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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124화 (124/211)

검을 든 꽃 124화

붕대 아래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너무나도, 약간 이성이 나갈 정도로.

에키는 유리엔의 앞에서 손을 흔들어보고, 고른 숨소리를 다시 확인했다. 상당히 깊게 잠든 것 같았다.

[너 뭐 해? 얘는 안 죽일 거잖아? 그런데 왜 자고 있는지 확인을 해?]

에키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정갈히 채워져 있는 금장식 단추를 쥐고 슬그머니 눈치를 보았다.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 목 조르려고? 우와, 죽일 거야?]

좀 닥쳐, 망할 마검아. 그녀는 속으로만 중얼거리며 단추를 하나 풀고 재빨리 손을 뒤로 물렸다. 이어 감각을 펼쳐 집무실 근처에 인기척이 있는지도 다시 확인했다. 아무도 없었고, 유리엔은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에키는 숨을 멈춘 채 빠르게 나머지 단추를 풀었다. 조심스럽게 목깃을 젖히자 둘둘 감겨 있는 흰 붕대가 드러났다.

‘뭔가 굉장히,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기분인데. 아니, 나쁜 짓이 맞긴 하지만…….’

매듭 부분이 뒤쪽에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다리 사이 빈 공간에 한쪽 무릎을 대고 한 손으로 제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모아 쥔 다음 몸을 바짝 기울였다.

약간 눌려 있는 매듭을 겨우 발견하고, 그것에 손을 대려는 순간.

끼익, 하고 두 사람분의 무게를 견디던 의자가 소리를 냈다. 동시에 그녀의 코 앞에서 유리엔의 하늘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자다 깬 눈동자는 몽롱하게 흐렸다. 에키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놀라 벌어진 손에서 그녀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그의 위로 쏟아졌다.

“로, 로드, 이건 그, 읍.”

변명을 하려던 입이 그대로 막혔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인식하지 못했다.

유리엔이 그녀의 뒷목을 움켜쥐고 제게로 당기며 입을 맞춰왔다. 다른 팔은 허리에 감겨들었다.

꾹 눌렀다가, 입술을 가볍게 깨물고, 입가를 살짝 핥더니, 말하느라 벌어져 있던 입안으로 혀가 들어왔다. 굳어 있는 그녀의 혀를 건드리고 쓰다듬었다.

저릿한 감각이 닿은 곳에서부터 오싹하게 퍼져나갔다. 생소하고 낯선 느낌이라 그를 밀어내려던 그녀는, 뒷목을 잡고 있던 그의 손이 부드럽게 미끄러지며 귓불을 건드리는 바람에 어깨를 움츠렸다.

“으.”

기분이 이상했다. 유리엔이 약간 입을 떼더니 달큼하게 웃었다. 반쯤 떠진 흐릿한 하늘색 눈동자가 그녀를 가득 담고 있었다.

목덜미의 여린 피부를 어루만진 손이 다시 올라와 그녀의 귓불을 쓸고, 귓바퀴를 따라 선을 그렸다. 나른한 손길.

“자, 잠시만요.”

뭔가 이상하다. 그답지 않다. 잠이 덜 깼나?

에키는 빙빙 도는 머리로도 용케 그런 판단을 내리고 그의 어깨를 짚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의 위에 몸을 기울이고 있다가 그대로 당겨 안기는 바람에 지나치게 밀착된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고 되레 힘을 주어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가 다시 입을 맞춰왔다.

깊고 농밀하게 탐해지는 감각. 허리를 감고 있던 그의 손이 등허리를 쓸어 올린다. 그의 품에 짓눌린 드레스 자락이 바스락거렸다.

“응…….”

그녀는 저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냈다. 어질어질하고 숨이 벅찼다. 어떻게 숨을 쉬어야 할지 모르겠다.

뒤로 물러나려 하면 금세 따라붙으며 놓아주질 않았다. 집요하고, 그러면서도 다정했다. 느껴질 리가 없는 단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그를 밀어내려던 그녀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이대로 녹아내릴 것 같아 그녀는 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주름 하나 없던 제복이 구겨졌다. 뺨을 붙들고 있던 그의 손이 천천히 목을 타고 내려가 드러난 쇄골에 닿았다. 예쁜 모양의 그것을 탐나는 듯이 어루만졌다.

[미쳤느냐, 네놈! 어디까지 갈 셈이냐!]

성검 랑기오사는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아까부터 계속 경고하고 말리고 잔소리를 했으나 주인이 듣질 못하고 있었다.

유리엔은 영혼을 후려치는 듯한 느낌에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눈앞에 흐트러진 에키네시아의 얼굴이, 손끝에 보드라운 피부가, 팔 안에는 가느다란 허리가, 그리고 아직도 닿아 있는 입술이, 있었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 그녀를 놓아 주었다. 방금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당분간 나한테 주인 소리 들을 생각 말아라.]

랑기오사가 짜증 어린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유리엔은 간신히 혼란스러운 머리를 정리했다.

연회 전날 에키네시아가 고백하는 바람에 밤을 샜고, 다음날 일정을 소화했고, 연회 당일 또 에키네시아로 인해 정신이 나갔었다.

그래도 그날은 잘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녀와 입 맞췄던 것과 그녀가 했던 말들이 자꾸 맴돌아 잠들지 못했다.

그로인해 이틀 연속 제대로 자지 못한 후유증이 남아 꽤 피곤한 상태였다. 잠깐 조는 사이 꿈까지 꿀 정도로.

그러니까, 애가 탈 정도로 달콤한 꿈을 꾸는 중인 줄 알았다. 눈을 뜨면 에키네시아가 바로 앞에 있는, 그녀가 그의 목가를 만지고 있는 그런 꿈.

‘꿈이 아니고, 현실이었다고?’

그는 제 목덜미를 더듬었다. 단추가 풀려 붕대가 드러나 있었다. 잠결에 답답해서 풀었던가? 반사적으로 단추를 잠그며 붕대를 가린 그가 황망히 앞을 보았다.

그에게서 풀려난 에키는 입가를 가린 채 비틀비틀 물러났다. 얼굴이 새빨갛다. 유리엔은 그녀를 보며 제가 뭘 했는지를 되새겼다.

키스해 버렸다. 아주 욕심껏. 아니, 사실 욕심은 한참 더 남았지만, 어쨌든 했다. 그것도 반강제로.

유리엔의 낯이 창백해졌다. 그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에키에게로 다가왔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녀가 그를 피해 물러서자 유리엔은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눈동자가 촉촉해지며 목소리가 떨렸다.

“에키네시아, 내가 방금…….”

“에키.”

“……에키. 내가 정말로…….”

“아뇨, 사과하지 마세요.”

에키는 발갛게 달아오른 채 여전히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있었다. 심장이 어찌나 요란하게 뛰는지 귀가 먹먹했다. 바르데르기오사가 뭐라고 종알거리는 것 같은데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그런 상태인데도, 그녀의 말은 망설임이 없이 튀어나왔다. 그저 솔직한 진심이었다. 키스를 했다는 이유로 사과를 듣고 싶진 않았다. 저런 표정을 짓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도 되는 관계라고 했었잖아요.”

“하지만, 내가 그대의 동의도 없이…….”

“저는 정말 싫었으면 당신을 때리거나 혀를 깨물어서라도 밀어냈을 거예요. 그러지 않았잖아요. 싫지 않았어요. 그, 어, 음, 당황스럽긴 했지만요.”

유리엔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그녀에게로 성큼 다가왔다. 에키는 또다시 물러섰다.

유리엔이 고개를 기울이더니 더 다가왔다. 그녀는 더는 물러날 수가 없었다. 등이 집무실의 거대한 유리창에 닿았다.

한 뼘 남짓한 거리까지 다가온 그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에키는 고개를 틀고 눈을 내리깔았다. 아직도 입을 가린 채였다. 달아오른 뺨은 쉽게 식을 기세가 아니었다. 그가 나직이 속삭였다.

“그럼 그대는 왜 나를 피하지?”

“…….”

얼결에 첫 키스를 한 상황에서 태연히 그를 마주하긴 어려웠다. 에키는 심호흡을 하고, 간신히 대답했다.

“아, 안 피했어요.”

“피하고 있잖나.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화가 난 거라면 참지 말아줬으면 한다. 잘못한 건 나고, 그대를 볼 염치가 없는 것도 나다.”

“화난 거 아니에요. 당신도 잘못한 게 아니고요. 그냥, 이, 이런 건 처음이라서, 좀, 안 익숙한 거니까……. 그러니까……. 좋았다고요.”

에키의 음성이 점점 작아졌다. 그녀는 입을 가리고 있던 손에 완전히 얼굴을 파묻었다.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함부로 단추를 풀고 붕대 아래를 보려던 벌을 받는 기분이었다.

유리엔은 그녀의 말을 듣고서야 그녀가 처음으로 키스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그도 처음이었다.

첫 키스를 이런 식으로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상황을 자각한 그의 얼굴도 그녀처럼 새빨갛게 타올라 버렸다. 황혼의 끝자락이 사방을 벌겋게 물들이고 있는 것이 정말로 다행이었다.

제대로 서 있기가 어려워서 그는 무심코 앞의 유리창에 팔을 짚었다. 그와 창 사이에 있는 에키네시아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녀는 파묻고 있던 얼굴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약간 젖어 있는, 발긋한 입술. 지나치게 예뻤다. 바로 조금 전에 맛 보았으나, 명료한 정신이 아니었던 터라 지독히 아쉬웠다.

탐이 난다. 그래도 되는 관계라고 했으니, 그래도 되지 않을까. 에키네시아가 했던 말이 변명이 되어주었다. 욕심이 솟아올라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나 역시 모든 것이 처음이라, 익숙하지 않다. 그럼에도 그대를 원한다. 언제나 욕심이 난다.”

유리엔은 홀린 듯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뺨을 한 손으로 감싸 들어 올렸다.

“그러니, 그대가 좋다면…… 좀, 더. 함께 익숙해졌으면 좋겠다. 그래도 되겠는가?”

뺨을 감싼 커다란 손의 감촉이 따뜻했다. 내려다보는 하늘빛 눈동자는 황홀해 보였다.

그는 종종, 아니 꽤 자주, 그녀를 볼 때 눈부시게 빛나는 무언가를 경애하듯 바라본다.

저렇게나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저런 식으로 애원하는 표정을 짓는 건 반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느릿하게 깜박이는 속눈썹마저 섬세한 세공품 같다. 심장은 아까부터 조금도 진정이 되지 않고 있었다.

에키는 대답 대신 팔을 들어 그의 목에 감았다. 유리엔은 그녀가 이끄는 대로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닿았고, 눈을 감았다. 떨리는 손이 얽혀들었다. 그들은 익숙해지려는 노력을 시작했다.

* * *

6월 24일은 주에 한 번 있는 위즈덤 클럽 모임 일이었다.

축제 이후 첫 모임이었고, 위즈덤이 모임을 시작한 이래로 처음으로 클럽원 전원이 참석한 날이었다. 그간 바빠서 오지 못했던 바라하 이슬라프가 드디어 참석했다.

에키는 늘 하던 대로 지도대련을 했다. 고백 이후 바라하를 다시 만나는 건 꽤 어색한 일이었으나, 바라하가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했기에 그녀도 태연히 행동했다.

바라하의 검술은 거의 완성되어 있었다. 덩치에 걸맞게 힘 있고 묵직한 검술이었다. 검술 면에서 손볼 곳은 많지 않았다. 그의 로드인 바론이 자주 대련을 해주는 덕분에 더욱 그랬다.

에키는 내심 감탄하면서 지도대련을 했지만, 그녀와 바라하의 대련을 보던 클럽원들은 에키네시아에게 경악했다. 입학한 이래 순위전 1위를 놓쳐본 적이 없던 바라하 이슬라프를 상대로도 지도대련이라니.

물론 에키가 기오사 오너임을 알고 있는 바라하는 당연한 일로 여겼다. 그는 그녀가 보여주는 검에 최선을 다해 집중했다.

“고맙다, 에키.”

“감사합니다, 선배님.”

대련이 끝난 후 바라하는 정중하게 인사를 남기고 빠르게 멀어졌다.

에키는 원래 모임이 끝난 후에 바라하를 따로 불러 조금 더 도와줄 계획이었다. 하지만 고백을 거절하고 나니 따로 만나는 건 그녀도 부담스럽고 그도 원하지 않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

어차피 그에게는 바론 틸리어스라는 훌륭한 스승이 있으니 그녀가 굳이 나설 필요는 없었다.

‘마음은 잘 추스른 걸까.’

에키는 심란한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뗐다.

바라하는 그런 그녀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반응하지 않았다. 마음을 접으려면 되도록 그녀에 대해 생각하지 말아야 했다. 그것이 잘 되지는 않아도.

* * *

클럽 모임을 나가고, 훈련을 하고, 스콰이어로서 유리엔과 함께하는 날들이 흘러갔다.

주위에는 절대 드러낼 수 없었지만 그와 그녀는 조금씩 더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있었다. 마스터의 탁월한 감각은 단둘이 있을 틈을 내기에 꽤 유용한 수단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도움이 있었다.

창천기사단장이 거의 매일 약혼녀를 방문한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사무관들 사이에서는 일이 없으면 일을 만들어서 하던 단장이 요즘은 쉬기도 하는 게 좀 인간다워졌다는 평이 돌았다. 약혼녀 덕분인 게 아니냐는 추론도 곁들여졌다.

6월 30일 오후, 로잘린 디아상트는 기사단 본부의 정원에 있는 가든 하우스에서 에키네시아 로아즈와 마주 앉아 있었다. 함께 있던 유리엔이 급한 보고를 받으러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이었다.

“……매번 고마워요, 디아상트 공녀.”

“뭘요. 이런 걸로라도 보답할 수 있어서 다행인 걸요.”

로잘린은 유리엔이 방문해 올 때마다 에키와 그가 같이 있을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주곤 했다. 그녀가 찻잔을 기울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웠다.

“저도 몰래 연애했었으니까요. 그것도 꽤 오래. 밀회를 가지는 요령은 도가 텄답니다.”

“……로잘린의 남편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션이라고 해요. 디아상트 전속 초상화가의 제자로서 처음 공작저에 왔었죠. 그때 전 열다섯 살이었고, 그는 열여덟이었어요. 성실하고, 착하고, 그리고 좀 무능한데다 미련한 사람이었죠.”

“네?”

무능하고 미련하다니, 공녀의 지위까지 버리고 선택했던 남자를 향하기에는 가차 없는 평이었다. 에키가 당황을 감추지 못하자, 로잘린이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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