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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119화 (119/211)

검을 든 꽃 119화

피어나던 감정을 짓밟아 꺼뜨리려 했었다. 그래선 안 된다고 여기며 지우려 했다. 부서졌다고 믿기도 했다.

자각해 버린 후에도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두려움에 젖어 도망치고 숨기려 했다.

그럼에도 그러지 못해서, 결국 넘쳐흘러서, 유리엔에게 하고 싶었던 다른 모든 말보다도 먼저 그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는 그녀가 망가져가던 순간에 기적처럼 주어진 빛이었고, 악몽 속에서 그녀를 지탱해 준 구원이자,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이며, 가장 깊은 미련이었다.

그렇게 고정되고 뿌리를 내린 마음이었다.

만약 유리엔이 그녀에게 고백을 하지 않고, 위장 약혼이 아닌 진짜 약혼을 했더라도, 그녀는 그를 사랑했을 것이다.

드러낼 수도 이루어질 수도 없지만 그랬을 것이다. 그 감정을 외면할 수는 있어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에키는 새기듯 말했다.

“누구도 제게 그 사람보다 특별해질 수는 없어요.”

바라하는 에키네시아를 응시했다. 그녀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약간 떨리는 양손을 맞잡은 채 허리를 곧게 펴고 그를 보고 있었다.

“저는 유리엔 단장님을 사랑해요. 그러니 저를 기다리지 마세요.”

강렬하게 느껴질 정도로 선명한 시선, 그에 비해 여린 몸의 선.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여자가 지독하게 예뻐 보였다.

이런 상황인데도, 아니 이런 상황이라서, 이런 여자라서, 더 홀릴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까. 저토록 선명하게 단언할 수 있는 마음이 탐이 났다. 포기할 수 있을까.

긴 침묵 끝에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노력은 해보지.”

“……노력이라니요?”

바라하는 그녀로부터 눈을 돌려, 벤치 위에 펼쳐져 있던 손수건을 접어 품에 넣었다. 그러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렸다.

“내 마음도 쉽게 변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

묵직한 말이었다. 무어라 덧붙일 수가 없어서 에키는 입을 다물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쓰게 웃었다.

“에키, 난 먼저 가야겠다. 차인 상처를 좀 달래야 할 것 같으니 따라오지는 말고.”

“선배님…….”

“사과도 하지 말고.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어깨를 으쓱인 바라하가 돌아섰다.

“다음에 보자.”

인사를 남긴 그가 정원 밖으로 향했다.

에키는 정원수 사이로 사라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그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 후에야 꽉 맞잡고 있던 양손을 떼었다. 긴장과 함께 힘이 쭉 빠져나갔다.

이렇게 진지한 호감을 거절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거절해야만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되도록 금방 그가 마음을 추슬렀으면 좋겠다.

가늘게 한숨을 내쉬던 그녀는 퍼뜩 놀라 한쪽을 바라보았다. 미약한 인기척이 있었다. 공격적이지 않은데다 정신이 없어서 이제야 알아차렸다.

“누…….”

누구냐고 물으려던 말끝이 잦아들었다. 약간 떨어진 정원수의 그늘 아래에서 하얀 것이 언뜻 보였다.

그녀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흰 그림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가까워지자 나무 기둥 뒤로 흐트러진 은발이 보였다.

나무에 등을 댄 유리엔이 고개를 숙인 채 굳어 있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귀가 새빨겠다.

“로드?”

그녀의 부름에 그의 어깨가 흠칫거렸다. 그가 돌아보지 않아서, 에키는 나무를 돌아 그의 정면으로 향했다.

“……언제부터 듣고 계셨던 거예요?”

“숨어서…… 들으려던 것이 아니라…… 나는…….”

유리엔이 횡설수설했다. 에키가 한 걸음 다가서자 그가 움찔 떨었다. 물러나고 싶은 듯한데 등 뒤가 굵은 나무 기둥이라 물러날 곳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기울여 숙이고 있는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귀를 보고 짐작하긴 했지만, 그의 얼굴은 타는 듯이 붉었다.

로잘린의 도움을 받아 정원으로 나온 유리엔은 금방 에키네시아와 바라하를 찾아냈었다.

정말로 그는 숨어서 들을 의도가 아니었다. 그가 그녀를 찾아낸 순간이, 에키가 바라하를 향해 ‘바라하 선배님, 저는 선배님을 좋아해요’라고 말하는 순간이었을 뿐이다.

그 말에 피가 식고 몸이 굳었다. 찰나에 온갖 생각과 감정이 휘몰아치다가, 그녀가 뒤이어 하는 말들에 그 모든 것이 희게 날아갔다.

〈제 마음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누구도 제게 그 사람보다 특별해질 수는 없어요.〉

〈저는 유리엔 단장님을 사랑해요.〉

어제 들었던 말도 아직 귓가에 맴돌고 있는데, 자극이 과했다.

바라하가 그녀에게 고백을 했다는 상황마저 잊혀졌다. 현재가 모조리 지워지고 이성이 마비되며 심장이 박동했다.

그는 서 있기 어려워서 나무에 기댔다. 주저앉지 않은 게 용한 상태였다.

숙이고 있던 그의 시야에 연한 분홍빛이 어른거렸다. 그가 준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에키네시아가 아래에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너무 가깝다.

잘 익은 포도알 같은 눈동자에 그가 비치고, 달콤한 향이 훅 끼쳐왔다. 그녀의 작은 얼굴 안에 당황과 혼란과 부끄러움이 뒤섞여 있었다.

하얀 목덜미, 레이스로 살짝 덮여 있는 쇄골의 선, 그런 것들이 눈에 확 들어왔다. 발긋한 입술이 움직였다.

“로드, 다…….”

조금 전에 그의 이름을 담고 감정을 발음했던, 입술이. 한 뼘밖에 되지 않는 거리에서, 지나치게…….

유리엔은 반사적으로 그녀의 어깨를 잡고 그녀를 밀어냈다. 거친 느낌은 아니었으나 급한 동작이었다. 그러곤 나무를 피해 뒤로 더 물러나려 했다.

에키가 엉겁결에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잡았다. 그녀의 손이 닿자마자 유리엔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하늘색 눈동자가 어지럽게 허공을 방황했다.

“왜 피하세요?”

“너무 가깝다.”

“네?”

“그대가, 너무 가까워서.”

“그게 무슨…….”

내가 미쳐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으니 조금만 물러나 줬으면 좋겠다. 유리엔은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하고 벌건 낯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에키는 얼떨떨하게 그를 보다가 천천히 잡고 있던 팔을 놓았다.

유리엔이 순식간에 거리를 벌렸다. 그래도 아예 멀어지진 않고 두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멈췄다. 그는 그 자리에서 흐트러진 호흡을 골랐다.

그녀가 황망히 물었다.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공녀님은요?”

“테라스에…… 같이, 있는 척을. 그녀가, 도와주었다.”

“도와주다뇨, 무엇을?”

“그대에게…… 가보라고…….”

유리엔이 더듬더듬 대꾸했다. 아무리 봐도 그는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가 제정신을 못 차리는 덕분에 에키는 상대적으로 침착해졌다.

“그러니까…… 공녀님이 도와주겠다고 하셔서, 같이 테라스에 있는 척을 하고 몰래 나오셨다는 건가요?”

“……그렇다.”

“저를 만나려고요?”

그가 양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다. 에키는 술렁이기 시작하는 속을 애써 가라앉히고 다시 물었다.

“다 들으셨어요?”

“……다는, 아닌 것 같다.”

“그럼 어디부터 들으신 거예요?”

“그대가 바라하를 거절하는 것부터 들었다.”

“……거기부터, 끝까지요? 제가 당신에 관해 한 말들, 다 들으신 건가요?”

“그…….”

말끝을 흐린 유리엔이 힘겹게 눈을 깜박였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에키는 멍하니 더 물었다간 울리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민망한 상황을 들키고 그에 대한 감정을 말한 것은 그녀인데, 말한 그녀보다 들은 그가 더 혼란에 빠진 모양새였다.

‘어제 내가 고백했을 때도 이랬을까.’

새빨갛게 달아오른 낯을 보고 있자니 열기가 전염되는 느낌이었다. 점점 어질어질해졌다.

고백에 답했어도 달라지는 게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무언가 변하고 있었다. 그녀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했다.

“저랑 로드 사이는 변하면 안 되잖아요.”

“……그게 무슨 뜻인가?”

“로드께선 약혼식을 준비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제가 대답을 드렸어도, 변하는 건 없어야…….”

“에키네시아.”

유리엔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는 말을 이으려다 잠시 멈추고, 손으로 제 얼굴을 몇 차례 문질렀다. 그리고 그녀에게로 한 걸음 다가왔다.

“그대가 내게 답을 주었을 때부터.”

얼굴의 열기는 약간 가라앉았지만,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이미 변했다.”

유리엔의 눈이 그녀와 마주쳤다. 에키는 그 말을 부정하려다가, 그 눈을 마주하며 입을 다물었다.

변했다. 많은 것이, 아니, 모든 것이 바뀔 것이다.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변화가 생겼다. 본능적인 깨달음과 함께 저릿한 감각이 손끝과 발끝부터 타고 올랐다.

유리엔이 그녀에게로 손을 뻗었다. 중간에 몇 차례 멈칫거리며, 조심스럽게 다가온 손이 그녀의 손을 받쳐 올렸다.

그가 허리를 숙이며 은발이 쏟아져내리는 것과, 눈부신 것을 보듯 반쯤 눈을 감는 광경이 눈앞에서 느리게 펼쳐졌다.

그는 장갑으로 덮인 그녀의 손등 위에 입술을 눌렀다. 서늘한 외양과 달리 델 듯이 뜨거운 감각이 얇은 레이스 너머로 닿았다.

“그대와 나의 관계는, 이미 변했으니.”

유리엔은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댄 채 말을 했다. 움직이는 감촉이 낱낱이 느껴졌다.

무엇으로 변했다는 건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깨달을 수 있었다. 사모한다고 말하고 사랑한다고 답한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는 명백했다.

“……앞으로도 계속 함께 변해갔으면 좋겠다. 이 삶의 끝까지.”

평생 함께하며 관계가 변해간다는 것. 스콰이어와 로드에서 연인. 그리고 반려. 부부. 그 뒤로도. 그 요청은 무거우면서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유리엔이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그러나 그의 손은 여전히 그녀의 손을 받치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드러낼 수 없으나…… 나는 그대를 길게 기다리도록 만들지 않겠다. 모든 것을 준비하겠다. 그대가 그저 선택하기만 하면 되도록.”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어 부드럽게 얽혔다. 그녀는 숨을 멈추었다.

“에키네시아.”

그가 허락을 구하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은발 뒤로 펼쳐진 밤 하늘에 별이 가득했다.

아득히 먼 곳에서 들리는 무도회의 음악 소리. 나뭇잎 냄새. 어렴풋한 등불의 빛. 얽힌 손. 닿은 체온.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 안에서 반짝이는 무언가. 떨리는 눈꺼풀.

삶의 끝까지 함께하자는 요청.

거절할 수가 없었다. 거절할 명분도 없었다. 거절하고 싶지도 않았다.

전신이 끓는 스프가 되어 누군가에게 휘저어지는 것 같다. 생각도, 판단도, 공포와 두려움도, 현재와 과거, 마음의 밑바닥에 남아 있던 죄책감까지도 모조리 휘저어지는 스프 속으로 녹아 들어갔다. 달콤한 맛이었다.

에키네시아는 손안에 놓인 것을 움켜쥐기로 했다. 과거를 두고 미래를 보았다.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지금은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입을 열었다.

“에키.”

자신의 손을 얽은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에키라고 부르세요, 로드.”

유리엔의 호흡이 찰나 멎었다. 짧은 정적 후에 그는 약간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도, 나를 이름으로 불러줬으면 좋겠다.”

“스콰이어가 멋대로 로드의 이름을 부르면 이상하게 여길 텐데요.”

에키가 웃음기 어린 어조로 대꾸했다. 순간적으로 유리엔은 위장 약혼이고 뭐고 전부 엎어버리고 싶어졌다. 그는 심호흡을 하고 속삭였다.

“다른 이들이 보지 않을 때만이라도.”

그녀는 자신을 보는 그의 눈에 기대감이 어린 것을 보았다. 조바심과 설렘이 뒤섞인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사랑스럽다. 자신보다 키가 큰 남자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어진다. 저도 모르게 평소보다 훨씬 보드라워진 목소리가 나왔다.

“로드, 로드의 애칭은 뭔가요?”

“……율.”

예상치 못한 질문에 유리엔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를 키웠던 유모와, 친구 디트리히, 그리고 스콰이어 시절 로드였던 바론에게만 들어본 애칭이었다.

그의 앞에서 에키네시아가 눈을 휘며 웃었다.

“그래요, 율.”

그녀의 혀끝에서 둥글게 구른 발음이 그의 귀로 파고들었다. 바로 앞에서 그녀가 지은 미소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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