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21화
아는 얼굴이었다. 죽였던 적 있는 자다.
그녀의 육체가 마검에 적응하고 난 후, 대놓고 학살을 하고 다녔을 때. 대규모의 토벌단을 이끌고 그녀를 토벌하러 왔던 황족.
황족 특유의 은발에 녹색 눈동자, 검으로 단련된 몸, 잘생긴 편임에도 어딘지 모르게 뒤틀려 보이는 인상.
유리엔을 제외하면 현재 아젠카에 있을 황족은 단 한 명뿐이었다. 제국의 2황자, 카르엠 드 하르덴 키리에.
지워진 과거의 1631년 겨울, 제국이 꾸렸던 토벌단은 굉장한 규모였다.
숫자 자체는 군대에 비하면 적었지만 평균적인 수준이 엄청났다. 가장 말단이 근위기사였고, 마탑의 마법사들과 7현자 중 넷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중에는 제자를 잃은 니콜의 스승도 있었다.
당시 토벌단은 딱히 작전이랄 것을 세우지 않았다.
그럴 만한 수준의 토벌단이었다. 어지간하면 피해 없이 목적을 달성했을 것이다. 상대가 에키네시아였던 게 문제였을 뿐이다.
마검에 물든 지 2년이 넘었던 시기였다. 연약하던 그녀의 몸뚱이는 쉼 없는 전투로 완벽하게 단련되었으며 마검이 공급하는 마나는 무한에 가까웠다. 인간의 악의로 구성된 마검은 영악한 짐승처럼 굴었다.
작전 없이 맞닥뜨렸어도, 지휘하는 자가 좀 더 현명했다면 결과가 달랐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아주 최악까지는 아니었다. 군대 간의 전술에나 맞을 법한 지휘였을 뿐이다.
상대가 화살을 맞추기도 어려울 정도로 가느다란 몸의 여인 하나인 데다,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며, 일 대 일로 마주했다간 몇 초 버티지도 못하고 사망하고, 다수로 잘못 둘러쌌다간 아군이 방해가 되어 오히려 더 불리해진다는 것을, 지휘관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 결과는 전멸이었다.
에키네시아 입장에선 몸이 힘들었고 부상을 입긴 했어도 심하게 끔찍한 기억까진 아니었다.
공격을 해 오는 기사나 마법사를 죽이는 것은 넘어져 울음을 터트리는 어린아이를 베는 것보다 덜 고통스러웠다. 그 시절은 대체로 처참했기에 토벌단을 학살한 정도면 양호했다.
그날의 기억 중에 가장 잊고 싶은 건 니콜의 스승이라 두어 번 본 적 있던 늙은 현자를 베었던 일이었다. 그 외에는 그저 일상적인 살육에 불과했다.
그 살육 와중에 분명 저자를 죽였다. 누구인지는 몰랐으나 특유의 은발 덕에 죽인 지휘관이 황족이었던 것은 알아봤었다.
별로 인상적이지 않아서 얼굴까지 기억하고 있진 못했는데, 마주하니 생각이 났다.
싸울 의지를 잃고 토벌단을 버리며 도망치다가 등을 보인 채 죽었던 지휘관. 그게 2황자였구나.
‘유리엔이 경고하자마자 만나다니.’
에키는 태연한 얼굴로 예를 취했다. 계단 중간에서 제대로 인사하긴 어려워서 가볍게 무릎만 굽혔다 폈다.
“제국의 황족을 뵙습니다. 로아즈의 에키네시아입니다.”
“안다. 너야말로 내가 누구인지 아나?”
“물론입니다. 제국의 젊은 사자이신, 카르엠 드 하르덴 키리에 전하.”
그녀는 고분고분 답하며 은밀히 감각을 넓혔다. 아무리 마스터라지만 황자쯤 되는 자가 타국에서 혼자 돌아다닐 리는 없었다.
역시 호위가 있었다. 계단 꼭대기에 근위기사인 듯한 기척이 하나. 실력은 마스터급이다.
그녀가 그것을 파악하는 사이 카르엠이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며 말했다.
“그래, 맞다. 내가 카르엠이다. 에키네시아 로아즈, 왜 이 몸이 친히 너를 기다렸을까? 짐작 가는 것이 있나?”
물론 짐작 가는 게 있었다. 그러나 에키는 전혀 모르는 척 눈을 깜박이며 대꾸했다.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내 친애하는 동생이 스콰이어를 들였다기에 궁금해져서 말이지.”
“어떤 것이 궁금하셨나요?”
“동생의 인간관계는 제법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너는 낯설어. 언제부터 유리엔과 아는 사이였지?”
“아젠카에 와서 처음으로 뵌…….”
그녀의 대답에 카르엠의 표정이 돌변했다. 네가 감히 나를 기만하느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는 그녀의 말을 툭 끊으며 말했다.
“황족의 물음에 거짓으로 답하는 건 중죄다, 로아즈 영애.”
“거짓말이 아닙니다. 아젠카에 오기 전에는 로드와 대화조차 해본 적 없어요.”
이건 정말 거짓말이 아니었지만, 카르엠은 전혀 믿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가 솟구치는 화를 누르는 것처럼 지그시 이를 물었다. 본래도 다혈질인 편이긴 했으나, 유리엔과 관련되면 늘 더 심하게 화가 솟구치곤 했다.
“그럼, 아젠카에 오기 전엔 내 동생과 만난 적이 없다는 소리냐?”
“예, 전하.”
“나를 바보로 아나? 넌 유리엔과 만난 적이 있다. 작년 탄신 연회 때 내가 분명히 보았지. 내 면전에서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다니!”
에키는 어이가 없어졌다. 서로 대화 한 번 안 나눠봤고 눈길도 마주쳐보지 못했던 것을 ‘만났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면, 그녀는 탄신 연회에 참석했던 모든 귀족과 만나본 사이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묘하게 걸리는 점이 있었다. 유리엔은 그녀를 탄신 연회때 처음 눈여겨보았다고 했었다. 그 때 그가 그녀를 보는 것을, 2황자가 알아챘었단 뜻인가?
“……전하, 저는 서로 인사 한 마디 나누지 않은 것을 만났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 뒤에 유리엔이 로아즈 영지를 방문한 적은?”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하.”
카르엠이 기가 차다는 듯 코웃음 소릴 냈다. 제 나름대로 결론을 이미 내어놓은 상태라 그녀의 대답을 믿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비웃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래, 사실대로 말할 순 없겠지. 이해해 주마. 잘 알겠다.”
[쟨 혼자 뭘 이해해 준다는 거야? 알긴 뭘 알아. 되게 짜증난다. 주인아, 저거 좀 죽이면 안 돼?]
마검이 투덜거리는 것을 들으며, 에키는 니콜이 했었던 말을 떠올렸다.
〈마검을 보낸 측에서는 의심을 하고 있거든. 로아즈와 유리엔 단장 사이에 무언가 끈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학살 사건을 벌여야 할 마검이 사라졌잖아. 아무도 죽지 않고. 상식적으로 이런 일이 가능한 게 기오사를 관리하는 창천기사단 말고 또 있겠니?〉
그녀가 스콰이어가 된 이후 유리엔과 로아즈 사이에 연결고리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반면, 그녀가 스콰이어가 되기 이전부터 유리엔과 로아즈 백작가가 관계가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마검을 보낸 측일 확률이 매우 높겠지.’
그녀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 사이 카르엠은 그녀의 바로 앞까지 내려왔다. 그는 비뚜름하게 입끝을 올린 채 말했다.
“뭐……. 어쨌든 내 귀한 동생이 처음으로 들인 소중한 스콰이어니, 형으로서 가만있을 수는 없지.”
카르엠이 품에 손을 넣었다. 에키는 반사적으로 긴장했다.
그러나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 그가 꺼낸 것은 조그만 벨벳 상자였다. 흔히 장신구를 담는 선물 상자. 선물용 붉은 리본까지 묶여 있었다.
카르엠이 그것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선물이다.”
“제게 왜 이런 것을……. 괜찮습니다.”
“말했잖나, 네 로드의 형으로서 챙기는 거라고. 설마 내 호의를 거절하려는 건 아니겠지?”
황족의 호의를 거절하는 건 굉장한 무례다. 거부했다간 트집을 잡혀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다.
받을 수밖에 없는 선물이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선물이기도 했다. 에키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대체 무슨 수작이야?’
“……감사합니다, 전하.”
“지금 열어보도록.”
“네?”
“지금 열어보라고 했다.”
심하게 수상했다. 카르엠이 유리엔과 사이좋은 형제였다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면서 호의를 베풀 리가 없었다. 조금 전에 유리엔이 경고까지 하지 않았던가. 하물며 마검의 흑막일 수도 있는 상대다.
에키는 불길한 것을 보듯 손바닥 위의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적어도 폭발하거나 하는, 공격적인 건 아니겠지.’
사람이 없는 계단이라지만 연회장이 코앞이었다. 게다가 저 연회장에는 지금 기오사 오너만 네 명에 마스터가 수십이었다.
이런 자리에서 기사단장의 스콰이어에게 이런 식으로 대놓고 해를 끼치는 건 제국의 황족이라도 무리였다.
“얼른 열어 보라니까. 뭐 하는 거냐?”
황족만 아니었어도 ‘싫은데요, 필요 없으니 도로 가져가세요’라고 대답했을 텐데. 에키는 심란한 눈으로 벨벳 상자를 노려보다가 리본에 손을 대었다.
긴장은 늦추지 않았다. 뭐가 나오든 놀라지 않을 각오를 하고 리본을 풀었다. 상자의 뚜껑을 쥐고 열었다.
그 안에는 검은 보석이 달린 목걸이가 있었다. 손가락 두 마디쯤 되는 커다란 보석이었는데, 처음 보는 종류였다. 심연처럼 새카만 빛깔이 독특했다.
그 뿐이었다.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에키는 목걸이에서 시선을 떼고 카르엠에게 기계적으로 인사를 했다.
“아름답네요. 과분한 선물이에요. 감사드립니다, 전하.”
“처음 보는 보석이겠지? 아주 희귀한 것이다.”
카르엠이 기묘하게 웃더니 그녀에게 손짓을 했다.
“한 번 걸어봐라. 어울리는지 봐야겠으니.”
괴상하긴 했어도 할 수 있는 요청이었다. 목걸이를 선물로 주면 걸어보라고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물론 나올 만한 요청인 것과 별개로 꺼림칙했다. 에키는 저도 모르게 찌푸려지려는 미간을 간신히 폈다.
“저, 이미 착용하고 있는 목걸이가 있어서…….”
“잠깐 해보라는 게 그리 어렵나? 이 몸이 친히 하사한 것인데, 지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항의를 하는 거냐?”
그가 불쾌한 듯 인상을 썼다. 에키는 속으로 욕을 하며 목걸이를 재차 살펴보았다.
혹시나 해서 꼼꼼히 보았지만 마법진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모든 마도구는 마법진이 새겨져 있으므로, 마도구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면 마나를 흘려 넣어야 했다. 사실 그녀는 손을 대지 않고도 자신의 마나를 넣어 볼 수 있었으나, 마스터인 카르엠의 코앞에서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둔해도 신체 외부로 마나를 흘리는 것까지 눈치를 못 챌 마스터는 없다.
‘독이라도 발라놨나.’
얼마 전에 독을 먹고 고생을 했더니 그 가능성이 떠올랐다.
하지만 여기서 그녀가 목걸이를 만지고 쓰러지거나 중독 증세를 보이기라도 하면, 난리가 날 것이다. 독을 쓰려면 은밀히 하지 이렇게 대놓고 줄 리가 없다.
그녀는 결국 한숨을 쉬고 목걸이에 손을 뻗었다. 카르엠이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끝이 보석에 닿았다.
흰 손가락에 검은 얼룩이 퍼져나갔다. 닿은 곳에서부터 새카만 마나가 쏟아져 들어왔다.
“……!”
에키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억누르며 흡수했다. 손끝에서 퍼지던 얼룩이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그건 무의식적이고 습관적인 행위였다. 늘 하던 대로, 마검의 마나를 사용하며 살의를 억제하는 행위.
그녀는 그것을 완전히 흡수해 버린 다음에야 방금 자신이 뭘 했는지 깨달았다.
“……윽!”
당황해서 목걸이를 내던졌다. 바닥에 나뒹군 목걸이의 보석은 유리처럼 투명해져 있었다.
[어? 이거 되게 익숙한 마나인데? 내 거잖아?]
에키의 감각을 함께 느낀 마검이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녀와 같은 판단이었다. 바르데르기오사에 쌓이는 살의의 마나였다.
이게 왜, 여기에, 어떻게?
에키는 얼이 빠져서 카르엠을 바라보았다. 그는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검을 차고 있다. 연회장에서 검을 차는 것은 예의가 아닌데도, 카르엠은 들어올 공격을 대비하는 것 같은 자세로 에키를 쳐다보았다.
그 모습에 당황했던 에키의 머리가 차게 식었다.
살의가 깃든 마검의 마나. 투명해진 보석. 그리고 공격을 막을 준비를 하는 2황자.
‘목걸이의 보석이 마석이었어.’
그것도 마검의 마나를 담아놓고, 접촉하면 담긴 마나가 곧바로 흡수되도록 만들어둔 마석. 급속도로 생각이 흐르고 판단이 이어졌다.
2황자 측이 마검을 보낸 게 확실하다. 마검의 마나가 든 마석을 가지고 있다는 건 마검을 소유한 적이 있다는 뜻이니까.
2황자는 선물이라는 핑계로 그녀가 마검의 마나를 흡수하도록 만들었다.
마검의 마나를 흡수하면 살의에 물든다. 살의에 물든 자는 무차별적으로 주위 인간을 학살하게 된다.
그녀가 누구보다도 마검의 마나에 익숙한 자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살의에 물들어 가장 가까운 인간, 즉 2황자를 죽이려 들었을 것이다.
황족 살해 시도는 사형이다. 즉결 처분도 허용된다.
2황자는 마스터였고, 에키네시아는 마스터가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살의에 물든 그녀를 제압할 자신이 있었을 것이다. 거기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여 마스터급 호위기사도 하나 더 데려왔다.
만약, 살의에 물든 그녀가 카르엠을 공격하고, 그 소란을 계단 위에 있는 호위기사가 소리쳐 알리고, 연회장의 모든 이들이 나와 보는 가운데 그녀가 카르엠을 죽이려 든다면.
설사 그 자리에서 2황자가 그녀의 목을 벤다 해도 항의할 수 없는 정당한 처분이고, 동시에 유리엔은 황족을 죽이려 한 스콰이어의 책임을 져야 했다.
‘반면 내가 물들지 않는다면.’
에키네시아 로아즈에게 마검이 있다는 뜻이 된다.
〈합리적인 의심이지, 그 집 딸내미가 마검을 쥐고도 괜찮은 특이 체질이라는 망상보다는.〉
니콜은 망상이라고 했었다. 그러나 방금, 자신은 그 망상을 증명해 버렸다.
판단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수 초. 공격을 대비하던 카르엠의 얼굴이 눈앞에서 일그러졌다.
“……설마,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