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25화
“너무 착해서 미련해 보이는 사람 있잖아요. 그이는 그런 사람이었거든요.”
“아…….”
“게다가 그림 그리는 것 빼고 다른 쪽은 영 소질이 없었죠. 약삭빠르지도 못하고, 제 이득을 제대로 챙기지도 못하고, 싫은 소리도 잘 못하고, 그러면서 떠넘겨진 일은 어떻게든 해내려고 낑낑대는.”
단점을 늘어놓으면서도 로잘린에게서는 남편 션에 대한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묻어났다. 그녀는 그리운 눈으로 말을 이었다.
“생활력도 영 글러먹었어요. 돈 버는 재주 따윈 하나도 없었죠. 집안 일도, 처음엔 자기가 다 할 수 있다고 해서 맡겼거든요. 그랬더니 열심히 하긴 하는데 실수하는 꼴이 속 터지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하녀를 고용했죠.”
[저거 다 욕이지? 그럼 잰 대체 왜 그 남자랑 결혼했대? 알고 보면 죽이려고 결혼한 거야? 아니면 결혼하고 나니까 죽이고 싶어졌단 건가?]
마검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에키가 황망히 되물었다.
“그럼 그분의 어떤 점에 반하셨던 건가요, 공녀님은?”
“잘생겨서요.”
에키는 들었던 찻잔을 놓칠 뻔했다. 로잘린이 웃음기 어린 어조로 말을 덧붙였다.
“유리엔 경만큼은 아니지만요. 착하고 성실한데다 잘생긴 남자가 제 말만 듣고 저만 바라보는데, 도저히 안 넘어갈 수가 없더라고요.”
“그건 확실히…… 그렇겠네요.”
“게다가 그이는 그림 쪽으로는 정말 재능이 있었거든요. 다음에 기회가 닿으면 보여드리고 싶어요. 어머, 생각해 보니 그림에 반한 것도 좀 있는 것 같네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어떤 그림을 그리시는지 무척 궁금해지는데요. 그럼 공작저에서 나간 후에는 남편 분이 그림을 판매해서 생활하셨던 건가요?”
“글쎄요, 그이는 내버려두면 빵값까지 물감 사는 데에 털어 넣고 굶어죽을 사람이에요. 그리고 그림은 사기당해서 헐값에 넘기고 오겠죠. 그 헐값도 오는 길에 구걸하는 사람에게 줘 버리고요.”
“…….”
“뭐, 좀 무능하면 어때요, 제가 말하는 건 그대로 따르니까요. 어차피 저는 아버지께서 시키는 대로 사랑 없이 결혼해서 남편의 그림자로 사느니,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제가 먹여 살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었어요. 원래 상업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로잘린이 어깨를 으쓱였다.
“가문을 나오면서 가져간 제 패물들을 팔아서 기반을 잡고, 그이의 그림을 파는 것으로 시작했어요. 판로를 뚫고 의뢰를 받고, 내친 김에 뚫은 판로를 이용해 미술품 중개업에 손을 좀 대서…… 꽤 순조로웠어요. 나름 잘살고 있었어요. 앞으로도 더 잘살고 싶었죠.”
그러나 디아상트 공작이 그녀를 도로 끌고 오면서 모든 게 어그러져 버렸을 것이다. 에키는 씁쓸한 기분으로 로잘린을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그녀는 아들을 증오하는 유리엔의 부친이나 딸을 이용하려 드는 로잘린의 부친이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런 자들은 아비라 할 자격도 없지 않나.
“……앞으로도 잘살게 되실 거예요. 그분과, 따님도 함께. 반드시 그렇게 되도록 저도 로드와 같이 돕겠어요.”
“고마워요, 로아즈 양.”
로잘린이 설핏 웃고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지난번 독 사건 이후 과할 정도로 안전 점검을 한 차였다.
에키 역시 그녀를 따라 차를 머금었다. 찻잔을 내려놓은 로잘린이 발랄하게 입을 열었다.
“재미없는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로아즈 양,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나요?”
“진도라니요?”
“유리엔 경과의 진도 말이에요. 키스는 해보셨죠?”
에키는 머금었던 찻물을 뿜을 뻔했다. 콜록거리는 그녀를 향해 로잘린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제가 당신 나이일 때는 션을 쓰러뜨렸는 걸요.”
“쓰, 쓰러뜨려요?”
“침대로요.”
에키의 뺨이 붉어졌다. 그녀는 어디에 시선을 둬야 할지 몰라 허둥거리며 손부채질을 했다.
로잘린은 턱을 괴고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암살 시도를 막을 때는 노련한 기사처럼 대단했는데, 이러고 있는 것을 보니 첫 연애 중인 스무 살 아가씨 그대로였다.
‘귀여워라.’
그녀는 상냥한 어조로 말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 물어봐도 돼요.”
에키는 찻잔을 움켜쥐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사실 궁금한 게 있었다. 아니, 꽤 많았다. 물어볼 만한 사람이 없어서 그냥 지냈을 뿐. 어쩌지, 물을까, 말까. 고심하던 그녀는 결국 입을 열었다.
“저, 저기, 디아상트 공녀.”
“그냥 로잘린이라고 불러도 돼요. 공녀라고 불리는 건 그리 좋아하지 않으니까.”
디아상트라는 성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퍼뜩 그런 깨달음이 왔다. 에키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럼 로잘린, 저…… 그러니까…….”
“네, 말하세요, 로아즈 양.”
“저도 그냥 이름으로 부르세요. 어쨌든 음, 그, 그러니까, 키, 키…….”
정말이지 이런 건 제대로 말하기가 어렵다. 차라리 마물과 싸웠으면 좋겠다. 에키가 말을 더듬거리자 로잘린이 태연히 되물었다.
“키스요?”
“……네. 그때마다 숨이 막혀서요. 어떻게 숨을 쉬어야 하나요?”
로잘린은 웃어버릴 것 같아 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에키는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찻잔을 노려보고 있어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로잘린을 알아채지 못했다. 로잘린은 간신히 웃음을 삼키고 대꾸했다.
“코로 숨 쉬면 되죠. 처음엔 잘 안 될걸요. 긴장해서 그런 거고, 나중엔 자연스러워질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감사합니다. 참고할게요.”
“더 궁금한 건 없나요?”
“그, 그럼…….”
에키는 부끄러움을 참으며 궁금했던 것들을 묻기 시작했다. 연애와 스킨십에 대한 이야기는 곧 유행하는 드레스와 보석을 거쳐 새로 나온 화장용품으로 옮겨갔다.
이번 여름에 인기를 끌 디자인이나 유명 보석세공사의 신작, 혹은 화장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만한 상대는 무척 오랜만이었다. 앨리스나 파티마, 니콜은 이런 화제에 관심이 없었으므로.
에키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로잘린과 수다를 떨었다. 그들의 수다는 급한 보고 때문에 자리를 비웠던 유리엔이 돌아오면서 끝났다.
“디아상트 공녀.”
가든 하우스로 들어온 유리엔은 서류 뭉치를 들고 있었다. 그가 잠시 말을 고르더니, 로잘린을 향해 말했다.
“그대의 남편과 딸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냈다.”
로잘린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달려들 듯이 그에게 다가오다가, 간신히 멈춰 섰다.
에키는 로잘린의 어깨가 들썩이는 것을 보며 숨을 죽였다. 유리엔이 로잘린에게 지도를 자른 조각을 내밀었다.
“올라바트 근처에 작은 해안 마을이 있는데, 이곳에 지역 주민들이 울부짖는 성이라고 부르는 낡은 고성이 있다. 성의 정식 명칭은 드라코툼바. 실소유주는 디아상트 공작이다.”
로잘린은 창백한 얼굴로 지도 조각을 받아 들었다. 붉은 표시가 있는 지점을 손끝으로 더듬은 그녀가 망연히 중얼거렸다.
“드라코툼바……. 울부짖는 성……. 전혀 들어본 적 없는 곳이에요.”
“실제 명의는 다른 자니까. 공작이 소유한 성이라는 건 거의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대략적인 보안 상황도 조사를 끝냈으니 며칠 안에 출발하겠다.”
“출발한다고요? 직접 가시는 건가요?”
“정보원들이 하기에는 어렵고, 기사를 동원하기에는 지나치게 비밀스럽고 사적인 일이니. 따라서 나와 내 스콰이어만 가는 것이 낫다.”
“경이 직접 움직일 명분이 있나요?”
“기오사 관련 제보가 비밀리에 들어와서 확인하러 간다고 할 예정이다. 마침 적당한 소문도 있다.”
“무슨 소문인가요?”
유리엔은 찰나 머뭇거리다가, 느릿하게 답했다.
“울부짖는 성에 악마가 산다는 소문이다. 그 성이 주민들 사이에서 울부짖는 성이라 불리게 된 건 종종 들리는 비명과 괴성 때문이라더군.”
“비명이라니, 설마…….”
남편과 딸을 떠올린 로잘린이 파랗게 질렸다. 유리엔이 고개를 저었다.
“몇 년은 된 소문이다. 비교적 최근에 그곳에 갇히게 되었을 공녀의 가족들과는 관계가 없겠지.”
악마가 산다는 소문과 기오사 제보라는 말이 연결되면 나오는 건 하나뿐이었다. 치유검 엘기오사가 발견된 현재 유일하게 행방불명인 기오사인 마검 바르데르기오사.
무성한 소문들 중에는 울부짖는 성에 마검이 있는 게 아니냐는 말이 실제로 있긴 했다. 마검이 어디 있는지 아는 유리엔이 헛소문이라 확신하는 것과 별개로 신빙성이 낮은 소문이었다.
정말로 울부짖는 성에 마검이 있었다면 이미 그 근처 마을에는 시체만 남아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는 그 소문을 핑계로 드라코툼바 성에 다녀올 작정이었다.
그는 에키네시아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 악마라는 말을 입에 담으며 그녀를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에키는 그의 말보다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드라코툼바라고? 맙소사…….’
[어? 드라코툼바면 거기 아니야? 마물의 성! 우리 가봤던 데잖아! 뼈다귀랑 식물형 마물들이라 베는 맛도 별로 없었던 곳! 그래서 재미없었는데. 아, 넌 그때 꽤 고생했었지. 특히 산성액 때문에. 그치?]
기오사를 가지고 있던 상인이 가서 죽으라는 목적으로 줬던 의뢰였다. 정식 명칭은 드라코툼바, 그 당시 마물의 성이라 불리던 마물 소굴.
〈그 성이 원래 굉장한 귀족 나으리의 소유였다지. 몇 년 전에 갑자기 마물이 대량으로 발생하면서 지금은 손쓸 수 없는 마물 소굴이 됐어. 마검의 악마가 지나가기라도 한 모양이야.〉
마물은 주로 흉한 일이 생긴 장소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다.
자연발생한 마물은 내버려두면 급속도로 번식하며 군락을 이루어 버린다. 대체로 군락을 이루기 전에 근처의 군대나 기사단, 고용된 용병이 처리하곤 했다.
그녀가 시간을 되돌리기 전의 대륙에는 쉽사리 처리할 수 없는 규모의 거대한 마물 소굴이 많았다.
마검의 악마가 학살을 하고 다닌 곳 대부분에서 마물들이 대량으로 발생했다. 게다가 그것들이 번식하기 전 처리해야 할 기사단들, 이미 번식해 버려서 토벌하기 어려운 곳들을 골라 처리하던 창천기사단까지도, 마검의 악마에 의해 대부분 몰살당했다.
〈뭐, 마비됐다가 겨우 수습되는 중인 제국이 촌구석에 있는 그런 마물 소굴까지 토벌할 여력이 어디 있겠어. 요즘 그런 곳이 많잖나. 다 악마 탓이지.〉
그렇게 악마로 인해 생겨나, 악마 때문에 토벌할 수 없게 된 마물 소굴이 정말로 많았다. 마물의 성이 되어버린 드라코툼바도 그 중 하나였다.
〈악마 년, 안 나타난 지 꽤 되었는데 어디서 죽었는지 몰라도 아주 사지가 찢겨 죽은 거면 좋겠군.〉
상인은 그렇게 말하며 침을 뱉었다. 에키는 그저 손톱이 파고들어 손바닥이 패일 정도로 주먹을 움켜쥐고 고개를 숙였다.
〈어쨌든, 내가 어쩌다가 그 성 지하 창고에 용의 뼈가 있다는 정보를 들었단 말이야. 성의 주인이었던 귀족 가문이 원래 보관하던 보물이라던가. 성 이름도 드라코툼바잖나, 고대어로 용의 무덤이란 뜻이지. 너처럼 무식한 용병은 모르겠지만.〉
귀족의 교양으로 고대어를 배웠었던 에키는 알면서도 침묵했다. 그 시절의 그녀는 늘 지치고 메마른 상태였다. 그런 사소한 것으로는 화를 낼 생각도 들지 않았다.
〈멸종한 지 한참 된 용이지만, 그 뼈는 진짜라더군. 온전히 보관된 진짜 용의 뼈. 마물의 성에서 그걸 찾아서 가져와. 그쯤은 되어야 기오사와 교환할 만하지 않겠어?〉
말도 안 되는 의뢰였다. 진짜 용의 뼈가 있는지도 확실치 않고, 만약 있다 해도 혼자서 거대한 용의 뼈를 찾아내 가져오는 것도 쉽지 않았으며, 드라코툼바는 악명 높고 오래 묵은 마물 소굴이었다.
하지만 에키는 그 의뢰를 받아들였고, 해냈었다. 용의 뼈를 가지고 돌아갔더니 상인이 기오사를 주기는커녕 그녀에게 독을 먹였었지만.
‘미래에 마물 소굴이 되었고, 지금은 아니라는 건, 앞으로 그 성에서 흉한 일이 벌어진다는 거잖아.’
드라코툼바에서 발생할 흉사는 에키네시아 자신과 관련이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악마 시절에 그 성 근처에서 학살을 벌인 적이 없었다.
상인은 악마 때문에 생긴 마물 소굴일 거라 말했지만, 직접 갔을 때 그곳을 보고 알았다. 아무리 많은 학살을 했다지만 마을 단위로 사람을 죽인 장소는 잊지 못한다. 마검의 악마는 그곳을 지나간 적이 없다.
‘거기서 나와 관계 없는 죽음이 발생해서, 그것 때문에 마물이 생겨났던 거야.’
이번에 유리엔과 그녀가 그 성에 가서 공녀의 가족을 구해낸다면, 알 수 없는 미래의 참사를 막게 될지도 모른다. 그들의 개입은 과거에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일 테니까.
얼마 전에 정리했던 조건들이 떠올랐다.
위험한 곳, 마물이 생겨나기 쉬운 곳, 인간의 감정이 격해지는 곳. 그리고 사람의 목숨과 관련된 것. 시간을 되돌린 자와 관계없는 사건.
‘결절이 생길 수도 있어.’
어디까지나 추측이었다. 그러나 그 추측은 확신에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