로도 꼬리에 부딪히며 박살이 나 추락했다.

겨우 주방에 올라온 에키는 유리엔의 왼쪽 어깨에서 피가 줄줄 흐르는 것을 보았다. 통증이건 부상이건 전부 도외시하고 그녀를 끌어 올리는 바람에 상처가 벌어진 모양이었다.

“율, 상처가…….”

더 말할 틈이 없었다. 하늘에 떠오른 용이 포효하며 공기가 진동했다. 그와 동시에 소름끼치는 음성이 그녀의 뇌리를 때렸다.

[죽여. 죽이겠다. 죽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

“……!”

[나 아니야! 내가 한 말 아니야! 난 얌전히 있었어!]

악의에 찬 메아리. 마검에 물들어 있을 때 느끼던 것과 비슷했다. 바르데르기오사가 제 발이 저렸는지 빽 고함을 질렀다. 확실히 목소리가 달랐다. 당황한 유리엔과 기겁한 션의 얼굴을 보니 그녀만 들은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용이다.”

유리엔이 신음처럼 말했다. 에키는 용을 올려다보았다. 그것은 선혈 같은 눈동자를 굴리며 아래를 살피고 있었다. 낮은 울음소리가 났다. 천둥이 우르릉거리는 듯했다.

[인간. 인간을 죽여야 해.]

동시에 뇌리를 울리는 말. 뼈에서 살아난 용이 말을 하고 있었다. 마검에 물들어버린 것 같은 어투였다. 용이 말을 할 수 있던가? 이 시대의 용은 전설 속에나 남아 있는 터라 그녀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짐작되는 건 있었다. 이 결절이 생긴 곳은 마검의 살의에 물들어 미쳐버린 인간이 적어도 네 명 이상 있었을 장소다.

‘그 영향이겠구나.’

용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옆에서 유리엔이 움직였다. 그는 주방 바닥에 있는 문으로 달려가 그것을 들어 올렸다. 아래를 확인한 그의 얼굴에 안도가 퍼져나갔다. 지하가 있을 공간이 없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술 저장고가 연결되어 있었다.

유리엔은 끙끙대고 있는 션을 들어 저장고 안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에키를 불렀다.

“이리로, 에키!”

[인간……!]

까마득한 위에서 섬뜩한 살기와 함께 열이 느껴졌다. 그들을 발견한 용의 입에 불길이 모여들었다. 에키가 저장고 안으로 뛰어들고 유리엔이 문을 닫는 것과 동시에 용의 입에서 불이 쏟아졌다.

캬아아아!

문 밖에서 용이 울부짖는 것이 들렸다. 나무문에 불이 붙어 타닥타닥 타올랐다. 이곳에 술병이 가득했다. 불이 번졌다간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에키와 유리엔은 급하게 주위를 뒤졌다.

유리엔이 청소 용도인 듯한 물통을 찾아냈다. 그가 문을 향해 물을 뿌렸다. 찬물 세례를 맞은 불이 잦아 들었다.

“사, 살았…….”

부들부들 떨던 션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콰각 하고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사람 몸통만 한 금속질 발톱이 젖은 나무문을 으스러뜨리다시피 하며 안으로 파고들었다. 발톱이 흔들리며 문의 파편을 떨어내더니 시뻘건 눈동자가 뚫린 공간을 들여다보았다. 그르릉, 하는 불티 섞인 숨이 흘렀다.

[죽이고 싶다.]

유리엔과 에키는 본능적으로 검을 쥐었다. 하얀 마나를 머금은 랑기오사와 보라색 마나를 머금은 아메시스트가 용의 눈을 향해 휘둘러졌다. 두 줄기의 마나가 날아오자 용이 눈을 감았다. 검기는 금속보다 단단한 검은 비늘로 뒤덮인 눈꺼풀을 놓지 못했다.

[야, 이런 걸로는 안 먹히겠다. 엄청 단단하네. 그거 있잖아, 네가 집중해서 만드는 검기! 그걸로 찌르면 될 거 같은데?]

[저것이 실제 용과 비슷하다면, 검기를 날리는 것으로는 절대 못 뚫는다. 마나를 중첩해서 정제된 검기를 형성해야 한다. 지금의 너로서는 불가능해. 알고 있겠지? 검기 중첩이 가능하면 제니스 초입의 경지다.]

마검과 성검이 각자의 주인에게 조언을 주었다. 에키는 미간을 구겼고 유리엔은 성검을 흘깃 보았다. 주인의 의문을 알아챈 성검이 말을 덧붙였다.

[이전에 주인과 함께 용을 잡아본 적이 있다. 인간의 기준에서 용은 악인 경우가 많았으니까. 어쨌든 마나를 아껴라, 지금 네 검기로는 약한 부위밖에 못 벤다.]

용이 감았던 눈을 떴다. 피가 떨어질 것처럼 새빨간 눈동자가 휘릭 구르며 그들을 바라보더니 약간 멀어졌다. 좁은 입구에 용의 입이 보였다.

누구나 용의 다음 행위를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용은 그대로 저장고 안쪽으로 불을 뿜을 작정이었다.

션은 핏기가 가신 얼굴로 등을 돌리고 품 안의 아기를 사력을 다해 감쌌다. 아기는 우는 것도 한계인지 히끅거리는 소리만 내고 있었다.

에키네시아는 멍하니 서 있었다. 저 비늘을 뚫으려면 평소보다 훨씬 많은 양의 마나를 사용하여 압축하고 중첩하는, 보다 강력한 검기를 사용해야 했다.

그러나 그녀의 코어에 남아 있는 마나로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검기를 쓰지 않으면 벨 수 없는 해골 와이번들을 아까부터 계속 처리하느라 많은 양을 소모해 버렸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마나가 쌓이겠지만 지금은 모자랐다.

실상 그녀는 몸에 코어를 형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당연히 보유하고 있는 마나의 양이 적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두 가지 이유 덕분에 어지간한 마스터와는 상대도 되지 않는 위력을 보일 수 있었다. 하나는 그녀의 영혼이 달성한 경지로 인한 마나의 정순함. 그리고 다른 하나는, 놀랍도록 효율적으로 마나를 사용하는 기술.

더 많은 양의 마나가 필요할 경우, 세상의 인간이 누군가에게 살의를 품는 한 계속해서 생성되는 마검의 마나를 써야 했다. 흰까마귀 협곡의 결절에서 대량의 마물을 처리하기 위해 마검을 사용했듯이.

그녀의 이성은 이미 결론을 내렸다. 바르데르기오사를 꺼내고, 마검의 마나로 저 용을 상대해야 한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격렬하게 그것을 거부했다. 토할 것 같았다.

‘유리엔 앞에서? 그를 죽였던 때처럼,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검게 물들이라고?’

그녀가 갈등하는 사이 용이 입을 벌렸다. 거무칙칙한 입 안쪽의 살과 동굴처럼 깊은 목구멍이 보였다. 그 안쪽에 불꽃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유리엔은 검을 움켜쥐었다. 저대로 불을 뿜으면 술 저장고 안에 있는 그들은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안에는 피할 곳이 없었다. 그리고 입 안쪽은 겉보다 확실하게 약한 부위였다.

‘기회는 지금뿐이다.’

그는 판단과 동시에 행동했다. 용의 입안으로 뛰어들었다. 랑기오사가 하얀 마나를 머금고 용의 입천장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그 순간 얼핏 보이는 용의 눈에 악의 어린 웃음이 감돌았다. 용은 기다렸다는 듯 불을 뿜는 대신 입을 다물었다. 유리엔의 모습이 거대한 용의 입안으로 삼켜졌다.

에키는 그 광경을 보았다.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거대한 용의 이빨이 빗장처럼 다물린다. 하얀 남자의 뒷모습이 용의 입안으로 천천히 사라진다.

다물린 용의 이빨 사이로 불꽃이 뚝뚝 흘러넘쳤다. 새빨간 불티가 꽃잎처럼 흩날렸다.

‘유리엔.’

증오받을까 두려운 마음도, 그의 앞에서 마검을 쥔다는 거부감도, 그 외의 복잡하고 상처투성이인 감정들도, 삽시간에 모조리 쓸려나갔다.

어쩌면 이렇게 되고야 말리라고, 마음 깊은 곳에서 예감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아메시스트를 내던지며 오른손의 장갑을 쥐어뜯듯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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