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꽃-118화 (118/211)

검을 든 꽃 118화

파트너로 참석해 놓고 첫 춤을 거절할 순 없는 일이었다. 에키는 얼떨떨한 상태로 그의 손을 잡았다. 그들은 테라스를 빠져나가 연회장에 들어섰다. 두 번째 왈츠곡이 막 시작된 참이었다.

무도회가 개시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춤을 추었고 따로 마련된 테이블에서 뷔페를 맛보는 사람들, 잔을 들고 대화를 주고받는 사람들도 약간 있었다.

한쪽에서 익숙한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테레사에게 디트리히가 춤을 청하고 있었다. 그쪽을 보고 있던 에키의 손이 가볍게 당겨졌다.

“파트너를 봐야지, 에키.”

“아, 네.”

에키는 반사적으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한 손은 서로 맞잡고, 다른 손은 상대의 어깨에. 가장 대중적인 중부식 왈츠의 자세였다.

체격 차이가 꽤 났지만 에키는 능숙하게 그에게 맞추어 스텝을 밟았다. 음을 따라 움직이자 당황으로 굳어 있던 그녀의 몸이 조금씩 풀렸다.

“춤은 잘 모르지만…… 너, 꽤 잘 추는 것 같은데.”

“잘 추는 것 맞아요.”

음악에 맞춰 돌면서 바라하가 속삭이는 말에 에키가 대꾸했다. 바라하가 낮게 웃음을 흘렸다.

“이제 좀 자연스러워졌군. 내가 한 말이 그렇게 놀랄 소리였어?”

“……네, 좀 많이요. 전혀 티를 안 내셨잖아요.”

“티를 안 냈다니, 굉장히 억울해지는데. 난 티 많이 냈다.”

“하지만…….”

“못 알아챈 건 너지.”

“그, 저기, 대체 언제부터 그런, 음…….”

언제부터 반했던 거냐고 묻기에 민망했다. 에키가 뭘 묻는지 알아챈 바라하가 박자에 따라 그녀의 어깨를 당기며 답했다.

“네 탓이야. 결절에서 네가 너무 예뻤거든.”

“……결절이요?”

에키의 표정이 괴상해졌다. 비를 맞고 푹 젖었던 데다 치마는 찢어 버렸었고 바닥의 붉은 액체에 마물 피까지 뒤집어썼던 그때? 그녀의 표정을 본 바라하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유리엔은 타국의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그것을 보고 있었다. 보지 않으려 했는데 저절로 그녀를 발견해 버렸다.

입은 외교적 수사로 겉을 둘둘 두른 알맹이 없는 대화를 하면서, 눈은 중앙의 홀에 있는 에키네시아와 바라하에게 향했다.

연보랏빛에서 검푸른색으로 물드는 드레스 자락이 부드럽게 물결쳤다. 그가 그녀를 생각하며 주문했던 드레스는 그녀에게 몹시 잘 어울렸다.

상상했던 것보다 예뻤다. 눈을 떼기가 싫을 만큼.

그가 보기에 눈부시니 다른 사람들도 그녀를 아름답다고 여길 것이다. 그것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키지 않았다.

유리엔의 안에서 에키네시아는 찬사를 받아 마땅한 존재인 동시에 홀로 가지길 원하는 태양이었다.

지금, 그녀와 춤을 추고 있는 바라하도 그녀의 빛을 알아본 거겠지. 알아봤다면 매혹당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탐내는 것까지 내버려두고 싶진 않았다. 그녀가 그를 선택했으니 그녀를 탐낼 수 있는 것도 자신뿐이었다.

얇은 레이스로 덮인 가는 어깨에 짙은 갈색의 큰 손이 얹혀 있었다.

그 손을 잘라버리고 싶었다.

유리엔은 순간적으로 치솟는 제 감정에 놀라 그들로부터 눈을 떼었다. 아마 지금 정안을 떠서 제 혼을 보면, 새카맣고 짙은 악의가 넘실거리지 않을까.

[무도회에서 같이 춤을 추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알고 있잖느냐. 인간인 이상 생각하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휘둘리진 마라.]

그 악의를 예민하게 감지한 성검이 잔소리를 했다. 유리엔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

알고 있다. 무도회는 춤을 추라고 있는 곳이고, 바라하는 에키네시아를 가르친 선배니 춤 정도는 얼마든지 같이 출 수도 있었다.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 따로 노는 게 문제일 뿐이다.

그는 바라하가 에키네시아의 파트너로 참석한 것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바라하가 조금 전에 그녀에게 고백했다는 사실도 당연히 몰랐다. 알고 있었다면 지금보다 더 동요했을 것이다.

“유리엔 경, 표정이 굳었어요.”

내내 그의 곁에 서 있던 로잘린이 속삭였다. 유리엔은 딱딱하게 대꾸했다.

“내 표정은 원래 이렇다, 공녀.”

“아뇨, 평소보다 무서운데요. 진정하세요. 2황자 전하께서 이쪽을 보고 있어요.”

그는 눈을 돌려 2황자를 찾았다. 연회장 한쪽에 마련된 소파에 방만하게 기대앉은 2황자가 그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카르엠이 입꼬리를 즉 올려 웃었다. 유리엔은 예의상 고개를 까닥인 후에 카르엠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섰다. 로잘린이 작게 말했다.

“심정은 이해하지만, 로아즈 양 쪽은 되도록 보지 않는 게 좋겠어요. 적어도 연회가 끝날 때까지는.”

“……티가 나는가?”

“조금만 자세히 봐도 눈치챌 정도로요. 경, 은근히 질투가 심하신 편이군요.”

유리엔은 입을 다물었다. 시선을 주는 것. 그것을 형제에게 들키는 것. 악몽의 발단이 되었던 탄신 연회에서의 일이 생각났다.

설명할 수 없는 공포와 뚜렷한 증오가 솟아 이 자리에서 카르엠의 목을 베어버리고 싶었다.

그때와는 다르다. 많은 대비를 하고 있고, 에키네시아는 무력한 귀족 영애가 아니라 제니스다. 유리엔은 그 사실을 되새기며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로잘린은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나이가 많진 않아도 그녀는 공작의 눈을 피해 평민인 남편과 열애 끝에 결혼하고 딸까지 낳은 유부녀였다. 그녀의 눈에는 유리엔이나 에키네시아나 어설펐다. 첫사랑에 어쩔 줄 모르는 소년소녀와 별 차이가 없었다.

풀풀 티가 날 정도로 서로 좋아하면서 뭣들 하는 건지. 그들 사이에 있는 지워진 과거와 비밀들을 모르는 그녀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로잘린은 유리엔에게 가족들의 구출을 약속받았고, 얼마 전에 에키네시아로 인해 목숨을 건졌다. 자신이 그들에게 보답할 만한 것이 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원한 건 아니라지만 위장 약혼으로 인해 그들의 관계를 방해하는 꼴이 된 게 미안하기도 했다. 로잘린은 좀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결심했다.

“도와 드릴까요?”

“……?”

“경과 제가 테라스로 나가는 건 자연스럽겠죠. 약혼할 사이니까요.”

로잘린이 살짝 턱짓을 했다. 어느새 곡이 끝났다. 바라하와 에키네시아가 홀에서 정원으로 바로 이어진 계단으로 향하고 있었다. 유리엔은 함께 나가는 그들에게 못 박히려는 시선을 간신히 자제했다.

“전 테라스에서 쉬고 있을 테니, 다녀오세요. 경에게 테라스와 정원을 오가는 것 정도는 쉬운 일이잖아요?”

약혼녀라는 입장은 그들을 돕기에 꽤 유리한 위치였다. 로잘린은 생긋 웃으며 그의 팔에 손을 올렸다. 잠깐 침묵하던 유리엔은 그녀를 에스코트하여 테라스 쪽으로 향했다.

“고맙군.”

“천만에요.”

겉보기에는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다가 테라스로 향하는 연인이었다. 막 약혼을 공표한 사이다웠다. 정략 결혼인 걸 다들 알아도 겉으로는 다정해야 하는 법이다.

그들은 함께 테라스에 들어가 커튼을 내렸다. 커튼을 내리자마자 로잘린은 그에게서 물러나 테라스 한쪽에 있는 티테이블에 앉았다. 테라스를 찾는 손님들을 위해 간단한 간식 거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녀는 쿠키를 집어 들며 말했다.

“그럼 다녀오세요, 경.”

유리엔은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살짝 숙인 후 난간을 넘어 아래의 정원으로 뛰어내렸다. 하얀 뒷모습은 소리 없이 정원수들 사이로 사라졌다. 로잘린은 그를 바라보며 쿠키를 베어 물었다.

“……션, 당신이 보고 싶어지네요. 릴리는 건강하겠죠?”

허공에 작은 중얼거림이 흩어졌다. 유리엔의 정보원들이 그녀에게 들은 단서를 바탕으로 그녀의 가족이 감금된 곳을 찾는 중이었다. 곧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로잘린은 그 희망을 품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 * *

왈츠가 끝난 후 에키는 바라하와 함께 정원으로 나왔다.

춤을 추면서 침착해지자 그와 제대로 대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대화는 주위에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할 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연회장에는 1층을 거치지 않고 바로 정원과 연결되는 외부 계단이 있었다. 그 계단을 통해 정원에 도착했다.

연회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정원은 고즈넉했다. 곳곳에 걸려 있는 등이 은은하게 빛을 뿌렸다.

[으슥한 곳으로 가? 드디어 죽이려고?]

에키는 마검의 헛소리를 무시하고 미로를 이룬 높고 빽빽한 정원수들 사이로 걸었다.

길을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형식의 정원은 곳곳에 쉼터가 있기 마련이었다. 그들은 곧 작은 천사상과 벤치가 있는 공간에 도착했다.

바라하가 손수건을 펼쳐 벤치 위에 깔아주었다. 드레스 차림의 숙녀를 위한 매너였다.

벤치에 앉으려던 에키는 그것을 보고 멈칫했다. 그녀는 자리에 앉지 않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바라하 선배님.”

“응?”

웃는 얼굴로 그녀를 돌아본 바라하가 눈썹을 늘어뜨렸다. 그는 에키가 말을 잇기 전에 선수를 쳤다.

“말하지 마.”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 줄 알고요?”

“미안한 얼굴이니까.”

바라하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벤치에 앉았다. 그가 그녀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에키는 그가 깔아놓은 손수건을 한 번 더 내려다보고, 다시 그를 보았다.

벤치 뒤의 정원수에 걸려 있는 등 불에서 엷은 빛이 그에게로 쏟아지고 있었다. 선이 굵고 잘생긴 얼굴이었다. 근육으로 꽉 찬 몸은 위압적이지만 매력적이기도 했다.

그 결절에서 자신의 두려움을 감추고 그녀를 지켜 주겠다고 말한 사람이었다.

마검이라는 무거운 비밀을 알고도 빚을 진 건 자신이라며 입을 다물어 주었다. 바라하는 그 뒤로 그 비밀에 대해서 그녀에게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유리엔이 아니었다.

떨림도, 설렘도, 울 것 같은 기분도, 정신이 나가버릴 듯한 감정도, 이성을 녹여버리는 홍수도 일지 않았다. 그저 미안함과 약간의 부끄러움과 그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바람만이 차올랐다.

에키는 벤치에 앉는 대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바라하 선배님, 저는 선배님을 좋아해요. 선배님은 좋은 사람이에요.”

그녀가 입에 담은 ‘좋아해요’는 어제 유리엔에게 했던 말과는 확연히 달랐다. 열기 대신 미지근한 온기. 애정이 아닌 호감.

어떤 의미의 ‘좋아해요’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바라하는 뒷말을 짐작했다. 에키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니까, 저보다 더 좋은 분을 만나게 되실 거예요. 죄송해요.”

“이건 사과할 일이 아니야, 에키.”

쓴웃음을 지은 그가 말을 이었다.

“당장 내게 답해 달라는 뜻은 아니었는데. 네가 누구를 담고 있는지 안다고 했잖아. 나는 네 마음이 변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

에키는 그의 말에 기다려도 되겠느냐고 물어왔던 유리엔을 떠올렸다. 그에게는 기다리지 말라고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말할 수 있었고, 말해야 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기다리지 마세요.”

“글쎄. 앞날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이야.”

유리엔이 약혼 발표를 한 직후다. 바라하로서는 당연히 그녀의 감정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니 포기하지 못하는 거겠지. 그 사실을 굳이 들이대지는 않는 점이 바라하다웠다.

위장 약혼을 아는 사람은 최소한이어야 했다. 지금 진실을 아는 사람은 황태자, 디아상트 공녀, 유리엔, 그리고 그녀뿐이었다. 그것은 밝힐 수 없었다.

에키는 복잡한 기분으로 그를 보다가, 드레스 자락을 쥐고 오른발을 약간 뒤로 뺐다.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숙였다. 깔끔한 숙녀의 인사. 연분홍색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죄송합니다.”

허리를 폈다. 그녀는 그의 눈을 마주했다. 한 호흡을 고르고, 담담히 말했다.

“제 마음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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