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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109화 (109/211)

검을 든 꽃 109화

마차는 일반인들에게 공개된 구역을 차례로 돌았다.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창천기사단 본부였다. 내부는 들어가볼 수 없어도 어지간한 왕성 크기의 본부 건물은 볼 수 있었다.

목을 빼고 본부 건물을 구경하는 남동생 옆에서 에키는 꽤 높은 곳에 있는 커다란 원형의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창천기사단장 집무실의 창문이었다.

유리엔은 그녀에게 축제가 끝난 후에 스콰이어 업무로 복귀하라고 명했다. 아마 거의 곧바로 디아상트 공녀의 가족을 구출하기 위해 떠나게 될 터였다.

독을 마신 날 이후 유리엔이 그녀에게 휴식을 강제해서 에키는 그 사건에 관한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그 사건 때문에 안 그래도 바쁘던 그가 더 정신없이 바빠졌다는 건 알았다.

‘지금 집무실에 있을까?’

창 너머에 혹시 하얀 뒷모습이라도 비치지 않을까 싶어 무의식적으로 발돋움을 했다. 상당한 높이라지만 그녀의 시력에는 어렴풋이 창 너머의 풍경이 보였다.

그러나 찾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어, 어어, 어어어!”

옆에 있던 란셀리드가 괴상한 소리를 내더니 그녀의 풍성한 소맷자락을 마구 잡아당겼다.

“누, 누님, 저, 저기 저분……! 헉, 설마 이쪽으로 오는 거예요?”

“호들갑 떨지 마, 란셀.”

눈살을 찌푸리며 란셀리드가 가리키는 방향을 본 에키의 눈이 커졌다.

본부 건물에서 나온 유리엔이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황제 탄신 연회 때 유리엔을 본 적이 있는 란셀리드는 그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서, 서, 성검의 주인…….”

란셀리드의 중얼거림에 유리엔이 누구인지 알아차린 호위기사들이 혼절할 것 같은 낯이 되었다. 그들의 반응이 어떻건 유리엔은 정확하게 에키네시아를 응시하며 다가왔다.

눈이 마주쳤다. 가슴 안쪽이 술렁여서 에키는 그의 목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창천기사단의 제복이 단정히 가리고 있어 붕대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붕대가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에키네시아.”

“로드.”

그녀는 드레스 자락을 쥐고 살짝 무릎을 굽혔다 폈다. 그녀를 보는 유리엔의 시선이 풀어지더니 옆에 서 있는 란셀리드에게 닿았다.

“가족인가?”

“남동생이에요. 인사해, 란셀.”

“어, 어?라, 란셀리드 로아즈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유리엔은 로아즈 가문에 대해 조사했던 터라 소년이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머리색도 다르고 분위기도 달랐지만 눈은 에키네시아와 거의 똑같았다. 맑은 보랏빛. 그녀와 닮은 점이 보이자 절로 호감이 갔다.

“창천기사단장 유리엔 드 하르덴 키리에다. 에키네시아로부터 그대에 대해 많이 들었지. 반갑군.”

“네? 누님으로부터요? 누님이 어떻게 단장님과……?”

란셀리드가 얼이 빠진 표정이 되어 에키네시아를 돌아보았다. 에키가 속삭였다.

“내가 단장님의 스콰이어잖아. 몰랐어? 전보에 분명히 썼는데.”

“아, 아버지께 한 번 듣긴 했는 데……. 그거 농담 아니었어요?”

소년의 눈동자가 요란하게 떨렸다. 표정에서 불신이 읽혔다. 에키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유리엔이 말했다.

“그녀는 내 스콰이어가 맞다, 로아즈 소백작.”

“마, 마, 말도 안 돼…….”

란셀리드는 혼이 빠져나간 듯한 얼굴이 되었다. 살아 있는 전설이나 다름없는 인물이 누나를 스콰이어로 삼았다니. 란셀리드가 알고 있는 에키네시아와는 도무지 연결이 되지 않았다.

유리엔은 소년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고 에키를 살폈다.

“에키네시아, 몸은 좀 괜찮나?”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다행이군.”

그의 눈매가 부드럽게 접혔다. 란셀리드는 누나를 향해 웃고 있는 창천기사단장을 묘한 기분으로 보았다.

분명히 작년 탄신 연회 때 보았던 창천기사단장은 서늘한 칼 같은 분위기였는데, 어쩐지 지금은 녹을 듯이 부드러워 보였다. 아무리 봐도 심상찮은 느낌이다.

‘설마 누님의 상대가……. 에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어. 성검의 주인이자 제국의 황족이며 창천기사단장인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란셀리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소년이 자신이 떠올린 망상을 열심히 지우는 동안, 유리엔은 열심히 에키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담담한 척하고 있는 그가 얼마나 들뜬 상태인지는 성검 랑기오사만이 알았다.

유리엔은 일을 하던 와중에 정보원으로부터 에키네시아가 동생과 함께 마차를 타고 아젠카 내성으로 들어왔다는 보고를 들었다.

창천을 돌아보는 거라면 반드시 본부에도 들리게 되겠지. 그 생각을 하자마자 그는 하던 일을 팽개치고 아래층으로 뛰어내려 온 참이었다. 그녀를 보지 못한 지도 사흘째였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 사흘이면 많이 참았지…….]

주인의 행태를 보며 성검은 다 포기하고 한숨만 쉬었다. 유리엔은 에키의 말에 집중하느라 성검의 말을 듣지 못했다.

“동생이 늘 아젠카를 보고 싶어했거든요.”

“그래서 창천기사단을 안내해 주고 있는 건가?”

“네, 로드, 여기가 마지막이었어요.”

“그럼…….”

“단장님.”

무어라 말하려던 유리엔이 등 뒤에서 들리는 부름에 입을 다물었다. 바라하가 서류 뭉치를 들고 나타났다.

“제국 측 귀빈들이 도착했습니다. 그 때문에 로드께서 단장님을 찾고 계십니다.”

그의 미간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가 펴졌다. 워낙 금세 말끔해져서 그것을 알아본 사람은 없었다.

“……알았다.”

느릿느릿 대답한 유리엔이 에키를 돌아보았다. 그는 다시금 무언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다른 말을 했다.

“내일 사열식 때 보게 되겠군. 아젠카의 태양 축제는 볼거리가 많으니, 충분히 즐기도록.”

“감사합니다, 로드.”

그는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본부 쪽으로 향했다. 바라하는 그가 떠나고 나서야 에키에게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다, 에키.”

멀어지는 유리엔 쪽을 멍하니 보고 있던 에키가 바라하를 돌아보며 웃었다. 바라하의 말대로 정말 오랜만이었다.

“오랜만이에요, 선배님. 많이 바쁘시다고 들었는데.”

“일에 치여 죽는 줄 알았지. 옆은 누구지?”

“남동생이에요. 창천을 안내해 주고 있었어요. 란셀, 이쪽은 부단장 바론 틸리어스 경의 스콰이어인 바라하 이슬라프 선배님이셔.”

“라, 란셀리드 로아즈입니다.”

“안녕. 누나랑 눈이 많이 닮았구나.”

쾌활하게 인사한 바라하가 다시 에키를 향해 말했다.

“에키, 오늘은 그럼 계속 남동생을 안내해 주는 거야?”

“아뇨, 창천 내부만 안내해 주기로 했어요. 축제는 혼자 돌아다니고 싶다고 해서.”

미리 정했던 일이었다. 혼자라 해 봤자 기사들과 하인이 따라붙겠지만, 그래도 17세쯤 되면 누나와 다니는 것보다는 따로 놀러 다니고 싶어 하는 법이다. 영지에서 후계자 수업을 받느라 바빠서 이런 기회가 드무니 더욱.

에키의 말에 바라하가 슬쩍 미소를 띠었다.

“그럼, 내게 시간을 내줄 수 있을까? 전에 약속했잖아.”

그녀는 샤이를 구출하러 떠나기 전에, 축제 때 식사를 함께 하기로 약속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스콰이어 서약 때부터 미뤄진 일이라 거절하기가 미안했다.

에키는 란셀리드를 흘깃 돌아보았다.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라하를 살피고 있던 란셀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창천은 여기가 마지막이라면서요. 아젠카는 안내해 주지 않아도 되니까, 가세요, 누님.”

“그래. 한슨 경, 필립 경, 란셀리드를 잘 부탁해.”

“걱정 마십시오, 아가씨.”

“아, 누님, 잠시만요.”

란셀리드가 바짝 다가오더니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타국 사람이긴 해도, 저 정도면 전 찬성이에요. 창천 부단장님의 스콰이어라니 부모님도 엄청 기뻐하실 것 같고.”

“……뭐?”

“누님의 놈팡, 아니, 하여간, 그거 저분이잖아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스콰이어 선배님일 뿐이야. 신세진 게 있어서 식사를 사기로 약속했던 거고.”

에키가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란셀리드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누님……. 뭐, 알겠어요. 그럼, 내일 사열식 때 봐요.”

란셀리드 일행을 마차에 태워 보낸 후, 에키네시아는 바라하와 함께 내성 밖으로 걸었다. 그녀는 그가 손에 쥐고 있는 서류 뭉치를 흘깃 보았다.

“선배님, 지금도 바쁘신 거 아니에요?”

“아, 이거? 가는 길에 전해주기만 하면 되는 거라서. 축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서 오히려 한시름 놨어. 준비는 다 끝났거든.”

바라하가 약하게 한숨을 쉬었다.

“요 한 달은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클럽에 가입해 두고 가보지도 못하고. 네가 쓰러졌을 때도……. 일부러 전령을 맡아서 간 거였는데, 얼굴을 보지도 못했지.”

그의 말에 에키는 유리엔과 대화하던 와중에 바라하가 부단장의 명을 가지고 방문했던 것을 떠올렸다. 감정에 휩쓸려 전부 털어 놓으려던 순간에 노크 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었다.

덕분에 마구잡이로 말해 버리는 걸 면했으니 고마운 일이었는데, 한편으로는 이상하게 약간 원망스럽기도 했다.

바라하는 다른 것을 떠올리고 있었다. 에키네시아가 있던 침실에서 약간 떨어진 복도에서, 부단장의 전언을 유리엔에게 전달한 후에 있었던 일을.

〈로드께서 이것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근위기사들 전체를 심문한 결과와 독의 경로에 대한 추측입니다.〉

그가 내민 밀랍으로 봉한 봉투를 유리엔은 받지 않았다. 넋이 나간 것처럼 시선이 봉투가 아니라 허공에 있었다.

〈단장님?〉

바라하가 의아하게 그를 부르자 비로소 유리엔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바라하는 말없이 봉투를 받아든 유리엔이 내용물을 읽는 동안 침실 쪽을 흘깃거렸다.

에키네시아가 독에 중독되어 쓰러졌다는 말에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성녀의 치료를 받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무사한지 확인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바라하는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단장님, 에키는 깨어났습니까? 괜찮다면 그녀를 만…….〉

〈에키네시아는 방금 깨어났다. 지쳐 있는 상태니 그녀를 방해하지 마라.〉

그의 요청이 이어지기도 전에 유리엔이 날카롭게 말을 끊었다. 서류 너머로 보이는 하늘색 눈동자가 얼음 조각 같았다. 어쩐지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일어서, 바라하는 더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 일과, 그 전에 있었던 일들, 갑자기 늘어난 자신의 업무량까지. 바라하는 이러고도 눈치를 못 챌 정도로 둔하지는 않았다.

‘연적이라고 생각하면 꽤, 아니, 심하게 강력하지.’

그래도 바라하는 자신이 더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에키네시아의 비밀을 알고 있었으니까. 창천기사단장이 그녀가 마검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 리는 없을 것이다.

바라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에키는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위즈덤에 가입하셨던데, 전에는 클럽이 없으셨어요?”

“별로 성격에 맞지 않아서. 맘에 드는 클럽이 없기도 했고.”

“앨리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선배님도 검에만 집중하는 클럽이 생기길 바라셨군요.”

“그 점이 마음에 들어서 가입한 거긴 하지만……. 솔직히 위즈덤에 가입한 가장 큰 이유는 너지.”

“네? 저요?”

“네가 있는 클럽이니까.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서류를 전해주고 올 테니.”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 그가 서류를 들고 행정부 건물로 들어갔다.

에키는 가만 선 채 바라하의 말을 곱씹었다. 내가 있는 클럽이라서 가입했다는 게 무슨 뜻이지.

[섀도 너랑 대련하고 싶어 하는 거 아니야?]

“아……. 하긴, 선배는 알고 있으니까.”

그녀가 마스터이며, 기오사 오너이고, 마검의 주인임을 알고 있으니 기사 지망인 바라하로서는 대련을 하고 싶을 만도 했다.

‘다음에 제대로 한 번 대련을 해야겠다. 바라하 선배라면 마스터는 당연하고, 기오사 오너도 가능성이 있지.’

결절 안에서 그가 보인 모습도 마음에 들었지만, 무엇보다 그는 마검이라는 커다란 비밀을 안고도 한마디도 흘리지 않은 사람이었다.

보답해 주고 싶었다. 자신이 그의 검을 제대로 살펴보고 다듬어주면 마스터가 되는 속도가 좀 더 빨라질 것이다. 에키는 시간이 날 때 바라하를 따로 불러내 제대로 도와주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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