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14화
유리엔은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있어도 그녀를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정안을 뜨면 회색 그림자들 속에서 홀로 솟구치는 불길이 보이니까.
그녀 옆에는 새하얗고 작은 혼이 보였다. 악의라고는 전혀 모르는 듯한 순백의 혼, 성녀였다. 그들을 확인한 그는 정안을 감았다.
“로드, 왜 여기에 계신 건가요? 만찬이 진행 중인 것 아니었나요?”
에키의 물음에 그의 말문이 막혔다.
그대의 행적을 정보원이 놓쳐서, 괜찮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대가 누구보다 강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래도 혹여 무슨 일이 있을까 봐, 정신을 놓고 찾아다녔다.
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유리엔은 급히 변명을 만들어냈다.
“성녀가…… 사라져서. 역시 그대와 함께 있었군.”
[너, 점점 거짓말이 느는 것 아니냐? 악행까진 아니라지만 적당히 해라.]
그는 성검이 떨떠름하게 지적하는 걸 못 들은 척했다.
동시에 에키 역시 마검이 하는 말을 못 들은 척하고 있었다.
[저거 봐, 쟤 너 감시하는 거라니깐! 그게 아니면 어떻게 바로 찾아와? 내 말 맞지? 그치? 감시하는 건 나쁜 거니까 죽, 으음, 으음, 난 말 안했다? 말 안 해도 알지, 주인아?]
이렇게나 빨리 사라진 걸 들키다니. 하녀가 뭔가 일이 있어서 샤이의 침실을 살펴보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에키는 그렇게 추측했다.
성녀가 실종되었다는 건 창천기사단장이 만찬을 그만두고 찾으러 나올 만한 사건이었다. 설마 대신전이 발칵 뒤집혔나? 그 가정에 상당히 미안해졌다.
“죄송합니다, 로드. 바로 돌아가서 대신전에 사죄하겠습니다.”
“언니 잘못 아니에요, 제가 축제를 구경하고 싶어 해서……!”
에키의 드레스 자락을 쥔 채 눈치를 보고 있던 샤이가 화들짝 놀라며 끼어들었다. 그녀가 당황하여 샤이를 말리려는데 유리엔이 급히 말했다.
“아니, 대신전은 성녀가 사라진 것을 모르고 있으니 신경 쓸 필요 없다. 추궁하려던 게 아니었다. 나는 그저 그대가…….”
걱정되어서 온 것이니.
그는 헛나올 뻔한 말을 간신히 자제했다. 에키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유리엔은 살짝 헛기침을 하고 말을 돌렸다.
“에키네시아. 성녀와 함께 축제를 보러 나온 건가?”
“네. 잠시 나갔다 오는 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제 생각이 짧았어요. 이제 돌아가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그대가, 아니, 그대와 성녀가 원하는 대로 해라.”
“네?”
의외였다. 유리엔이라면 추궁하지는 않아도 당연히 지금 돌아가라고 할 줄 알았다.
“허락받지 않은 외출인데, 괜찮은 건가요?”
에키가 반문하자 유리엔의 시선이 주눅이 든 샤이에게 잠시 머물렀다. 그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 정도로 융통성이 없진 않다. 대신전 역시 성녀를 보호하려는 거지, 가두려는 게 아니므로 이해할 것이다. 내가 책임질 테니, 얼마든지 즐기도록.”
그의 말에 샤이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소녀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가, 감사합니다!”
“당연한 일이니 감사하지 않아도 된다.”
“배려 감사합니다, 로드. 퍼레이드가 끝나면 돌아갈 거니 그리 긴 시간은 아닐 거예요.”
에키 역시 안도하고 웃으며 인사를 했다.
그녀가 웃자 유리엔이 반사적으로 따라 웃었다. 바보처럼 보일 만한 행동이었음에도 섬세한 외모와 분위기 탓에 고아하게만 보였다.
살짝 휘는 그의 입술에 저절로 눈길이 갔다. 거스러미 하나 없이 매끈하고 모양 좋은 입술이었다. 보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바라하 선배님은 진짜 왜 그런 질문을 해서는.’
에키는 얼른 눈을 돌리며 애꿎은 바라하를 탓했다.
그들이 지체하는 사이 퍼레이드가 저만큼 앞서가 있었다. 그녀는 샤이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기다가, 몇 걸음 가지 않아서 뒤를 돌아보았다.
유리엔이 따라오지 않았다.
그는 아까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멀어지는 그들을 보고만 있었다. 에키네시아를 확인했고, 별 일 아님도 확신했으니 이제 만찬장으로 돌아가야 했다.
가기 싫었다.
유리엔은 그녀가 보이지 않게 되면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미적거렸다. 그때 에키가 고개를 기울이며 그를 불렀다.
“로드?”
“……?”
“……책임지신다는 거, 함께 계신다는 뜻 아니었나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유리엔의 표정이 흐트러졌다. 입이 살짝 벌어지고 눈이 깜박였다.
에키는 그가 책임진다는 말에 당연히 같이 다니는 것인 줄 알았다. 그의 표정을 보니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던 듯해서, 그녀의 낯이 화끈해졌다.
“아, 아니에요, 제가 착각했습니다. 바쁘실 텐데…….”
넋이 나가 있던 유리엔이 그 말에 정신을 차렸다. 그는 황급히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그녀의 옆에 서서 퍼레이드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대꾸했다.
“아니, 그 뜻으로 한 말이 맞다. 막 일정이 끝난 참이라 여유가 있어서.”
[너, 만찬 와중에 뛰쳐나왔잖느냐. 안 돌아가도 되는 거냐?]
성검이 황당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가 같이 있길 바라는 상황에서 유리엔에게 그런 건 알 바가 아니었다. 그 정도는 얼마든지 수습할 자신이 있었다.
“가지.”
그는 나란히 선 그녀를 향해 녹을 듯이 웃고는 걸음을 옮겼다. 에키가 얼떨떨하게 그를 따라 걸었다.
그들을 보고 갸웃거리던 샤이는 금세 퍼레이드 쪽에 시선을 빼앗겼다. 퍼레이드의 꼬리에 따라붙는 아이들에게 천사 분장을 한 여자가 화관이나 꽃목걸이를 씌워주고 있었다.
에키는 들썩이는 소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샤이가 허락을 맡듯 그녀를 돌아보더니 보닛 챙을 꼭 쥔 채 아이들 무리에 섞여 들어갔다.
에키와 유리엔은 소녀가 꽃목걸이를 받아 드는 걸 지켜보았다.
시선은 그쪽인데 온 신경은 옆에 있는 사람에게 쏠렸다. 퍼레이드의 나팔과 북이 내는 소리가 심장박동처럼 들렸다.
문득 유리엔이 팔을 들었다. 그는 에키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안쪽으로 약간 당겼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지나가는 남자와 그녀의 어깨가 스치는 게 거슬렸다.
기묘할 정도로 예민해진 감각으로 에키는 그가 움직이는 것을 낱낱이 느끼고 있었다. 피할 수 있었지만 피하지 않았다.
손이 닿고, 그에게 가까워졌다. 무례하지 않게 살짝 얹은 손이었으며 가벼운 당김이었다. 품에 안긴 것도 아니었다. 그녀의 어깨가 그의 가슴팍에 약간 닿았을 뿐이다. 손은 금세 떨어졌다.
그녀는 그것을 의식해 버렸다.
어깨에 탄탄한 감촉이 닿으며 은은하게 기분 좋은 체향이 쏟아졌다. 훅 가까워진 거리. 그 순간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욕심이 피어올랐다.
“……!”
에키는 그를 거칠게 밀쳐내고 한 걸음 물러섰다. 가슴 안쪽이 쿵쿵거리고 목덜미가 홧홧했다. 마검이 이상하다는 듯 그녀를 불렀다.
[뭐야, 너 왜 그래? 쟤가 너 공격하려 한 거야? 난 못 느꼈는데?]
유리엔은 밀쳐진 그대로 굳어서는 그녀를 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갑작스런 행동을 변명하려 입을 열었던 에키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
‘왜 밀쳐낸 거지, 난?’
그녀는 답을 알고 있었다. 차마 말할 수 없는 답이었다. 가까워지니 까 만지고 싶어져서 밀쳐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는가.
고작 어깨가 스쳤다고 더 닿고 싶어지다니, 스스로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유리엔을 상대로, 저 고결한 사람을 상대로 그런 마음을 품었다는 게 어쩐지 죄스럽기까지 했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유리엔이었다. 그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사과했다.
“놀라게 했군. 미안하다. 그대가 부딪힐 것 같아 무심코…….”
“아니에요, 놀란 게 아니라, 아니, 놀라긴 했는데, 그러니까…….”
에키는 횡설수설 중얼거렸다. 온 얼굴이 빨개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런 감정도, 이런 식으로 남자를 의식해 본 것도 처음이라서.
연회나 무도회에서 얄팍한 추파를 받아친다거나, 저질스럽게 접근하는 놈들을 두 번 다시 넘보지 못하게 밟아주는 건 해보았다.
그러나 그녀 쪽에서 상대를 욕심 내어 본 적은 없었다.
‘나, 정말로 유리엔을 좋아하는구나. ……남자로서도.’
그에 대한 제 감정이 무슨 의미인지를 새삼 다시 깨달았다.
좋아하는 것과 욕망하는 것 사이에는 상당한 간극이 있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그것을 넘어 보았다. 증오에 대한 두려움이 옅어지자 솔직한 마음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지러운 열기가 온 몸을 돌아다녔다.
꽃목걸이를 건 샤이가 종종거리며 돌아왔다. 소녀는 그들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기류를 느꼈다.
“언니?”
“……아무것도 아니야, 샤이. 가자.”
샤이가 구세주처럼 보였다. 에키는 얼른 샤이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잠시 멈춰 있던 유리엔이 느리게 뒤따라왔다.
그는 심각하게 제 행동을 반성했다. 방심하면 자꾸만 그녀에게 손을 대게 된다. 갑작스레 그녀를 잡아당겼으니 그녀가 화를 낼 만도 했다.
‘내 얼굴을 마음에 들어 한다고 해서, 싫어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녀가 나를 좋아한다는 뜻이 되지는 않는다.’
제 감정이나 욕망을 내키는 대로 쏟아낼 수는 없었다. 그녀의 허락도 없이 그러는 것은 옳지 않았다.
에키네시아는 자신을 납득시켜 달라고 했고, 그는 나름대로 설명을 했다. 진실을 전부 말할 수는 없었으나 거짓은 하나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설명에 그녀가 납득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아직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때 사택에서 어쩌면 대답을 들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그는 기다려야 했다.
노크 소리에 에키네시아가 입을 다물었을 때를 떠올리자 바라하를 어떻게든 치워버리고 싶어졌다. 장기 임무로 오지에 보내버릴까. 순간적으로 든 충동에 그는 성검의 문양이 있는 오른손바닥을 내려다보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러느라 유리엔은 에키로부터 두세 걸음 정도로 떨어져서 뒤따르고 있었다. 동행이라 보기 어려울 정도의 거리였다.
샤이가 그것을 흘깃 돌아보더니 에키를 향해 물었다.
“언니는 왜 단장님이랑 손을 안 잡아요?”
“……응?”
“약혼할 사이잖아요, 두 분.”
유리엔이 일순 비틀거렸다. 에키는 얼어붙었다가, 간신히 말을 꺼냈다.
“누가 그래, 샤이?”
“아론 신관님이, 단장님이 곧 약혼하실 거라고 했어요.”
샤이는 약혼 상대가 에키가 아니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심하게 당황하니 되레 차분해졌다. 에키는 침착하게 되물었다.
“단장님이 약혼하실 분은 내가 아니야. 왜 그렇게 생각한 거니?”
“언니가 아니라고요?”
샤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소녀는 이상하다는 얼굴로 유리엔을 돌아보았다. 유리엔은 낯이 새하얘져서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럼 왜 단장님은 언니를 볼 때만 웃어요?”
“…….”
[네가 얼마나 티를 냈으면 어린애도 눈치채는 게냐. 이래가지고선 위장 약혼도 다 들키는 것 아니냐?]
성검이 한탄했고 유리엔이 멈춰 섰다. 그는 허둥거리며 다른 곳을 보았다.
샤이는 이번에는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에키를 향해 말을 던졌다.
“언니도 단장님 보면서 빨개졌잖아요.”
“…….”
[이 꼬맹이는 지금 뭔 소릴 하는 거야? 빨개지는 건 화났다는 뜻이잖아. 방금도 쟤가 너 건드려서 화낸 건데, 보고도 모르다니 바보인가 봐.]
마검이 종알거렸고 에키는 창백해져서 유리엔을 돌아보았다. 다행히 유리엔은 아까보다 더 멀어져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급히 변명했다.
“그, 그건,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니라, 음, 창피해서 그런 거야.”
“창피해요? 뭐가요?”
회색 눈동자가 말갛게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에키는 급하게 주위를 살폈다.
마침 퍼레이드가 광장 근처에 도달해서, 광장에서 마법사들이 커다랗게 불꽃을 쏘아 올리고 있었다. 그녀는 얼른 샤이를 그쪽으로 돌려 세웠다.
“샤이, 저거 봐!”
밤하늘이 화려한 빛으로 반짝였다. 샤이는 순식간에 불꽃놀이에 시선을 빼앗겼다.
에키는 더 자세히 보려고 폴짝거리는 소녀를 안아 올려 근처에 있던 조각상의 받침대 위에 앉혀주었다. 그러고 나서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