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32화
션이 창백해진 채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유리엔이 그에게 등을 보였다.
“업혀라. 힘주어 매달리도록.”
“예? 가, 감히 어찌…….”
“딱히 다른 방법이 없으니.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라.”
션은 유리엔의 말을 금방 이해했다. 스스로 넘어갈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덜덜 떨며 유리엔의 등에 올라탔다.
유리엔은 그를 등에 업고, 왼팔에는 아기를 안은 채로 가볍게 일어나더니 몇 발자국 도움닫기를 했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쉽게 그 거리를 뛰어넘어 돌계단에 착지했다.
마나로 신체를 강화하는 마스터, 그중에서도 월등한 그에게 이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걱정되는 건 따로 있었다.
품 안에서 흔들림에 놀란 아기가 울음을 터뜨렸다. 유리엔은 흘깃 허공을 보았다. 하늘을 배회하던 해골 와이번들이 울음소리를 듣고 몰려들었다. 그는 랑기오사를 움켜쥐었다.
* * *
에키네시아는 연구실의 문을 닫아 걸고 나와 유리엔과 로잘린의 가족을 찾아다녔다. 그 와중에 해골 와이번을 50마리쯤은 벤 것 같았다.
그녀는 짜증스럽게 쥐고 있던 가방을 휘둘렀다. 가방 모서리에 찍힌 와이번의 눈이 박살 나며 뼈다귀가 쏟아졌다.
“끝이 없네, 진짜. 얼마나 많이 있는 거야?”
투덜거리며 다음 파편으로 건너가려던 그녀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응? 무슨 생각해?]
“발. 결절 내부는 생겨난 장소, 그곳에 남은 감정이나 사념으로부터 영향을 받잖아.”
[그게 왜?]
“살의에 물들어 망가져버린 사람들이 있는데, 여기 마물들, 왜 이렇게 약하지?”
산성액이 튀는 넝쿨은 움직이지 않으니 마물이 아니었고, 해골 와이번은 보통 와이번보다 빠르고 재생이 되긴 해도 그렇게까지 위협적이진 않았다. 약점도 지나치게 분명했다.
샤이를 구할 때 들어갔던 결절이야 하나의 비극, 그것도 미수에 그친 비극이 있던 장소에 불과하니 그리 위험하지 않았던 게 이해가 갔다.
그러나 이곳은 살의에 물들어 정신이 망가진 인간이 넷이나 있었던 장소였다.
게다가 피해자가 네 명뿐이었다는 보장도 없었다. 이 성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울부짖는 성이라고 불리고 있었으니.
그런데도, 지워버린 과거에 사형장 근처에서 생겼던 결절이나, 흰 까마귀 협곡 전쟁터에 생겼던 결절과 비교해 보면 이곳은 상대적으로 평화로웠다.
정확히는 마물이 너무 약했다. 지형이 기괴해서 그렇지 회귀 전에 이곳에 생겨났던 마물소굴보다도 약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마검이 태평하게 종알거렸다.
[넌 내 주인이잖아, 너한텐 뭐든 다 약한 게 당연하지!]
“그게 아니라…….”
눈살을 찌푸린 채 대꾸하려던 에키가 말끝을 흐렸다. 말이 씨가 된 걸까. 이변은 갑작스레 일어났다.
푸르던 하늘이 저물었다. 태양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데 하늘만 새빨갛게 물들었다. 주위가 조금 어두워졌다. 어스름이 막 깔리기 시작하는 초저녁처럼.
동시에 그녀에게 덤벼드는 해골 와이번들의 뼈가 숯처럼 검어졌다. 에키는 위에서 급강하하는 검은 뼈의 와이번을 향해 아메시스트를 쳐올렸다.
깡, 하고 금속끼리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검이 멈췄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의 힘이면 손쉽게 뼈를 으스러뜨렸는데 이번에는 홈조차 나지 않았다.
[단단해졌네? 우와, 신기하다.]
단단해지기만 한 게 아니었다. 힘도 더 강해졌다. 위에서 내리누르는 발톱을 검으로 버티며 그녀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에키는 인상을 찌푸리고 힘을 더 가해보았다. 밀려나지 않았다. 근육이 당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몸으로 이 이상의 근력을 발휘하려 하면 무리가 올 것이다.
그녀는 포기하고 마나를 움직였다. 아메시스트의 흰 칼날에 보랏빛이 불꽃처럼 어룽거렸다. 검기를 덧씌운 칼날은 푸딩을 가르듯 간단하게 검은 뼈를 갈라버렸다.
그러면서 에키는 손목을 틀어 놈의 척추 뼈 중 하나를 검의 궤적 안에 넣었다. 이번에는 눈이 아니라 그곳을 부숴야 재생하지 않을 테니까.
마검의 주인이기에 핵의 위치가 바뀐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뼈다귀가 되어 떨어지는 와이번의 잔해를 피하며 그녀가 혀를 찼다.
“좋지 않네.”
[뭐가? 쉽잖아?]
“마나엔 한계가 있으니까. 검기가 아니면 벨 수 없는 게 끝도 없이 몰려온다면…….”
[내가 있잖아! 나! 나 쓰면 되지!]
마검이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에키는 대답 대신 한숨을 쉬고 걸음을 빨리했다.
이변은 하늘과 해골 와이번에게만 일어난 게 아니었다. 넝쿨을 디디려던 그녀는 그것이 스륵 움직이며 그녀의 발을 피하는 바람에 아래로 추락할 뻔했다.
열매만 피하면 되던 넝쿨이 뱀처럼 움직이며 발목을 휘감으려 들었다. 자르면 산성액이 쏟아지니 베어내기도 조심스러웠다. 그 와중에 와이번도 끝없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 이변들은 그녀에게 그다지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저 더 이상 옷자락까지 피하는 건 힘들어져서 드레스 끝단이 엉망이 되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기묘한 초조감마저 솟아올랐다.
에키는 쉬지 않고 사방을 뒤져나갔다. 허공에 떠도는 와이번이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해서 이름을 외치며 찾을 수는 없었다. 몰려드는 것들을 처리하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시간이 지체될 테니까.
천장이 날아간 침실의 벽 위에 섰을 때, 그녀의 귀에 와이번의 괴성과 함께 날개뼈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주변에서 나는 소리는 아니었다.
‘수가 많아.’
저것들이 공격하고 있는 건 누구지?
그 방향에 있는 대지에 성벽의 일부가 꽂혀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그녀는 가방을 쥔 채 꿈틀거리는 넝쿨을 짓밟으며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허공에서 몸을 틀고 성벽의 중간을 박차고 재도약했다.
성벽 꼭대기에 올라서자 시야가 탁 트이며 바람이 불었다. 바람에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마구잡이로 흩날렸다. 에키는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누르고 아래를 살폈다.
벽난로가 있는 바닥의 일부가 허공에 떠 있었다. 벽은 하나도 남지 않았고 굴뚝만 남아 우뚝 솟아 있었다.
그 굴뚝과 벽난로를 와이번 떼가 새카맣게 뒤덮었다. 뼈밖에 없는데도 워낙 수가 많으니 안쪽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에키는 곧바로 그 안쪽에서 하얀 남자를 찾아냈다. 그의 옷 곳곳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유리엔!”
그녀는 비명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다.
유리엔은 그녀의 목소리를 언뜻 들었다. 반응할 여유는 없었다. 그는 벽난로 입구를 몸으로 가린 채 쉼 없이 랑기오사를 휘두르는 중이었다.
하얗게 마나가 어린 검이 닿을 때마다 검은 뼈들은 갈라졌지만, 검이 지나가고 나면 도로 달라붙었다. 물을 베는 꼴이었다.
그의 등 뒤 좁은 벽난로의 안쪽에서는 션이 딸을 감싸며 몸을 웅크렸다. 머리 위로 뚫린 굴뚝에서 와이번들이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오려고 주둥이와 발톱을 마구잡이로 들이댔다.
겁에 질린 아기는 목이 쉬었는데도 계속 울었고, 그 소리가 끊임없이 와이번을 불러들였다. 션이 울먹이며 아기의 입을 막았으나 그래도 울음소리가 새어 나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아기가 자꾸만 울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들은 이동하는 내내 끊임없이 해골 와이번과 싸워야 했다.
유리엔은 백여 마리가 넘는 와이번을 쓰러뜨리며 전진했다. 왼팔에 아기를 안은 채로도 그에게는 여유가 있었고, 션은 감탄하기 바빴다.
그때까지는 괜찮았다. 와이번이 검게 변한 이후부터가 문제였다.
[젠장, 대체 어떻게 변했기에 파마의 힘이 먹히지 않는 건지.]
성검이 분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해골 와이번이 검게 변한 후부터 악을 처단하는 성검의 기능이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 성검으로 베어도 와이번은 부서지지 않고 계속해서 공격해 왔다.
유리엔은 당황하지 않고 핵을 찾았다. 재생형 마물은 부수면 재생이 멈추는 핵이 있기 마련이니까. 문제는 거기서 발생했다.
허연 뼈의 와이번들은 눈을 꿰뚫으면 망가졌다. 반면 검게 물든 해골 와이번들은 개체마다 핵의 위치가 달랐다. 어떤 놈은 눈, 어떤 놈은 척추, 어떤 놈은 발톱이었다.
에키네시아는 마검의 능력으로 보는 순간 어디가 핵인지 알아차리기에 상관없었다. 그에 비해 유리엔은 와이번을 한 번에 처리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그래도 그 혼자 있었다면 차근차근 피해가며 부수면 되었겠지만, 그에게는 지켜야 할 사람이 둘이나 있었다.
두개골을 갈라버렸던 해골 와이번이 부수자마자 재생되며 왼팔에 있는 아기를 노렸을 때, 유리엔은 아기를 감싸며 어깨를 내주었다. 뒤에 서 있던 션이 물어 뜯기려던 때에는 그를 걷어차 밀어내면서 다리를 물렸다.
다리를 다친 곳이 벽난로가 있는 바로 이곳이었고, 조금만 더 가면 주방이 있는 땅이었다. 벽난로 바닥과 주방은 넝쿨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넝쿨은 밟으려는 순간 돌변하여 발목을 휘감았다. 유리엔은 넝쿨을 잘라야 했다. 쏟아진 산성액은 간신히 피했으나, 넘어갈 방법이 사라졌다.
그 결과가 지금 상황이었다.
에키는 자세한 상황은 몰랐지만 위태롭다는 건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벽난로가 있는 곳으로 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보였지만 한참을 돌아가야 했다. 너무 멀었다.
멀다, 라고 판단하는 순간 몸이 먼저 움직였다.
구두를 벗었다. 이어 드레스 아래의 패티코트를 빠르게 벗어 던지고 너덜거리는 드레스 자락을 무릎 높이에서 잘라냈다.
다리가 완전히 자유로워졌다. 그녀는 가방을 두고 아메시스트만 움켜쥐었다.
선명한 눈동자가 공중을 바라보았다. 해골 와이번들이 아기 울음소리에 이끌려 계속해서 모여들고 있었다. 그녀는 그 움직임을 눈에 담았다. 퍼덕거리는 와이번들의 날갯짓에 그녀의 호흡이 맞춰져갔다.
[주인아? 너 설마…….]
‘지금.’
그녀가 맨발로 성벽 위에서 뛰어올랐다. 보통 사람이 보기에는 나는 것처럼 보일 높이와 거리로 뛰었으나, 벽난로에 닿기에는 한참 모자랐다.
정점에 오른 몸이 자연스럽게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 추락 지점에 해골 와이번 한 마리가 있었다.
진주색 페디큐어가 발라진 하얀 발이 와이번의 검은 두개골을 밟았다. 텅, 하는 소리가 나며 그 발은 다시 허공으로 솟았다. 밟힌 두개골이 반동으로 완전히 으스러졌다.
높이를 다시 얻었다. 하지만 아직도 모자랐다.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던 그녀는 벽난로를 향해 날아가던 또 다른 와이번의 머리를 밟았다. 그리고 또 다시. 다시 한 번 더.
곡예에 가까운 행위였다. 에키는 네 마리의 와이번을 징검다리처럼 밟고 무사히 벽난로가 있는 바닥에 착지했다. 착지와 동시에 아메시스트가 보랏빛을 머금고 휘둘러졌다.
끼아아!
키익, 키익!
그녀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눈이 멈춘 곳에 어김없이 검이 찔러 들어갔다. 가끔은 다른 곳을 보면서 아무렇게나 베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녀의 검이 거쳐간 해골 와이번은 더 이상 재생하지 못했다. 마검의 살육특화 능력을 그녀는 완벽히 체득하고 있었다. 어디를 찔러야 저것이 죽는지를 머리보다 몸이 먼저 알고 움직였다. 그것을 정교하게 찌를 검술도 있었다.
절반 이상의 와이번이 검은 뼈다귀가 되어 쌓이자, 와이번들의 움직임이 변했다. 한둘이 달아나기 시작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퍼덕거리며 전부가 흩어졌다.
에키는 그것들을 뒤쫓지 않았다. 뒤쫓을 방법도 없었다. 어지간한 그녀로서도 마나 소모량이 많았다. 그녀는 가쁘게 어깨를 들썩이며 검을 늘어뜨리고 유리엔 쪽을 보았다.
유리엔은 벽난로에 기대선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왼쪽 어깨와 오른쪽 허벅지가 피로 물들어 새빨갔다. 그녀의 눈이 흔들렸다.
“율……!”
다행히 중상은 아닌 듯했다. 그녀는 그를 부르며 걸음을 떼었다.
그 순간, 길고 날카롭고 소름끼치는 울음소리가 아득히 깊은 곳에서부터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에키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아까부터 맴돌던 불안감의 근원이 저 아래에서 느껴졌다. 유리엔 역시 무언가를 느꼈다.
그들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까마득한 아래, 새파란 바다에서 부글부글 기포가 솟았다. 그리고 그 기포 사이에서 무언가가 올라왔다.
처음 보인 것은 두 개의 뿔. 이어서 드러나는 건 새카만 비늘로 뒤덮인 머리, 붉게 번뜩이는 눈동자, 기다란 목, 육중한 몸통.
그리고, 온 하늘을 뒤덮을 것처럼 거대한 날개.
드라코툼바의 지하에 잠들어 있던 용의 뼈가 결절의 뒤틀린 법칙에 따라 육신을 얻었다.
바다를 가르며 몸을 일으킨 검은 용이 날개를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