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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126화 (126/211)

검을 든 꽃 126화

“에키네시아.”

그사이 로잘린에게 설명을 끝낸 유리엔이 그녀를 불렀다. 에키는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받쳐 들었다. 그녀는 얼결에 그가 이끄는 대로 가든 하우스를 나와 정원 쪽으로 향했다.

“다녀오세요, 두 분.”

로잘린이 그들에게 인사를 하며 가든 하우스의 문을 닫았다. 단장이 약혼녀와 함께 있는 정원에 누가 들어올 일은 어지간하면 없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가든 하우스에 유리엔을 찾으러 오면 로잘린이 둘러댈 것이다.

기사단 본부에 딸린 정원은 여럿이었다. 이 정원은 그중에서도 상대적으로 외진 곳에 있으며 크고 무성한 정원수가 가득해 조그마한 숲처럼 꾸며진 곳이었다.

녹음의 그늘 사이로 구불구불한 오솔길이 이어졌다. 오솔길 양쪽으로는 장미넝쿨이 가득했다. 정원사가 손질해 둔 색색의 장미가 한껏 피어 있었다. 숲냄새와 뒤섞인 장미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그러나 에키는 그런 주위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결절은 생겨난 장소에 영향을 받는다. 만약 드라코툼바에 결절이 생겨난다면…….

‘거기에 생겼던 마물 소굴과 비슷하려나. 아니, 더할 수도 있지.’

“드라코툼바 성을 지키는 인원은 50명 정도, 그리 수준이 높지 않다. 그대가 상대라면 말이다. 정면 돌파 하는 건 쉬운 일이겠으나, 공녀의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서 조용히 일을 처리할 계획이다.”

유리엔이 불쑥 말을 꺼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우선 기오사 문제로 정식 방문을 청하고, 내가 성주를 상대하는 사이 그대가 내부를 조사해 줬으면 한다. 성의 구조상 짐작되는 장소가 몇 곳 있으니 그곳들 위주로 돌아보면 된다.”

“길을 잃은 척, 말인가요?”

“그런 식이 좋겠군. 되도록 얕보이는 게 낫다. 그때 감금된 곳을 찾아 내면 그날 밤에 바로, 찾아내지 못하면 머물면서 다시 기회를 노리도록 하지. 세부적인 계획은 출발할 때 다시 알려주겠다.”

“알겠습니다, 로드.”

그녀가 대답하자 유리엔이 미묘하게 우울해졌다. 왠지 시무룩한 느낌. 결절에 대한 생각에 빠진 상태라 대강 대답했던 에키는 그 이유를 금방 눈치챘다.

“……율.”

고쳐 부르자 확 밝아졌다가, 허둥거리며 입가를 슬쩍 가린다.

알기 쉬웠다. 로드라고 부르면 서운해하고, 유리엔이라고 부르면 좋아하고, 율이라고 부르면 좋아하면서도 수줍어서 어쩔 줄 몰라 한다. 결절 때문에 복잡하던 머리가 그를 보니 말끔해졌다.

‘결절이 생길 것 같다고 해서 구하지 않을 거야? 아니잖아. 이미 세 번이나 겪어봤는걸. 대비하고 들어가면 되는 거지. 더는 고민하지 말자.’

결정을 내리자 비로소 주위에 감도는 장미향이 느껴졌다. 나뭇잎 사이로 말갛게 내리꽂히는 여름의 햇볕도. 그리고 그녀의 곁에서 걷고 있는 달아오른 얼굴의 연인도.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위험을 미리 걱정하기엔 지나치게 좋은 날이었다.

앞으로 무슨 일을 겪는 결국에는 지금과 같은 행복으로 돌아올 것이다. 저절로 그리 되지 않는다면, 그녀 자신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행복으로 되돌아오도록 만들 것이다.

그런 예언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에키는 웃으며 그의 팔짱을 꼈다. 그의 얼굴이 더 빨개졌다. 키스까지 해놓고서, 그는 이런 사소한 일에도 넋이 나간다.

심지어 이게 꽤 익숙해진 결과였다. 처음 그녀가 팔짱을 꼈을 때 유리엔은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비틀거리며 걷다가 안 되겠다며 정원의 나무를 붙들고 한동안 심호흡을 하던 것이 생각이 나서 에키는 조금 더 웃었다.

“율, 언제쯤 출발할 예정인가요?”

“사흘 후에, 출발할 예정이다.”

“그럼 그렇게 알고 준비해 둘게요.”

“……오늘 그대의 방에 돌아가면, 내가 보낸 마법 가방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쓰도록.”

“네? 마법 가방이요?”

유리엔은 저번 임무 때 에키가 니콜의 마법 가방을 빌려서 가져왔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같이 야숙할 때 그녀가 지나가는 말로 니콜의 것을 빌렸다고 말했었다.

그는 그녀가 필요한 물건을 빌려 써야 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또다시 장기 임무가 계획되자마자 마법 가방을 주문했다.

“그대에게 필요할 것 같아서.”

에키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확실히 필요하긴 했다. 사실 마법 가방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필요하다고 해서 쉽게 쓸 만한 물건이 아닐 뿐이다.

마법이 새겨지면 가격이 치솟는다. 반영구적인 마법진을 물건에 새길 수 있을 정도의 마법사면 마탑 수준이었고, 마탑 소속 마법사의 인건비는 장난이 아니었다.

일회용인 마도구와 달리 이런 마법 물품은 꾸준한 마나 충전이 필요해서 충전만 전문으로 하는 마법사가 따로 있기도 했다.

마법사가 아니면 마스터급 기사여야 충전이 가능한데, 마스터급 기사의 몸값은 충전 가능한 수준의 마법사보다 훨씬 비쌌다.

니콜은 마법 가방을 일상적으로 들고 다니며 에키에게 빌려주기도 하고, 로아즈 백작에게는 하나 선물하기까지 했지만, 본인이 마탑 소속 마법사인데다 현자의 제자라는 지위에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에키는 마법 가방의 가격을 잠깐 생각해 보다가 그만두었다. 흔히 사고파는 물건이 아니라서 짐작이 안 갔다.

‘이런 걸 받아도 되나. 이미 아메시스트부터 선물의 스케일이 장난이 아니긴 했지만…….’

그녀가 멍한 상태로 있자 유리엔이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았다.

“……필요 없는 물건인가?”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율, 저한테 너무 과한 선물을 주는 것 아니에요? 이 검도 그렇고, 저번의 드레스도…….”

“선물을 받는 것이 부담스러운가? 하지만 그대는 그래도 되는 관계라고 하지 않았나.”

그는 이해가 가지 않는 듯 갸웃거렸다. 에키가 고개를 저었다.

“선물 자체가 부담스러운 게 아니라, 과하게 비싼 것들이잖아요.”

“그대에게 과한 것은 없다. 그대는 이런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받아야 할 사람이다.”

한 치도 의심하지 않는 당연한 명제를 말하는 어투였다. 에키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가끔 그가 자신을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의심스러웠다.

유리엔이 저보다 한참 위에 있는 존재를 대하듯 그녀를 대할 이유가 없다. 마검의 주인임을 모른다면 알려지지 않은 마스터라 해도 그의 스콰이어일 뿐이고, 안다면 증오하지 않는 게 기적인 판이니까.

하지만 실제로는 그녀를 보는 시선도 그렇고, 그녀의 재능에 대해 말했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듯이, 그는 그녀를 우러르다시피 한다.

“전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에요, 율.”

“아니, 그대는 누구보다도 대단한 사람이다. 그러니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라. 부족한 것을 말하고, 바라는 것을 요구해 다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하겠으니.”

지극히 당연하다는 어조, 눈부신 무언가를 보는 듯한 시선. 예전에는 그래도 나름 자제하고 숨겨서 티가 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연인이 되고 나서는 지금처럼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대가 나를 움직인다.〉

어스름이 진 방에서 그가 했던 고백이 떠오른다. 그의 눈에 비치는 자신은 대체 어떤 사람인 걸까. 에키는 절실하게 자신을 응시하는 푸른 눈을 마주하다가, 천천히 말했다.

“그럼, 요구할게요.”

유리엔의 낯이 확 밝아졌다. 기대되는 기색이 숨길 수 없이 묻어났다.

요구하겠다는 말에 이런 반응이라니, 정말 이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 에키는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른 채 말을 이었다.

“눈을 감아요.”

유리엔은 그 요구는 조금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저렇게 녹을 듯이 애틋한 표정을 짓고서,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감으라니. 그러나 그는 순순히 눈을 감았다.

“움직이지 마세요.”

그녀가 속삭이듯 말하고는 그의 어깨를 짚었다. 다른 손으로 그의 목을 당겨 아래로 내리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 유리엔이 그녀에게 했듯이 입을 맞추며, 로잘린에게 들은 조언을 합쳐서 실천해 보았다.

유리엔의 어깨가 들썩였다. 반사적으로 그녀를 끌어안으려던 그의 팔이 그녀의 요구를 떠올리고 멈췄다.

그가 휘청거리거나 무너지거나 그녀를 움켜쥐고 삼키려 들지 않은 건 순전히 그녀의 요구 때문이었다.

나가 버리려는 이성을 붙잡고 간신히 버텼다. 달콤한 불을 삼키는 시간이었다.

에키가 입술을 떼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는 그 감은 눈가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춘 후에 그로부터 물러났다.

“이제 눈 뜨셔도 돼요. 요구는 끝났어요.”

“……이게, 그대가 바라는 거라고?”

유리엔이 눈을 떴다. 그만큼이나 달아오른 얼굴로 에키네시아가 웃고 있었다.

“네. 지금 하고 싶었거든요.”

잠깐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어지럽다. 이미 미쳐 있는데 더 미치는 것도 가능할 것 같다. 그는 쉰 목소리로 물었다.

“어째서?”

“어째서라니요, 당신이 좋아서죠. 저도 당신을 원하니까.”

에키는 민망해서 살짝 시선을 피하면서도 솔직하게 답했다.

원한다, 고, 그녀가 그를 원한다고.

유리엔은 전에 그녀가 자신을 원한다고 말하는 것을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상상만으로도 미칠 뻔했었던 게 현실이 되어 있었다.

너무 달아서 현실 같지가 않았다. 사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그녀가 고백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이 전부 꿈인 건 아닌지 의심해 보곤 했다.

유리엔은 계속 품고 있던 질문을 충동적으로 던졌다.

“그대는 왜 나를 선택했지?”

그녀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혼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대는 대체 언제부터, 왜, 나를…….”

에키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언제부터, 왜.

거슬러 올라가면 그 시작은 그와 그녀가 처음으로 서로 시선을 마주했던 때. 검에 물든 그녀를 성검으로 짓누른 채 그가 그녀를 대신해 그녀의 심정을 언어로 만들어 주었을 때.

그때에 심어진 씨앗이 흔들림 없이 그녀를 기다려주는 그를 보면서, 그리고 그녀의 손에 모든 것을 잃으면서도 그녀를 외면하지 않는 그를 보면서, 시간을 되돌려 만난 이후 처음으로 그의 미소를 보면서, 그렇게, 싹이 트고 뿌리를 내려 꽃을 피웠다.

아직은 말할 수 없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말을 했다.

“당신밖에 없었어요.”

나를 알아차리고, 나를 기다려준 것은. 내가 가장 비참하던 순간에 내 곁에 있어준 사람은.

당신 외의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유리엔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바라하라는 선택지가 있었으니까.

그가 무어라 더 물으려던 순간 에키가 손을 뻗어 그의 목덜미를 가리켰다. 정갈한 깃 위로 흰 붕대가 조금 드러나 있었다.

“율, 여전히 붕대를 하고 있네요. 그때 입은 부상이 아직도 낫지 않았나요?”

“……거의 다 나았다.”

“보여주실 수 있나요?”

“그건…….”

유리엔이 곤란한 낯으로 목깃을 추어올렸다. 조금 보이던 붕대가 완전히 가려졌다.

에키는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저 아래에는 그녀가 그에게 입힌 상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마검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것을 숨기려 한다.

그러나 그녀의 확신이 틀릴 아주 작은 가능성이 있었다.

틀린 채 말을 했다간 간신히 이어진 그와의 관계가 붕괴해 버린다. 이미 그에게 닿아버린 그녀는 예전보다도 더 그것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조건을 붙였다.

“그걸 보여주세요, 율. 그러면…….”

그녀는 그로부터 물러나 앞서 걷기 시작했다. 숲이 그늘을 드리우고 장미덩굴이 이어진 오솔길 위로 흰 구두가 걸음을 옮긴다. 하얀 미니드레스 자락이 나비처럼 팔랑거렸다.

몇 걸음 걸은 그녀가 돌아서서 멍하니 멈춰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때 제대로 대답할게요. 언제부터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는지를.”

그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에키네시아는 예전에 유리엔이 대련 이후에 모든 것을 답하겠다고 미루었던 이유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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