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16화
기숙사에 돌아온 에키는 그대로 침대에 엎드렸다. 차가운 시트에 달아오른 얼굴을 묻자 약간 진정이 되는 듯했다.
앨리스가 오늘도 가족과 함께 여관에서 자기로 해서 정말 다행이었다. 티를 내지 않는 게 불가능했을 테니까.
그녀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말해 버렸어…….”
그에게 말해 버렸다. 충동이었으나, 어느 정도는 예견된 결과였다. 계속, 계속 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자꾸만 속에서 하지 못한 말들이 덜걱거리고 있었으므로.
그의 마음에 대답했다. 그녀의 마음을 드러냈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부끄러워서 그의 반응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도망쳤는데.
‘기뻐했을까?’
어떻게 반응했을까. 보지 못한 게 문득 아쉬워졌다. 에키는 눈 앞으로 흘러내린 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감았다 풀었다 하며 보지 못한 그의 표정을 상상해 보았다.
웃었을까. 당황했을까. 뺨이 다시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주인아, 너 걔한테 좋아한다고 했잖아? 걔도 너 좋아한다고 했었고. 그럼 너 이제 걔랑 결혼해? 걔랑 애기 낳는 거야? 언제 낳을 건데?]
마검이 천진하게 물었다. 슬금슬금 피어오르던 홍조가 그 말에 온 몸을 화끈하게 물들였다. 에키는 폭발할 것같이 빨개져서 오른손바닥을 내려다보다가, 마검을 뽑아냈다.
[어? 왜? 뭐 하게? 누구 죽이러 가?]
그녀는 마검을 침대에 고이 내려놓고 손에 마나를 모았다. 보랏빛이 일렁이자 바르데르기오사가 기겁했다.
[으악, 뭐야! 왜! 내가 뭘 했다고! 악! 악! 따가워! 잘못했어! 뭔지 몰라도 잘못했어!]
에키는 마검을 몇 대 쥐어박은 후 징징거리는 녀석을 침대 구석에 팽개쳐 놓았다. 홀로 있는 이럴 때만이라도 잠깐 마검과 떨어져 있고 싶었다.
문양 안에 있을 경우 바르데르기오사는 그녀와 감각을 공유하지만, 이렇게 뽑아서 손에서 떨어뜨려 두면 감각을 분리할 수 있었다.
물론 분리한다고 해도 손바닥의 문양을 통해 연결되어 있으므로, 기오사 오너는 언제든 제 기오사의 위치를 감지할 수 있었다.
기오사와 연결이 깊어질 경우 분리해 둔 기오사를 문양으로 불러들이는 것도 가능했다. 기오사의 자아를 각성시키기까지 한 에키에게는 그것도 쉬운 일이었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드레스를 정리해 넣다 보니 그가 준 드레스가 걸려 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가만히 섬세한 레이스를 쓸어보았다.
‘이걸 입고 그와 춤추진 못하겠지.’
내일 연회에서 유리엔은 디아상트 공녀와 함께해야 하므로, 그와 춤추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고 보니…… 그에게 답해 줬다고 해서, 뭔가 달라질 일은 없겠구나. 달라져서도 안 되고. 위장 약혼이 끝날 때까지는 그저 스콰이어와 로드일 뿐이어야 하니까.’
로잘린의 사정을 직접 들었으니 그와 공녀 사이를 의심하진 않는다. 그 약혼이 가짜인 것도 잘 알고 있다.
애초에 유리엔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그녀의 마음을 드러낼 일이 생길 줄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렇게 되고 보니, 그들 사이의 관계가 당분간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점이 서운하게 느껴졌다. 한 번 흘러나온 욕심은 되돌리는 게 불가능했다.
‘그가 약혼식을 하는 것도 보게 되겠네.’
그리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었다. 그가 다른 사람의 곁에 있는 모습은.
가슴 안쪽이 일렁거리다 가라앉았다. 위장이고, 어쩔 수 없는 일이며, 로잘린의 사정까지 알면서도, 그래도 감정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드레스를 만지작거리던 에키는 불현듯 내일 연회의 파트너에 대해 떠올렸다. 자신이 그렇듯이, 유리엔 역시 그녀 곁에 바라하가 서 있는 것을 싫어할까?
그는 사교계를 잘 알 테니 이런 자리에서 파트너가 그렇게까지 큰 의미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알 터다. 그에게 대답을 했으니 바라하와 그녀 사이를 착각할 리도 없고.
게다가 그녀는 그가 보낸 드레스를 입고 갈 예정이었다. 선물로 받은 검을 차고 다니는 것과 선물로 받은 드레스를 입고 연회에 참석한다는 건 꽤나 다른 의미였다.
‘그가 보낸 게 아니었다면 받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 드레스가 유리엔이 보낸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같이 상자를 열어본 앨리스를 제외하면 유리엔뿐이니, 그만이 알아챌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 고결하고 순한 남자가 누군가를 질투하는 것 자체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질투하는 유리엔이라니.
‘바라하 선배도 별 뜻 없는 파트너라고, 오해하지 말라고까지 했으니 까…….’
괜찮겠지. 그녀는 그렇게 판단하고 옷장의 문을 닫았다.
[쳇. 쳇. 이번엔 죽이자는 말도 안 했는데. 치이.]
“시끄러워, 발. 잠이나 자.”
잠옷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던져놓았던 마검에 손을 뻗었다. 인간의 악의로 만들어진 새까만 손잡이에 손이 닿기 직전, 그녀는 멈칫했다.
마검 바르데르기오사. 그녀를 지옥으로 떨어뜨린 검. 그를 죽인 검. 회귀 이전의 기억을 유지하기 위해, 버릴 수 없는 검.
‘유리엔은 마검에 대해서 정말 알고 있는 걸까? 그에게 말해도 될까?’
겁이 난다. 만에 하나라도, 전부 그녀의 착각일 뿐 유리엔이 그녀가 마검의 주인임을 모르고 있다면, 말하는 순간 모든 게 어그러질지도 모른다.
분명히 자신은 그가 알고 있는 것 같아서, 모든 것을 알고도 그녀를 용납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그에게 마음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정작 고백하고 나니 도로 두려워졌다. 얻었다가 다시 잃으면 견디지 못할 테니까. 아이러니했다.
유리엔의 목에 있는 붕대가 떠올랐다. 그 아래에 있는 것을 보고 싶었다.
그게 마검에 의한 상처라면, 그가 알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으므로. 정신을 잃었을 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정말로 내가 그를 다치게 만든 거라면…….’
에키는 어지러운 눈으로 마검을 바라보다가 그것을 집어넣었다.
* * *
6월 22일, 축제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낮에는 대신전에서 제례가 있었다. 새 태양을 맞이하며 신에게 올리는 제례로, 일반인들에게도 공개된 의식이었다.
제례의 중간에 거대한 그릇에 물을 부어놓고 태양을 뜻하는 금가루를 뿌려 넣으며 축복하는 과정이 있었다. 축복한 물은 제례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이마와 양손등에 적시고 돌아가게 된다.
본래는 수석 신관 중에서 하나가 하는 일이지만, 이번에는 샤이가 성녀로서 그 역할을 맡게 되었다.
축복 이후 사람들이 축복의 물을 적실 때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환자를 치료하게 되어 있었다. 사열식은 기오사 오너로서였으니, 성녀로서는 처음 행하는 일이었다.
성녀를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샤이는 잔뜩 긴장한 기색이었지만 훌륭히 제 역할을 해냈다.
엘기오사를 꽂아 넣는 성녀의 치료 과정을 처음 본 사람들은 당황했지만, 모든 것이 말끔히 낫는 기적을 보자 금세 찬양이 쏟아졌다.
“좀 더 크고, 연습을 해서 많은 사람을 치료할 수 있게 되면, 순례라는 것도 떠나보고 싶어요.”
제례 후에 만난 샤이는 에키에게 벅차오른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치유검의 주인들은 모두 예외 없이 순례를 다녔다고 한다. 엘기오사의 오너가 될 정도로 선한 자들에게 치유라는 선한 힘이 주어지면 쓰고 싶어서 좀이 쑤시는 상태가 된다더니, 샤이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내버려두면 끝없이 베풀기만 할 테니 항상 곁에서 보조하고 지키며 적절히 자제하게 할 사람이 필요했다. 에키는 샤이 뒤에 시립해 있는 수석 신관 아론을 흘깃 보았다. 아론은 걱정할 필요 없다는 듯 엷게 웃었다.
아론이 성녀의 지킴이가 되고, 창천이 성녀의 방패가 될 것이다.
죽을 운명이었던 소녀는 이제 수많은 사람을 살리게 된다. 에키는 묘하게 뭉클해져서 샤이를 안아주었다.
“샤이, 언제든 내 도움이 필요하면 부르렴. 비밀이지만, 언니는 정말 정말 강하거든.”
에키가 귓가에 속삭이자 샤이는 눈을 휘며 웃었다.
“언니도 언제든 아프면 저를 부르셔야 돼요. 저도 언니를 도울 테니까요.”
* * *
란셀리드는 제례를 본 후에 로아즈 영지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에키는 동생을 배웅하기 위해 역까지 나가기로 했다.
니콜은 아젠카 내성의 성문까지만 따라 나왔다. 그녀는 몹시 피곤한 안색이었다. 란셀리드가 인사를 하다 말고 혀를 차며 말했다.
“니콜 누나, 눈 밑에 기미가 굉장한데.”
“호위란 건 원래 남들이 놀 때가 제일 바빠. 외부인이 많아지니까.”
“누나도 건강 좀 챙겨가면서 해.”
잔소리를 하는 소년의 머리를 니콜이 마구잡이로 쓰다듬었다.
“다 컸네, 란셀. 걱정도 할 줄 알고. 에키도 철들더니 요즘 둘 다 철 드는 시기니?”
“애 취급 하지 마!”
란셀리드가 툴툴거리며 니콜을 밀어냈다. 니콜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니콜과 인사를 나눈 후 마차를 타고 역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소년은 앳된 얼굴에 제법 심각한 표정을 띤 채로 자꾸만 에키를 흘깃거렸다. 참다못한 에키가 결국 입을 열었다.
“란셀, 할 말이 있으면 지금 해.”
“……누님,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거 알면서도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요…….”
“뭔데?”
“단장님이랑 누님 무슨 사이예요?”
[애기 낳을 사이……. 아! 아! 아파! 이씨, 맞는 말이잖아!]
에키는 오른손을 꽉 움켜쥔 상태로 최선을 다해 태연한 표정을 만들어냈다.
“서약을 한 스콰이어와 로드 사이지. 그건 왜?”
“……그럼 다른 거. 누님, 뭐 숨기는 거 있죠? 위험한 비밀 임무 같은 거라도 하고 있어요?”
“그런 거 없어. 난데없이 왜 이래? 누가 뭐라고 했어?”
란셀리드는 미묘한 낯으로 누나를 바라보았다.
혼자서 돌아다니는 동안 이것저것 많이 주워들었다. 니콜에게도 약간 이야기를 들었다.
사관학교의 ‘레이디’이자 창천기사단장의 스콰이어인 에키네시아 로아즈는 불과 몇 달 만에 유명인이 되어 있었다.
천재, 괴물, 괴짜, 그리고 그 유리엔의 스콰이어답다는 평을 듣고 있는 행적들.
입학 첫날의 결투부터, 신입생 순위전, 마물 토벌, 사관학교 클럽, 성녀 구출에, 공녀 암살을 막아낸 이야기까지.
그 이야기 속의 에키네시아는 란셀리드가 알던 그녀와는 꽤 달랐다. 소년이 기억하고 있던 누나는 까탈스럽고, 게으르고, 딱히 특기랄 게 없고 취미는 장신구와 드레스 쇼핑인, 그런 평범한 백작가의 딸이었다.
굳이 칭찬을 해보자면 춤을 잘 추는 편이고 예쁘장한 외모라는 정도. 강하게 나가면 절대 고집을 안 굽히는데 은근히 여려서 조금만 약한 척 해도 금방 넘어온다는 건 장점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어쨌든 란셀리드에게 에키네시아 로아즈는 누나였다. 스스로는 신경질 많고 고집도 세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다른 사람이 욕하면 가서 주먹을 날려줄, 그런 평범한 누나.
그래서 구름 위의 존재들이라고 생각하던 아젠카의 사관생도들에게 ‘너희 누나는 차원이 달라’라는 소리를 듣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란셀리드는 누님이 왜 저렇게 변했는지 니콜에게 물어봤었다. 그녀는 애매하게 웃으며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라고만 했다.
고작 3개월 남짓인데,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거기다 창천기사단장님이 이런 마도구를 주는 건 대체…….’
란셀리드는 가슴팍에 넣어둔 벨벳 케이스를 만지작거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 캐묻고 싶은 건 많았다. 하지만 소년은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성검의 주인이 자신의 스콰이어인 누나에게도 비밀로 하고 직접 맡긴 물건이다. 불안하고 의아하면서도, 극비 임무를 받은 창천의 일원이라도 된 것처럼 가슴 한구석이 두근거렸다.
부탁받은 지 하루 만에 입을 열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의 누나는 말하지 않기로 결심한 일을 한두 번 더 캐묻는다고 말해 줄 사람도 아니었다.
“……아뇨, 됐어요. 몸 조심해요. 더 마르지 말고요. 안 그래도 부모님 걱정 많으신데 속 썩일 일 없게 하시고.”
“누가 할 소릴. 너나 잘해.”
란셀리드는 빙긋 웃고는 열차에 올랐다. 열차는 곧 역을 빠져나갔다.
* * *
태양 축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연회는 해가 진 이후에 시작되었다. 연회 장소는 기사단 본부에 있는 홀이었다.
에키는 늦은 오후부터 연회에 참석할 준비를 했다. 앨리스도 함께 치장을 하면서 서로를 도와주었다.
앨리스가 보고 있는 탓에 마나를 써가며 치장할 수가 없어서 에키로서는 평소보다 좀 더 오래 걸렸다. 그래도 같이 도와가며 꾸미는 건 즐거웠다.
상체부터 골반 즈음까지는 달라붙고 그 아래로는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연하늘빛 서부식 드레스는 앨리스에게 딱 맞았다.
에키는 그녀의 짧은 금발에 가발을 붙이는 대신 화려한 진주 핀으로 장식하고, 늘씬하게 드러난 목에도 섬세한 진주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앨리스 역시 에키가 드레스를 입는 것을 도왔다. 다이아몬드와 자수정이 엮인 레이스 핀, 물방울 모양 자수정을 중심으로 세공된 은귀걸이와 목걸이는 에키의 드레스와 잘 어울렸다.
준비를 마친 후에 그들은 나란히 방을 나왔다. 앨리스는 에키가 바라하와 함께 연회에 간다는 말에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단장님께서 허락하신 겁니까?”
“이건 로드께 허락받을 일이 아니지 않아요?”
“그저 로드와 스콰이어라면 그렇겠지만요…….”
앨리스가 말끝을 흐렸다. 에키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자신은 지금 유리엔이 보낸 드레스를 입고 있었으니까. 아래로 갈수록 검푸른빛이 도는 연보라색 드레스에, 함께 왔던 레이스 장갑과 구두까지.
“로드와 스콰이어죠. 다른 건 없어요.”
에키는 밖으로 향하며 태연하게 답했다. 앨리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더 이상 무어라 말하지는 않았다.
란셀리드에 이어 앨리스까지 속이는 것 같아 꽤 미안했다. 그래도 유리엔의 약혼이 위장이라는 건 절대 들켜서는 안 되는 일이므로 어쩔 수가 없었다.
바라하는 여자기숙사 근처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앨리스는 위즈덤 클럽원들에게 합류했고, 에키는 혼자서 그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