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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123화 (123/211)

검을 든 꽃 123화

10막. 솔직해지는 것과 외면할 수 없는 것.

6월 23일, 축제 기간 내내 가족들과 함께 여관에서 묵었던 앨리스는 오랜만에 기숙사에서 일어났다.

해가 뜨기 직전의 어스름한 새벽이었다. 이 시간에 일어나 훈련을 하는 건 앨리스의 몸에 배인 습관이었다.

앨리스는 늦게 일어나는 룸메이트를 깨우지 않기 위해 조용히 커튼을 걷고 욕실로 향했다. 그러다가 에키네시아의 침대 쪽 커튼 너머로 어른거리는 불빛을 보았다.

그녀는 커튼 쪽으로 다가가며 에키네시아를 불러보았다.

“에키?”

“꺄악!”

“왜 비명을 지르는 겁니까?”

“아, 아뇨, 조, 좀 놀라서. 벌써 아침이에요?”

“아직 새벽입니다만. 일찍 일어났군요.”

“……저기, 앨리스, 이렇게 된 김에 잠시만 도와줄래요?”

“무슨 일입니까?”

에키가 개인 공간을 분리해 둔 커튼을 걷었다. 그 안의 풍경에 앨리스는 순간적으로 데자뷰를 느꼈다.

침대 위에 늘어놓은 화려한 모자들과, 쌓여 있는 보석함과, 의자와 화장대와 열려 있는 옷장에 마구잡이로 늘어져 있는 드레스들.

사관학교 입학 첫날 101호의 문을 열었을 때와 비슷한 꼴이었다.

“……뭐 찾는 거라도 있습니까, 에키?”

“찾는 건 없는데, 으음, 찾는 거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앨리스, 이것 좀 봐요.”

잠옷 차림의 에키가 즐겨 입던 하늘색 드레스와 깃털 장식이 달린 자그만 모자를 들어 보였다. 앨리스가 그것을 확인하자 곧이어 네이비색 미니드레스와 같은 색의 레이스 리본을 들어 올렸다.

“둘 중에 뭐가 나아요?”

“네?”

“이쪽은 평소 같은 스타일이지만 잘 안 쓰던 깃털 장식 포인트를 활용해서 늘 보던 것 같은데 살짝 다른 느낌을 줘보려고 했어요. 반대로 미니드레스는 한 번도 안 입었던 거니까, 완전히 달라진 분위기가 나지 않을까 해서.”

“…….”

“너무 갑자기 다른 분위기를 내는 건 별로일까요? 비슷한데 조금 다른 정도가 무난하겠죠? 아, 하지만 전이랑은 좀 달라 보이고 싶은데.”

“…….”

“평소랑 비슷하면 눈길이 덜 가잖아요. 이 하늘색 드레스는 자주 입은 편이기도 하고. 역시 미니드레스 쪽이 나을까요? 이제 꽤 더워졌으니까 시원해 보이는 것도 좋겠죠?”

“저기, 에키.”

“음, 그런데 양쪽에 리본을 다는 건 너무 어린애 같나요? 예전에 노라가, 아, 노라는 제 전속하녀예요, 어쨌든 노라가 저한테 미니드레스를 입을 땐 리본을 다는 편이 어울린다고 했었거든요. 하지만 아무래도 리본은 너무 어린애 같잖아요, 그렇죠?”

“저는…….”

“좀 더 성숙해 보이고 싶은데. 그럼 리본보다는, 음, 이게 나으려나요? 라피스 라줄리로 우아한 느낌을 낸 거니까……. 아니면 이쪽은 어때 보여요? 아, 이건 안 되겠네. 미니드레스랑 너무 다른 분위기네요. 으, 어떤 스타일이 취향인지 슬쩍 떠볼 걸…….”

“에키!”

“네?”

앨리스는 결국 거의 소리치듯 그녀를 불렀다. 진지한 얼굴로 보석함을 뒤지던 에키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앨리스가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했다.

“대체 누구를 생각하며 옷을 고르고 있는 겁니까?”

그 물음에 움찔한 에키는 손에 쥐고 있던 리본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특별히 누구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냥, 기분 전환을 하려고요.”

앨리스는 어제 연회에서 있었던 단장의 약혼 발표를 떠올렸다. 솔직히 정말 많이 당황했다. 에키와 기사단장 사이에 무언가가 있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으므로.

그들 사이의 진실이 어떻든 이제는 없었던 일이 되겠지만.

그것을 생각하자 기분 전환을 하고 싶어졌다는 에키의 말이 범상치 않게 들렸다. 앨리스는 약간 안타까운 눈으로 에키를 바라보다가, 결심한 듯 말을 꺼냈다.

“저는 옷을 고르는 데에 소질이 없습니다, 에키. 제대로 도와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그래도 어쨌든 둘 중에서는 미니드레스 쪽이 나아 보이는 군요. 슬슬 더워지고 있으니까요.”

“아……. 역시 그렇겠죠?”

“네. 그리고 그 리본을 단다고 해서 어린애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제도에서 리본 장식이 요즘 조금씩 유행한다고들 들었습니다. 양갈래로 묶는 게 아니라 장식하는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가요? 처음부터 묶을 생각은 없었어요. 음, 이렇게 하면 어때요?”

“예쁩니다. 지나치게 어려 보이지도 않고요. 도움이 되었습니까?”

“충분해요! 고마워요, 앨리스.”

에키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앨리스는 이상하게 들떠 있는 듯한 그녀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옅게 한숨을 쉬고는 새벽 훈련을 위해 떠났다.

에키는 밤새 니콜과 마석 목걸이에 대해 논의하고 새벽에 돌아왔었다. 아침부터 스콰이어 업무를 시작하려면 잠들기에는 애매한 시간이었다. 잠이 오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다음날의 스콰이어 업무에 대한, 즉 유리엔과 하루 종일 함께할 준비를 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옷을 고르는 것도 그냥 준비의 일환이다. 에키는 애써 그렇게 합리화하며 최선을 다해 치장하기 시작했다.

[주인아, 벌써 두 시간째야. 언제 끝나?]

“다 되어가.”

[그 말 30분 전에도 했는데?]

“금방 끝나.”

[평소엔 한 시간도 안 걸리잖아!]

“시끄러워, 발. 집중해야 하니까 입 다물어.”

[치이, 지루해…….]

마무리를 하고도 마음에 차지 않아 계속 고치던 에키는 결국 아슬아슬한 시간이 되어서야 출발했다.

* * *

유리엔은 거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거슬리는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모아 치우고 드러난 목을 확인했다. 일주일이 넘었는데 멍은 여전히 새카맣게 짙었다.

‘예상보다 낫는 속도가 느리다.’

그는 붕대로 다시 멍 자국을 가리며 그것이 빨리 낫기를 빌었다. 에키네시아가 그에게 고백하기 전에는 상처라도 아쉬웠으나, 그녀와 그의 관계가 달라진 지금은 얼른 사라져야 할 흔적이었다. 들키고 싶지 않으니까.

모든 것을 털어놓기엔 간신히 이어진 관계가 너무 소중했다.

‘흔적이라…….’

무심코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이 입술에 닿았던 감촉은 정말로 부드러웠었다. 거울에 비친 그의 낯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침부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아무것도 아니다.”

유리엔은 황급히 손을 떼고 붕대를 마무리했다.

제복을 걸치고, 어딘가 구김이 있진 않은지 꼼꼼히 확인하고,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제복에 달린 금속 장식을 한 차례 닦았다. 그러고 나서 머리카락을 정리해 느슨히 묶어 한쪽 어깨로 늘어뜨렸다.

예전이라면 그저 불편하지 않게 묶고 그대로 나갔을 텐데, 오늘의 그는 거울을 확인했다. 잠시 고민하다가 묶은 것을 풀었다.

햇살을 받은 은발이 흘러내리며 순은처럼 빛났다. 그는 그것을 자연스러우면서도 반짝이게 보이도록 다듬었다. 랑기오사가 한숨을 푹푹 쉬고 있었으나 유리엔은 꽤 진지했다.

밖에서 에키네시아가 스콰이어로서 대기하고 있을 것이다. 더 시간을 들일 수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안색이 나빠 보이지 않는지, 표정은 괜찮은지까지 살폈다. 그는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다.

“아르 세밧티엠.”

유리엔이 나오자 에키가 그를 향해 경례를 했다. 유리엔은 나오자마자 굳어버렸다.

그녀가 오늘 입은 미니드레스는 무릎이 살짝 보이는 길이였다. 그 전까지 그녀가 입던 드레스는 짧아봤자 종아리의 절반 정도만 보였었다.

풍성한 러플 아래, 흰 스타킹으로 감싸인 둥근 무릎. 날씬하게 드러난 다리의 선. 가는 발목을 휘감은 구두의 끈.

그를 올려다보는 에키네시아의 얼굴. 분홍빛 입술. 그 입술이 그에게 주었던, 아직도 제대로 믿기지 않는 고백들.

“아르 세밧티엠. 좋은 아침입니다, 단장님.”

마침 나온 같은 층의 테레사가 그를 보고 인사했다. 유리엔은 반쯤 들어 올렸던 손을 급하게 내리고 그녀의 인사에 답해 주었다.

테레사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뭘 했을지 모르겠다.

에키와 테레사가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동안, 유리엔은 미간을 문질렀다.

여러모로 심장에 안 좋다. 머리에도 안 좋다. 이 상태로 그녀와 함께 있으면서, 누구에게도 그녀와 그의 관계를 들켜서는 안 된다니. 오늘 일이 제대로 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 *

예감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오전 서류 업무 내내 그는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실수도 몇 번 했다. 다행히 서류 업무 자체에도 익숙하지 않고 유리엔이 결재하는 내용도 잘 모르는 에키는 알아채지 못했다.

유리엔은 오늘 본 서류들 절반은 다시 보아야 할 거라고 짐작했다.

아젠카는 축제의 여운이 남아 어수선했다. 여운만 남은 게 아니라 축제의 뒤처리도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다. 부단장이며 사무관들이며 하인들이 계속 드나들거나 머물러서 에키나 유리엔이나 사적인 대화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점심은 아직 돌아가지 않은 남부 왕국 후작과, 서부 부족장이 함께하는 외교적인 자리였다. 에키는 따로 식사를 했다.

오후에는 제국으로 돌아가는 2황자를 배웅했다. 이렇게 조용히 돌아가는 게 이상해서 유리엔은 내심 긴장한 채 카르엠을 대했다.

그의 뒤에 시립해 있던 에키는 카르엠과 딱 한 번 시선이 마주쳤다. 카르엠은 그녀를 보자마자 미간을 일그러뜨리다가, 곧 인상을 펴며 입끝을 비틀어 올렸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기묘한 미소만 남긴 채 아젠카를 떠났다.

* * *

니콜 시즈튼이 보낸 호위 업무 교대에 대한 통지와, 니콜 대신 공녀를 호위하기 위해 올 마법사에 대한 보고서까지 보고 나자 벌써 저녁이었다.

오전에 실수한 것들 중 급하게 고쳐야 할 것들을 따로 분류해 둔 후, 유리엔은 뻐근해진 뒷목을 주물렀다. 에키가 결재가 끝난 서류를 가져다주러 나간 틈이었다. 그는 의자에 기댄 채 잠시 눈을 감았다.

‘총행정관을 뽑아야겠군.’

지금까지 유리엔은 최소한의 휴식 시간과 훈련 시간을 빼면 성실하게 일만 했다. 일과 훈련 외에는 딱히 할 것이 없었다. 일이 없으면 찾아내서 하기까지 했다.

그는 역대 창천기사단장들처럼 총행정관을 임명해 행정업무를 맡기지 않고 대부분의 일을 직접 했다. 행정을 전혀 모르는 기사 출신들은 그래야 했으나 유리엔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황족 출신이라 기본적인 행정과 통치에 대한 교육을 받아 그리 어렵지가 않았다. 원체 뭐든 금방 잘하게 되는 편이기도 했다.

그래서 전임 총행정관이 은퇴할 때까지는 자문을 받았지만 그 뒤로는 총행정관 없이 지냈다. 평소에 하던 업무량이 엄청났다는 소리다.

하지만 이젠 여유 시간이 필요했다. 아주 절실하게 필요했다.

유리엔은 눈을 감은 채 총행정관 임명과 업무 분담에 대한 구상을 했다. 피곤한 상태였던 그는 그러다 깜박 잠이 들었다.

에키는 서류를 사무관들에게 가져다주고 집무실로 돌아왔다. 그녀는 내심 경악하는 중이었다.

‘뭐가 이렇게 바빠? 축제 직후라 그런 건가? 설마 늘 이런 건 아니겠지. 훈련과 외교만 해도 바쁠 판인데 시정에 기사단 행정 업무까지 하다니, 사람을 혹사시키는 것도 정도가 있지…….’

“다녀왔습…….”

집무실 문을 열며 보고하려던 에키가 입을 다물었다. 의자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유리엔이 보여서였다.

숨이 고르다. 잠들었나? 피곤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집무실의 커다란 창으로 황혼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주홍빛으로 물들어 늘어진 은발이, 혼절했다가 그의 사택에서 일어난 직후에 보았던 것과 비슷했다.

그녀가 누운 침대가에 엎드려 있던 그의 모습. 내내 곁을 지켰던 거겠지. 이렇게 바쁘면서. 그 때엔 공녀 암살 시도 뒤처리 때문에 지금보다도 더 정신이 없었을 텐데도.

에키는 소리를 내지 않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긴 책상을 돌아 옆으로 가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내리감은 은빛 속눈썹이 흰 피부 위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눈이 그 그림자를 따라, 턱 선을 훑고 내려가 목덜미에 닿았다.

단단히 채워진 목깃. 그 아래에 있을 붕대. 에키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건드리면 깨어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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