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10화
얼마 지나지 않아 바라하가 나왔다. 에키는 그와 함께 내성을 벗어나 축제를 맞이한 아젠카 시내를 가로질렀다.
날씨가 좋았다. 거리에는 여름 꽃의 향기와 들뜬 사람들이 가득했고, 가로등마다 걸린 태양이 수놓아진 휘장이 새파란 하늘 아래에서 펄럭였다.
바라하에게 점심을 대접할 작정이었기에 에키가 앞장서서 걸었다. 파티마에게 들었던 유명한 레스토랑에 갈 생각이었다.
바라하는 에키가 식사를 사겠다는 말에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가 그녀를 뒤따르며 물었다.
“스콰이어 업무는 할 만해?”
“선배님 덕에요. 사실 로드께서 별로 일을 시키시질 않아서, 많이 해 보진 못했어요.”
“같이 장기 임무를 갔었잖아. 그런데 별로 안 해봤다고?”
“바라하 선배님도 부단장님께 지명 받기 전에 단장님의 임시 스콰이어를 해 보셨다면서요? 알다시피 로드께서 워낙 철저하셔서……. 실피드를 데려간 것도 아니다 보니 제가 뭘 챙길 틈이 없더라고요.”
바라하의 표정이 의뭉스러워졌다. 단장은 모시기 편한 기사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콰이어가 할 일을 빼앗을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스콰이어가 해야 할 일을 명확하게 구분해 주는 편이었다.
‘상대가 그녀라서 그런 건가. 이거…… 에키가 스콰이어 지명된 직후에 돌던 소문이 마냥 헛소문은 아닐지도.’
단장이 사관학교 선발 시험에서 응시생에게 한눈에 반해서 입학하자마자 스콰이어 지명을 했다는 소문. 에키네시아의 괴물 같은 실력이 알려지면서 ‘재능에 반했다’라는 쪽으로 바뀌었던 소문이었다.
아무래도 재능에 반한 게 아닌 것 같아 바라하는 내심 혀를 찼다. 에키는 레스토랑을 찾느라 그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찾던 곳을 발견한 그녀가 그를 돌아보았다.
“여기예요. 혹시 와보신 적 있으세요?”
“아, 여기. 로드와 함께 한 번 와 봤지.”
“어땠어요? 괜찮던가요?”
“맛있었다. 아젠카에서 상어 요리라면 여기가 제일이라던데, 명성대로였어.”
“다행이네요. 들어가죠.”
축제기간이라 사람이 많았지만, 가격대가 귀족에게도 살짝 부담스러울 정도로 높은 곳이라 자리가 있었다.
에키는 바라하에게 뭘 좋아하는지 물어본 다음 풀코스로 시켰다. 신세진 게 많은 터라 제대로 보답하고 싶었다. 창천에서 암살 시도를 막은 포상으로 상당한 상금을 준 덕에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곧 차례대로 요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확실히 나오는 것마다 고급스럽고 맛이 좋았다. 식사를 하며 소소하게 대화하던 와중에 바라하가 말을 꺼냈다.
“에키, 마지막 날 연회 때 함께 갈 파트너는 정했어?”
문득 떠오른 듯 던진 물음이었으나 실상은 말을 꺼낼 타이밍을 주의 깊게 잰 결과물이었다. 에키는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아뇨. 연회라서 그냥 참석하려고요.”
순수한 무도회라면 파트너와 함께 입장하는 게 예법이었지만, 춤보다 사교와 각종 공표, 축하행사, 기념식 등이 중심인 연회의 경우 파트너를 대동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물론 모든 연회는 무도회를 겸하고 있으므로 파트너를 정하는 경우가 많긴 했다. 그래도 함께 갈 사람이 딱히 없는 상황에서까지 일부러 구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의 대답에 바라하가 싱긋 웃었다. 그는 바닷가재의 껍질을 벗겨서 에키의 접시에 놓아주며 말했다.
“그럼, 나하고 가겠어?”
“아, 감사합니……. 네?”
“연회 파트너 말이야. 딱히 같이 갈 사람이 없다면, 함께 갔으면 하는데.”
그 제안에 에키는 조금 전 란셀리드가 떠든 헛소리를 떠올렸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바라하는 미묘하게 변하는 에키네시아의 표정을 확인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난 파트너와 함께 연회에 가본 적이 없거든. 내 고향에서는 연회의 형식이 여기랑 좀 달랐고, 아젠카에 와서는, 음, 이런 걸 부탁할 만큼 친한 여생도가 없었지.”
“아…….”
“너와는 이 정도 부탁은 할 수 있는 사이라고 생각하는데. 다른 생도들에게 부탁했다간 오해를 살 수도 있어서. 안 될까?”
그렇게 묻는 그의 어조가 가벼워서 에키는 막 떠오르려던 가정을 버렸다.
오해할까 봐 그녀에게 제안한다는 걸 보니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란셀리드의 헛소리 때문에 엉뚱한 착각을 할 뻔했다 싶었다.
실제로 귀족들 사이에서 무도회나 연회의 파트너라는 건 그렇게까지 무거운 의미가 아니었다. 파트너라 해도 부부가 아닌 이상 연회에서 내내 같이 다니지도 않는다. 에스코트를 받고 함께 입장해서 선곡을 추는 정도.
연회의 주인공급이라거나 공식적인 행사에 가까운 자리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이번 연회는 성녀 데뷔라는 큰 의미가 있긴 해도 어디까지나 축제의 마지막 날을 장식하는 이벤트에 가까웠다.
‘게다가…… 유리엔은 디아상트 공녀와 파트너일 테니.’
연회 때 약혼식 날짜를 공표한다고 했으니 그는 공녀와 함께 입장할 것이다.
속사정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 모습을 상상하니 약간 기분이 가라앉았다. 감정이라는 건 논리적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위장 약혼인 걸 들켜선 안 되니까, 그와 마주치는 건 피해야겠지. 전에도 이상한 소문이 났었잖아. 그럼 파트너가 있는 편이 나을지도.’
에키는 눈을 내리깔았다가 맞은편의 바라하를 보았다. 바라하가 어깨를 으쓱이며 한숨을 쉬었다.
“역시 부담스럽나? 부담스러우면 거절해도 괜찮아. 혹시 너도 파트너가 없다면 같이 가는 것도 좋겠다 싶어서 그냥 해본 소리니까.”
상황이나 필요성을 다 제해도, 인간적인 호감에, 스콰이어 교육을 해준 호의에, 그녀의 비밀을 지켜주고 있는 것까지. 어려운 부탁도 아닌데 거절할 수가 없었다.
“바라하 선배님의 부탁인데, 들어 드려야죠. 함께 가요, 연회.”
“고맙다, 에키.”
목적을 달성한 바라하는 기분 좋게 웃었다.
식사를 마친 후, 에키는 계산서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녀보다 먼저 바라하가 그것을 집어 들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배님? 제가 사기로…….”
“아니, 당연히 내가 사야지.”
“여러모로 신세를 졌으니 제가 사야죠.”
“빚진 건 나야. 그것도 목숨 빚.”
그가 성큼성큼 계산대로 향했다. 고작 계산서를 뺏자고 마나를 쓸 수는 없어서 에키는 당황한 채 뒤따르며 항의했다.
“그래도, 들어올 때부터 제가 사기로 한 거였잖아요?”
“네가 사면 안 돼.”
“네? 왜요?”
데이트가 아니게 되니까.
바라하는 그 말은 굳이 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부담을 줄 때가 아니었다. 지금 의식하게 했다간 확실하게 거절당할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이건 내가 살 테니, 넌 대신 다른 걸 사주면 돼.”
“선배님!”
그는 빠르게 계산을 하고는 나가버렸다. 에키는 별 수 없이 그를 뒤쫓았다. 레스토랑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가 뒤늦게 나오는 그녀를 향해 싱글싱글 웃어 보였다.
“에키, 아젠카의 태양 축제는 처음이라고 했었지?”
“네. 그런데 선배님, 다른 걸 사 달라는 건 무슨 말이에요?”
“우선 따라와, 축제 명소들만 골라서 안내해 줄 테니까.”
에키는 얼결에 그에게 이끌려 태양 축제가 시작된 아젠카를 돌아다녔다.
여름 꽃들로 각종 형상을 만들어 세워둔 중앙 도로, 악단과 서커스들이 모여 공연 중인 거리, 한 해 중 가장 긴 태양을 기다리며 밤새 불을 피우는 행사가 준비되고 있는 광장까지.
축제를 경험해 본 3학년 생도인 데다 부단장의 스콰이어로서 축제 준비에 직접 참가했던 바라하는 좋은 가이드였고, 사방은 취할 정도로 떠들썩하고 활기찬 분위기였다. 처음에는 당황한 상태였던 에키도 곧 꽤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바라하는 식사 대신으로 그녀에게 각종 간식거리를 사달라고 요구했다. 구운 새고기나 꿀에 절인 과자까지는 그러려니 했던 에키는 큼직한 막대 사탕과 초콜릿을 바른 과일에 이르러서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바라하 선배님, 단거 좋아하세요?”
“왜, 의외야?”
바라하는 초콜릿이 듬뿍 발린 사과를 든 채 씩 웃으며 되물었다. 커다란 덩치의 바라하가 들고 있으니 그녀의 주먹만 한 사과가 사탕처럼 작아 보였다.
“솔직히 의외이긴 해요. 선배님 분위기만 봐선 연상이 안 되서.”
“이제부터 연상해 봐. 이런 거 맛있잖아, 안 그래?”
그가 에키에게 사과 꽂이를 내밀었다. 초콜릿의 달달한 향과 살짝 새콤한 사과의 향이 훅 끼쳐 왔다. 기분 좋은 향이었다. 에키는 미소 지으며 그것을 받아 들었다.
바라하가 마지막으로 안내한 곳은 모루 거리였다.
아젠카는 기오사 전설과 기사들이 몰려드는 도시라는 특성 탓에 대장장이들의 성지이기도 했다. 그렇게 아젠카에 정착한 대장장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 모루 거리였다.
대장장이들은 이날을 위해 만든 작품들을 모루 거리에 잔뜩 전시해 놓았다. 대륙 각지에서 방문한 기사와 용병들이 보물을 찾듯 모루 거리를 헤집고 다녔다.
바라하와 에키가 모루 거리에 들어서자 나와 있던 대장장이들이 그녀의 허리에 걸려 있는 아메시스트를 보고 넋이 나갔다. 그중 몇은 끈질기게 달라붙기까지 했다. 결국 그들은 제대로 구경하지 못하고 급히 그 거리에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눈에 광기가 돌더군. 하여간 장인이란 작자들은.”
바라하가 진땀을 닦더니 아메시스트 쪽을 흘깃 보았다. 에키네시아의 눈동자 색과 같은 자수정이 박혀 있는 하얀 마법검. 형태가 어쩐지 랑기오사를 연상시키는.
“에키, 그거, 단장님께서 준 검이라고 했지?”
“네. 스콰이어가 된 기념이라고 주셨어요.”
“넌 손질하기 귀찮아서 싸구려 검을 들고 다니는 거 아니었나? 그건 괜찮아?”
“이건 마법검이라서요. 날의 청결과 강도가 유지되는 마법이 걸려 있어서 손질할 필요가 없거든요. 들고 다니기에 편하기도 하고요.”
에키가 검집에 연결된 허리끈을 가리켜 보였다. 단순하면서도 예뻐서 드레스에도 잘 어울리는 끈이었다. 하얀색이라 색감이 튀지도 않았다.
지나칠 정도로 그녀에게 딱 맞는 검이 아닌가. 바라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물을까, 묻지 말까. 어느 쪽이 나을까. 괜히 의식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그는 슬며시 그녀를 떠보았다.
“그야말로 너를 위한 검이군. 마음에 들어?”
그 질문에 에키는 아메시스트를 내밀던 유리엔을 떠올렸다.
바짝 긴장해서 귓불이 불그스름해진 채, 마음에 드느냐고 묻던 남자를. 그녀가 감사하다고 답하는 순간 생기를 얻은 꽃처럼 화사하게 퍼지던 미소를.
그때에도 그는 그녀가 마검의 악마라는 걸 알고 있었을까.
알면서도, 자신을 죽였던 여자를 위해 검을 만들고,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에 그렇게 뭐든 내줄 듯이 웃었다는 건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건지.
“……네.”
유리엔을 떠올리느라 대답까지 간격이 있었다. 바라하는 그 사이에 에키네시아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그녀에게서 언뜻 스쳐 지나간 감정이 심상치 않았다. 끝내 그는 망설이던 질문을 던졌다.
“에키, 단장님을 어떻게 생각해?”
“존경할 만한 분이죠. 그분을 로드로 모시게 되어 영광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거 말고.”
바라하는 짧게 호흡을 고른 후에, 되도록 가볍게 들리도록 노력하며, 다시 물었다.
“남자로서 말이야.”
에키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그, 저, 선배님, 방금 뭐라고요?”
“단장님을 남자로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남자로서. 이성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그 말이 굉장히 생소하게 들렸다.
유리엔을 좋아한다는 걸 깨닫고 나서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지점. 그에게 예쁘다고 한 적도 있고, 그를 보고 떨렸던 적도 있으면서도,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녀에게 그는 너무나 특별하고 고결하게 빛나는 사람이었다. 쥐고 싶어도 결코 쥘 수 없는 성검 같은 사람. 설렘 뒤로 항상 죄책감과 공포가 따라붙었다.
그래서 그를 마음에 품고, 그를 의식하여 긴장하면서도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했다. 남자로서의 유리엔은.
그러니까 예를 들면, 그와 입을 맞춘다든가, 그를 만져 본다든가, 안는다든가, 그런 것은 지금까지 정말로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저, 저는…….”
지금이 처음이란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