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22화
카르엠이 그녀에게로 성큼 다가왔다. 그는 그녀의 오른손을 낚아채려 했다. 마검의 문양을 확인하려는 목적일 것이다.
짧은 순간에 에키는 갈등했다. 문양을 들킬 수는 없다. 피할까? 어떻게 해야 하지?
결정을 내렸다. 그녀는 피하지 않았다.
카르엠이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장갑을 벗기려는 듯 다른 손이 뻗어 온다. 에키는 손목이 잡힌 상태로 피하려는 것처럼 뒤로 확 잡아 당겼다.
그 힘이 꽤 강했다. 카르엠의 몸이 그녀 쪽으로 약간 기울었다.
그 순간 그녀는 카르엠의 발을 걸고, 손목을 뿌리치며 밀쳤다. 가슴팍을 밀치면서 마나를 담아 교묘하게 명치를 후려쳤다.
마스터라 해도 실력은 천차만별인 법이다. 카르엠은 작정하고 기절시키려 드는 에키네시아를 상대로 버틸 만한 수준이 되지 못했다. 그는 명치를 맞는 것과 동시에 기절했다.
정신을 잃은 카르엠이 그대로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지자 우당탕탕 하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에키는 깜짝 놀란 것처럼 휘둥그렇게 눈을 뜨고 입가를 가렸다.
“어머나, 황자 전하!”
겉보기에는 손목이 잡힌 아가씨가 당황해서 남자를 밀쳐내고, 그로 인해 균형을 잃은 남자가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진 꼴이었다.
“전하!”
계단 위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위기사가 그 소리에 기겁해 튀어나왔다. 검은색과 붉은색이 섞인 제복 차림에, 가슴에는 하얀 사자의 문장. 제국 근위기사단 소속의 기사였다.
그자가 다급히 계단을 뛰어내려 왔다. 에키는 놀라서 물러나는 척하면서 계단을 비스듬히 밟았다.
그녀의 몸이 기우뚱 하며 아래로 떨어지려 했다. 지나가던 기사가 반사적으로 에키를 붙잡았다.
에키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기사의 어깨를 잡는 척하면서 목덜미를 내려쳤다. 그 역시 당황한 상태에서 그녀를 상대로 버틸 만한 수준은 못 되었다.
그녀는 난간을 잡고 몸을 바로 세우며 비켜섰다. 기절한 기사는 제 주군과 똑같은 꼴이 되어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에키는 한숨을 내쉬며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볼썽사납게 널브러진 남자 둘이 보였다.
[에잉, 안 죽었네. 목이라도 부러졌음 좋았을 텐데. 아니다, 그럼 피 맛을 못 보니까 이쪽이 낫겠네? 주인아, 이제 죽일 거지?]
“좀 닥쳐봐.”
머리가 아팠다. 그녀는 우선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목걸이를 주워 들었다.
투명해진 보석. 다시 이리저리 둘러봐도 그녀의 눈으로는 마법진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마석은 겉보기에 보석과 큰 차이가 나지 않아서 전문가가 아닌 그녀로서는 제대로 분석하는 게 불가능했다.
마검의 마나를 이런 식으로 써먹는 건 상상도 해보지 못했다. 이런 게 쉽게 만들 수 있는 물건일까? 그녀는 제발 쉽게 만들 수 없는 물건이길 빌었다.
‘일단 이건…… 니콜 언니에게 가져가 봐야겠다.’
에키는 포기하고 벨벳 상자를 주워 그것을 도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힐끔 연회장 쪽을 보았다.
제법 요란한 소리가 났는데 나와보는 사람은 없었다. 음악 소리에 묻혀 제대로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상자를 챙기고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기사를 발끝으로 밀어 치우고, 엎어져 있는 2황자를 확인했다.
완전히 기절한 상태. 에키는 무표정하게 그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이제 확신했다. 이자가 로아즈 저택의 주방에 마검을 가져다 둔 원흉이었다. 뒤에 황제가 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바르데르기오사를 이용해 이득을 보려던 건 2황자다.
마주하면 찢어 죽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여버리고 싶다고 소망했었다. 망설임 없이 죽이리라 결심했었다.
이자로 인해 그녀는 제 손으로 가족을 죽였고,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고, 유리엔을 죽였고, 아젠카를 멸망시켰다.
이자로 인해 6년간 원치 않는 살육을 벌이고, 9년간 진창을 구르며 기오사를 모았다.
모든 것을 바꿔버린 15년의 지옥. 새빨갛게 차오르는 분노. 지옥에서 기어올라 온 그녀의 혼이 속삭였다.
죽여버려. 복수를 해. 네 고통의 만분의 일이라도 느끼게 해줘.
살의가 전신을 타고 오른다.
[우와, 살의 봐. 잘됐다, 지금 주위에 아무도 없잖아! 내 마나 가지고 있는 걸 보면 저놈이 날 가져다 놓은 놈 확실하지? 나쁜 놈이니 거리낄 것도 없네! 주인아, 죽이자! 죽여버려!]
주위는 어두웠고, 아무도 없었다. 죽이는 건 정말로 쉬운 일이다. 당장 저자가 일어나서 발악을 해도 그녀는 개미를 눌러 죽이듯 죽여버릴 수 있었다.
과거만 본다면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현재를 본다면.
에키네시아는 치솟는 살의를 눌러 삼키며 오랜 경험에서 비롯된 냉정을 끌어올렸다.
2황자는 제국의 직계 황족이다. 거기다 황제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었다.
그가 사망하면, 그것도 아젠카의 연회에 참석했다가 죽은 채 발견되면, 얼마나 복잡하고 끔찍한 문제가 발생할지 안 봐도 뻔했다.
심지어 아젠카의 군주는 유리엔이었다. 유리엔이 지배하고 있는 땅에서 2황자가 죽었다간 정말로 제국과 아젠카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제국과 아젠카가 전쟁을 선포하면 로아즈가 위태로워진다. 가족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 간신히 되돌려 얻은 새로운 삶은 혼란으로 빠져들 것이다.
그녀가 죽였다는 것을 들키건 들키지 않건 간에, 2황자의 죽음만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리고, 미래를 본다면.
그녀는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안쪽의 어둠이 밤하늘처럼 느껴졌다.
〈앞으로도 계속 함께 변해갔으면 좋겠다. 이 삶의 끝까지.〉
조금 전, 유리엔이 그녀에게 했던 말. 그가 말한 대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미래를 그려본다.
2년 내지는 3년 정도에 기사가 되어, 다른 기오사를 얻어 기오사 오너가 된다. 그 기오사를 각성시키고, 마검을 봉인하고, 창천의 기사로서 그와 함께하는 삶.
이미 존재하지 않게 된 과거는 정말로 잊어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
처음부터 그녀는 복수하기 위해 시간을 되돌린 게 아니었다. 목표가 복수였다면 9년의 세월 중 어딘가에서 지쳐 나가떨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목표는 모두를 되살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행복해지려고 시간을 되돌렸다. 그리고 지금의 그녀는 꽤나 행복했다.
가족이 살아 있다. 친구가 생겼다. 즐거운 것들도, 좋아하는 것들도 늘어난다. 비극을 겪기 전의 자신을 되찾아간다. 창천의 기사로 살아갈 미래가 있다.
무엇보다도, 유리엔이 있었다. 결코 이루어질 리 없다고 생각했던 그와 마음이 닿았다.
에키는 무심코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손끝이 달았다.
유리엔이 그녀의 복수를 이해할 수 있을까. 혹여 이해한다 해도, 형을 죽인 사람과 함께 살 수 있을까.
‘사이가 나쁘다지만 그래도 혈육이잖아. 그의 가족을 죽이고 그와 함께하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겠지.’
어머니가 다른 것도 아니고 완전히 같은 부모 아래에서 태어난 친형이다. 게다가 배후에 있을 황제는 그의 친아버지였다.
그녀는 복수를 위해 그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로 간신히, 이제야 간신히 두려움을 묻어버리고 그와 함께하는 미래를 그리게 되었는데. 아직도 남아 있는 그에 대한 죄책감 위에 새로운 죄책감을 쌓을 순 없었다.
‘지금 이 현재와, 그와 함께하는 미래를 위해서라면, 복수를…… 포기할 수도 있다.’
그녀는 스스로 내린 결론에 놀랐다. 놀랐으나 그 결론을 부정하지는 못했다. 에키는 헛웃음을 흘리며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모두 없던 일로 만들었다. 그 과정은 고통스러웠으나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그러니, 결과를 유지하기 위해 지워버린 과거는 잊어줄 수도 있었다.
그놈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유리엔을 위해서.
그녀와 그녀의 주위를 더 이상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녀는 결정을 내렸다.
[주인아, 안 죽이고 뭐 해? 내버려 둘 거야? 이놈 때문이잖아!]
“너 때문이기도 하지.”
[내가 아니라 나한테 쌓이는 살의 때문이지. 난 착해! 말도 잘 들어!]
“네가 본능을 잘 참고 죽이자는 소리 좀 그만하면 착하다는 거 인정해 줄게.”
[……치사해.]
에키는 챙겨놓은 벨벳 상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풀밭에 얼굴을 처박고 쓰러져 있는 2황자를 한 차례 걷어찼다. 구두 굽으로 걷어찼으니 꽤 아플 텐데 카르엠은 일어나지 못했다.
내친 김에 머리도 몇 번 밟아주었다. 유치하고 무의미한 분풀이였으나 속은 약간 상쾌해졌다. 그녀는 그의 머리를 지그시 밟은 채 속삭였다.
“봐주는 거예요, 빌어먹을 황자 전하.”
아마 방금 카르엠은 그녀가 마검의 주인임을 알아차렸을 거다.
그러나 확신하진 못한다. 그냥 그녀가 마검에 휘둘리지 않는 체질이고, 마검은 유리엔이 가져가 보관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그녀가 마검의 주인임을 대놓고 발설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마검과 관련된 음모의 흑막임을 자백하는 꼴이 되므로.
마검과 관련된 문제는 절대 표면에 드러낼 수 없다. 그녀든, 2황자든 간에.
물 아래에서 그녀를 건드리는 건 그녀에겐 전혀 위협이 되지 못한다. 오늘 2황자가 그녀를 황족 암살범으로 만들려다 실패했듯이.
그녀가 경계하는 건 표면으로 드러나는 일이다. 평온도, 꿈꾸기 시작한 미래도 모조리 부서져버릴 테니까.
에키는 벨벳 상자를 움켜쥐고 발 아래를 노려보았다. 어차피 기절한 상태라 카르엠은 듣지 못할 테지만 상관없었다. 스스로에게 하는 말에 가까웠으므로.
“네놈이 뒤에서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유리엔은 황태자를 지지하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정확히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는 2황자가 아니라 황태자를 택했다. 그를 도우면 자연스럽게 2황자는 도태된다.
디아상트 공작과 근위기사단장 관련 조사를 쐐기에 맡겨 두었으니 혹여 2황자 측과 공작이 연루되어 있다면 그쪽도 정리할 수 있을 거다.
그녀의 가문인 로아즈는 그녀의 로드가 유리엔이기 때문에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 공식적인 방법으로는 말이다. 일단 그렇게 판단해도, 당연히 여러모로 대비는 해야겠지만.
“두 번은 없어.”
에키는 나지막이 중얼거리고는 발을 치웠다. 비슷한 은발인데 그저 혐오스럽기만 한 머리칼을 내려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녀는 계단을 올라 연회장에 들어가서 지나가는 시종을 붙잡고 놀란 얼굴로 호소했다. 2황자 전하와 호위기사분이 계단에서 넘어져서 정신을 잃으셨다고.
시종이 근위기사 몇과 함께 계단으로 향하는 것을 확인하고, 에키는 파티마와 앨리스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 * *
2황자와 근위기사는 연회가 끝난 후에나 깨어났다.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기절했다는 것은 그들의 명예를 걱정한 시종이 입을 다물어 주었다.
물론 유리엔의 귀에는 들어갔다. 그는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아마 에키네시아가 그들을 기절시켰으리라 짐작했다.
3일간 이어진 축제가 끝난 다음날, 2황자를 포함한 제국 측 방문객들은 아젠카를 떠났다.
유리엔은 성녀의 소속 문제로 분쟁이 벌어지거나 카르엠이 무언가 더 일을 벌이리라 생각하고 대비했었다.
그러나 예상했던 것에 비해 이상하리만치 조용하게 그들은 제국의 수도로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니콜 시즈튼이 다른 마법사에게 공녀의 호위를 넘기고 마탑으로 귀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