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30화
“그대는…….”
유리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에키의 공격에서는 살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기절시키려는 목적이 느껴졌다.
왜? 추측은 쉬웠다. 그는 그녀를 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결절이 생겼고, 이 성의 어딘가에 갇혀 있을 로잘린의 가족은 저 결절에 말려 들어갈 확률이 높았다. 구해야 하니 그를 안전한 곳에 두고 그녀 혼자 저 결절에 들어가려는 거겠지.
그것이 그를 화나게 만들었다. 차라리 죽이려 들었으면 화가 덜 났을지도 모르겠다. 왜, 항상, 늘, 혼자서 모든 것을 짊어지려 하는가. 그가 이를 악물었다.
에키는 당황하여 손목을 빼내려 했다. 뭐라고 변명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저기, 율…….”
“그대는 스스로 결절에 들어가면서, 나는 피하길 원하는가?”
내려다보는 하늘색 눈동자가 쨍할 정도로 강렬했다. 손목을 움켜쥐는 힘도 아플 정도로 강했다. 그는 화가 난 것을 숨기지 않았다.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변명할 말이 없었다. 행동과 의도를 모조리 읽혀버린 기분이었다. 그가 나직이 물었다.
“에키네시아. 흰까마귀 협곡에서 그대가 결절에 들어갔을 때, 내가 무슨 심정으로 그대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렸는지 아는가?”
몰랐다. 그러나 그 결절에서 나왔을 때, 그녀를 끌어안고 그가 지었던 표정은 기억하고 있었다.
무너졌다가 간신히 복구된 것 같은, 오열과 환희가 뒤섞여 있던 얼굴. 그 때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표정. 걱정했다는 단어로 표현하기엔 너무 깊고 무거웠던 감정.
요란한 종소리가 귀를 때리고 있었다. 부산하게 달아나는 소음이 사방에서 맴돌았다.
고함소리, 문을 여닫는 소리, 뛰어다니는 소리, 무언가가 쏟아지고 깨어지는 소리, 비명들. 그 속에서 그와 그녀만이 고요했다.
일그러진 공간이 자리를 넓히며 다가오고 있었다. 가까워지는 결절을 흘깃 확인한 유리엔이 침묵을 깼다.
“나는, 그대가 나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에키는 순간 숨을 멈추었다.
말한 적 없는 사실이다. 검을 제대로 맞댄 적이 없으니 그녀의 정체를 모른다면 알아챌 방법이 없는 진실이기도 했다. 그것을 담담하게 인정한 그가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대의 등 뒤에 숨어 있을 생각은 없다.”
유리엔이 그녀의 손목을 놓았다. 그의 빈손에서 하얀 검이 흘러나왔다. 성검 랑기오사. 그는 그것을 잡았다.
“그대보다 약하다 해도, 나는 무력한 존재가 아니다. 그러니 나를 배제하려 하지 마라.”
훅 하고 바람이 불었다. 갑자기 결절이 급속도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유리처럼 굴절된 공간이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그러나 유리엔도 에키네시아도, 미동도 하지 않고 서로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속삭였다.
“그대의 곁에 서서, 그대를 돕게 해다오.”
결절이 그들을 삼켰다.
* * *
가장 먼저 느껴진 건 소금기가 묻은 바람이었다. 바닷바람 같았다. 그러고 보니 울부짖는 성에서는 바다가 내려다보였었다. 해안마을 근처에 있는 성이었으니.
에키는 감았던 눈을 떠보았다. 깊은 푸른빛이 아찔하게 펼쳐졌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 끝없이 넓어 보이지만 가까이 가면 어느 순간 벽에 가로막힐 것이다. 결절은 분리된 공간이므로.
그녀는 고개를 숙여 발아래를 보았다. 비상식적인 공간이니 뭘 보든 놀라지 않을 작정이었는데, 보자마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바닥이 투명해서 아래의 바다가 그대로 비쳐보였다. 기겁해 자세히 보니 무엇을 밟고 서 있는 건지 보였다.
유리창이었다.
대지의 좁은 일부가 까마득하게 솟아올라 있었다. 기둥처럼 솟아오른 대지들 사이는 시퍼런 바다가 채웠다. 그리고 그 좁은 땅 위에 거인이 장난삼아 뜯어내 올려놓은 것처럼 성의 일부들이 중구난방으로 꽂혀 있었다.
에키가 디디고 있는 건 창이 있는 복도의 일부였다. 모서리를 중심으로 건물이 기우뚱하게 박혀 있어 유리창 위에 서 있는 꼴이었다.
발 한 번 잘못 굴렀다간 깨질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 유리창에서 벗어났다.
단단한 바닥을 디딘 후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로 곁에 있던 유리엔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아래의 바다, 곳곳에 솟아오른 기둥 같은 좁은 땅과 그 위에 제멋대로 널린 성의 파편들. 솟아오른 땅도 아니고 텅 빈 허공에 그냥 둥둥 떠 있는 건물의 일부들도 꽤 되었다.
그리고 대지와 대지 사이를 거미줄처럼 엮고 건물을 얽어매고 있는 거대한 식물의 줄기들이 있었다.
에키는 그것을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마물소굴에서 산성액을 토해 놓던 식물형 마물과 생긴 게 아주 비슷했다.
[주인아, 뒤! 뒤에!]
마검이 그녀를 부르는 것과 동시에, 에키는 뒤로 돌아서면서 허리에 있던 아메시스트를 뽑아 들었다.
그녀의 등을 후려치려던 것이 검에 깔끔하게 막혔다. 막히는 정도가 아니라 파삭거리며 갈라졌다. 하얀 뺏가루가 바람에 흩날렸다.
끼익, 끼익, 끼익!
“이건 또 뭐야. 와이번(Wyvern)…… 같긴 한데.”
[우와, 뼈만 남았네. 마물소굴일 때는 걸어다니는 뼈다귀들만 나오더니 여긴 날아다니는 뼈다귀가 나오나 봐!]
와이번은 원래 팔 대신 박쥐 날개가 달려 있는, 악어와 비슷한 머리에 도마뱀 같은 몸통을 가진 마물이었다. 크기는 대체로 말과 비슷했고 비늘로 뒤덮인 단단하고 육중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는 것은 허연 뼈만 있는 와이번들이었다. 뼈다귀만 남은 날개가 펄럭거리며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뻥 뚫려 있는 두개골의 눈 부분에 벌건 안광이 형형했다.
그녀의 칼에 앞발이 부서진 와이번이 뒤로 물러나며 끼익거렸다. 그 울음소리가 동료를 부르는 소리였는지 허공에서 배회하던 대여섯 마리의 와이번이 날개를 접으며 아래로 급강하했다. 작살이 내리꽂히는 것 같은 속도였다.
[뼈뿐이라 그런가 보통 와이번보다 빠른 거 같은데?]
말의 내용과 달리 마검의 어조는 한가했다. 에키는 한 걸음 움직이는 것으로 내리꽂히는 발톱들을 피하며 그대로 검을 올려쳤다. 바르데르기오사가 주인에게 제공하는 살육에 특화된 능력이 어디를 공격해야 죽일 수 있는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눈.’
올려쳐진 검에 의해 와이번 하나의 두개골이 완전히 박살이 났다. 눈 부분이 부서지면서 벌겋던 안광이 사그라들었다. 그러자 몸을 구성하던 뼈다귀가 힘을 잃고 아래로 우수수 떨어졌다.
키이이익!
다른 와이번들이 괴성을 지르며 날아오르자 에키는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가장 아래에 있던 와이번의 눈 부분을 베고 지나간 칼날이 옆에 있던 다른 와이번의 날갯죽지 뼈를 부쉈다.
키에엑!
키이, 키익, 키이익!
눈이 부서진 와이번은 뼈가 흩어지며 떨어졌지만, 날개가 부서진 와이번은 날개뼈가 도로 붙었다. 그 와이번은 기겁한 듯한 비병을 지르고는 다른 와이번들과 함께 그녀가 뛰어오를 수 없는 까마득한 높이로 치솟았다.
에키는 사뿐히 착지하며 혀를 찼다.
“골치 아프게 생겼네.”
[왜?]
“마물을 다 쓸어버려야 할 텐데, 날아다니면 잡기 어렵잖아.”
[어, 그러게? 되게 귀찮겠다.]
부서진 뼈다귀들이 그녀의 주위로 툭툭 떨어졌다. 흐트러진 드레스 자락을 펴다가 무심코 그 뼈다귀들에 시선을 주었던 그녀의 미간이 구겨졌다.
바다에 떨어진 뼈가 녹아내렸다. 겉보기엔 평범한 바다로 보이는데 평범과는 거리가 먼 모양이었다.
[와! 와! 저거 봐, 녹았어! 떨어지면 뼈도 못 추리겠다, 그치?]
“발, 어쩐지 즐거워 보인다?”
[녹아 죽는 건 못 봤단 말이야! 주인아, 인간 빠뜨리자고는 안 할 테니까 마물이라도 빠뜨려보자, 응?]
“…….”
에키는 마검의 말을 무시하고 눈을 가늘게 뜬 채 다시금 주위를 살폈다.
해골 와이번들이 여기저기서 날아다니고 있었다. 언뜻 보아도 수가 엄청났다. 유리엔이라면 몰라도 다른 인간들은 저것으로부터 무사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녀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것을 안다고 말하던 유리엔이 떠올랐다. 어떻게,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에키는 심호흡을 하고 그 생각을 일단 제쳐두었다. 결절 안에서 찾아 내야 할 사람이 많았다.
‘대피할 시간이 있었으니 어지간한 사람들은 다 도망갔을 거고, 유리엔은 괜찮겠지만…… 로잘린의 가족들과, 연구실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위험해.’
조급해진 그녀는 조각난 성의 파편들 중에서 구분할 수 있는 형상을 찾아내려 애썼다. 그러다 오른쪽 위에 떠 있는 연구실 문을 발견했다.
‘사슬에 묶여 있었으니 그 사람들은 여전히 저기에 있겠지. 결절의 시작점도 저기일 거고.’
문을 확인하고 한 번 더 주변을 훑었다. 연구실과 지하가 아니니 로잘린의 가족들은 북쪽 탑에 갇혀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러나 북쪽 탑 모양의 파편은 그녀의 시야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에키는 우선 앞에 보이는 것부터 해결하기로 결심하고 마법 가방을 쥔 채 발을 굴렀다.
바닥에서 부서져 있는 복도의 벽 위로, 벽을 디디고 중간의 허공에 떠 있는 발코니의 난간으로, 난간을 박차고 뛰어올라 연구실의 문고리를 움켜쥐었다.
기울어져 있던 문이 그녀의 무게로 인해 바깥쪽으로 확 열렸다. 에키는 열린 문에 매달린 채 일단 연구실 안쪽으로 가방을 던져 넣었다.
‘하나, 둘.’
문을 잡고 흔들리며 타이밍을 잰 다음, 안으로 뛰어들었다. 무사히 연구실 안에 착지한 그녀는 내부를 살펴보았다.
비스듬히 기울어지는 바람에 찬장이 넘어져 한쪽에 처박혀 있었다. 깨진 유리병과 각종 액체가 기울어진 바닥에 뒤엉켜 고여 있는 꼴이 위험해 보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살의에 물든 사람들은 묶인 사슬 덕에 액체가 고인 웅덩이로 빠지지는 않았다. 천장이 멀쩡해서 해골 와이번들이 공격하지 않은 것도 천만다행이었다.
그들은 인간을 발견하자 또다시 죽이고 싶어 발광하기 시작했다. 허공을 길게 가른 금 같은 시작점은 몸부림치는 여자의 위쪽 천장에 있었다.
에키는 기울어진 바닥을 요령껏 걸어 우리 앞으로 다가갔다. 철창을 열고 여자의 앞에 섰다. 손을 대기 전에 그녀는 찰나 고민했다.
‘흡수하면 살의가 추가되는 거나 다름없겠지.’
참을 수 있는 양일까. 스스로의 인내를 가늠해 보았다. 아까 여자의 안에서 느낀 살의의 양도 떠올려 보았다. 네 명 다 그 정도라면 충분히 흡수할 수 있는 양이었다.
사실 이성을 잃지만 않는다면 훨씬 더 많은 살의도 억누를 자신이 있었다. 중독되어 정신을 잃었을 때 살의가 약간 줄어들어 여유가 있기도 했다.
‘오히려 걱정되는 건…….’
에키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장갑을 벗었다. 맨손으로 날뛰는 여자의 명치를 누르고, 조금 전과 똑같은 방법으로 마나를 흡수했다.
한 번 해보았더니 두 번째는 수월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의 머리카락과 눈동자에서 물이 빠지듯 검은색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에키의 흰 손가락 끝이 잠깐 검게 물들었다가 가라앉았다.
검은색이 빠져나가고 갈색 머리카락으로 되돌아오자 여자의 몸부림이 멎더니 축 늘어졌다.
마검의 마나를 완전히 흡수한 에키가 손을 떼고 제 이마에 살짝 배어난 땀을 닦아냈다. 그녀는 여자를 불러보았다.
“저기요. 제 말이 들려요?”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에키는 조심스럽게 숙인 여자의 턱을 받쳐 들어올렸다.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며 가려져 있던 여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괜찮…….”
그녀는 말을 멈췄다. 벌어진 여자의 입에서 침이 흐르고 있었다. 뒤집혀 있는 눈에는 빛이 없었다.
보자마자 알 수밖에 없었다. 숨을 쉬고 있어도 시체나 다름없다는 것을. 여자는 정신이 죽어버렸다.
[으엑. 못 견뎠나 봐. 하긴 미치는 게 정상이지.]
에키는 표정이 사라진 얼굴로 여자를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손을 뗐다. 이 점을 걱정했었다.
어떤 고통인지 알기에, 그리고 살의에 물든 여자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기에, 버티지 못하고 망가진 그녀가 약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에키네시아는 자신이 미치지 않은 게 운과 오기 덕분이었음을 안다. 살면서 한 번도 극한에 몰려본 적이 없어서 마검을 쥐기 전에는 몰랐으나, 그녀는 의지가 굉장히 강한 편이었다.
그래서 그 악몽을 버텨낼 수 있었다. 최악의 순간에 무너지는 대신 불타오르는 것을 택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그녀 같을 수는 없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거나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그저 그들이 버틸 수 있는 것과 그녀가 버틸 수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