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17화
연미복 차림의 바라하는 약간 낯설었다. 평소의 그가 들판에서 어슬렁거리는 맹수 같다면 지금은 양탄자에 앉아 있는 길들인 흑표범처럼 보였다.
“선배님.”
“어서와, 에…….”
그녀를 돌아보며 이름을 부르려던 바라하의 입이 벌어진 채 멈췄다. 노란 눈동자가 그녀에게 박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바라하 선배님?”
“아, 미안.”
바라하가 헛웃음을 흘리더니 그녀를 향해 매끄럽게 팔을 내밀었다. 그는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평소에도 예뻤는데, 오늘은 더 예쁘네. 반하겠는데.”
“칭찬 감사해요. 반하지는 마시고요.”
에키는 웃으며 그의 팔에 손을 올렸다. 연회장이 가까워서 마차를 타지 않고 걸어갈 예정이었다. 나란히 연회장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바라하가 물었다.
“반하면 안 돼?”
“안 돼요.”
“왜?”
그녀는 곧바로 답하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약간의 망설임 끝에, 에키는 작게 대답했다.
“……마음에 둔 사람이 있거든요.”
바라하 입장에서는 고백도 하기 전에 차인 꼴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가 마음에 둔 사람이 누구인지 이미 알아채고 있었고, 또 다른 것도 알고 있었다.
〈내일 연회 때 단장님과 디아상트 공녀의 약혼이 공표될 거다. 약혼식은 준비 기간을 넉넉하게 잡고 가을 쯤에 성대하게 하신다는군.〉
어젯밤에 그의 로드이자 부단장인 바론 틸리어스로부터 들은 말이었다. 바라하는 그 말이 믿기지가 않아 몇 번이나 되물었었다. 돌아온 말은 사실이라는 확언뿐이었다.
‘에키네시아를 마음에 둔 상태로 다른 여자와 약혼을 한다고. 그 단장님이?’
그럴 수 있다. 정략결혼이란 그런 거니까. 자세히는 몰라도 단장의 정치적 입지가 복잡하다는 건 대충 알고 있었다.
공적인 일을 처리할 때 유리엔이 사적인 감정에 흔들리는 걸 본 적이 없으니 결혼 또한 ‘공적인 일’로 진행하는 걸지도 모른다.
어쨌든 오늘 유리엔 단장은 디아상트 공녀와의 약혼을 공표할 거고, 그렇게 되면 마음이 어떻건 간에 그는 공녀에게 충실할 터다. 단장은 그런 사람이고, 성검의 주인이니까.
그러므로 에키네시아가 지금 품고 있는 마음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다. 바라하는 그렇게 판단했다. 그는 저보다 한참 아래에 있는 그녀를 씁쓸하게 내려다보았다.
‘오늘 연회에서 있을 발표를 알고 있을까.’
“……누군지 몰라도 운 좋은 사람이군. 걱정 마, 안 반했어. 그리고 너는 나한테 반해도 돼. 나는 마음에 둔 사람이 없거든.”
“전 있다니까요?”
“마음이란 건 바뀔 수도 있는 거잖아.”
바라하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마음이니 기다리면 된다.
약혼 발표를 들으면 그녀는 분명히 슬퍼하겠지만, 자신이 위로해 줄 테니까. 슬플 때 곁에 있어준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건 흔한 일이다.
‘그나저나 단장님은 결국 약혼할 거면서 에키에게 여지를 준 건가. 너무하는군.’
그는 연회가 아니었다면 아메시스트가 걸려 있었을 에키네시아의 허리를 슬쩍 노려보았다. 그의 안에서 유리엔에 대한 평가가 급격히 하락했다.
* * *
태양 축제 마지막 날의 연회는 축제를 마무리하는 이벤트였다. 보통 참석하는 것은 창천의 기사와 준기사, 단원들, 그들의 파트너나 가족, 아젠카의 고위층과 타국에서 방문한 소수의 귀족들 정도다.
그러나 이번 연회는 참석자들의 수도, 지위도 급이 달랐다.
거의 모든 국가의 고위 귀족들이 한둘씩은 참석했다. 명목은 그저 연회를 즐기러 온 귀빈이지만 실상은 각국 대사들이나 다름없었다.
성녀 때문이었다. 모든 병과 부상을 완벽하게 치료할 수 있는 엘기오사 오너. 엘기오사가 오랜 기간 동안 행방불명이었기에 성녀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샤이는 연회의 시작과 동시에 테레사와 함께 등장했다.
꽃잎 같은 귀여운 흰 드레스 차림의 소녀는 금실로 수놓은 진녹색 천으로 만든 서부식 드레스를 입은 샤프롱의 손을 잡고 나타났다. 한 걸음 뒤에서 수석 신관 아론이 신관복 차림으로 따르고 있었다.
샤이가 입장한 후 곧바로 아젠카의 군주가 입장했다. 유리엔은 푸른 망토까지 갖춘 예복을 입고 붉은 머리카락의 여자를 에스코트하고 있었다. 로잘린 디아상트였다.
창천기사단장이, 제국의 3황자가 디아상트 공녀와 함께 입장했다. 일순 연회장 안이 술렁였다.
바라하는 옆에 있는 에키네시아를 흘깃 살폈다. 놀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의외로 담담한 얼굴이었다.
홀의 끝에 있는 단에 올라선 유리엔이 샤이를 소개했다. 소녀가 드레스 자락을 쥐고 무릎을 굽히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다음으로 간단한 축사가 이어졌다. 유리엔은 원래 길게 연설하는 편이 아니었기에 축사는 몇 마디 되지 않았다.
이어 유리엔이 한 계단 내려서고 부기사단장 바론이 단 위에 올라섰다. 그는 축제에 관한 몇 가지 기록들을 짧게 낭독하고, 창천기사단이 앞으로 진행할 일들을 공지했다.
가장 중요한 말은 그 끝에 나왔다.
“다가오는 가을, 오늘로부터 3개월 후인 9월 22일에, 창천기사단장 유리엔 드 하르덴 키리에 경과 로잘린 디아상트 공작 영애의 약혼식이 있을 예정입니다. 정식 초대장이 이번 달 안에 발송될 테니 많은 참석 바랍니다.”
3개월. 결혼식도 아니고 약혼식을 예비하는 기간으로는 상당히 길었다.
유리엔이 한계까지 늘려 잡은 기간이었다. 되도록이면 약혼식 날이 오기 전에 모든 일을 끝낼 작정으로.
연회장 안에서 창천기사단장이 공녀와 함께 입장할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술렁임이 일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나란히 서 있는 창천기사단장과 공녀를 향해 쏠렸다.
로잘린이 드레스 자락을 쥐고 예를 취하자 유리엔이 그녀의 손을 잡고 손등에 가볍게 입술을 댔다. 약혼에 대한 확언이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이건 엄청난 소식이로군. 3황자가 디아상트와…….”
“그럼 제국의 정세는…….”
“창천기사단장이 약혼을…….”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이미 다 계획되었던 일이고, 들었던 일이었다. 그런데도 에키는 그 모습을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반들거리는 대리석 바닥을 보았다. 바닥에 비친 자신의 표정이 깊게 가라앉아 있어서, 에키는 얼른 표정을 가다듬었다.
유리엔은 일부러 사람들 쪽에 시선을 두지 않았다. 그쪽을 보기만 해도 자신은 에키네시아를 찾아낼 테니까. 아무리 가짜라지만 다른 여자와 약혼을 공표하는 모습을 보이고서 그녀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음악이 시작되었다. 넓게 비워진 홀에서 첫 춤을 추는 것은 성녀 샤이와 신관 아론, 그리고 유리엔과 로잘린이었다. 하얀 남자와 붉은 여자는 꽤 잘 어울렸다.
바로 어젯밤에 그에게 답했는데, 누구에게도 그것을 알릴 수가 없다.
다 알고 있다. 알고 있고, 각오도 했었다. 이런 문제로 그를 의심하지도 않고, 로잘린이 가엾다고도 생각했다.
그럼에도 무언가 무거운 것이 속을 깊게 파고들었다. 그건 통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선배님, 저 잠시만요.”
그래서 에키는 바라하에게 속삭이고 물러났다. 춤추는 것까지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첫 번째 곡이 끝나고 나서 본격적으로 무도회가 시작될 때 돌아오면 될 터였다.
그녀는 그대로 테라스로 나가 사람이 있다는 표시로 커튼을 닫았다. 짙은 자주색의 커튼을 당겨 닫자마자 커다란 손이 그것을 밀고 들어왔다. 바라하가 성큼 테라스로 들어섰다.
“잠시 바람만 쐬고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따라오실 필요는…….”
“당연히 따라와야지, 여기선.”
“네? 왜요?”
바라하는 대답 없이 손에 들고 있던 것을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를 뒤따라오며 시종에게서 받아 든 와인 잔이었다.
에키는 멍하니 그것을 보다가 사양하지 않고 받아 들었다. 술은 잘 즐기지 않지만, 복잡한 심정일 때 술이 유용하다는 건 잘 안다.
그녀는 테라스의 난간에 기댄 채 와인을 홀짝였다. 연회용이라 그리 도수가 높진 않았다. 바라하는 그녀로부터 약간 떨어진 곳에 기대서 제 몫의 잔을 기울였다.
닫힌 커튼 너머에서 연회장의 음악이 들려왔다. 왈츠였다. 샤이는 잘 추고 있겠지. 에키는 일부러 샤이의 춤만 생각했다.
“에키.”
바라하가 문득 그녀를 불렀다. 불러놓고서 그는 한동안 침묵했다. 제 잔을 완전히 비운 후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
“너, 단장님 좋아하지?”
에키는 사레가 들려 요란하게 기침을 했다. 바라하가 다가와 그녀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그녀는 간신히 기침을 멈추고 급하게 부정했다.
“으, 아, 아니에요! 아까 말한 건 다른 사람이에요!”
“너 연애해 본 적 없지? 누구 좋아하게 된 것도 처음이고.”
“…….”
“적나라하게 티 납니다, 후배님.”
키득거리며 말한 그가 웃음을 그치고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노란 눈동자가 깊은 빛을 품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굉장히 많은데, 천천히 말할게.”
바라하는 말하면서 에키네시아를 찬찬히 살폈다. 예상보다는 충격이 덜해 보였다.
혹시 그녀도 단장의 약혼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던 걸까. 그렇다면 무슨 심정으로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고 말했던 걸까.
그는 평소보다 한층 낮아서 진중하게 들리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너한테 파트너 신청할 때, 다른 생도에게 부탁했다간 오해를 살까 봐 너한테 부탁한다고 했었지.”
에키네시아가 거절할 것 같아서,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더 친해지고 더 익숙해지면 그때 제 마음을 알릴 계획이었다. 아무리 봐도 그녀는 이런 일에 서툴러 보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알려야 할 때다. 그는 그렇게 판단했다.
“그거, 네가 생각하는 건 오해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게 무슨…….”
“그리고 미안. 아까 오는 길에 거짓말을 했다. 뭐가 거짓말일 것 같아?”
에키는 당황한 상태로 그가 했던 말들을 되짚어 보았다. 이거, 설마. 설마, 정말로?
떠오른 것은 있는데 믿기지가 않았다. 그걸 차마 입밖에 낼 수가 없어서 그녀는 황망하게 눈만 깜박였다. 바라하는 길게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빙긋 웃으며 답을 내어놓았다.
“사실 너한테 반한 지 좀 됐거든. 그래서 반하지 말라는 말은 못 지키겠다.”
에키는 손에서 미끄러지는 와인 잔을 간신히 움켜쥐었다. 손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투명한 잔 안에서 얼마 남지 않은 붉은 액체가 그녀의 머릿속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어, 주인아, 지금 이 커다란 놈도 네가 좋다는 거지? 근데 넌 랑기오사 오너가 좋댔잖아. 그럼 얜 필요 없으니까 죽이자! 마침 볼 사람도 없으니 여기서 죽이면 되겠네!]
마검이 천진난만하게 망언을 했다. 익숙한 헛소리를 들으니 약간 정신이 들었다.
그러니까 지금, 바라하 이슬라프가 자신에게 고백을 했다.
고백이라니. 그녀는 바라하를 그런 상대로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누구든 그녀의 마음에 유리엔보다 더 깊게 흔적을 남기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
에키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선배님, 죄송하지만 저는…….”
“알아. 네가 단장님을 좋아하는 것도 알고.”
바라하는 에키의 손에 위태롭게 잡혀 있는 와인 잔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조금 남겨둔 와인을 한 번에 마셔버렸다. 빈 잔 두 개를 한 손에 든 채 그가 말했다.
“알고 하는 말이야. 너한테 다른 선택지도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서.”
바라하는 에키네시아에게 단장과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굳이 강조하진 않았다. 방금 좋아하는 남자의 약혼 공표를 들은 여자에게 그러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 상황에서 물러날 정도로 신사도 아니긴 하지.’
첫 왈츠가 끝나가고 있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무도회가 시작된다. 바라하는 얼이 빠진 에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파트너와 함께 연회에 온 건 처음이지만, 첫 곡은 함께 추는 게 관습인 건 안다. 갈까, 에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