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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113화 (113/211)

검을 든 꽃 113화

사열식 이후 에키는 들썩이는 란셀리드를 놀러가라고 보내고 기숙사 방에 틀어박혔다. 축제는 어제 충분히 즐겼고, 아직도 봐야 할 결절 관련 책들이 많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발. 라키아기오사가 어떤 성격인지 혹시 알아?”

[몰라. 만나본 적 없는걸.]

“카이로스기오사처럼 항상 자아가 있는 검이니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 같긴 한데…….”

기본적으로는 라키아기오사 마음대로겠지만, 그래도 결절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조건이 있는 건 확실했다.

평화로운 곳보다 위험한 곳. 마물이 없는 곳보다는 마물이 있는 곳. 전쟁터나 재해가 휩쓸고 간 폐허처럼 인간의 감정이 격해지는 곳.

다른 곳에 안 생긴다는 건 아니지만 저런 장소가 생길 확률이 높았다. 조건을 나열하던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 라키아기오사……. 성격이 별로 좋진 않겠네.”

[어, 전 주인도 욕했는데! 악취미일 게 틀림없다고 하더라.]

“그 사람은 뭐 알아낸 것 없어? 생각 좀 해봐.”

[으음…….]

마검이 낑낑대는 소리를 냈다. 마검의 전 주인에 대해서는 기오사를 모으던 시절에 바르데르기오사로부터 이것저것 들었다. 수백 년 전 사람인 데다 그 당시의 마검은 지금보다도 인간을 몰랐던 탓에 그다지 도움이 되진 않았었다.

에키는 별 기대 없이 책을 뒤적였다. 그녀가 결절 생존자들의 증언을 모은 책에 집중하며 바르데르기오사에게 물어본 것을 잊을 때쯤, 마검이 소리를 쳤다.

[아, 아! 생각났다!]

“깜짝이야. 뭔데?”

[분명히 화산 터졌을 때야. 거기 결절이 생긴 걸 보고 튀면서, 앞으로 상관없는 일은 건드리면 안 되겠다고 했었어! 그 뒤로는 별로 결절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상관없는 일? 자기하고, 그러니까……. 카이로스기오사를 쓴 당사자하고 관계가 없는 사건 말이야?”

[어, 그거 맞을걸. 특히 사람 목숨이랑 관련된 문제를 제일 좋아하는 거 같다고, 걔가 공간검도 너 같은 새끼 아니냐고 욕했어. 쳇.]

“……너 그 사람한테도 많이 혼났지?”

[……야, 그래도 깬 꼬박꼬박 피 먹여줬어. 네가 더해. 좀 죽이면 어때서! 그리고 네가 때리는 게 더 아파!]

“맞을 줄 알면서 끝까지 떠드는 네놈이 더 대단하지.”

[하지만 죽이고 싶단 말이야! 본능인데 뭐 어쩌라고!]

“본능을 참을 줄 알아야 어른이 되는 거야.”

[난 인간이 아니고 기오사인데?]

에키는 투덜거리는 소리를 무시하고 마검이 알려준 내용을 정리해 둔 것에 덧붙였다.

사람의 목숨과 관련된 것. 다른 하나의 신검인 카이로스기오사를 사용한 사람, 그러니까 시간을 되돌린 자와 관계없는 사건일 것.

이것까지 덧붙이고 나니 윤곽이 잡혔다. 아직 가설에 불과하지만, 결절이 발생할 만한 상황은 예측할 수 있을 듯했다.

[주인아, 해 졌어. 엘기오사 오너랑 아까 약속한 시간 아냐?]

“아.”

오늘 저녁에 샤이의 무도회용 드레스를 마지막으로 점검해 주기로 했었다.

원래 샤프롱인 테레사가 하기로 되어 있던 일을 아무래도 미덥지가 못해서 그녀가 하겠다고 나섰다. 안 그래도 자신이 없었던 테레사는 꽤나 고마워했다.

에키는 곧바로 대신전 내에 있는 샤이의 저택으로 향했다. 성녀를 모시는 하녀들은 테레사보다 더 자주 드나드는 에키에게 익숙해져서 금방 그녀를 안내해 주었다.

“언니!”

하녀들의 시중을 받아 드레스를 걸치고 있던 샤이가 반색하며 그녀를 반겼다.

층을 낸 하얀 천을 겹겹이 드리운 드레스는 목련 꽃잎 같았다. 소녀다우면서도 성녀라는 신분에 어울리는 디자인이었다.

“잘 어울리네. 예쁘다.”

에키의 말에 샤이가 활짝 웃었다. 그녀는 장신구까지 샤이에게 걸치게 해서 마지막 점검을 끝냈다.

하녀들이 준비된 드레스와 장신구를 정리하러 나간 후에, 에키와 샤이는 테라스에서 차를 마셨다.

“참, 사열식 잘 봤어.”

“엄청 떨렸어요. 저 괜찮았어요?”

“물론, 다들 감탄했는걸. 정말 잘했어, 샤이.”

그녀의 말에 샤이가 부끄러운 듯 우물거렸다. 그러면서도 기쁜 것은 감추지 못하고 테이블 아래에서 다리를 흔드는 소녀가 귀여워서, 에키는 웃음을 흘렸다.

샤이를 살리려다 결절이 생겼었지만 전혀 후회되지 않았다. 바라하 때도 후회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살리려 할 때마다 결절이 발생한다 해도 상관없어. 살리고 싶은 사람이면 살리자. 그쯤은 감당할 수 있으니까.’

지키기 위해서, 또는 살리기 위해서 검을 드는 건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그런 이유라면 기쁘게 검을 들 수 있었다.

밖에서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어둑한 저녁 하늘 위로 색색의 불꽃이 환하게 터졌다. 바라하에게 들었던 축제 둘째 날의 불꽃놀이였다. 샤이가 입을 벌린 채 먼 하늘에서 반짝이는 불빛들을 응시했다.

“저게 불꽃놀이에요?”

“그래. 처음 보니? 야간 퍼레이드가 있다던데, 그게 시작되었다는 신호일 거야.”

“우와…….”

소녀의 회색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몸이 절로 불꽃이 터지는 쪽으로 기운다. 너무 멀어서 제대로 보이지 않자 약간 들썩이기까지 했다.

에키는 그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충동적으로 물었다.

“보러 갈래?”

“네?”

“불꽃놀이랑, 야간 퍼레이드, 야시장도 열린다고 들었어.”

“하, 하지만 신관님이 위험하니까 밖에 나가지 말라고 했는걸요.”

“괜찮아, 내가 있잖…….”

그녀는 말하다가 멈칫했다. 실제 실력과 별개로 그녀는 공식적으로는 고작 스콰이어에 불과했다. 성녀를 호위하겠다며 나서기는 무리였다.

그렇다고 기오사 오너라 바쁜 테레사에게 부탁할 수는 없다. 내일 있을 제례 준비로 정신이 없는 대신전이 호위도 없이 성녀의 외출을 허락해줄 리도 없었다.

에키는 고민하다가 희미하게 기대감이 어린 샤이의 얼굴을 보았다. 그 얼굴을 보자 고민이 끝났다.

‘잠깐만 나갔다 오면 되니까.’

“샤이, 일찍 잔다고 하고 침실에서 기다려. 조금 있다가 데리러 올게.”

“네? 몰래 나가는 거예요? 그래도 돼요?”

“잠시만이라면. 축제 보고 싶지 않아?”

머뭇거리던 샤이는 달아오른 뺨으로 조그맣게 말했다.

“……보고 싶어요.”

“그럼, 보러 가자. 돌아가는 척하고 기다리고 있을게. 하녀들이 나가고 나면 창문을 열어.”

“네!”

소녀가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에키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는 척하고 정원에서 잠시 기다렸다가, 2층에 있는 침실 창문이 열리는 것을 확인하고 뛰어올랐다. 검은 프릴이 달린 살구색 드레스 자락이 소리 없이 창틀에 내려앉았다.

에키는 샤이의 잠옷을 갈아입히고 챙이 넓은 보닛을 꺼내 씌운 다음 안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들키지 않고 아젠카 내성을 빠져나가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소녀를 데리고 사람들이 가득한 거리로 향했다.

에키가 예상하지 못한 것은, 그녀를 계속 주시하고 있는 정보원들이 있다는 점이었다.

2황자가 방문한 이후 유리엔은 창천 내의 정보원들에게 에키네시아의 행적을 놓치지 말라고 명해 뒀었다. 그래서 사용인으로 위장하여 곳곳에 있는 정보원들이 언제나 그녀의 위치를 체크하고 있었다.

그녀의 행적이 사라져 버리자 정보원은 곧바로 유리엔에게 보고를 올렸다.

타국 귀빈들이 모인 만찬이 진행 중이었다. 그는 만찬 와중에 빠져나와 정보원의 보고를 확인했다.

“성녀의 저택에 들린 이후로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다고?”

“예, 단장님.”

“……알았다. 제자리로 복귀해라. 그녀가 보이면 바로 보고하도록.”

정보원이 물러났다. 유리엔은 만찬장으로 돌아가지 않고 망연히 서 있었다. 성검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별 일 아닐 거다.]

“알고 있다.”

에키네시아를 직접 보러 왔다고 떠들었던 2황자는 지금 만찬장 안에 있었다. 제국 측 귀족들도 전부 저 안에 있다. 호위로 따라온 근위기사단은 다른 홀에서 식사 중이었다. 경비를 서는 건 창천의 준기사들이다.

무언가 일어날 기색은 없었다. 그리고 무슨 일이 벌어지든 에키네시아가 위험해질 확률은 극히 낮았다. 차라리 그녀가 누군가를 위험하게 만들 확률이 더 높을 것이다.

판단을 끝낸 유리엔은 만찬장의 문을 흘깃 보더니 근처를 지나가던 하인을 불러 세웠다.

“부단장에게, 급한 일이 생겨서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다고 전해라.”

“알겠습니다.”

유리엔은 그대로 본부를 벗어나 성녀의 저택 쪽으로 향했다. 성검이 기가 막힌다는 듯 중얼거렸다.

[알고 있다면서? 지금 어딜 가는 거냐, 너는?]

“…….”

유리엔은 할 말이 없어서 침묵했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그래도 불안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 그녀를 확인해 봐야만 했다.

성녀의 저택에 도착한 그는 침실의 창문이 약간 열려 있는 걸 발견했다. 돌아올 때를 대비해 에키가 조금 열어둔 것이었다.

유리엔은 창가로 뛰어올라 침실 안이 비어 있는 것을 보았다. 성녀가 사라졌다.

정보원의 말에 의하면 마지막으로 만난 건 에키네시아였고, 성녀는 일찍 자겠다고 말했었다.

[같이 사라진 걸 보니 둘이 함께 나간 것 아니냐? 축제 구경이라도 간 모양이지.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성검의 추측에 유리엔 역시 동의했다. 정보원에게 축제 거리에 그녀가 있는지 확인해 보라고 명하면 끝날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결국 내성 밖으로 향했다. 성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찼다.

* * *

가게마다 작은 태양처럼 둥근 등이 내걸렸다. 황금빛으로 꾸민 여인과 천사로 분장한 사람들이 탄 꽃마차가 나팔을 든 나팔수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마차의 뒤로는 화려한 분장을 한 사람들과 등불과 깃발을 든 사람들이 뒤따랐다.

태양 축제의 야간 퍼레이드였다. 퍼레이드가 지속되는 내내 하늘에선 불꽃놀이가 벌어졌고 거리에선 각종 좌판이 벌어졌다.

샤이는 신이 나서 팔랑거리며 돌아다녔다. 어찌나 좋아하는지 눈이 별처럼 반짝이고 볼은 사과 같았다. 에키는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샤이를 뒤따랐다.

좌판에 각종 군것질거리가 많았다. 샤이는 그것들을 구경하면서도 사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에키는 아예 은화를 몇 개 쥐어주었다.

은화를 받은 소녀는 어쩔 줄 모르고 망설였다. 그러곤 결심한 얼굴로 그것을 쥐고 아까부터 흘깃거리던 솜사탕 쪽으로 달려갔다.

곧 샤이는 제 얼굴보다 큰 솜사탕을 두 개 사 와서는 하나를 에키에게 내밀었다.

“언니, 이거…….”

“응? 내 것도 사 온 거야?”

“네.”

샤이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웃었다. 그게 너무 사랑스러워서, 에키는 솜사탕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도 기쁘게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녀는 샤이와 나란히 솜사탕을 먹으며 퍼레이드를 따라 걸었다. 주위는 음악소리와 웃는 얼굴로 가득했다. 순전히 샤이를 위해 나온 길이었는데 그녀 역시 즐거워졌다.

‘앞으로는 축제 같은 것도 자주 다녀 봐야겠다.’

아주 예전에는 거리를 돌아다니는 게 귀족답지 못하다고 생각해서 무시했고, 마검을 쥔 이후로는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서 즐겨본 적이 없었다. 오늘만 해도 어제 다 봤다고 생각하며 나오지 않았으니까.

[이런 거 시시해. 재미없어!]

투덜거리는 마검을 자연스럽게 무시하며 에키는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그 상태로 주위를 훑던 그녀의 시선이 한곳에 붙들렸다.

“언니?”

샤이가 걸음을 멈춘 그녀를 의아하게 올려다보았다. 에키는 샤이를 돌아보지 못하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왁자지껄한 사람들 너머로 훌쩍 큰 키의 남자가 후드를 눌러쓰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유리엔?’

후드에 가려져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는지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그냥 보자마자 알았다.

그가 그녀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달리기라도 했는지 어깨가 약간 들썩이다가, 그녀에게 다가오면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춘 그가 후드를 살짝 젖혔다. 은발 아래로 보이는 반듯한 얼굴과 새파란 눈동자. 역시 유리엔이었다.

“……로드.”

에키가 멍하니 그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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