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20화
좋아서 심장이 멎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꿈인 게 아닐까.
유리엔은 맞잡고 있던 손까지 놓고서 입가를 가린 채 약간 물러났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몇 차례 머리를 내저은 후, 간신히 말했다.
“……그냥, 그냥 유리엔이라고 부르도록. 그 편이 나을 것 같군.”
“애칭으로 불리는 게 싫으세요?”
“…….”
“싫은 건 아니잖아요, 그렇죠?”
에키가 물러난 만큼 그에게 다가서며 되물었다.
그녀의 말대로, 싫은 게 아니라 좋아서 문제였다. 유리엔은 부정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그녀는 어쩔 줄 모르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율이라고 부를게요. 당신과 함께 하면서.”
손을 들의 그의 뺨에 얹었다. 그녀 쪽에서는 처음으로 하는 접촉이었다. 장갑 너머로 느껴지는 피부가 매끄럽고 따뜻했다. 가로막은 얇은 천이 답답했다.
그녀가 뺨을 만지자 유리엔은 완전히 넋이 나가버렸다.
커다랗게 떠져서 그녀에게 고정된 눈동자가 비 온 뒤의 하늘처럼 맑고 예쁜 푸른빛이었다. 에키는 그 눈을 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이 준비하는 것을 기다리기만 하지도 않을 거고, 선택만 하지도 않을 거예요.”
닿고 싶어도 닿을 수 없던 것이 손에 쥐어졌다. 쥐기로 한 이상, 받 아들이기만 할 생각은 없었다.
가슴 안쪽이 두근두근 요동쳤다. 뒤늦게 자각하여 흘러나왔던 욕심이 그 고동을 따라 흘렀다.
그녀를 내려다보며 멍해져 있는 그의 얼굴이 못 견디게 예뻤다. 내 것. 닿아도 되는 것. 함께하기로 결심한 사람.
정말이지 사랑스러워서, 열기가 이끄는 대로, 충동적으로 움직였다.
손에 살짝 힘을 주자 그의 얼굴이 쉽사리 순응하여 숙여진다. 다른 손으로 어깨를 짚고, 약간 발돋움을 했다.
그녀의 입술이 그의 눈 바로 아래의 뺨에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스친 것에 가까운 접촉이었다.
그대로 손을 떼고 물러나며, 에키는 달아오른 얼굴로 속삭였다.
“같이 해요. 뭐든. 같이, 당신을 얽어맨 상황들을 풀어내고, 그 다음에…….”
꼼짝도 않고 있던 유리엔이 돌연 그녀의 턱을 잡았다. 말하다가 붙잡힌 에키는 혀를 씹을 뻔했다.
한 손이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고, 다른 손이 허리를 붙들고 제 쪽으로 그녀를 잡아당겼다.
입술이 닿았다.
말캉한 살이 그녀의 입술을 꾹 눌러 왔다. 누르고, 벌어진 제 입술 사이에 그녀의 아랫입술을 머금고, 살짝 빨아들이더니, 혀끝이 닿아 왔다.
고작 입술에 닿은 정도였으나, 그 순간 오싹한 감각이 불티처럼 튀어 온 몸으로 확 퍼져나갔다. 무너졌던 이성이 그 감촉에 퍼뜩 돌아왔다.
에키는 기겁해서 그를 밀어냈다. 늘 조심스럽던 평소와 달리 얽어매듯 그녀를 잡고 있던 그가 화들짝 놀라 손을 놓았다.
그녀는 손등으로 입을 가렸고, 유리엔은 약간 물러났다.
에키네시아가 그의 뺨을 만졌고, 당겼고, 입술을 댔다. 녹을 듯이 보드라운 감촉이 그의 피부에 닿았다. 함께하자고, 뭐든 같이 하자는 말을 들었다. 그가 정신이 나가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다.
[네가 언젠가 사고 칠 줄은 알았다만, 너무 빠른 것 아니냐…….]
성검이 중얼거렸다. 방금 자신이 뭘 했던가. 그는 무심결에 손으로 제 입술을 더듬었다. 감촉이 남아 있었다.
그나마 진정되었던 그의 얼굴이 도로 목덜미부터 귀 끝까지 확 타올랐다.
머리가 하얗게 비더니 불꽃놀이 폭죽 같은 것이 가슴께에서 펑펑 터져 댔다. 닿은 것만으로도 어지럽도록 좋은데, 더 깊게 닿고 싶은 욕심까지 일었다.
그런 심정과 별개로 미친 짓이었다는 판단은 섰다. 유리엔은 차마 에키네시아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내가, 잠깐 미쳐서…….”
“아, 아뇨, 괜, 괜찮, 괜찮으니까, 그냥 좀, 놀란 거고, 게다가 음, 제가 먼저…….”
당연히 에키도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다. 더듬고 싶지 않은데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그녀는 으, 하고 신음을 흘리고는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온몸이 흐물흐물해지는 기분이었다.
[뽀뽀했지? 지금 너 쟤랑 뽀뽀한 거지? 우와, 뽀뽀했어! 이제 진짜 애기 낳는 거야? 그럼 앞으로 쟤는 죽이자고 안 할게!]
눈치 없는 마검이 떠들어댔다.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드는 것과 동시에 부끄러워서 미칠 것 같아졌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오른손을 움켜쥐고 마나를 퍼부었다. 아프다고 징징거리는 소리를 무시하며 호흡을 골랐다.
“로드, 아니, 음, 율.”
“…….”
그녀의 부름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던 유리엔이, 그녀가 고쳐 부른 애칭에 뻣뻣해져 버렸다. 눈에서 초점이 나갔다.
민망함에 시선을 돌리고 있던 에키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놀라서 밀어낸 것뿐이니까, 그러니까, 음, 기분이 나빴다던가, 그런 건 아니니까, 정말 신경 쓰지 마세요.”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
“아니, 사과도 하지 마시고요. 그, 그래도 되는, 그런 관계가 된 거잖아요. ……그렇죠?”
스스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머리가 빙빙 돌아서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그녀는 자신 없는 물음을 덧붙이며 슬며시 그를 살폈다.
유리엔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관계가 변했음을 먼저 확언해 놓고서도 그녀의 말이 충격적이었다. 그래도 되는 관계, 라니. 이게 정말 현실이 맞나.
그래도 된다고.
욕망이건 감정이건 죄 쏟아놓아도 된다는 허락처럼 들렸다.
그녀가 그의 앞에서 고개를 기울이며 그를 올려다본다. 자신이 한 말이 맞는지 고심하는 듯한 얼굴로.
유리엔은 평생 쌓아온 절제를 다 끌어모아 스스로를 다스렸다. 또 미친 짓을 할까 봐.
에키네시아는 그가 가진 욕망의 깊이를 모르고 있었다. 아까 그녀가 바라하가 좋다고 하는 줄 알았을 때, 그가 찰나 무슨 생각까지 했는지 알긴 할까.
성검의 주인은 자신이 정상이 아님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는 속내와 달리 고결하게만 보이는 낯으로 말했다.
“그래도, 조금 전에는 명백히 내가 무례했다. 앞으로는 주의하지.”
사과 자체는 진심이었다. 주의하겠다는 말도 진심이었다. 그의 말에 에키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정말 괜찮다니까요. 주의까지 할 일은 아니었어요.”
경황이 없어서 밀어냈을 뿐 솔직히 좋았다.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다. 게다가 키스도 아니고 고작 입맞춤이었다.
아마 그녀가 밀어내지 않았다면 키스가 되었을 테지만, 에키는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가 고개를 가로젓자 유리엔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무르게 굴지 마라.”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유리엔은 말을 돌리며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이 지금까지의 그와 달리 이상하리만치 농밀하게 느껴졌다. 똑바로 보고 있기가 힘든 느낌에 에키는 시선을 내렸다. 각 잡힌 목깃으로 가려진 그의 목덜미가 보였다.
아직도 붕대를 두르고 있을까. 보여달라는 말은 들어주지 않겠지. 억지로라도 확인하고 싶은 충동이 들어서 에키는 마른침을 삼키며 참았다.
그사이 연회장 쪽에서 계속 들리던 음악이 멎었다. 벌써 무도회 중간의 휴식시간인 모양이었다.
“……슬슬 돌아가시는 게 좋겠어요. 시간이 많이 흘렀잖아요.”
유리엔이 연회장 쪽을 잠시 보더니, 다시 그녀를 돌아보았다.
다 그만두고 그냥 그녀와 계속 함께 있고 싶었다. 동시에 이대로 계속 있다가는 심장이 터지거나 아까보다 더한 사고를 치지 않을까 싶은 의심이 들었다.
사고를 치는 쪽도 심장이 터지는 건 똑같겠군. 그는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 그렇군. 이만…… 돌아가야겠다.”
최선을 다해 인내심을 끌어낸 말이었다. 에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몇 발짝 걷다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에키네시아.”
“에키, 예요.”
“……에키.”
애칭을 입에 담자, 그녀가 그를 바라본다.
밤이 드리워 짙게 채색된 정원에 서 있는 여자.
등불 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피부 위로 굽슬거리며 흐르는 연한 분 홍색 머리칼과, 그가 고른 연보랏빛 드레스. 살짝 웃고 있는 입술과 그를 똑바로 바라보는 또렷한 눈동자.
“네, 율.”
이러다 정말 죽을 것 같다. 익숙해질 수 있긴 할까.
유리엔은 일부러 시선을 떼고서야 간신히 하려던 말을 꺼낼 수 있었다.
“2황자……. 카르엠 형님이 그대를 만나보고 싶다고 했었다.”
“네? 2황자 전하께서요?”
“조심해라. 그는…….”
그대가 마검을 쥐도록 만든 자다.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유리엔은 그 말을 삼키고 다른 말을 했다.
“……나를 좋아하지 않으니, 내 스콰이어인 그대에게도 무언가 해를 끼치려 할지도 모른다.”
카르엠과 유리엔의 사이가 나쁘다는 건 니콜에게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자가 그녀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건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에키는 약간 갸웃거렸다.
‘마검 때문인가?’
떠오르는 가정은 그것뿐이었다. 아무래도 2황자 측이 로아즈에 마검을 가져다둔 흑막일 확률이 높았으니까.
학살을 벌여야 할 마검이 증발하더니, 로아즈의 영애가 아젠카로 가서는 덜컥 스콰이어까지 되었다. 음모를 꾸민 자들 입장에선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하고 싶어 하겠지. 만나 보려 하는 것도 당연했다.
사실 마검의 출처 뒤에 있는 것이 황족일 줄 몰랐을 때는, 확인하러 와서 정체를 드러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복수하기 쉽게 말이다.
‘2황자는 유리엔의 형제고, 황제는 그의 아버지지.’
증오에 가까운 관계라는 것을 듣긴 했지만, 그래도 그의 친혈육이었다. 그녀가 복수하려는 대상은. 한동안 밀쳐두었던 복잡한 심정이 수면으로 떠오르려 했다.
‘나중에…… 나중에 생각하자, 이건.’
그녀가 고민하는 사이, 유리엔은 다른 것을 묻고 싶어 입을 떼었다가 꾹 다물었다.
‘왜 나를 선택한 건가, 그대는?’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자연스럽게 떠오른 의문이었다. 왜 자신이 그녀에게 누구보다 특별하다는 건지 알고 싶었다.
지워진 과거를 알고 있는 자신은 그녀에게 불편한 존재일 텐데. 그녀는 분명히 그보다 바라하와 있는 것을 더 편하게 여겼었다.
게다가 바라하는 디트리히가 말했듯 좋은 남자였다. 둘 사이에 호감이 있는 것도 분명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망설임 없이 바라하를 거절하고 그를 택했다.
왜? 언제부터? 유리엔은 그 질문을 일단 뒤로 미뤄두었다. 말하기 두려워진 진실과 함께.
“그대는, 곧 스콰이어 업무에 복귀하겠군.”
“네. 그때 뵙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다.”
각자 다른 번민을 묻어둔 채 다음을 약속했다.
마주한 순간 지어지는 미소와 떨리는 목소리는 그저 진심이었다. 비밀을 전부 드러내진 못했어도 넘쳐흐른 감정은 온전히 드러났다.
유리엔은 미적거리는 걸음으로 정원을 벗어나 테라스로 향했다.
에키는 그가 보이지 않게 된 이후에 긴장이 풀려 쪼그려 앉았다.
입술을 만지작거리다가, 아직도 화끈거리는 뺨에 양손등을 대어 식혔다. 심장이 여전히 두근거렸다.
[맞는 말 했는데 때려. 서럽다.]
“발, 맞는 말이라고 다 해도 되는 건 아니야.”
[어, 그럼 맞는 말이긴 한 거네, 주인아? 나 안 틀렸지?]
“…….”
에키는 이마를 짚었다. 그녀가 진정하고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무도회는 자정까지 진행될 터였다. 시간이 한참 남아 있었다. 그래도 그녀로서는 드물게 무도회를 즐길 마음이 들지 않았다. 유리엔과 춤을 출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내키지가 않았다.
결국 에키는 샤이와 위즈덤 클럽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먼저 기숙사로 돌아갈 작정으로 연회장으로 향했다.
정원과 연회장을 잇는 계단은 2층까지 나선형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아직 여운이 남은 상태로 계단을 오르던 에키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계단 중간 즈음에 사람 그림자가 있었다. 짧은 은발이 눈에 띄었다. 짙은 초록빛 눈동자의 남자는 나선 계단의 난간에 기댄 채 아래쪽의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오래 기다리게 만드는군. 같이 나갔던 덩치 큰 녀석은 먼저 돌아오던데 말이야.”
그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