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꽃-111화 (111/211)

검을 든 꽃 111화

반짝이는 은발, 시인처럼 우아한 얼굴, 섬세한 외모와 다르게 거칠고 큰 손, 단단하던 팔, 넓은 어깨.

내리깐 긴 속눈썹 아래에서 습기 어린 하늘색 눈동자가 그녀를 향하던 모습. 미미하게 떨리던 입술.

그 입술이 닿는다면.

상상과 동시에 가슴께부터 머리끝까지 화끈하게 열이 올랐다. 바라하는 그녀가 새빨갛게 달아올라서 말을 더듬는 것을 보았다.

“그, 그런 건 왜 물으세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언어로 된 대답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에키네시아의 달아오른 얼굴이 대답을 대신했다. 바라하는 그녀가 유리엔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서로 마음이 있는 상황인가. 이건……. 젠장.’

거기다 그의 질문이 괜히 무언가 의식하게 만든 느낌이었다. 묻지 말았어야 했다. 그는 내심 후회하며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에키, 슬슬 시간이 되었으니 중앙 광장에 다시 가보자.”

“시간이 되었다니요?”

“밤새도록 태양을 기다리기 위한 불이 이제 곧 점화될 테니까. 볼 만할 거야. 가자.”

어느새 해가 저물 때가 되었다. 중앙 광장의 분수대 앞에 마련된 거대한 장작더미 근처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각자 다른 생각에 빠진 에키와 바라하도 그리로 향했다.

하루 종일 아젠카를 돌아다닌 란셀리드와, 앨리스의 가족들, 거기에 파티마의 가족들까지도 점화를 보기 위해 광장에 온 터라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서로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여덟 살인 앨리스의 늦둥이 여동생이 커다란 맹수 같은 바라하를 보고 겁에 질려 숨어버려서 소소한 웃음이 터졌다.

황혼이 지기 시작하자 마법사가 만든 태양 같은 불꽃 덩어리가 색종이, 꽃송이들과 함께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해가 저무는 하늘을 가로지르며 내려온 불꽃이 장작더미에 닿았다.

하늘에서 태양이 완전히 지는 것과 동시에 장작더미에 불이 붙었다. 기름을 잔뜩 먹인 마른 나뭇가지들 위로 순식간에 불이 퍼져나갔다.

주홍색 불꽃이 눈부시게 타올랐다. 하늘에 있던 태양이 밤을 맞이하여 쉬기 위해 이 광장에 내려온 듯한 광경이었다.

폭죽이 터지고 악단들이 음악을 연주했다. 요리와 술이 나왔다. 어둠이 내린 광장은 곧 밤을 불태우는 축제의 장이 되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모두 함께 저녁을 먹고 헤어졌다. 바라하는 늦게 도착한다는 가족을 마중하러 역으로 떠났고, 파티마나 앨리스는 오늘 가족과 함께 여관에서 묵는다고 했다.

에키는 더 놀고 싶다는 란셀리드를 전속하인 닉에게 맡겨 여관으로 돌려보낸 후 기숙사로 향했다. 그리고 기숙사 입구에서 어느 하녀로부터 발신인 불명의 두꺼운 편지봉투를 받았다.

기숙사를 관리하는 하녀를 전부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 하녀는 유달리 낯선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에키는 잠자코 봉투를 받아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뭐야, 수상한 하녀 아니었어?]

“방식이 익숙해서.”

전달하는 방식이 회귀 이전 쐐기와 비슷했다. 봉투를 열자 붉은 쐐기의 마크가 보였다.

내용물은 짐작했던 대로 쐐기가 보낸 의뢰 결과였다. 황태자와 2황자의 세력 구도와 최근 행적을 정리한 목록.

에키는 책상에 쌓여 있던 결절 관련 책들을 밀어놓고 그 목록을 펼친 다음 꼼꼼히 읽었다. 황태자와 2황자의 개인 신상이나 세력 구도를 살피다보니 점점 생각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창천이, 그러니까 유리엔이 처리하지 못한 마검을 처리했다, 라는 쇼로 확실하게 이득을 볼 수 있는 건…… 역시 2황자야.’

2황자 카르엠은 마스터급 기사였다. 그는 작년에 마스터가 되었다.

유리엔이 스물세 살이라는 최연소 마스터 기록을 세워버리는 바람에 부각되지 못했지만 스물아홉 살에 마스터가 되었다는 건 꽤 뛰어나다는 뜻이었다. 마스터가 될 수 있는 기사 자체가 극소수인 데다가, 보통은 30대 이후에 마스터가 되니까.

반면 황태자 크루엔은 검과는 거리가 멀었다.

크루엔의 지지세력이 크루엔을 지지하는 건 냉정하면서도 비정하지는 않은 성품과 유능함 때문이었다. 고갈되어 망해가던 광산촌을 몇 가지 아이디어와 교섭으로 관광도시로 만든 게 꽤 유명했다.

그러나 그 역시 스물네 살에 창천 기사단장이 되자마자 토벌단을 조성해 죽음의 숲을 토벌하고 도시 두 개 규모의 땅을 인간의 터전으로 되돌린 유리엔의 업적에 묻혔다.

2황자건 황태자건 유리엔을 탐탁지 않게 여길 만도 했다. 너무 뛰어난 것도 문제다.

[와, 엄청 짜증나겠다. 뭘 해도 묻히네.]

“……그래도 황태자는 괜찮아. 분야가 다르잖아.”

실제로 황태자는 나름 자신의 입지를 잘 다지고 있었다. 2황자가 문제였다. 심지어 에키는 2황자가 작년에 마스터가 되었다는 것도 지금 처음 알았다. 별로 화젯거리가 되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정황상 2황자. 그럼 황제도 연루되어 있을 확률이 높아.’

행적 쪽에서는 증거가 될 만한 게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긴 했다. 마검이라는 극도로 위험한 수단을 이용하는 음모를 허술하게 다루지는 않았을 테니까. 뒷골목의 조직이 2주간 조사한 정도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한숨을 쉬며 종이를 넘기던 에키의 눈에 문득 이상한 부분이 보였다.

2황자 측, 정확히는 황제의 최측근인 근위기사단장이 사냥을 위해 가끔 방문하는 별장이 있는 지명. 2황자의 행적을 기록하다가 함께 적힌 모양이었다.

그 지명을 목록의 다른 곳에서 본 듯한 느낌에 그녀는 다시 종이를 뒤적거렸다. 한참을 뒤진 끝에 겹치는 지명을 찾아낼 수 있었다.

“디아상트 공작이 종종 찾는다는 온천이 있는 곳이잖아?”

근위기사단장과 마찬가지로, 황태자의 행적을 조사하다 보니 측근인 디아상트 공작의 행적도 약간 첨부되어 있었다. 그중에 지나가듯 적힌 내용이었다.

콜본. 온천과 사냥터 양쪽으로 유명한 제국 북부의 관광지였다. 그곳에 들리는 고위 귀족은 꽤 많았다. 따라서 그렇게까지 이상한 공통점은 아니었다. 하지만 에키는 그 점이 신경 쓰였다.

‘회귀 이전에, 황태자는 황제가 된 후에 디아상트를 숙청했었지. 이유가 있었을 거야. 그 이유가 2황자와 관련이 있을지도 몰라.’

에키는 공작의 행적과 근위기사단장의 행적을 나란히 놓고 내려다보았다. 고민하던 그녀는 종이를 당겨 쐐기에 보낼 새 의뢰 내용을 쓰기 시작했다.

-근위기사단장과 디아상트 공작이 최근 콜본에 방문한 날짜와 동선을 조사해서 보낼 것. 최대한 상세하게.

* * *

제국 측 귀빈들이 도착했다는 바라하의 전언을 듣고 본부로 돌아간 유리엔은 기다리고 있던 부단장 바론을 만났다.

바론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단장님, 원래 예정에 없던 손님이 방문했습니다. 미리 연락을 받지 못해서 숙소 배정부터 접객 상황 전반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그냥 인원이 늘어난 정도면 사무관들 선에서 처리되었을 일이고, 어지간한 귀빈이면 바론이 알아서 했을 것이다.

그러지 못하고 기사단장이 직접 와야 할 경우라면 뻔했다. 유리엔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형님이 오셨군.”

“예, 성녀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2황자 카르엠 드 하르덴 키리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2황자가 지금 저 응접실에 있다는 소리에, 서늘한 무언가가 돋아나려 했다.

유리엔 자신의 일에 휘말려 에키네시아가 독을 마신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다. 그 뿌리에 있는 자이자, 아무 상관도 없던 그녀가 마검을 쥐게 된 원인인 자가 저기에 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입끝을 비틀었다. 평생 카르엠에게 증오와 음해를 받으며 살아왔음에도 유리엔은 딱히 반발해 본 적이 없었다. 대체로 감내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얽힌 일은 감내할 수가 없었다. 아니, 감내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진정해라. 너는 정당한 방법으로 처벌할 준비를 하고 있잖느냐.]

성검이 혀를 차며 한마디 했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돋아나는 것들을 가라앉혔다.

“단장님?”

“……아니다. 내가 직접 맞이할 테니, 경은 황족에 걸맞은 예우를 준비하도록.”

“알겠습니다.”

유리엔은 응접실에 홀로 들어섰다. 방만한 자세로 소파에 늘어져 있던 은발의 남자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유리엔을 향하는 녹색 눈동자가 기분 나쁘게 번들거렸다. 증오를 숨기지도 않는 눈이다.

“오랜만이구나, 유리엔.”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카르엠 형님.”

“이게 얼마 만에 등장한 성녀냐. 당연히 직접 와야지. 엘기오사는 모든 병을 낫게 할 수 있다지?”

“……치료를 할 때 체력이 소모되어 한계가 있습니다.”

“어쨌든 만병통치약이라는 소리 아니냐. 아바마마께서도 관심이 크시다. 사실 성녀는 기사도 아니고 제국 출신이니, 대신전이 아니라 황실에서 통제하는 게 옳지 않으냐?”

지독히 뻔뻔한 소리였다. 유리엔은 침착하게 대꾸했다.

“성녀는 제국민이 아니라 솔 족이고, 통제할 대상도 아닙니다. 대신전은 엘기오사 오너를 위한 절차에 따라 그녀를 보호하고 보조할 뿐입니다.”

대신전의 간섭은 성녀의 의지를 넘어설 수 없었고, 창천이 그것을 감시하게 되어 있다. 반대로 창천의 간섭 또한 대신전이 견제하게 되어 있었다.

기사가 아닌 기오사 오너이자 스스로를 지킬 무력이 없는 치유검의 주인을 위한 전통이었다.

다만 샤이는 보호자가 없는 고아인 데다 미성년자라 어느 정도 통제하는 바가 있긴 했다. 글자부터 각종 교양 교육과 제례, 데뷔, 샤프롱 선정 등이 그것이었다.

그래도 대신전의 일은 어디까지나 보호자로서의 역할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 선을 넘어서면 절차대로 창천이 나서게 된다. 마찬가지로 창천이 성녀의 힘을 빌리려면 샤이 본인의 동의는 물론 대신전의 동의가 필요했다.

“유랑민족이건 뭐건 제국에서 태어나 제국에서 살았으면 제국민이지. 그럼 그 보호니 보조니 하는 것도 황실이 하는 게 낫지 않겠나?”

“……제국 정책상 솔 족은 제국민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건 알고 계십니까?”

“날 무시하지 마라, 유리. 내가 그것도 모를 것 같으냐? 빌어먹을 놈.”

알고 있다면 할 수 없을 주장을 해놓고서 카르엠이 이를 갈았다. 초록색 눈에서 불티가 튀었다. 유리엔이 그를 지적했다는 점 자체에 대한 분노가 솟구치는 듯했다.

익숙한 행태라 유리엔은 대응하지 않았다. 합리적으로 반박해 봤자 길길이 날뛰기만 할 터였다. 말이 통하지 않는 대상을 말로 상대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형님께선 그 문제 때문에 직접 오신 겁니까?”

“글쎄, 그건 아랫것들이 알아서 논의할 일이고, 나는 직접 만나 보고 싶어서 왔다.”

“성녀를 말입니까?”

카르엠이 돌연 기묘하게 웃었다. 즐겁고 기대되어서 견딜 수 없다는 미소. 유리엔에게는 익숙한 미소였다.

‘네가 기르던 새가 아바마마의 정원을 망쳐서, 쏴 죽일 수밖에 없었어’라고 말하며 유리엔의 반응을 살피던 때에 어린 카르엠이 짓던 표정이었다.

그 뒤로도, 쫓겨나듯 제국을 떠나게 된 16세까지 지긋지긋하게 저 표정을 봤었다. 사소한 흠으로 트집을 잡아 그의 것을 빼앗거나 부수며, 그의 반응을 기대하는 얼굴.

카르엠은 바로 그 얼굴로 말했다.

“아니, 내가 보고 싶은 건 에키네시아 로아즈다.”

테이블 아래에서 유리엔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카르엠이 유심히 그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친애하는 동생이 스콰이어를 들였다니 꼭 한 번 만나 보고 싶어져서 말이지.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도 있고.”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그건 네 스콰이어에게 직접 물어볼 예정이라서. 너는 몰라도 된다.”

유리엔의 낯은 담담했다. 카르엠은 입꼬리를 올린 채 그를 바라보다가, 기지개를 폈다.

“열차를 오래 탔더니 피곤하군. 이제 방이 준비되었겠지? 난 좀 쉬어야겠다. 아, 성녀 관련 문제는 브루스 후작과 말해라.”

“……편히 쉬십시오.”

카르엠이 하인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을 나갔다. 그제야 유리엔은 움켜쥔 주먹을 풀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자국이 남아 있었다.

[마검의 주인은 강하다. 저놈에게 어찌될 일 따윈 없어. 알고 있겠지?]

성검이 불안한 듯 물었다. 유리엔은 잠시 침묵하다가, 느릿하게 성검의 말에 동의했다.

“그래……. 그녀는, 누구보다 강하지.”

그러니 그가 가졌던 다른 모든 것처럼 부서질 일은 없다.

그녀는 비극마저 되돌린 사람이니까. 그리고 그가 그녀를 부서지지 않도록 지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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