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15화
불꽃놀이가 마무리되며 야간 퍼레이드가 끝났다.
에키는 유리엔과 함께 샤이를 저택으로 데려다 주었다. 소녀가 잠든 침실의 창문을 닫고 돌아서자 어둑한 정원에 그와 그녀만이 남았다.
유리엔은 말없이 대신전 바깥으로 향했다. 에키 역시 입을 다물고 그와 나란히 걸었다.
아직 완연한 여름이 아니어서 선선한 밤바람이 피부에 와 닿았다. 희게 떠오른 달이 지상에 흐릿한 빛을 떨궜다.
그 흐린 빛만으로도 그녀에게는 너무 밝았다. 옆에서 걷고 있는 유리엔의 모습이 지나치게 뚜렷하게 보였다.
그녀는 문득 그가 자신과 비슷한 보폭으로 걷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보다 큰 키인 만큼 자연스럽게 걸으면 훨씬 보폭이 클 텐데, 그는 처음부터 보폭을 그녀에게 맞추고 있었다.
담담한 얼굴을 하고서 그녀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뜻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의 비밀을 모른 척하듯이.
에키는 바로 옆에 있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달빛 속에서 올려다보는 그는 비현실적일 정도로 아름답게 보였다. 순은으로 정교하게 빚어낸 세공품처럼.
이렇게 보면 차갑게만 보이는데, 그녀를 대할 때는 늘 따뜻하고 부드럽다.
가슴 안쪽에서 심장이 굴러다니는 것 같아 시선을 약간 내렸다. 단정하게 채워진 제복의 목깃이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그 아래에 붕대를 감고 있을까.
“로드.”
작은 부름에 유리엔이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에게 와 닿는 시선이 너무 물러서 조금 걱정될 정도였다.
무르고 순한 사람이라서, 그녀가 만들어낸 악몽을 고스란히 기억하면서도 그녀를 사랑할 수 있는 걸까. 이렇게 물러서야 손해만 보고 사는 것 아닐까.
랑기오사가 알았다간 있지도 않은 뒷목을 잡을 만한 생각을 하면서, 에키는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목에 입었던 부상은 다 나으셨나요?”
“……순조롭게 낫는 중이다. 신경 쓰지 마라.”
실은 여전히 손자국 모양의 시커먼 멍이 남아 있었다. 워낙 심한 멍이라 꾸준히 연고를 발라도 잘 낫지 않았다. 그래도 마스터인 그는 보통 사람보다는 훨씬 빠르게 나을 것이다.
‘다음주쯤이면 붕대를 감고 다닐 필요가 없겠지.’
그렇게 판단하면서 묘한 아쉬움이 들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그에게 남긴 흔적이 사라지는 느낌이라서. 제 스스로 생각해도 비정상이라 유리엔은 애써 다른 생각을 했다.
이를테면, 그를 올려다보는 에키네시아의 모습이 지나치게 유혹적이라는 생각을. 밤이라서인지 낮에 볼 때와는 묘하게 분위기가 달랐다.
좀 더 희고, 여리고, 그리고…… 이쪽도 별로 정상적인 생각은 아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평생 금욕적으로 살아온 부작용이 한 번에 몰려오는 걸지도 몰랐다. 이대로 보고 있다간 아까처럼 또 손을 댈 것 같아서 유리엔은 억지로 눈을 떼어 앞으로 향했다.
대신전에서 기사단 쪽으로 이어지는 많은 길들 중에 굳이 이 길을 고른 건 한적하고 빙 돌아가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일부러 긴 길을 골랐다. 유리엔보다 창천에 익숙하지 못한 에키네시아는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길게 돌아가고 싶었다. 그저 나란히 걷는 것뿐이었지만 그냥 좋았다.
발자국 소리 외에는 고요했다. 먼 곳에서 밤을 새며 달리는 소란한 축제의 소음이 들렸다. 에키네시아가 그 고요를 깼다.
“로드, 부상을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유리엔은 확연히 당황해서 걸음을 멈추었다. 에키는 그를 따라 멈춰 서서 떨리는 손을 드레스 자락에 감추고 다시 요구했다.
“목에 있는 부상을, 제게 보여 주셨으면 좋겠어요.”
유리엔을 향하는 그녀의 눈동자가 선명했다. 복잡한 감정이 뚝뚝 묻어나는데도 그 눈은 흔들림 없이 그를 담고 있었다. 그는 숨을 멈추었다. 그녀가 재차 묻는다.
“보여주실 수 있나요?”
눈치를, 챈 건가? 역시 붕대를 감추지 못한 게 실수였다. 어디까지 눈치챘을까. 마검이 무언가 알아차리고 그녀에게 알려주었을까.
이것을 보여주면, 그녀가 마검의 주인임을 그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 그들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그녀가 마검을 쥐게 된 원인이 그였음을 밝히게 되는 건가.
그것을 생각하는 순간, 유리엔은 마스터임을 들켰을 때 그녀가 공포에 젖어 달아나고 싶어 했던 심정을 거의 완벽하게 이해했다.
달아나고 싶어졌다.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그에게 마음을 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망가질까 봐.
이제 그는 그녀를 포기할 수 없게 되어 버렸는데, 이 상태에서 그녀가 그를 증오하게 되면, 자신이 어떻게 될지 상상이 가지 않아서.
그녀를 위해 숨기긴 무슨. 처음에는 그랬을지 모르나, 이젠 그가 겁이 나서 숨기고 싶어졌을 뿐이다. 유리엔은 제 추한 속내를 비웃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목 근처를 가렸다.
“……그건 좀, 힘들겠군. 보기 좋은 것도 아니니.”
“큰 부상이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역시 많이 다치셨던 건가요?”
“아니, 별것 아니다. 그저…….”
그가 눈을 내리깔았다. 에키는 그의 긴 속눈썹이 긴장으로 파르르 떠는 것을 지켜보았다. 무언가 두려워하는 느낌이었다.
관심을 가지고 보아서 그런지 그의 표정이 점점 잘 읽혔다. 어쩌면 그가 그녀 앞에서 갈수록 더 무방비해져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머뭇거리던 그가 손끝으로 목깃을 추어올리며 겨우 뒷말을 내어놓았다.
“그대가 보기에 흉할 테니까.”
“상처를 보는 건 익숙해요. 그러니 보여주세요, 로드.”
그녀는 귀족 아가씨답게 차려입고 다닌다고 해서, 귀하게만 자란 아가씨들처럼 상처를 보고 놀라지는 않는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그러나 유리엔은 그 행간에서 다른 것을 읽어냈다.
당연히 그녀는 상처에 익숙했다. 보는 것에도, 상처를 입는 것에도. 유리엔 자신보다도 그녀가 더 부상에 익숙할 것이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깨달음이었다. 앞으로는 조금도 다칠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는 목깃을 쥔 채 약간 물러났다.
“보여주고 싶지가 않다. 미안하군.”
“……아뇨, 제가 무례했습니다. 죄송해요, 로드.”
에키는 유리엔이 절대 스스로는 그의 상처를 보여주지 않으리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녀가 포기한 듯 보이자 유리엔이 목깃을 쥔 손을 놓으며 가만 고개를 저었다.
“사과할 일은 아니다, 에키네시아.”
그들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세월을 먹은 돌길은 반들반들했고 양옆에 심어진 이팝나무는 하얀 꽃들을 눈이 내린 것처럼 이고 있었다. 은은한 향이 사람 대신 길을 채웠다. 그와 그녀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기사단이 가까워졌다. 길이 끝나는 곳에 높은 울타리와 열려 있는 철문이 있었다. 문 너머로 가면 그는 왼쪽, 기사단 숙소 쪽으로, 그녀는 오른쪽의 기숙사 쪽으로 갈라져야 했다.
그의 걸음이 느려졌다. 이 찰나가 조금이라도 더 길어지길 바라는 것처럼.
에키는 그것을 알아채고 고개를 들었다. 반듯하고 담담한 옆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로드.”
즉시 반응하며 그녀를 응시하는 예쁜 하늘색 눈동자. 기나긴 악몽 속에서 유일하게 그녀를 기다려 주었던 바로 그 눈.
‘내게 그것이 얼마나 큰 구원이었는지, 당신은 알까.’
울컥 무언가가 솟구친다. 꽃향기가 코끝에 맴돌았다.
“로드, 저는.”
나는 당신의 검을 쥘 수조차 없는 악마여서, 당신을 사랑할 자격이 없는데. 시간을 되돌렸다고 해도 그 모든 일이 완전히 없었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닌데.
당신이 그 죄악들을 다 끌어안고도 나를 좋아해주는 것만 같아서.
확신할 수는 없다. 어쩌면 그때 살의는 넘치지 않았고, 무언가 다른 이유로 쌓여 있던 살의의 일부가 증발해 버렸을 수도 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그쪽이 차라리 일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여전히 그녀가 누군지 알지 못할 수도 있다. 전부 그녀의 착각일 수도 있다.
“저는, 그러니까…….”
그럼에도 마음이 더 커져버려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가 내보인 감정이 깊어서, 그게 그녀의 안으로 파고들어서, 그녀의 두려움을 녹여 버렸다.
억누르던 공포가 옅어지자 마음이 자꾸만 부풀어 올랐다. 욕심이 난다.
“……당신을.”
결코 꺼낼 수 없으리라 여겼던 말들이 목 끝까지 차올라 넘실거렸다. 그녀는 그중에서 딱 하나의 말을 끄집어냈다.
그녀가 선택한 말이 아니었다. 저절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좋아해요.”
입 밖에 꺼낸 말이 델 듯이 뜨겁게 느껴졌다. 말을 만들어낸 혀부터 얼굴로, 그리고 전신으로 열기가 퍼져나갔다.
에키는 유리엔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늘어뜨렸다.
“전에, 제가 당신에게 무슨 의미인지 설명해 주셨잖아요. 대답을 드리겠다고 했었죠. 이게 제 대답이에요, 로드.”
유리엔은 말이 없었다. 그녀는 그의 얼굴 대신 가슴팍에 눈을 둔 채 덧붙였다.
“당신을 좋아하고 있었어요. 사실은, 당신이 저에게 고백하기 한참 전부터.”
아주 예전부터. 정말 많이.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게.
그녀는 드레스 자락을 쥐고 살 무릎을 굽혔다.
“그럼, 편안한 밤 되세요, 로드.”
에키네시아는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완벽하게 인사를 하고는, 그대로 돌아서서 철문을 통과했다.
연분홍빛 머리카락과 살구색 드레스 자락이 도망치듯 밤 속으로 멀어졌다.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유리엔은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눈도 깜박이지 않고, 숨도 쉬지 않고, 그대로 시간이 정지하기라도 한 것처럼 굳은 상태로.
[……주인?]
성검이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그에게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성검은 잠시 기다렸다.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아주 먼 곳에서 들렸다.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이 쏘아 올린 불꽃이 먼 하늘을 수놓았다.
[정신 차려라. 주인, 주인?]
기다리다 못한 성검이 다시 불렀다. 유리엔은 그 부름을 듣고도 몇 초 후에야 움직였다.
비틀비틀 움직이던 그는 제대로 걷지 못하고 가로수에 부딪혔다. 이팝나무 꽃이 머리 위로 우수수 쏟아졌다. 그는 멍하니 눈을 깜박이며 뚝뚝 떨어지는 꽃잎들을 맞고 있다가, 흙바닥에 그냥 주저앉았다.
[……괜찮나?]
“괜, 찮다.”
[부딪힌 곳 말고. 네 상태 말이다.]
“괜찮은, 것 같다.”
[전혀 안 괜찮아 보인다만.]
“괜찮…….”
유리엔은 말을 하다말고 입을 틀어막았다. 틀어막은 입에서 말인지 신음인지 분간도 가지 않는 웅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꿈…….”
[꿈 아니다.]
용케 그것을 알아들은 성검이 그 사이에 백 살쯤 더 먹은 듯한 목소리로 대꾸해 주었다.
유리엔은 그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가 망연히 중얼거렸다.
“어디서부터 꿈이지?”
[꿈 아니라고 했다.]
“뭐가 꿈이 아니라는 건가?”
[전부다.]
“전부 다 꿈이란 뜻인가.”
[…….]
성검은 제 주인이 완전히 맛이 갔다고 판단하고 입을 다물었다.
놔두면 정신이 돌아오겠지. 애초에 랑기오사는 마검의 주인이 좋아한다는 말을 할 때부터 자신의 주인이 고장 나는 걸 예상했다.
성검까지 침묵하자 유리엔은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밤이 끝나고 아침 해가 밝아올 무렵에서야 그는 비척거리며 일어나 숙소로 향했다.
욕실에서 찬물을 그대로 머리 위에 쏟아부었다. 소름이 돋으며 정신이 조금 들었다.
아까부터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던 것이 뚜렷해졌다. 에키네시아가 그에게 했던 말들이.
〈좋아해요.〉
〈당신을 좋아하고 있었어요. 사실은, 당신이 저에게 고백하기 한참 전부터.〉
달콤한 노랫소리처럼 그 말들이 귓가에 달라붙었다. 귓불과 목덜미에서부터 벌건 열기가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아무래도 꿈이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