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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127화 (127/211)

검을 든 꽃 127화

그날 기숙사로 돌아온 에키는 잘 포장된 상자를 발견했다. 유리엔이 보낸 마법 가방이었다.

기본적으로는 바퀴와 손잡이가 달려 끌고 다닐 수 있는 보통 여행용 가방의 형태였다. 크기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다만 형태 외에는 겉보기부터 확연히 보통 가방과는 달랐다.

겉을 감싼 흰 가죽은 마법을 잘 받아들이는 재질일 것이다. 마법 가방에는 희귀한 마물을 특수 처리한 가죽을 쓴다고 니콜이 전에 설명해준 것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상단에는 엄지손가락만 한 커다란 마석이 박혀 있고, 그것을 중심으로 가방의 절반을 뒤덮는 크기의 마법진이 금실로 수놓아져 있었다. 얼핏 보면 섬세한 문양으로 보였다.

에키는 시험 삼아 짐을 챙겨 넣어 보았다. 니콜한테 빌렸던 것보다 더 많은 양의 짐이 들어갔다.

그녀는 가만히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무언가를 결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녀 암살을 막은 대가로 받았던 포상금 전부와, 정식 스콰이어가 되면서 받아 모아뒀던 월급을 챙겼다.

꽤 늦은 시간이었지만 그녀는 그것들을 들고 곧바로 아젠카 시내로 향했다.

[응? 너 이 시간에 어디 가?]

“주고 싶은 게 생겨서. 사흘 후 출발이니 시간을 맞출 수 있을지 모르겠네.”

[누구한테 뭘? 죽일 만한 놈한테 독이라도 주려고?]

“죽이는 것밖에 상상이 안 되면 그냥 입을 다물어, 발.”

[그게 아니면 재미없단 말이야!]

에키는 마검의 투덜거림을 무시하며 목표했던 가게를 찾아냈다. 그리고 주문제작을 맡겼다.

그로부터 사흘 후, 에키네시아는 울부짖는 성으로 출발하기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주문했던 물건을 받았다.

* * *

신력 1629년 7월 3일.

창천기사단장 유리엔 드 하르덴 키리에와 그의 스콰이어 에키네시아 로아즈는 임무를 위해 비밀리에 아젠카를 떠났다.

‘비밀리에’라고 하지만 부기사단장이나 대신관 같은 아젠카의 주요인사들은 임무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아는 것은 마검 바르데르기오사에 대한 제보일 뿐, 공녀의 가족을 구출하러 간다는 진짜 이유는 알지 못했다.

열차의 객실에 자리를 잡은 후 유리엔은 곧바로 드라코툼바의 내부지도를 꺼냈다. 그가 붉은 색으로 표시가 된 곳들을 짚어 보였다.

“북쪽 탑은 폐쇄되어 접근할 수 없다고 한다. 뒤뜰에 복도 하나로 연결된 별채는 연구실이라고 불리면서 격리되어 있다. 지하 2층은 원래 존재했으나 지진으로 무너진 이후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세 곳이 확인해 봐야 할 곳들이다.”

에키는 지하에 표시된 붉은 가위표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 그곳이 지워진 과거에 그녀가 용의 뼈를 찾아낸 장소였다.

‘저긴 확실히 아냐. 용의 뼈를 보관해 둔 곳에 사람을 가둬두진 못할 테니까. 그럼 둘 중 하나인가.’

“세 곳이 모두 아닐 경우 비밀 방이 있다고 간주하고 좀 더 세부적인 수색에 들어가야 한다. 그때에는 물러나서 처음부터 다시 조사할 예정이다. 다만 그럴 확률은 낮다고 생각한다.”

“알겠습니다.”

에키네시아는 알려지지 않은 마스터다. 기사단장의 스콰이어라지만 사관생도, 그것도 1학년에 불과한 그녀를 제대로 경계하진 않을 것이다.

경계받지 않는 것에 비해 그녀는 마스터로서 마나의 흐름을 감지하여 마법으로 은폐된 곳이라도 알아차릴 수 있다.

따라서 유리엔이 성주를 상대하는 동안 그녀가 성 내부를 조사하는 건 괜찮은 계획이었다.

그들은 그 뒤 세부적인 사항과 공녀의 가족들을 구출한 후의 문제들에 대해 조금 더 논의를 했다.

논의가 끝난 후 유리엔은 내부지도를 접어 그녀에게 건넸다. 에키는 그것을 받으며 전부터 묻고 싶었던 것을 물었다.

“율, 당신이 위장 약혼을 한 건, 황태자 전하를 지지한다는 걸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서, 맞지요?”

“그렇다. 약혼을 거절하면서 지지한다고 하는 건 신뢰가 가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제가 길게 기다리지 않도록 하겠다고도 하셨죠.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요?”

에키는 한 차례 호흡을 고르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황태자 전하를 지지하려면 약혼을 유지해야 하죠. 그런데도 제가 길게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건, 당신이 약혼을 오래 끌 생각이 없다는 뜻이잖아요.”

그녀는 혼자서 그런 일이 가능한 경우를 몇 가지 생각해 보았다. 약혼을 파기하고도 황태자에 대한 지지가 유지되는 상황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그리고 그녀가 가진 정보들을 이용해 한 가지 가능성을 추리해 냈다.

“약혼을 중지하고도 황태자 전하를 지지하는 데에 문제가 없다는 건, 디아상트 공작과 황태자 전하가 갈라서게 될 예정이라서인가요?”

아직 그녀가 맡겼던 쐐기의 조사 결과는 오지 않았다. 2황자 측의 근 위기사단장과 디아상트 공작이 콜본에서 자주 만났었는지에 대한 조사.

만약 그 조사 결과가 예상과 달라도, 에키는 확실하게 아는 것이 있었다. 황태자가 황제가 된 이후 디아상트를 숙청한다는 미래. 지워진 과거에 있었던 일.

로잘린 디아상트, 디아상트의 차녀와의 약혼이 황태자에 대한 지지가 되는 이유는 디아상트의 장녀가 현 황태자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황태자와 디아상트가 갈라선다면 자연히 약혼은 의미가 없어진다.

유리엔이 황제를 끌어내리고 황태자를 바로 제위에 올릴 작정인 것을 모르고 있는 에키로서는 당연한 추리였다. 반면 유리엔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디아상트 공작과 황태자 전하가 갈라선다고? 그대는 왜 그렇게 생각하지?”

“확실한 건 아니지만……. 디아상트 공작과 2황자 전하 간에 무언가 있는 것 같아서요.”

그렇게 되는 미래를 봤기 때문에, 라고 말하지는 못하고, 에키는 에둘러 대답했다. 그리고 유리엔은 그녀가 말하지 않은 것을 짐작했다.

유리엔이 본 에키네시아에 관한 기억들은 성검의 기억이라, 완벽하지 않았다. 그가 보지 못한 시간들 중에 에키네시아는 디아상트와 황태자가 갈라서는 미래를 보았을지도 모른다.

‘이미 결혼한 로잘린 디아상트를 약혼녀로 보낸 것부터 심상치 않았다. 독 사건도 수상하고. 확실히, 디아상트 공작은 그저 크루엔 형님을 지지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있다. 조사해 봐야겠군.’

에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쩐지 그는 그녀가 한 말들을 아예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그럼 약혼을 끝낼 다른 계획이 있었나?

“율, 디아상트 공작을 조사해서 약혼을 파기할 계획이 아니었나요?”

“……아직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으나, 다른 쪽으로 일을 진행하는 중이다. 빠르면 가을, 늦어도 올해가 가기 전에 결과가 나올 것이다.”

마검으로 음모를 꾸민 정황을 밝혀내고, 2황자를 처벌하고 황제를 끌어내릴 날.

그때가 되면 그가 원하지 않아도 에키네시아에게 알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마검의 주인임을 그가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를 지옥으로 밀어 넣은 계기가 자신이라는 진실을.

유리엔은 저도 모르게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에키는 그 동작을 놓치지 않았다. 곧 그가 침착해진 어조로 말했다.

“디아상트 공작과 2황자 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알아보도록 하겠다.”

“……저도 확실한 증거가 생기면 알려 드릴게요.”

잠시 정적이 고였다.

에키는 생각에 잠긴 유리엔을 가만히 살피더니 돌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리엔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그녀의 움직임을 좇았다.

그녀는 짐칸에 올려놨던 가방을 열고 그 안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냈다. 그들 사이의 테이블에 그 케이스를 올려놓고 심호흡을 했다.

조금, 아니, 꽤 떨렸다. 유리엔이 아메시스트를 줄 때 왜 그렇게 수줍어했는지 알겠다. 마음에 들지 않을까 봐 조바심을 내며 그녀를 살피던 그의 모습이 떠오른 덕에 그녀는 웃는 얼굴로 케이스를 내밀 수 있었다.

“받아요, 율.”

“이건…….”

“그동안 받기만 했잖아요. 저도 당신에게 주고 싶어서.”

“……무엇을?”

“그냥, 선물이에요. 받지 않을 건가요?”

유리엔이 삐걱거리는 움직임으로 그녀가 내민 케이스를 받았다. 검은 가죽 케이스의 겉에 묶인 하얀 리본에 손을 대고는, 그대로 정지했다. 완전히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기다리던 에키가 독촉했다.

“열어봐요.”

그가 숨을 고르더니 떨리는 손으로 리본을 풀었다. 리본이 건드리면 깨어질 것처럼 느껴지기라도 하는지 몹시 조심스러운 손놀림이었다. 마침내 케이스의 뚜껑을 연 그가 안을 들여다보았다.

커프스 버튼이었다. 백금과 다이아로 섬세하게 세공된. 중앙에 그의 손바닥에 있는 랑기오사의 문양과 똑같은 무늬가 금으로 새겨져 있었다.

에키는 유리엔에게 무엇을 선물하면 좋을지 꽤 고민을 했었다.

랑기오사 오너인 그에게 검과 관련된 선물은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서류 작업이 잦으니 만년필이 좋을까, 아니면 조각을 좋아하는 것 같으니 조각도는 어떨까.

고민 끝에 결정한 게 저것이었다. 가장 무난하고, 계속 지니고 다닐 수 있는 것. 제복 아래의 셔츠 소매에 달 수 있는 커프스 버튼.

막상 주고 나니 불안해져서, 그녀는 살짝 눈치를 보았다. 유리엔은 멀거니 그것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가만 보니 숨도 안 쉬고 있는 것 같았다.

“율?”

그녀가 그를 부르자 그가 비로소 눈을 깜박였다. 그는 더듬더듬 물었다.

“그대가, 직접…… 의뢰해서 만든 것인가?”

랑기오사의 무늬를 새긴 커프스 버튼이 따로 있을 리가 없었다. 당연히 주문제작품이었다. 임무를 다녀오기 전에 주고 싶어서 급하게 제작을 맡기고 출발 직전에 겨우 받았었다. 에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음, 급하게 맡긴 거라……. 다음엔 더 좋은 걸 드릴게요.”

“그럴 필요는 없다.”

유리엔이 잠긴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녀가 그를 위해 만든, 세상에서 하나뿐인 물건. 그게 무엇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처음으로 그에게 준 선물이라는 게 가장 중요했다.

속에서 무언가가 벅차올라 가슴께와 목 안쪽을 꽉 틀어막았다.

“……이것이면, 충분하다.”

“유, 유리엔?”

에키가 당황해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유리엔이 의아하게 고개를 들자 그녀가 허둥거리며 말했다.

“왜, 왜, 우는 거예요?”

“……?”

그녀의 말에 그는 눈가를 더듬어 보았다. 물기가 묻어나서 그 스스로도 놀랐다. 고작 한두 방울이었지만, 아무리 감격했다지만, 울다니. 그것도 그녀 앞에서.

유리엔은 기겁해서 눈물을 닦아냈다. 부끄러움에 그의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울었잖아요, 지금!”

“그, 런 게 아니라…….”

둘러댈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어물거리며 눈가를 가리면서도 다른 한 손으로 케이스를 꽉 쥐고 놓지 않았다. 에키는 얼이 빠진 채 그를 바라보다가 푸슬 웃고 말았다.

“싫어서 운 건 아니죠?”

“그럴 리가 있겠나.”

그가 정색하며 대답했다. 잠깐 고민하던 에키가 케이스 안에 담겨 있던 커프스 버튼을 집으려 했다. 유리엔이 빼앗기기 싫다는 듯 움찔 케이스를 움직였다.

“잠시만 이리 주세요.”

그녀가 케이스를 가져가더니 커프스 버튼을 꺼냈다. 그리고 유리엔에게 손을 내밀었다.

“달아 드릴게요.”

유리엔은 손목을 내밀기는커녕 그대로 굳어버렸다. 에키는 포기하고 몸을 일으켜 그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그녀보다 훨씬 굵은 손목이었다. 유리엔을 볼 때면 늘 섬세하고 여리다는 생각이 드는데, 정작 만져보면 굉장히 탄탄했다. 기사다운 몸이었다.

그녀는 그의 제복 소매를 약간 걷어 올리고 드러난 셔츠 소매에 커프스 버튼을 조심스럽게 달았다. 금과 백금, 다이아몬드로만 장식된 커프스 버튼은 그의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반대쪽도요.”

유리엔이 천천히 반대쪽 손목을 내밀었다. 팔이 약간 떨리고 있었다. 그쪽에도 커프스 버튼을 달자 그가 손목을 들어 그것을 확인했다. 말이 나오지 않는 듯했다.

‘진작 선물할 걸 그랬어.’

에키는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다음에는 울지 마세요.”

“다음 이라니…….”

“선물을 드릴 때마다 우는 건 곤란하잖아요.”

유리엔이 벌건 낯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에키가 말을 이었다.

“계속 함께할 테니, 선물도 앞으로 계속 드릴 텐데. 이건 시작일 뿐인 걸요.”

그는 홀린 듯한 눈으로 손목의 커프스 버튼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함께할 미래의 시작점이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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