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12화
축제 둘째 날 오전에는 창천기사단 사열식이 있었다. 아젠카의 태양 축제에서 가장 유명한 행사였다.
새벽부터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광장에 빽빽하게 자리를 잡았고, 광장에 자리를 잡지 못한 사람들은 거리에서 행진을 기다렸다.
사관생도와 기사들의 가족, 관계자들을 위해서 광장 한쪽에 따로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사열식은 창천의 매라고 불리는 정식 기사들과 준기사들까지만 치르는 행사였다. 그래서 사관생도들도 그곳에서 사열식을 기다렸다.
에키는 앨리스네 가족의 옆에서 란셀리드와 함께 있었다. 생도의 가족들보다 그들을 경호하기 위해 온 기사들이 훨씬 더 들뜬 기색이었다. 로아즈 가문의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시작하나 봐요, 누님!”
란셀리드가 몸을 들썩거리며 말했다. 아젠카 내성의 성문 쪽에서 마법으로 만든 불빛이 쏘아 올려졌다. 악단이 연주하는 행진곡이 들려왔다.
망토를 두른 기사들이 말을 타고 행진하는 건 다른 기사단들의 사열식과 큰 차이가 없었다. 갑옷 대신 흰 제복 차림이라는 게 눈에 띄긴 했지만 사열식에서 제복을 착용하는 기사단들이 꽤 있었기에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창천의 사열식이 유명한 건 수십에 달하는 마스터가 한 자리에 모이는 점과, 기오사를 볼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온다!”
“진짜 창천기사단이다…….”
“우와아!”
“창천! 창천!”
기사단 본부에서 출발한 창천기사단이 거리를 행진하기 시작했다. 행진을 따라 거리에 선 사람들이 소리를 질러댔다. 그 덕분에 광장에서도 기사들이 어디쯤 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마침내 기사단이 광장에 도착했다. 비슷한 시간에 대신관과 수석신관들이 나타났다. 꽃과 색종이가 눈처럼 뿌려지고 악단의 음악이 사람들의 환성에 파묻혔다.
에키는 대신관의 바로 뒤를 따라 걷고 있는 샤이를 발견했다. 금실로 수를 놓은 풍성한 백색 신관복과 길게 늘어뜨린 베일 때문에 소녀의 모습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조만 몸집 덕에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베일 속에서 작은 머리가 조금씩 움직이며 누군가를 찾는 듯했다. 샤이가 그녀 쪽을 볼 때 에키는 살짝 손을 흔들어 주었다. 베일이 달싹거리는 걸 보니 알아본 모양이었다.
독을 마셨을 때, 치료를 위해 불려왔던 샤이는 피에 젖은 에키를 보고 새파랗게 질려 떨었다고 들었다.
치료 후에 에키가 감사인사를 하러 방문하자 소녀는 그녀를 붙들고 놓아주려 하질 않았다.
〈어, 언니, 저, 열심히 연습할 거예요. 전부 낫게 할 거예요, 누구도 제 앞에서 죽지 않게 할 거예요……. 그래도 다치지 마세요. 무서웠어요. 엄마가 생각나서…… 무서웠단 말이에요.〉
샤이는 매달려 울먹이며 그렇게 말했다. 샤이를 달래고 안심시키느라 에키는 그날 거의 반나절을 소녀와 함께 있어야 했다.
대신관의 뒤로 수석신관들이 정렬했다. 샤이가 광장의 중앙으로 걸어가 섰다.
네 장의 날개를 편 황금빛 매와 방패무늬가 수놓인 푸른 깃발을 든 기수들이 광장 주위에 빙 둘러섰다.
높다란 깃대 아래로 이백여 명의 준기사들이 도열했다. 그들도 흰 제복을 입고 있었지만 기사의 것과는 약간 다른 형태였다.
준기사들이 동시에 검을 뽑아 상체 앞에 세워 들었다. 백 단위의 검이 한 번에 뽑히는 소리가 강렬했다. 나란히 선 은빛 칼날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에키는 그들 중에서 선명한 빨간 머리의 디트리히를 발견했다. 그는 마침 가까이에 서 있었다.
디트리히의 시선은 기사들, 그 중에서도 선두에 있는 테레사를 향했다. 눈빛도 미소 띤 입꼬리도 깊었다.
‘테레사에게 마음이 있구나, 역시.’
지워진 과거, 서로를 살리기 위해 희생하려던 그들이 떠올랐다.
테레사의 디몽기오사는 방어에 특화된 검이었다. 그래서 공격에 특화된 기오사를 가진 디트리히보다 에키를 상대로 버티기에 유리했다.
테레사가 남고, 디트리히가 달아나는 건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그럼에도 떠나는 남자의 얼굴은 절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테레사의 피를 뒤집어쓰고 그를 찾아냈을 때 절망의 밑바닥에 도달한 인간의 표정을 보았었다. 에키는 그런 얼굴을 수없이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그런 얼굴에 익숙해질 수는 없었다.
‘이번에는 둘 다, 행복하기만 했으면 좋겠어.’
언뜻 떠오른 피투성이 기억을 눈 앞에 펼쳐진 사열식의 풍경으로 덮었다.
에키는 검고 큰 말을 탄 테레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옅게 웃고 있었다. 묶지 않고 풀어 내린 금발이 말의 걸음을 따라 가볍게 흔들렸다.
기사들의 선두에는 실피드를 타고 있는 유리엔이 있었다.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고요한 얼굴, 곧은 등. 귀가 아플 정도로 요란한 주변의 환성과 소음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준기사들 앞을 따라 광장을 한 바퀴 행진하던 기사들이 사관생도들 앞을 지나쳐갔다.
[어, 쟤가 너 본다!]
마검이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유리엔의 시선은 헤매지 않았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똑바로 그녀에게 와 닿았다.
유리알 같은 눈동자가 그녀를 보는 순간 빛을 산란하듯 반짝이고, 입가에 설핏 미소가 돌았다가, 다른 곳으로 향하며 담담해졌다.
시선이 마주친 시간은 아주 짧았다. 그 짧은 시간에 그녀는 그와 닿는 것을 상상해 버렸다.
‘그를…… 남자로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가슴 안쪽에서 뭔가가 덜걱거렸다. 이게 다쓸데없는 질문을 한 바라하 때문이었다.
옆에 있던 란셀리드가 의아하게 그녀를 보았다.
“누님, 속이 안 좋아요? 왜 입을 가리고…….”
“아무것도 아니야. 앞이나 봐.”
행진을 끝낸 기사들이 중앙에 서더니 말에서 내렸다. 열을 지어 선 마스터들이 차례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들은 검을 뽑는 것과 동시에 검기를 형성했다.
개인의 파장에 따라 다른 색을 띄는 마나가 검을 감싸며 빛났다. 서른 명이 넘는 마스터가 빛을 머금은 검을 들고 도열하는 건 아젠카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다시 한 번 함성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이제 남은 건 기오사 오너들이었다.
그중에서 홀로 기사가 아닌 샤이는 눈에 확 띄었다. 수석신관 아론이 다가오더니 샤이의 베일을 벗겨 주었다.
자그마한 황금 관 아래로 잿빛 머리카락이 물결쳤다. 제 나이보다도 어려 보이는 소녀는 몹시 앳되었다.
대신관이 짧게 축사를 했다. 신을 찬미하고 기사들을 축복하는 내용이었다. 축사의 끝에 대신관은 샤이를 호명했다.
“……신께서 베푼 자애가 인간 안에도 존재함을 증거하는 이가 여기에 있으니, 성녀로 부름받은 소녀가 이 땅에 섰도다. 치유검 엘기오사의 주인이여.”
샤이가 양팔을 벌렸다.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소매가 바닥에 끌렸다.
전신을 덮은 제례복에서 목부분만 가슴 위까지 깊게 파여 있었다. 가슴팍에 그려진 붉은 열매가 맺힌 연둣빛 나무 문양에서 빛이 흘렀다.
순간 광장 전체에 숨죽인 정적이 감돌았다. 문양에서 나무 덩굴에 휘감긴 은빛 단검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의 자비심과 사랑으로 만들어진 치유검 엘기오사. 샤이가 엘기오사를 양손으로 받쳐 들었다. 정적은 도로 함성이 되었다.
대신관이 물러나고 창천기사단장이 앞으로 나섰다. 기사의 정점에 선 그는 호명을 받지 않았다.
유리엔은 오른손을 앞으로 내뻗으며 스스로 검을 불렀다.
“성검 랑기오사.”
황금빛이 솟아오르며 순백의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의 사명감과 정의로 만들어진 검.
유리엔이 그것을 쥐는 것과 동시에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의 환호가 터져 나왔다. 에키는 흥분한 란셀리드에게 부딪힐 뻔했다.
랑기오사를 쥔 유리엔이 나머지 기오사 오너들을 향해 돌아섰다. 그가 그들을 호명했다.
“수호검 디몽기오사.”
테레사가 앞으로 나서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하얀 손바닥에 곡선을 그리는 푸른 문양이 있었다.
그 문양에서 대검에 가까울 정도로 칼날의 폭이 넓은 검이 솟아올랐다. 손잡이는 깊은 바다와 같은 빛깔, 칼날을 타고 푸른빛이 파도처럼 어룽거렸다.
인간의 슬픔과 보호본능으로 만들어진 검. 테레사 폰 프랑 알마리가 그 검을 쥐었다.
“광검 살릭기오사.”
이어 커다란 덩치의 부기사단장 바론이 나섰다. 왼손잡이인 그는 왼손에 기오사의 문양이 있었다.
발톱자국 같은 회색 문양에서 짐승의 이빨처럼 삐죽삐죽한 칼날의 대검이 떠올랐다. 바론의 덩치에 어울릴 만큼 거대한 검이었다. 칼날 전체에 맹수가 할퀸 것 같은 발톱자국이 가득했다.
인간의 분노로 칼날을 만들고 인간의 광기로 다듬은 검, 살릭기오사. 바론 틸리어스가 그것을 움켜쥐었다.
네 개의 기오사가 모두 모습을 드러냈다. 기사들이 동시에 아젠카식 경례를 행했다.
다음, 도열해 있던 기사들 중 절반 정도가 움직였다. 한 발을 내디디며 검을 베어 올리자 검에 맺혀 있던 검기가 하늘로 쏘아졌다.
이어 샤이를 제외한 기오사 오너들 역시 하늘을 향해 마나를 쏘아 올렸다. 색색의 빛이 새파란 하늘을 가로질렀다.
마스터 중에서도 뛰어난 자들만 가능한 기술이 축포 대신에 사용되었다. 광장의 함성은 귀가 먹먹할 정도에 이르렀다. 대신관의 짧은 축도는 함성에 묻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기오사 오너들이 먼저 기오사를 집어넣었다. 다른 기사들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검을 집어넣고, 마지막으로 준기사들이 납검했다.
함성은 기사단 전체가 본부로 돌아가고 사열식이 끝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기사의 말을 마구간에 돌려보내는 건 스콰이어의 일이다. 행진을 따라 본부로 돌아온 에키는 곧바로 유리엔으로부터 실피드를 넘겨받았다.
그녀가 실피드를 끌고 마구간으로 향하는 것을 확인한 후, 유리엔은 근처에 서 있던 란셀리드에게로 다가갔다.
“로아즈 소백작.”
“어, 으악, 단장님?”
열띤 어조로 일행들에게 사열식 이야기를 하고 있던 소년이 화들짝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유리엔이 조용히 손짓했다.
“잠시 이리로.”
란셀리드는 얼떨떨하게 가문의 기사들과 전속하인을 돌아보더니 주춤 거리며 다가왔다. 유리엔은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도록 약간 떨어진 곳에서 소년에게 가죽 주머니를 건넸다.
“로아즈로는 언제 돌아갈 예정이지?”
“내일 저녁에 돌아갈 예정입니다.”
“돌아가면 그것을 항상 지니고 다니도록.”
“예?”
“열어봐라.”
란셀리드는 그의 말을 따라 주머니를 열어보았다. 검은 벨벳 케이스 안에 금색 마법진이 새겨진 얇은 유리판이 들어 있었다. 소년은 그것이 마도구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 마도구는 유리엔이 마탑에 결절 정보를 제공하면서 봉인구와 함께 받아온 또 하나의 대가였다. 그는 이것을 받아내느라 마탑에서 꽤 오랜 시간 체류했었다.
“이동마법이 새겨져 있다. 범위는 반경 3미터 정도. 그 안에 있는 생물은 모두 설정된 좌표로 이동된다. 인원수는 상관이 없으니 저택의 인원 전체가 몸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도착지는 안전한 곳이니 걱정하지 마라.”
란셀리드는 귀를 의심했다. 이동마법 자체의 비용도 어마어마한데, 이 정도면 돈으로 가격을 매기기 어려울 정도의 성능이었다.
“다, 단장님, 이, 이, 이건…….”
“그것을 쓸 일이 없길 바라지만, 혹여나…….”
유리엔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마검이 사라지고 음모는 실패했으며 3황자가 황태자와 손을 잡으려 한다. 이 사태를 2황자와 황제가 가만 두고 볼 리는 없었다.
어떤 식으로 나올지 예상이 잘 되지 않았다. 그러니 모든 것을 대비해야 했다. 그는 에키네시아가 더 이상 그로 인해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걸 원하지 않았다.
“……일종의 보험이다. 에키네시아에게는 알리지 말고 그대만 알고 있어라. 위급 시에 잊지 말고 쓰도록.”
유리엔은 넋이 나간 란셀리드를 내버려두고 몸을 돌렸다. 성검이 망설이는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넌 네가 하는 일들을 마검의 주인에게는 전혀 알리지 않을 작정이냐?]
“그녀가 평온한 삶을 원한다고 했으니까. 내가 그녀를 원한다고 해서 그녀의 평온을 망가뜨릴 수는 없다.”
[……옳은 말이긴 하다만.]
넘치던 살의를 흡수한 것부터 지금 같은 대비와 뒷수습, 게다가 황제를 갈아치우고 정당한 방법으로 복수를 하려는 것까지.
만약 마검의 주인이 이 모든 일을 알게 된다면, 유리엔이 전부 혼자서 감내하려 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할까.
에키네시아를 지켜보았던 성검은 그녀가 기뻐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성검은 굳이 주인에게 그 점을 상기시키지는 않았다.
유리엔 역시 그녀가 그런 사람임을 알고 있을 테니까. 알고도, 그녀가 모르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마구간에 갔던 에키네시아가 돌아오고 있었다. 그녀를 보자마자 저절로 그의 입가가 풀어졌다. 그녀에게는 예쁘게만 보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