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28화
보통 성이란 요충지에 세워져 기사단이 주둔하며 방어를 전담하거나, 도시를 감싸고 세워져 도시를 수비하게 된다. 이런 성은 국가에서 관리하고 성주를 임명하곤 했다.
그러나 그와 다른 경우로, 귀족들이 다양한 목적으로 지은 작은 성들이 있었다.
휴양을 위한 별장의 개념으로 아름답게 건설하기도 했고, 가문의 기사들을 훈련시키거나 재산을 보관할 목적으로 건설하기도 했다. 그런 성들은 개인 소유의 성이다.
드라코툼바는 후자에 속하는 성이었다.
마을에서 전나무 숲 안쪽으로 이어진 좁고 울퉁불퉁한 길을 마차를 타고 한참 달리니 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작은 성은 울부짖는 성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어딘지 모르게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절벽을 등지고 앉은 성은 늙은 쥐 같은 색이었다. 진회색 돌로 지어진 벽은 견고했으나 갈색으로 말라붙은 담쟁이들이 흉물스럽게 엉켜 있었다.
성문의 금속 부분과 경첩은 벌겋게 녹슬었다. 성문 위의 성벽에서 석궁을 들고 있는 경비병은 눈 밑이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경비병은 마차를 보자마자 석궁을 겨눴다.
“정지! 누구냐!”
마부석에 앉아 있던 마부, 정확히는 마부 역할로 따라온 창천의 정보원이 목소리를 높였다.
“창천기사단장께서 드라코툼바 성주에게 방문을 청한다! 문을 열어라!”
“창천……?”
여기서 그 이름을 들을 줄은 몰랐던 경비병은 얼떨떨한 얼굴이 되었다.
마부가 창천의 인장이 찍힌 서류로 신분을 증명하고, 경비병이 성주에게 소식을 알리고, 안으로 안내되어 유리엔과 에키가 성주의 만찬에 초대받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성주는 나뭇가지처럼 마른 휑한 얼굴의 남자였고, 창천기사단장은 그가 상대하기엔 지나치게 무거운 이름이었다.
그는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식탁에 앉은 유리엔을 바라보았다.
“창천기사단장께서 이 궁벽한 곳까지 무슨 일로 오셨는지…….”
“제보가 들어왔다.”
유리엔이 담담하게 말했다. 성주는 땀을 닦았다.
“무, 무슨 제보 말씀이십니까?”
“이 성에 바르데르기오사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더군.”
“바, 바르데르기오사요? 마검?”
“이 성이 울부짖는 성이라고 불린다고 들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울부짖는 비명이 들려온다고. 그 비명이 마검과 관련이 있는가?”
성주의 낯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머리가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로 고개를 저어댔다.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이곳은 스베인 백작가 소유의 성일 뿐입니다! 백작가 소속의 마법사님이 여기에 연구실을 차리셨는데, 마물로 실험을 하면서 마물이 내는 비명 때문에 그런 헛소문이 도나 봅니다.”
“마물이라고? 마물 실험은 불법 아닌가?”
“아닙니다! 허가를 받았습니다. 허가서를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성주는 절박하게 말했다. 에키는 드레스를 완벽하게 차려 입고 유리엔의 오른편에 앉아 조용히 그 대화를 듣고 있었다.
‘스베인 백작가가 아니라 디아상트 공작가의 소유일 텐데.’
성주는 당연히 진실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성주와의 대화에서 소득을 얻는 건 기대하지 않았다.
에키는 적당한 타이밍을 노려 스푼을 내려놓고 유리엔을 불렀다.
“로드, 저…….”
“아, 미안하군.”
유리엔이 잊고 있었다는 듯 그녀를 돌아보더니, 성주를 향해 말했다.
“대화가 길어질 듯하니, 내 스콰이어를 먼저 숙소로 안내해 주겠나.”
“아, 실례했습니다. 숙녀분은 피곤하실 텐데.”
겉보기란 중요한 요소였다. 성주는 드레스 차림의 에키네시아를 기사단 장의 스콰이어라기보다 귀족 영애로 인식하고 있었다.
성주가 하녀를 불러 안내를 명했다. 에키는 인사를 하고 하녀를 따라 만찬장을 나왔다.
[이제 가는 거지? 가다가 들켜서 죽일 일 생겼으면 좋겠다! 얘부터 죽이는 거야?]
마검이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에키는 마검의 말을 무시하고 촛대를 든 하녀를 따라 걸었다.
성 내부는 천장이 높고 창이 좁아 어두웠다. 약간 서늘한 복도를 따라 걷자니 지워진 과거에 이곳에서 마물이 배회하던 풍경이 떠올랐다. 어딜 봐도 음산했으나 폐허였던 그 때에 비하면 그래도 멀쩡하고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손님방으로 보이는 곳에 도착하자 하녀가 문을 열어주었다.
“여기서 쉬시면 됩니다, 아가씨.”
“고마워.”
하녀가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물러났다. 에키는 일단 문을 열고 방에 들어갔다. 방은 무난한 손님용 침실이었다.
그녀는 닫은 문에 기대 선 채 하녀의 기척이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기다린 다음, 도로 문을 열고 나왔다.
‘감시하는 기척은…… 없네.’
성 전체의 신경이 유리엔에게 쏠려 있는 모양이었다. 그것을 의도하긴 했지만 그래도 한둘 정도는 그녀에게 따라붙을 줄 알았다. 예상보다 경계가 느슨하고, 경비 수준도 낮았다. 덕분에 일이 쉬워질 듯했다.
지하 쪽은 용의 뼈가 있는 곳이니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에키는 먼저 연구실이라 불리는 별채 쪽으로 움직였다.
오가는 경비병들의 눈을 피하는 건 드레스 차림으로도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구조는 내부지도를 보고 외워둔 데다, 지워진 과거에 와본 덕에 익숙했다. 용의 뼈를 찾아내기 위해 샅샅이 뒤지기까지 했던 곳이라 잘 알고 있었다.
에키는 금세 연구실 근처에 도착했다. 길게 이어진 복도의 끝에 경비병이 두 명 서 있었다.
그녀는 암살자나 첩자가 아니었기에, 이런 아무것도 없는 복도에서 경비병의 눈을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쟤들은 못 피하겠네? 그럼 죽여서 안 들키게 하자!]
에키는 마검의 헛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잠깐 생각하다가, 그냥 정면으로 복도에 들어섰다.
금색 레이스로 장식된 적갈색 드레스 자락이 그녀의 걸음을 따라 사뿐사뿐 흔들렸다. 루비가 달린 금귀걸이가 귓가에서 달랑거렸다.
그녀는 가진 드레스 중에서도 일부러 화려한 것을 입고 왔다. 어딜 봐도 귀한 신분으로 보이는 아가씨가 태연히 다가오자 경비병들이 당황했다.
“멈추십시오. 누구십니까?”
“이 성의 경비병들은 몇 안 되는 손님의 얼굴도 기억 못 하니?”
에키는 짜증스럽게 말하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경비병들이 서로 눈치를 보더니 한 명이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창천기사단장님과 함께 오신 영애십니까? 몰라 뵈어 죄송합니다.”
“알면 됐어. 앞으로는 조심해.”
그녀는 코웃음을 치고는 경비병들을 지나쳐 연구실 쪽으로 걸어가려 했다. 당황한 경비병이 창으로 막아서며 급히 말했다.
“이곳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아가씨.”
“응? 여기가 어딘데? 이 성은 왜 이렇게 미로 같니?”
드라코툼바 성이 복잡한 구조인 건 사실이었다. 경비병이 한숨을 쉬었다.
“길을 잃으신 거라면 손님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기, 길을 잃었다니, 이건 그냥 산책이야! 산책한 것일 뿐이지만, 어쨌든, 뭐, 안내해 봐.”
그녀가 턱짓하자 경비병 둘이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러더니 하나가 앞장서서 복도 밖으로 빠져나갔다.
“따라오십시오, 아가씨.”
에키는 얌전히 경비병의 뒤를 따르다가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자 슬쩍 발을 움직였다. 계단에 깔려 있던 양탄자가 강한 힘에 밀려 아래로 미끄러졌다.
“어, 어?”
그녀는 바닥의 양탄자가 움직이는 바람에 비틀거리는 경비병의 뒷목을 재빨리 후려쳤다. 그러곤 기절한 경비병이 넘어지는 것을 받아 들어 계단 아래에 눕혀놓았다.
그녀는 제국의 황족이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졌던 모습을 기억 속에서 되살려 경비병의 자세를 고쳐주었다. 계단에서 떨어진 것으로 보이도록.
[너 계단 되게 좋아한다? 그냥 쓱 해버리는 게 더 편할 텐데.]
“시끄러워, 발. 바쁜데 자꾸 헛소리 하지 마.”
[헛소리라니, 충고라고! 솔직히 네가 생각하기에도 이런 번거로운 짓보다 죽이는 게 더 편하지 않아?]
“아무나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좀 닥쳐.”
에키는 빠르게 아까의 복도로 되돌아갔다. 혼자 남아 있던 경비병이 의심스럽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가씨? 왜 돌아오셨습니까? 같이 간 녀석은…….”
“빨리 따라와. 걔가 계단에서 혼자 고꾸라져서 기절했으니까.”
“네? 그게 무슨…….”
“네 동료가 계단에서 넘어졌다고. 여긴 대체 훈련을 시키긴 하는 거니? 어떻게 경비가 손님 얼굴도 제대로 못 알아보고,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기나 해?”
그녀는 일부러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그리고 경비병이 당황하든 말든 앞서 걷다가 짜증을 내며 돌아보았다.
“뭐 하니, 당장 안 따라와?”
경비병은 지키던 문을 돌아보며 고민하더니, 에키가 한 차례 더 짜증을 내며 성주까지 들먹이자 한숨을 쉬고 그녀를 따라왔다.
그녀는 그를 데리고 아까 그 계단으로 향했다. 널브러져 있는 동료를 본 경비병이 급히 그의 상태를 살피고는 에키를 돌아보았다.
“넘어지면서 다쳤을 수도 있으니 사람을 불러와야겠습니다.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아가씨를 안내할 하녀도 불러오겠습니다.”
“알았으니 빨리 가. 피곤해 죽겠어.”
“죄송합니다, 아가씨.”
경비병이 황급히 달려갔다. 에키는 당연히 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줄 생각이 없었다. 경비병이 사라지자마자 그녀는 연구실이 있는 복도로 되돌아갔다.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던 문에는 마나가 흐르고 있었다. 알람 마법이나 공격 마법 같은 게 걸려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유도했다지만 경비병들이 쉽게 자리를 비울 수 있었던 이유였다.
에키는 마법사가 아니었고, 마법에 조예가 있지도 않았다. 그녀가 마법에 대해 아는 건 교양으로 배운 것과 니콜에게 얻어 들은 게 전부였다.
그러나 그녀에겐 기오사를 모으기 위해 9년을 떠돌며 얻은 경험과 마스터 위의 경지에 오른 실력이 있었다.
아직도 그녀는 자신의 경지를 무어라 부르는지조차 몰랐지만, 자신이 어디까지 할 수 있으며 어떤 일까지 가능한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부술 거야?]
“아니, 되도록 조용히 처리해야 하니까.”
극과 극은 통하는 법이다. 검의 정점에 오르면 그 파괴력이나 마나 통제가 마법과 다름없는 수준으로 보이듯이.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침입을 느낀 마나의 흐름이 요동치며 마법이 발동되려 했다.
에키는 검에 마나를 불어넣는 요령으로 문고리에 마나를 불어넣어 마나의 흐름을 헤집어 놓았다. 그로 인해 발동하기도 전에 마법의 구조가 붕괴했다. 상당히 무식한 방법이었으나 효과적이었다.
이어 마나로 코르셋을 조이고 물건을 들어 올리던 것처럼 문고리 너머의 잠금쇠를 움직였다.
금세 달칵 하고 잠금쇠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소리를 내지 않고 문을 밀어 열었다.
그 안에서 에키네시아가 본 광경은 그녀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범주의 것이었다.
연구실이라고 했고, 아까 성주가 마법사가 마물 실험을 하고 있다고 했었으니 그런 공간일 줄 알았다. 혹은 그녀가 찾고 있던 로잘린의 남편이나 딸이 갇혀 있는 곳이거나.
어느 쪽도 아니었다. 에키는 입구에 얼어붙은 채 숨을 멈췄다.
입구 근처는 확실히 마법사의 연구실다웠다. 커다란 책상에 어지럽게 양피지들이 널려 있고 책들이 제멋대로 쌓여 있었다. 한쪽에 마석과 각종 액체가 든 유리병이 진열되어 있었고 마법진을 그린 종이가 굴러 다녔다.
입구의 바로 맞은편에는 철창으로 격리된 우리가 있었다. 우리 안에 있는 것은 짐승도, 마물도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일렁거리는 검은빛으로 머리카락과 눈동자, 피부 일부가 물들어버린 사람들.
사슬에 사지가 묶인 채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몰골. 그 검은 눈에 분명하게 떠올라 있는 살의.
그들은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인간을 죽이고 싶어서 몸부림쳤다. 사슬이 철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앞에 있는 인간을 죽일 수가 없자 그들이 마구잡이로 울부짖었다.
지워버린 과거, 아젠카의 지하 감옥에 묶여 있었던 에키네시아 로아즈 자신과 비슷한 꼴이었다. 마검의 마나에 물든 자들.
“……이게, 무슨.”
그 순간 그녀가 떠올린 건 니콜이 조사하기 위해 가져간 마석 목걸이였다.
2황자, 마검, 디아상트 공작과 2황자 간의 관계, 디아상트 공작이 은밀히 소유하고 있는 성에 갇혀 있는, 마검의 마나에 물든 인간.
연결고리가 느껴졌다. 오싹 소름이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