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31화
에키는 사슬을 끊고 늘어지는 여자를 안아 올렸다. 액체가 고인 곳을 피해 엎어진 책장에 여자를 기대 앉혀놓았다. 그리고 다른 우리로 다가갔다.
[자아도 안 남아 있을 텐데 구해서 뭐 하게?]
“남아 있을 수도 있지. 내가 그랬던 것처럼.”
[흐응, 너 같은 사람이 흔하진 않을 텐데.]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잖아.”
한 명이라도 자신처럼 자아가 살아 몸에 갇힌 채 울부짖고 있다면, 외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남은 세 사람의 살의를 차례차례 흡수했다.
그러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 중 누구도 의식이 되돌아오지 못했다.
에키는 그저 살아 있을 뿐인 네 개의 몸뚱이를 가만 내려다보았다. 까득, 이가 갈렸다. 그녀의 눈 안쪽에 용암 같은 분노가 치솟았다가 오래 묵은 냉정 아래로 가라앉았다.
[어? 살의다! 얘네를 죽이려는 건 아닐 거고……. 주인아, 누굴 죽이고 싶어진 거야? 이 인간들 물들인 나쁜 놈?]
“글쎄.”
그녀는 기묘하게 웃고는 마법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구해야 할 사람들이 더 있었다.
* * *
유리엔이 눈을 뜨자마자 본 것은 입을 벌리고 달려드는 해골 와이번이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쥐고 있던 랑기오사를 휘둘렀다.
키이익!
랑기오사가 증폭시킨 마나가 빛무리처럼 허공을 갈랐다. 와이번은 반으로 갈려 떨어져 내렸다. 갈린 부분이 불에 그슬린 것처럼 까맸다. 성검이 가진 파마의 힘이 발휘된 흔적이었다.
[죽음을 거스른 악한 것들이구나. 그런데 주인, 분명히 다음에는 이러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나? 또 결절에 제발로 들어오다니.]
유리엔은 성검의 말에 대꾸할 틈이 없었다. 그는 몰아쳐 오는 십여 마리의 와이번들을 정신없이 베어냈다. 까맣게 탄 뼈들이 수북이 쌓이고 나서야 그는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약속한 적은 없지 않나. 노력해 보겠다고 했을 뿐.”
[그래서 네가 안 들어오려는 노력을 하긴 했느냐? 들어오려고 노력했지.]
“그건…… 미안하군.”
[사과는 필요 없고 앞으로는……. 아니다. 말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겠군. 차라리 빨리 마검의 주인과 결혼하기나 해라.]
주위를 살펴보던 유리엔은 사레가 들 뻔했다. 성검이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어차피 그녀와 얽히면 죄다 내던져 버리니, 그냥 다 털어놓고 얼른 결혼해라. 그럼 사고라도 덜 치겠지.]
“…….”
유리엔은 대답 없이 목깃을 추어올렸다.
그가 무엇을 두려워해 진실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지 잘 아는 성검이 한숨을 쉬었다. 성검은 조언을 주려다가 인간 사이의 감정 문제는 자신이 끼어들지 않는 게 나았던 경험을 되새기고 입을 다물었다.
그사이 유리엔은 주변을 대충 확인했다. 기괴한 공간이었다. 사방을 살피며 분홍색을 찾던 그의 귀에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기 울음 소리였다.
그는 금세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을 찾아냈다. 탑의 꼭대기만 남아 있는 대지가 약간 떨어진 곳에 있었다. 북쪽 탑의 일부인 듯한 뾰족한 지붕에 와이번들이 가득 내려앉아 있었다.
아기 울음소리는 그 안쪽에서 들려왔다. 와이번들은 그 울음을 좇아 뼈만 남은 앞발로 지붕을 파헤쳐댔다.
폐쇄되어 있던 북쪽 탑. 아기. 아마도 로잘린의 어린 딸일 것이다. 상황을 파악한 유리엔이 급히 움직였다. 그가 있는 곳에서 탑 쪽으로 바로 갈 방법은 없었다. 다른 것을 징검다리 삼아 이동해야 했다.
중간 허공에 떠 있는 정원의 일부에서 뻗어 나온 넝쿨이 유리엔이 서 있는 복도의 파편에 엉켜 있었다. 정원이 좀 더 높은 곳에 있어서 그의 위치에서는 잔털처럼 돋아난 뿌리가 가득한 흙바닥이 보였다.
넝쿨을 타고 올라가 정원에서 뛰어내리면 와이번이 몰려 있는 지붕에 착지할 수 있을 듯했다. 판단하자마자 그는 복도의 벽 위로 뛰어올라 엉켜 있는 넝쿨을 밟았다.
넝쿨은 성인 팔뚝 정도 되는 두께의 진녹색 줄기에 뾰족한 잎사귀와 손톱만 한 빨간 열매가 다닥다닥 맺혀 있는 형태였다. 열매가 기이할 정도로 많아 붉은 반점으로 뒤덮인 것처럼 징그러웠다.
그 모양이 어쩐지 불길해서 유리엔은 최대한 열매를 피해 발을 디뎠다.
하지만 넝쿨은 좁았으며, 열매는 지나치게 많았고, 와이번들이 지붕을 뚫고 들어가는 데까지 남은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중간쯤에서 그는 열매를 하나 밟고 말았다.
“큭.”
으깨진 열매에서 투명한 액체가 팍 튀어 올랐다. 손톱만 한 열매에서 나왔다기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양이 많았다. 본능적으로 제복 망토를 당겨 액체를 막은 그는 액체가 닿은 부분이 녹아내리는 것을 보았다.
[이런, 달려라!]
성검이 다급히 소리를 질렀다. 유리엔은 랑기오사가 소리를 지른 이유를 바로 알 수 있었다.
공중으로 튀어 오른 액체가 넝쿨에 맺힌 다른 열매에 떨어졌다. 그러자 그 열매가 터지며 다시 산성액이 솟구쳤다. 그 액체는 또다시 다른 열매를 터뜨렸다.
연쇄적으로 열매가 터지며 산성액이 아래에서 튀어 오르고 위에서 쏟아지기 시작했다.
유리엔은 망토로 몸을 가리고 열매가 터지든 말든 밟으며 전속력으로 달렸다. 액체가 비처럼 쏟아지자 넝쿨마저 녹아내렸다. 발밑이 위태롭게 출렁거렸다.
그는 넝쿨이 끊어지기 직전에 간신히 공중에 떠 있는 잔디밭에 도착했다. 뒤를 돌아보니 넝쿨은 가닥가닥 끊어져 아래의 바다로 떨어지고 있었다.
키에에!
와이번의 울음소리와 뼈끼리 부딪히며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붕의 일부가 뚫려 구멍이 난 것이 보였다. 시간이 촉박했다.
유리엔은 망토라기보다 그물에 가까워진 너덜너덜한 천을 벗어 내던져 버리고 랑기오사를 고쳐 쥐었다.
아래에 북쪽 탑의 지붕과 빽빽한 와이번들이 보였다. 바로 뛰어내리기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뒤로 물러서며 도움닫기를 하여 밑으로 뛰어내렸다.
끼아아아악!
기괴한 비명과 함께 콰그작, 하고 뼈가 으스러졌다. 떨어져 내리며 그가 짓밟은 와이번의 갈비뼈가 산산조각 났다.
몰려 있던 해골들이 모조리 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수십에 달하는 새빨간 불빛들이 형형하게 한 곳을 보는 광경은 심약한 사람이라면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섬뜩했다.
그러나 유리엔은 담담했고, 성검은 별 경고를 하지 않았다. 그는 랑기오사를 들었다.
하얀 빛무리가 파도처럼 몇 차례 쓸고 가자 남은 것은 부서진 뼈다귀들뿐이었다. 파마의 권능이 발휘되는 랑기오사를 쥔 창천기사단장 앞에서 마물은 별 위협이 되지 못했다.
마지막에 남은 와이번 몇 마리가 정신없이 달아났다. 유리엔은 그제야 검을 내렸다.
남은 와이번의 뼈들이 지붕의 경사를 따라 미끄러져 떨어졌다. 그는 바다에 닿자마자 뼈들이 녹아버리는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성검이 혀를 차며 잔소리를 했다.
[보통 바다는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라.]
“알겠다.”
지붕에 난 구멍은 그가 들어가기엔 작았다. 유리엔은 지붕에서 아래의 좁은 땅으로 뛰어내렸다.
입구의 철문에는 육중한 자물쇠와 사슬이 걸려 있었으나 그에게는 무의미한 장벽이었다. 그는 자물쇠째로 철문을 반으로 갈라 치웠다.
“으아아악!”
안으로 한 발짝 들여놓는 순간 절규인지 기합인지 모를 괴성과 함께 무언가가 휘둘러졌다. 유리엔은 머리를 내리치는 그것을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망가진 철창에서 떼어낸 것 같은 쇠막대였다.
“허억, 허억, 허억…….”
막대를 움켜쥔 남자가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숨을 몰아쉬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이마에 들러붙어 있었고 벌겋게 충혈되어 노려보는 눈에는 눈물이 그렁했다. 그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유리엔의 손에 잡힌 막대를 도로 빼내려 버둥거렸다.
유리엔은 그 곱상한 얼굴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초상화를 보고 기억해 둔 얼굴이었다.
“피레 출신의 션 워런트, 맞나? 나는 유리엔 드 하르덴 키리에, 아젠카의 창천기사단장이다.”
발악하던 남자의 움직임이 멎었다. 연한 갈색의 눈동자가 휘둥그렇게 커졌다. 유리엔은 쥐고 있던 쇠막대를 놓아주며 말을 이었다.
“로잘린 디아상트의 청으로 구출하러 왔다. 딸은 어디 있지?”
“……예? 로잘린이 어떻게……. 저, 진짜 창천기사단장이십니까? 서, 성검의 주인?”
“그렇다.”
유리엔은 증명 삼아 그의 눈앞에서 랑기오사를 문양 안으로 회수했다. 션의 눈이 더 커져서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했다. 문양에 검을 보관하여 자유롭게 넣고 빼내는 건 기오사 시리즈만의 특징이었고, 기오사 오너의 상징이기도 했다.
유리엔은 놀람으로 굳어버린 션을 내버려두고 안쪽을 둘러보았다.
철창이 달린 작은 창이 사람 키보다 높은 곳에 있는 휑한 방이었다. 철창 위쪽의 벽 일부가 떨어져나가 쇠막대 몇 개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저 중에 하나를 주워 무기삼아 그에게 휘두른 모양이었다.
낡은 나무 침대 위에는 매트리스조차 없이 닳아빠진 이불이 놓여 있었고, 이 빠진 테이블이 엎어진 채 침대 아래를 가리고 있었다.
아기 울음소리는 테이블로 가려진 침대 아래에서 들려왔다. 어떻게든 딸을 지키려고 션이 아기를 거기에 숨겨둔 듯했다.
유리엔은 잠시 고민했다. 결정은 빨랐다. 이곳은 벽과 천장, 문까지 부서진 데다 와이번들에게 들켜 안전하지 않으니 이동해야만 했다.
테이블을 밀어 치웠다. 침대 아래의 바구니에 낡은 포대기에 파묻힌 아기가 보였다.
유리엔은 울고 있는 아기를 포대기째로 안아 올렸다. 6~8개월쯤 되어 보이는 아기는 제법 묵직했으나 마스터인 유리엔에게는 새털처럼 가벼운 무게였다.
그가 아기를 안고 일어서자 션이 화들짝 놀라 팔을 벌리고 그에게 다가왔다.
“리, 릴리! 제, 제, 제가 안겠습니다!”
“그대는 자기 몸을 간수하는 데 집중하도록.”
유리엔 자신은 한 팔에 아기를 안고도 마물들을 처리할 수 있으나, 저 남자는 그를 따라오기도 벅찰 것이다. 그가 아기를 안고 이동하는 게 나았다.
아기는 낯선 사람에게 놀랐는지 울음을 그치고 딸꾹거리고 있었다. 아버지를 빼닮은 얼굴이었지만 보송한 머리카락은 어머니를 닮아 붉은색이었다.
유리엔은 포대기를 고쳐 아기가 그의 품에 기대도록 만들고는 오른손으로 다시 랑기오사를 뽑아 들었다.
“션 워런트. 결절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가?”
“결절이요? 들어는 봤습니다만…….”
“이 성은 결절에 삼켜졌다. 밖의 풍경이 기괴하더라도 너무 놀라지 말도록. 마물이 많으니 내 뒤에서 떨어지지 마라.”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유리엔은 빠르게 말하고는 아기를 안은 채 밖으로 나갔다. 션이 허둥지둥 그를 뒤따라왔다.
‘내부에 생겨난 마물……. 정확히는 괴생명체들을 전부 죽이고, 시작점에 기오사를 꽂아 넣는다.’
결절 내부의 마물은 편의상 마물이라 부를 뿐 실제 마물과는 다른 존재다. 유리엔은 결절 탈출법을 되새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작점에서 기다리면 반드시 에키네시아와 마주치겠지만, 그는 이 결절의 시작점이 어디인지 모른다. 아기와 무력한 션을 데리고 시작점이나 에키를 찾으러 다니는 건 너무 위험했다.
‘이들이 머물 수 있는 안전한 장소를 확보하고, 그 뒤에 그녀를 찾는다.’
어떻게 할지 정한 그가 멀리까지 훑어보았다. 천장이 막혀 있고 벽이 멀쩡한 곳을 찾아야 했다.
가장 좋은 건 지하다. 기둥처럼 치솟은 땅이나 허공에 떠 있는 성의 일부들을 보면 지하가 멀쩡히 있을 확률은 희박했으나, 어차피 결절은 기존 세계의 법칙이 들어맞지 않는 공간이었다.
유리엔은 외워뒀던 성의 내부지도를 떠올리며 지하와 연결된 방이나 복도가 근처에 있는지 찾아보았다. 오래지 않아 그는 반토막 난 주방이 있는 땅을 발견했다.
드라코툼바 성의 주방은 지하의 술 저장고와 연결되어 있었다. 주방 바닥에 들어 올려 여는 방식의 문이 설치된 것이 보였다. 문은 멀쩡한 듯했다.
그 아래에 술 저장고가 제대로 연결되어 있을지는 의문이긴 했다. 그래도 여기에 있는 것보다는 그 쪽으로 가는 것이 나았다.
‘꽤 멀군.’
문제는 거리가 상당하다는 점이었다.
그는 제멋대로 솟아오른 높이가 다른 땅들과, 허공에 떠 있는 건물의 일부들과, 그 사이를 드문드문 얽어 매고 늘어져 있는 넝쿨을 확인했다. 그리고 점처럼 보이는 높이에서 배회하고 있는 해골 와이번들의 수를 가늠해 보았다.
“맙소사…….”
뒤에서 션이 괴상한 풍경을 보고 경악성을 흘리고 있었다. 유리엔은 돌아서서 그의 몸을 살펴보았다. 키가 크고 날렵했지만, 단련되지 않은 몸이었다. 화가라고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혹시 몰라 그들이 선 땅의 바로 옆에 떠 있는 부서진 돌계단을 검으로 가리켰다.
“여기서 저 곳으로 뛰어넘어 갈 수 있겠나?”
션은 멍하니 그가 가리킨 곳을 보았다. 적어도 10미터는 될 거리였다. 가능할 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