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29화
[쟤네 되게 익숙한 느낌이다?]
마검이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에키는 신음처럼 대꾸했다.
“네 마나에 물든 인간들이잖아.”
[설마 저번에 그 마석 같은 걸로? 뭐야, 걔네 너희 집에 나 가져다 두기 전에 내 마나를 엄청 많이 보관해 뒀나봐?]
마검의 말에 퍼뜩 떠오른 게 있었다. 그녀는 유리병이 진열된 찬장 쪽으로 향했다. 알 수 없는 액체와 각종 재료가 든 유리병들 사이에 마석이 담긴 유리병들이 보였다.
언뜻 보기에는 그냥 보석 같지만 이런 곳에 있으니 마석이겠지. 에키는 그중에서 검은 마석이 담겨 있는 유리병을 찾아보았다. 보이지 않았다.
대신 찬장 아래에서 잠겨 있는 서랍을 찾아냈다. 그녀가 자물쇠를 움켜쥐고 잠시 고민하자 마검이 종알거렸다.
[열쇠가 없잖아. 어떻게 할 거야?]
“없어도 돼.”
짧게 답한 그녀가 고민을 끝내고 마나를 움직였다. 보랏빛이 반짝이더니 그녀의 손 안에서 자물쇠가 으스러졌다. 그녀는 자물쇠의 파편을 탁탁 털어내고 서랍을 열었다.
[어, 주인아, 조용히 처리할 거라고 하지 않았어?]
“우선순위가 바뀌었으니까.”
[무슨 뜻이야?]
“조용히 처리하는 것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내는 게 급해.”
에키는 서늘한 어조로 대꾸하며 안쪽을 뒤졌다. 서랍 안에 철제금고가 있었다.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맨 손으로 마나를 뽑아내어 금고를 부쉈다.
그 안에는 케이스에 하나씩 담긴 검은 마석 몇 개와, 메모가 잔뜩 끼워진 노트가 있었다.
에키는 케이스를 열고 검은 마석에 손가락을 대어보았다. 목걸이 때처럼 마나가 흘러 들어오진 않았다.
마석은 마나를 저장하는 성질이 있지만, 그 안에 마나를 넣거나 빼내는 건 마석만 가지고는 불가능했다. 그러려면 특별한 가공이나, 마법사 혹은 마스터급 기사가 필요했다. 그리고 에키네시아는 바로 그 마스터급 이상의 기사였다.
그녀는 마석 안에 마나를 불어넣어 보았다. 그녀의 마나가 마석 안의 마나와 닿아 부드럽게 섞여 들었다. 그 안에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우와, 진짜 내 마나다!]
“……미치겠네.”
이로서 저 사람들이 마검의 마나에 물든 게 확실해졌다.
더불어 드라코툼바 성에서 마물이 생겨날 정도의 참사가 벌어진 원인도 짐작이 갔다. 실수든, 의도든, 살의에 물든 저 사람들이 풀려나와 참극을 일으켰을 것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이니 정확하게 알 수는 없어도 관련이 있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내가 시간을 되돌리기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거겠지.’
마검의 마나를 이용해서 실험을 하고 마석 목걸이 같은 것을 만들려면, 로아즈 저택에 마검을 보내기 전에 마검의 마나를 뽑아놓아야 했다.
훨씬 예전부터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뜻이다. 당연히 회귀 이전에도 일어났던 일일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의에 물든 인간이나, 마검의 마나가 담긴 마석 같은 게 그 시절에는 발견되지 않았던 이유는…….
‘악마 때문이야.’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가진 잠재력이 이 일에 연루된 자들의 상상을 초월해 버려서. 그녀가 막을 수 없는 악마가 되어 대학살을 벌였으니까.
그 와중에 연루된 자들이 죽었을 수도 있고, 그것을 보고 경악한 자들이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관련된 연구와 마석들을 모조리 폐기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이런 게 남아 있고, 계속 진행되고 있는 걸지도.’
에키는 마석을 내려놓고 노트를 집어 들었다. 두께가 상당한 그것을 대강 휘릭휘릭 넘겨보았다. 암호인지 뭔지 모를 알아볼 수 없는 말들과 그녀로서는 해석하기 어려운 수식과 마법진들이 빽빽했다.
문득 그녀의 손이 멈췄다. 복잡한 수식들 옆에 고대어로 휘갈겨놓은 낙서 같은 게 보였다. 그녀는 교양으로 배웠던 고대어를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 되살려 그것을 더듬더듬 읽었다.
-마검에서 추출한 마나를 이용하면, 또 다른 마검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녀의 손에서 노트가 미끄러져 떨어졌다.
[왜? 뭔데 그래?]
미처 보지 못했는지 바르데르기오사가 의아하게 물어 왔다. 에키는 입을 다문 채 마른세수를 했다.
‘무슨 미친 짓을 벌이려는 거야?’
현기증이 이는 머리를 짚고 알게 된 것들을 조합해보았다. 디아상트 공작이 몰래 소유하고 있던 성. 마법사의 연구를 위해 지었다는 성. 여기서 마검을 연구한 자료가 나왔다. 노트의 상태로 보아 꽤 오래 된 것 같다.
‘디아상트 공작이 예전부터 바르데르기오사를 가지고 있었던 걸까? 그러다가 황제에게 마검을 전달하고? 그럼 왜 공작은 황태자를 지지하고 있는 거지? 무엇을 노리고? 마검을 만든다는 건 대체…….’
에키는 장갑으로 가려둔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아득하고 어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왜애, 뭔데? 무슨 말이었길래? 나도 가르쳐줘! 나도오!]
“……발, 네 마나를 가지고 너 같은 검을 또 만드는 게 가능할까?”
[엥? 그게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불가능해?”
[이 몸은 기오사라고. 날 만든 사람은 신의 권능을 빌린 인간이란 말이야! 내 찌꺼기로 나 같은 검을 만들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래, 그렇겠지.”
에키는 떨어뜨린 노트를 노려보다가 그것을 주워 들었다. 그러곤 주변을 뒤져 큼직한 가죽주머니를 하나 찾아냈다. 그 안에 있던 잡동사니를 쏟아버린 후, 살의가 담긴 마석들과 노트를 쓸어 담아서 챙겼다.
잠시 밖에 귀를 기울였다. 아직 경비병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대로 일어서서 나가려다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크르르.”
“캬아악!”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몸부림치는 자들이 보였다. 중년의 남녀와 젊은 남녀, 총 네 명. 검게 물든 머리칼과 눈동자. 족쇄에 쓸린 피부가 까져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누구일까. 어떤 사람이었을까. 어쩌다가 살의에 물들어 이곳에 갇혀 있게 된 걸까. 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성이 남아 있을까.
마검에 물들어 있을 때 그녀 자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가. 저들도 자신처럼, 저 몸뚱이 안에서 지금 울부짖고 있는 건 아닐까.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것이 어떤 지옥인지 너무나 잘 알아서.
에키는 멍하니 자신이 챙겨 든 가죽주머니를 바라보았다.
마석에 담아놨던 마검의 마나로 물든 사람들이라면, 마검의 마나를 도로 뽑아내면 멀쩡해지지 않을까?
타인의 몸 안에 있는 마나를 흡수하는 건 본디 마법의 영역이었다. 마법진과 빈 마석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 연구실에 마나를 흡수할 수 있도록 가공된 마석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설사 있다고 해도 에키는 그것을 구분할 수 없었다.
대신 그녀에게는 마나를 수족처럼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실력이 있었다.
마스터라면 누구든 마석으로부터 저장된 마나를 흡수할 수 있다. 마스터의 몸 안에 생성되는 마나 코어가 그런 일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마스터 위의 경지인 자신은 마석이 아니라 사람으로부터 마나를 흡수하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해본 적은 없지만 할 수 있을 수도 있다.
그녀는 오른쪽 끝에 있는 우리로 다가갔다. 우리의 창살을 움켜쥐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녀 또래의 여자가 그 안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멋대로 날뛰는 육체에 갇힌 채 울부짖던 시간들. 누군가 구해주기를 내내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를 구해줄 수 없었다. 그건 스스로 이겨내야 하는 시련이었다. 기오사. 고대어로 ‘시험’이라는 뜻의 그 이름처럼.
그녀와 달리 저 사람들은 바르데르기오사를 쥔 게 아니다. 그러니 구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누구보다 절실하게 발버둥쳐 보았던, 마검의 악마였던 에키네시아는 시도해 보지도 않고 그 가능성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어? 뭐 하려고?]
에키는 철창의 자물쇠를 부수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까워지자 사슬에 묶인 여자가 더 격렬하게 발광했다.
여자의 앞에 선 그녀가 장갑을 벗었다. 진주색에 가까운 분홍색 매니큐어를 바른 가지런한 손톱이 드러났다.
그 손톱이 감옥의 벽과 바닥을 긁느라 뒤집어지고 갈라져 피가 맺혀 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의 고통은 의외로 별것 아니었다. 그 손에 아버지와, 어머니와, 란셀리드와, 니콜 언니와,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과…… 유리엔의 피를 묻힐 때에 비하면.
지저분한 누더기와 뒤엉킨 머리카락 사이로 그녀의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손이 파고들었다. 이 여자는 마스터가 아니니 마나 코어도 없겠지만, 그래도 코어가 생기는 위치인 명치 위에 손을 올렸다.
에키는 여자의 몸부림을 무시하고 자신의 마나 코어를 움직였다. 마석의 마나를 흡수하는 요령으로 빨아들여 보았다.
허공을 휘젓는 느낌만 들었다. 몇 번 시도하다가 이번에는 반대로 마나를 불어넣어 보았다. 검이 아니라 사람의 몸임을 잊지 않고, 종잇장을 다루듯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이질적인 마나가 흘러들자 여자가 더 미쳐 날뛰었다. 에키는 다른 손으로 버둥거리는 몸뚱이를 눌렀다.
여자의 몸에 스며든 그녀의 마나가 익숙한 것에 닿았다. 살의를 담은 마나. 그녀는 고여 있는 그것을 자신의 마나로 감싸서 잡아당겨 보았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잘되지 않았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실제로는 길지 않았으나 체감은 몹시 긴 시간이 흘렀다. 어느 순간 손끝에서 그 익숙한 감각이 빨려들어 왔다.
‘됐……!’
내심 환호하려던 찰나.
[으악! 주인아! 앞에! 앞에 봐! 저거 또 나왔어!]
마검의 호들갑에 그녀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사슬에 묶인 여자의 머리 위 천장에서부터 공간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공간의 신검 라키아기오사가 공간을 베고 지나간 상처 자국. 결절이었다.
“망할!”
에키는 욕설을 내뱉으며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결절이 부풀어 오르며 여자를 삼켰다. 그 옆의 우리에 있던 남자도. 점점 범위를 넓히며 그것이 연구실을 거의 다 잡아먹었다.
그녀는 아까 챙겨둔 가죽주머니를 움켜쥐고 일단 연구실 밖으로 향했다.
결절이 생긴 걸 보니 그녀가 시도했던 방법이 성공하긴 한 모양이었다. 방금 한 행동이 죽을 운명이던 저 사람들을 살게 만든다는 뜻이니까.
장갑을 도로 끼며 일직선의 복도를 나는 듯이 빠져나가자 이제야 돌아오는 경비병들이 보였다. 경비병 하나가 인상을 찌푸리고 그녀를 향해 무어라 소리치려 했다. 에키가 그보다 먼저 소리쳤다.
“도망쳐! 결절이야!”
“예?”
“결절이 생겼다고, 이 성에! 전부 나가!”
어리둥절해하던 경비병들은 그녀의 뒤로 물거품처럼 부풀어 오르는 일그러진 공간을 보고 새파랗게 질렸다.
“저, 저, 저게, 겨, 겨, 결절……?”
“결절 맞으니까 빨리 대피해! 당장 성 전체에 알려!”
에키는 그들을 지나쳐가며 명령조로 말하고는, 하녀가 배정해 주었던 자신의 방으로 달렸다.
결절은 일종의 자연재해였다. 결절을 확인하자마자 경비병들은 황급히 성 전체에 종을 울려 사태를 알렸다.
곧 성은 아비규환이 되었다. 하녀와 하인들, 경비병들까지 모조리 급한 대로 짐을 챙겨 밖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다행히 결절이 부푸는 속도는 그렇게까지 빠르지 않았다. 물론 저 속도가 언제까지 유지될지, 결절의 전체 범위가 얼마나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에키는 방에 들어가서 하인들이 가져다 놓은 마법 가방을 찾았다. 그것을 열고 연구실에서 챙겨 나온 가죽주머니를 쑤셔 넣은 다음, 가방을 집어 들었다.
결절이 생길 수도 있다고 예상했기 때문에 마법 가방 안에 식량과 물, 약 등의 필수품들을 쟁여놨었다. 이것만 가지고 있으면 결절에 들어가도 무리 없이 버티고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가방을 들고 방 밖으로 나왔다. 곧바로 만찬이 이루어졌던 식당 쪽으로 향하다가 달려오던 유리엔과 딱 마주쳤다.
“에키!”
그가 창백해진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 에키는 말없이 그에게로 다가갔다.
‘도망치라고 한다고 그가 도망칠까? 나를 두고?’
유리엔은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그 사실을 확신했다. 그렇다고 그와 함께 결절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유리엔이 안전한 곳에 있길 원했다. 강제로라도.
그래서 그가 있을 식당 쪽으로 온 참이었다. 에키는 그에게 다가가며 손을 휘둘렀다. 기절시키기 위한 손놀림이었다.
그녀는 마스터인 2황자 카르엠도, 근위기사도 손쉽게 기절시켰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가로막혔다. 그들과 유리엔 사이에는 같은 마스터라 부르기 미안할 정도의 실력 차이가 있었다.
그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다가오는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에키가 흠칫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